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칼럼] 역사 속에 잊혀졌던 광해군의 손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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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오랜 세월 역사속에 잊혀지거나 묻혀진 인물들을 추적하는 일에 남다른 집념이 있었으며, 그러한 결과물들을 정리하여 2013년 8월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을 출간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광해군의 손녀도 그러한 연구의 일환(一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 같은 경우는 필자의 마음에 강하게 끌리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광해군의 불행한 가족사" 제하의 칼럼에서 일부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본 칼럼에서는 오랜 세월 역사속에 잊혀져 있던 광해군의 손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제부터 필자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광해군 손녀의 실체에 대하여 탐색하여 보기로 하자. 먼저 인터넷을 통하여 최초로 알게 된 광해군 손녀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광해군이 폐위(廢位)된 이후 폐세자와 후궁 소훈 사이에 딸이 있었는데 궁궐에서 양육하기가 어려워 어느 궁녀가 그 딸을 데리고 민가(民家)에서 길렀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광해군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로 연구하였지만 광해군의 손녀가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최초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광해군 손녀에 대하여 다각도로 조사한 결과 의성김씨 문중의 김문거에게 하가(下嫁)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 광해군 손녀의 생모가 되는 후궁 소훈(昭訓)에 대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허균의 딸이 소훈으로 간택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허균에 대하여는 “홍길동전”의 저자로서 역모죄로 처형을 당한 비운의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광해군과 허균이 사돈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 중요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광해군에 대한 필자의 연구가 미흡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례라고 본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과정에 의하여 허균의 딸이 광해군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광해군 일기 1619년(광해 11년) 1월 18일에 근거하여 1618년(광해 10년) 가을에 허균의 딸이 폐세자의 후궁 소훈으로 선발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광해군의 손녀가 1618년(광해 10년)생이므로 현주(縣主)의 생모(生母)는 소훈(昭訓) 허씨가 아닌 제3의 소훈(昭訓)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002년에 출간된 "광해군과 친인척“제하 서명표지에 놀랍게도 광해군의 계보(系譜)가 일부 올려져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광해군 손녀의 생모(生母)가 모양녀(母良女)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를 해석하면 폐세자의 소훈(昭訓)은 평민출신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소훈(昭訓)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부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광해군이 폐위(廢位)된 이후 소훈(昭訓)의 행적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점도 안타깝게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광해군 손녀의 존재와 관련하여 중요한 기록이 발견되었으니 그것은 1차 사료라 할 수 있는 인조실록에서 나왔다는 점을 주목한다. 구체적으로 인조실록 1624년(인조 2년) 3월 26일에 광해군 손녀에 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현주(縣主)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역사에 실존하였던 공식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조실록에도 공식적으로 등장한 광해군 손녀 행적의 대부분이 역사 속에 묻혀져 있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폐위(廢位)된 이후 어느 궁녀에 의하여 민가에서 자란 현주(縣主)가 어떤 경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의성김씨 문중의 김문거에게 하가(下嫁)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고 본다. 이미 소개한 “광해군과 친인척”의 계보(系譜)에 의하면 김문거와 현주(縣主) 사이에 자손을 두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김진(金縉) 이라는 양자를 두어서 후사(後嗣)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김진(金縉)이 밀양박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는데 그 이후의 계보(系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비록 현주(縣主)가 자녀를 소생하지 못하였지만 계자(系子)를 통하여 후사(後嗣)를 이은 점을 주목한다. 그런데 그러한 현주(縣主)가 구체적으로 시댁이라 할 수 있는 의성김씨 문중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더불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여부와 묘소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현주(縣主)의 행적 대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지만 광해군의 후손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간절한 열망(熱望)을 가지고 오랜 세월 역사 속에 잊혀 졌던 현주(縣主)의 생애(生涯)를 복원(復元)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박관우 / pgu77@naver.com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