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는 대접이었다. 음식 하나하나에 배려의 마음이 스며 있었다. 내 입가에 감동의 미소가 떠오른다.
’딸을 낳으면 비행기를 타고 아들을 낳으면 기차를 탄다.‘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난 딸아들 덕에 자주 비행기 트랩을 밟는다, 복 많은 엄마로다. 사실 비행기와 기차삯은 거의 비슷하다. 시간이 단축되는 장점과 하늘을 나는 교통수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기차보다 대접을 받는 게 아닌가 싶다.
이번 서울길에도 아들이 비행기표를 예매하여 보내왔다. 시간관념 철저한 남편과 그에 버금가는 난 비행기 이륙시간보다 1시간여 빨리 도착하도록 예정하고 공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비행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비행기 출발 시간이 2번이나 지연된다는 알림이 연달아 왔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도착해 상대방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거듭 늦겠다는 통보를 받은 듯 순간 짜증이 나려는데 “우리 여기서 내려 서창 억새밭길을 걸읍시다.(버스편을 이용 중이었음)”
아! 위기(?) 때마다 발휘되는 남편의 기지!!
완연한 가을빛이 억새 위에 다숩게 앉아 있다. 폐부 깊숙이 실려 오는 상쾌, 상큼한 가을 내음, 명약을 복용한 듯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아, 남편은 명의로다.
2번의 지연으로 인한 항공사에 대한 불신과 짙은 안개로 인한 불안 그리고 긴 대기시간을 염려한 아들딸사위가 다급하게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ktx로 변경하였다. 아이들의 섬세한 마음씀이 예쁘고 고마웠다. 예기치 않은 문제로 우리처럼 예약 해지자들이 많아 손실을 입을 항공사를 생각하니 처지가 딱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기차 여행이라 ~
남아있는 몇 좌석을 급하게 구하다 보니 남편과 난 다른 칸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서로 옆좌석에 요청하여 자리를 교환하기를 바랐는데 그냥 희망 사항이 되고 말았다. 생면부지의 옆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차마 입을 떼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 조금만 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테니까 잠시만 참고 견디자는 생각이 둘 다 똑같았다.
북적거리는 인파들은 이미 위드코로나에 익숙한 듯 전혀 경계의 기미가 없다. 승차하자마자 잠 속에 빠져 한참 후 깨어보니 어느새 서울 용산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소요시간이 고작 1시간 40분. 내 소박한 3시간 40분 걸리는 일반고속버스의 낭만이 삽시간에 진부하게 느껴지며 마음 한구석이 서걱거린다.
역까지 마중 나온 딸과 사위. 사위의 어머니 즉 나의 사부인은 아들(사위)이 키가 커서(190cm) 어디서든 눈에 먼저 띤다고 하지만 난 사위보다 30센티나 작은 키의 내 딸이 먼저 눈에 확 들어오니 이는 천륜이요 자연의 이치로다. 검은 점퍼 커플룩의 딸사위 얼굴이 화색으로 맑다. 엄마 마음도 화색으로 따뜻해진다. 작년 가을 동생네와 즐겼던 맛집을 향해 노란 은행잎으로 포장된 길을 걷는다. 자식들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는 서울길. 낯섦도 없고 이물감도 없다. 다만 꽉 찬 든든함만 가슴을 벅차게 한다. 참 좋다. 넘쳐나는 점심 손님들만 북새통이다. 여기도 위드코로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세상 같다. 입맛 탓일까, 음식 탓일까. 작년 가을에 동생 부부와 먹었던 그 맛이 아니다. 기억 속의 입맛이 코로나에 걸렸을까. 그래도 앞, 옆에 음식맛을 넘어서는 애인들과 함께 하는 이 분위기는 사람을 달달하게 하는구나. 달달한 막걸리로 돋운 취기는 가을 오후 단풍길 노닐기에 딱 제맛이로고.
덕수궁으로 갈까 경복궁으로 갈까.
한복차림을 한 젊은 여행객들에 시선이 끌려 경복궁에 이르렀다. 마침 해설사의 열띤 해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건 당연한 진리다. 궁내의 건축물, 유물들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되고 여기에 감성, 감동이 더해진다. 마치 역사 속에 서 있는 듯한 착각과 함께 잠깐잠깐 몽환에 휩싸이며 처연해지기까지 함은 지나친 몰입 때문일까? 서녘 가을볕에 바랜 시련 많았던 경복궁의 수난 때문일까?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조선왕조 으뜸 궁궐 경복궁의 넓디넓은 뜰의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여기 또 크나큰 한 세상이 있었음을 실감한다.
최첨단의 서울 속의 고궁 나들이. 현대와 동떨어진 너무나도 큰 시대적 차이는 간혹 현시점과의 경계를 모호하게도 한다. 하지만, 궁내 곳곳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는 가을 단풍들은 조선시대와 21세기 오늘을 동시대적 공감으로 한 묶음으로 엮어준다.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 정도에 머물렀던 경복궁의 추억에 수정전. 향원정, 태원전, 소주방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발걸음을 옮기며 역사의 숨결을 더듬으며 기억 속에 더하게 된다.
