오월 역사기행, 울릉도 독도 탐방 - 너머너머 독도(2)
10시 40분.
배가 사동항에 지연 도착한 탓에 점심시간이 빠듯했다. 승객들은 쫒기듯이 오찬장으로 이동하여 간단한 뷔페 차림의 점심을 먹었다. 종업원들까지 시간을 재촉하는 바람에 마음마저 급했다. 더구나 긴 시간 동안 배에서 시달린 승객들은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 채로 식사를 마쳐야 했으리라.
11시 50분.
어쨌든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곧장 사동항에 대기 중이던 배에 승선을 마치고 출발하였다. 승객들의 입에선 불만의 소리가 거의 없었다. 아마 독도를 향한 연모와 열망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게 하고 덮고 잠재웠으리라.
승객들은 그새 멀미 대비를 마쳤다. 아마 울릉도까지의 학습효과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멀미약도 먹고, 계피 사탕도 입에 머금고 만반의 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울릉도행 배에서는 승선한 지 15분경부터 멀미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독도행 배에서는 15분이 지난 12시 5분이 되었음에도 주변엔 아무도 멀미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강두희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오히려 그동안의 피로와 수면 부족 때문에 독도에 가는 동안 잠깐 잠을 잘 수 있었다. 이 또한 다행이며 감사할 뿐이다.
오후 1시 5분.
안내하는 방송이 나왔다. ‘독도경비대원들에게 선물할 사람은 미리 배안에서 구입하시라. 도착은 30분 남았다’고 알려주는 방송에 눈을 떠 보니 독도가 그림처럼 눈앞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안에는 계속해서 독도 관련 노래가 흘러나왔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독도는 우리 땅>을 비롯하여 ‘저 멀리 동해 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는 <홀로 아리랑> 등등. 노래를 들으면서 잠시 독도를 정리해 본다.
독도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중 ‘우산도’는 독도의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우산국’이란 고구려 말로 위쪽은 높은 지대,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옛 지도에서 독도의 옛 이름인 우산도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독도는 멀리서 보면 봉우리가 세 개로 보인다고 해서 ‘삼봉도’라고 불렸고, 강치라고도 불리는 가지어(바다사자)가 많이 산다고 해서 ‘가지도’라고도 불렸다. 현재의 ‘독도’라는 명칭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섬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다 해서 ‘돌섬’,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돌섬인 독도를 지역 말로 불렀던 ‘독섬’, 한없이 크고 넓은 바다에 외롭게 솟아 있다는 뜻의 ‘독섬’을 한자로 표기해 ‘독도’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행정 지명으로서 독도라는 명칭은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1906년 울릉 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후 독도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생각의 틈을 비집고 이윽고 접안을 시도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승객들이 술렁이기 사작하였다. ‘조심스럽게 접안하고 있고 내리실 때 안전사고에 주의하시라’는 안내 방송과 함께 독도경비대원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입도를 환영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승객들도 환호하며 손을 흔들고 답례를 보냈다. 뭔지 모르지만 가슴에서 울컥하는 감동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만의 감정은 아니었으리라. 나중에 확인해 보니 아내 강두희 씨는 물론 이OO 관장님을 비롯한 일행들 모두가 비슷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어쨌든 삼대가 덕을 쌓아야 입도에 성공할 수 있다고하는 전설 같은 얘기들 속에서 단 한 번의 탐방에 바로 입도하게 되는 행운, 영광, 감동을 누릴 수 있었다.
봇물처럼 배 밖 독도에 첫발을 내디딘 승객들은 제한된 20여 분의 시간을 아껴가면서 국토 너머 맨 끝, 바다 너머 맨 동쪽, 세월 너머 우리 국토, 모든 것을 너머 우리땅 독도를 탐닉하느라 분주했다.
서로가 모르는 사이이지만 탐방객 모두가 한마음으로 우리 땅, 우리 국민, 우리 역사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하나였으리라.
우리 일행들은 오월 역사기행이니만큼 오월어머니집 이OO 관장님이 준비해 온 태극기와 손팻말을 들고 독도 인증샷을 하였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보며(지극히 제한된 좁은 공간이지만) 눈으로 코로 뿐만 아니라 머리와 마음속에까지 새기고 저장하기 바빴다.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니만큼 잊지 않으려는 듯 기억 속에 잘 저장해 두어야만 했다.
아들 새길이가 독도에서 인증샷으로 기념하였듯 독도를 지키느라고 수고하는 독도경비대원들을 격려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코로나로 얼굴을 온통 검은 마스크로 가리고 있어 아쉽기는 했지만.
너머너머에 있었던 독도와 약 20여 분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뱃고동 소리를 신호 삼아 모두 다시 승선하였다. 밖에 남아있던 독도경비대원들이 다시 도열하여 경례한 후 손을 흔들며 배웅하였다.
승객들도 한 호흡기 안의 들숨날숨처럼 하나가 되어 대원들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마주 흔들며 긴 이별을 하였다. 내 아들, 내 부모, 내 친척, 내 이웃이 된 마음으로. 이렇게 독도는 나를 넘고 너를 넘어 우리들을 우리가 되게 하였고 공동체가 되게 하였다.
1시 55분.
독도와의 짧은 만남 긴 이별을 뒤로하고 다시 울릉도 사도항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역시 배멀미를 대비하느라 부산하다. 약을 먹고, 계피 사탕을 먹고, 올벼쌀을 씹으면서. 그리고 즐겁고 가벼운 마음, 뭔가 이룬 듯한 후련하고 시원한 마음, 뿌듯한 마음들을 안고 귀향하듯 울릉도로 향하였다. 창가엔 여전히 파도의 파편들이 얼룩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다. 마치 독도 역사의 얼룩인 양.
3시 25분.
배 멀미 없이 잠시 오수를 즐기는 사이 배는 울릉도 사동항에 도착하였다. 일행들이 모두 무사히(배멀미 없이) 다시 울릉도에 들어온 것이 다행이고 감사하다.
4시 20분.
배에서 내려 숙소인 도동의 울릉팬션에 도착했다. 숙소 환경이 열악하다고 미리 듣긴 했으나 생각보다 더 했다. 좁은 복도 계단, 좁은 방, 허름한 시설과 화장실 등. 그럼에도 주인 할아버지는 당연한 듯 당당하게 시설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중에 본 것인데 본인인지, 아들인지는 모르나 거실 거울 위에 조그만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일본에서 취득한 농학박사 학위 국내 등록증이 들어있었다.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라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을까. 본인이면 마땅히 혹은 아들의 학위일지라도 외국박사 학위가 주인의 당당한 자존감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아내는 다른 여자 일행인 정OO 님, 유OO 님과 402호에 묵게 되었다. 옆방이어서 다행이다. 아내가 동숙자들과 잘 소통하여 좋은 친교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는 일행 2명과 두 밤을 같이 자게 되었다. 두 분은 이OO 관장님의 오랜 지인으로 신OO 님, 김OO 님이었다. 알고 보니 신OO 님은 같은 기독교장로교단의 교인이어서 반가웠다. 뿐만아니라 내가 창립 예배에 참석했던 그 교회의 교우이기도 하고 내가 아름다운 가게에 봉사할 수 있도록 공간을 10년 동안이나 기부해 준 OO교회에 출석하고 있어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나아가 선후배 등 아는 분들이 겹쳐서 오래전부터 교제해 온 사람처럼 여겨져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또 김OO 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이 유명한 곳이어서 나도 한 번 식사를 했던 터이고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서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다. 다행이고 감사하다. 여행 중에 친밀감을 느끼는 분들을 새롭게 만나고 교제하는 일은 얼마나 신선한 일인가. 여행의 또 다른 의의가 아니겠는가.
6시.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멀리 산책 나갈 수 없어 아쉬웠으나 저녁 식사는 자유로 하게 되어 있어 우리 일행 8명이서 함께 하기로 했다. 이곳저곳 탐색하다가 결국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한팀은 목살구이집으로 한팀은 울릉도 음식으로 따개비칼국수, 꽁치물회, 오징어불백을 먹으며 울릉도에서의 첫 저녁 식사를 하였다.
7시 40분.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긴 하루 일과를 정리한 후 울릉도에서의 첫날밤을 시작하였다.
첫댓글 생생한 독도 사진을 접하니 실감납니다. 짧은 경험이지만 평생 남을 귀한 시간들. 태극기가 유난히 우리 '한국땅' 존재를 느끼게 합니다. 나도 같이 태극기를 흔들고 싶습니다. 독도에 가면 더 애국자가 되겠지요. 마음에 우리 조국사랑. 뭉클합니다.
독도에 발이 닿는 순간,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태극기도 유난히 예뻐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