오늘의 집들이 호스트인 아들의 5시 30분까지 오라는 요청에 따라 경복궁을 나선다.
엘리베이터까지 풍기는 맛있는 음식 냄새. 침이 동한다. 기대가 더욱 커진다. 우릴 맞는 아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분주했음이 여실하다. 특별히 아빠엄마 식성을 배려한 배민음식(배달음식)아닌 집밥 음식을 짓고 있는 아들의 깊은 심사. 뜻밖의 선물이다. 한쪽 면이 살짝 탄 호박전, 간 맞추고 부침옷 입혀 지져내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꼬.
뒤따라 식탁 위에 오른 마파두부. 고기 볶아 갖은 야채 넣고 보글보글 끓여낸 마파두부는 영양은 물론 비주얼까지 완벽.
한 달 생활비 털어 아낌없이 마련했을 것 같은 두텁한 한우구이. 씹지 않아도 능히 소화될 듯 부드럽고 고소하다. 소고기도 부위별로 마련하여 설명까지 곁들인 친절한 준비가 맛과 어우러져 가족애의 불꽃심지를 절정에 이르게 한다. 술상이 이슥할 즈음에 맞춰 청량고추 송송 띄운 매콤한 바지락국도 엄마가 끓여내던 꼭 그대로다. 혼자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서빙에 설거지까지 도맡았다.
가족들을 초대하여 집들이 호스트 역할을 아주 힘껏 잘 해낸 아들. 가족들을 맞이하느라 온 정성을 몽땅 쏟아부었다. 음식에도 배려와 사랑의 마음이 느껴져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들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다니. 참으로 귀하고 귀하다.
아들은 직장일을 하면서 논문을 완성하여 심사를 마치고, 석사학위수여식 때도 우리에게 더할 수 없는 극진한 대접을 했다. 매번 처음 대하는 고급 레스토랑. 예술이라 불러 마땅할 진기한 음식. 나아가 음식에 덧붙인 정중한 서비스로 아빠엄마의 소박함을 넘어 격조있는 자리에 초대하여 앉게 했다. 검소절약이 생활화 되어있는 우리에게 아들은 분수와 능력의 경계를 용케 잘 넘나드는 지혜로 자족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한 삶의 고수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30여 년의 시차는 아랑곳없고 밤 깊은 줄 모르는 활기 넘치는 소통의 장은 파할 줄을 모른다. 60대 아빠의 관용과 무한한 신뢰, 응원을 업고 자란 아이들이 척박 무례한 세상 속에서도 강건, 건전하게 잘 버텨주고 있어 고마울 뿐이다. 30여 년 삭힌 사랑이 특별한 면역제가 되고 있음이라 여겨본다.
이래저래 오늘은 어버이에 대한 훌륭한, 참으로 기특한 대접이었다. 엄마치레 별반 없었음에도 받고 또 받게 하는 자식들의 무성하고 푸짐한 대접. 염치를 잃을까 경계하면서도 넘치는 대접에 염치없이 복을 누리는 사람이로다.
“엄마! 내일 아침 메뉴는 누룽지예요.”
두툼 씩씩한 아들 음성이 내 마음과 몸 안에서 윤슬처럼 반짝거린다.
첫댓글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는 대접 맞습니다. 호박전,마파두부..어머니 생신 때 자식들이 미역국을 끓여 행동으로 효도하는 자제분들. 음식에 사랑,정성 가득합니다. 아드님도 대단하네요. 마파두부?^^
배운 대로 사나 봅니다. 얼마나 귀한 모습인지요. 참 훌륭한 자제분들, 분수와 능력의 경계를 조화롭게 넘나듦도 참 멋지네요. 👍 👍
이쁘디 이쁜 사모님 글길을 다녀 왔네요.~
눈도 호강하고 귀도 호강하고 맛도 호강하는 글길~~
필요 이상으로 대기 할 이유는 없어 서창길 선택 좋습니다.
너무 맛있고 또 가고 싶은 맛집 두번째는 아는 맛이기에 첫번째 그 맛에 못 미치지 않을까요?~
엄마 아빠 가족의 사랑이 넘쳐 보고자란 아드님이 어디 가겠어요?
어느 복 많은 아가씨가 차지 할까요?
오목조목 탄탄한 가족 이야기 참 행복해서 본 받으렵니다.^^👍💯
아...
읽는것만으로도 힐링되고 정화되는듯한 느낌.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을 아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세상의 감탄사는 다 끌어다 환호했을 취원님의 활짝 핀 얼굴이 보이는듯 합니다.
아들에 혹은 딸에게 받는 기쁨이 어디 이것뿐이겠어만은 아주 작은것이라도 자식에게서 받는 기쁨과 호사는 견줄데가 없지요.
덩달아 마음이 넉넉해지고 환하게 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