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재
2004년 01월 04일
그 한 사람이 되는 2004년
로마서5:12-21
2004. 1. 4 설교방송 (성경본문)
그 한 사람이 되는 2004년
로마서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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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2004년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새해를 맞아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오늘 말씀하여 주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해 12월 26일, 이란의 남동부 케르만 주에 있는 고대 유적 도시 밤(Bam)에 리히터 규모 6.3~6.7의 강진이 일어났습니다. 사망자가 40,000명에 이르렀고 2,00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었습니다.
1991년 이래로 이란에는 1,000번 이상의 지진이 일어나서 1만7천명이 사망하고 5만3천명이 부상했습니다. 이란 지역은 고대 68년에도 북동부에서 1만 명이 사망했고, 62년에도 1만2천 명이 사망했습니다. 페르시아 때도 지진 피해가 잦았고 1990년 6월에는 북서부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7.7의 지진으로 불과 수초만에 4만 명이 목숨을 잃는 최악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교회 1부 예배 중에 갑자기 정전이 됐는데 전기가 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 난방도 꺼지고, 마이크도 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1, 2, 3, 4. 이 만큼의 순간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이란과 그 주변 국가에서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인도 아시아 대륙이 북쪽의 유라시아 대륙을 미는 압력으로 인해서 수천년 전부터 지진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번 지진은 진앙이 도시에서 불과 16km 밖에 떨어져있지 않았고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났기 때문에 수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분명 천재지변의 결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천재(天災)이기만 하겠습니까.
천재(天災)이기도 하지만 인재(人災)가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란이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구조 작업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네 명이 부삽 하나를 든 채 한 명이 땅을 파고 다른 사람들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또, 50대 남자가 자기 식구들이 다 죽었는데 그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고, 침실 자리로 보이는 자리에 빨간 잠옷을 입은 팔이 하나 보여서 파보았더니 부인과 세 아이 모두 목숨을 잃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주로 흙벽돌로 지어진 밤 지역의 건물들도 큰 문제가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상반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란에 지진이 발생하기 얼마 전 작년 12월 22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에서 리히터 규모 6.5의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곳에서는 건물 한 채만 무너지고, 3명이 사망했습니다. 너무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이란 정부는 모두가 부정을 행하며 부적합한 건축서류에 도장을 찍어줬습니다. 땅값이 오르고 주택이 부족하니까 건물에 무작정 허가를 내줬습니다.
이란의 지진과 미국의 지진을 비교하며 왜 이란에는 그 많은 지진을 대비하는 훈련과 정책을 시행하는 지도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그 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4만 명이 아닌 40명, 400명이 죽는 사고로 축소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그 한 사람 때문에 불쌍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이란은 이슬람 국가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기독교 국가여서 그렇다는 것보다도 오늘은 '그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나는 어떤 한 사람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12절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처음 신앙을 가질 때 아담 때문에 인류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하면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담과 하와가 지식의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고? 그것 때문에 인류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어떻게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 이럴 수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성경의 가르침이 마음에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죄인이라는 것도 용납이 안 됐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겠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다 그 분의 사업이 무너지고 부도가 났습니다. 자기 한 사람의 실수로 인해서 아내와 자녀, 부모님, 장인, 장모가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또 자신에게 투자했던 많은 사람들이 부도의 고통을 함께 겪어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이 집사님은 한 사람의 죄의 결과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경험하고, 아담의 죄의 결과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올해 1월 2일 개장한 새해 첫 증권시장의 콜옵션 거래에서 한 투자자가 턱없이 낮은 매도(賣渡) 주문을 냈습니다. 주당 2,000원의 매수(買受) 주문을 내려고 했는데 실수로 [매수]가 아닌 [매도] 버튼을 클릭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5억의 손해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매수하기 위해 지켜보고 있던 투자자들이 그것을 구입해서 125배에 이르는 수익으로 횡재를 했습니다. 그 순식간에 3,500 여건의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5억은 평생을 모아도 못 모으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 집안의 가장이 클릭을 잘못한 실수로 인해서 얼마나 온 집안 식구들이 고통을 겪겠습니까. 새해 벽두부터 증권에 불을 켜고 있는 사람일수록 빚도 많고, 대박을 노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5억의 빚은 치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원조교제를 해서, 한 번의 실수로 신문에 명단이 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사단과 동물, 식물 때문에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들에게는 죄를 지을만한 인격이라곤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죄를 짓도록 미혹하기만 하고, 그 미혹을 받아들여서 죄를 범한 존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는데 첫 사람 하와가 그 자유의지로 죄를 범한 것입니다. 물론 죄는 범죄 이전부터 있었지만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아담의 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초로 죄를 세상에 들어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수도의 상수원에 독약을 뿌리면 그 수도가 닿는 곳에 다 퍼집니다. 그 물을 먹는 사람마다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는 과정입니다. 맨 처음 독약을 뿌린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대표가 되고,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는 것이 이런 원리입니다.
국제 협약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서 협약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한국의 바다이고, 어디까지는 일본의 바다이고, 공해(公海)는 어디고 하는 걸 정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협약을 몰랐다고 해서 배타고 일본 해상에 들어가도 되는 건 아닙니다. 나를 대표하는 이가 서명을 했기 때문에 그 서명의 효과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나에게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쉬운 이야기가 절대로 안 믿어지는 겁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인정을 못합니다.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다릅니까.
아담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문을 꽉 닫으셨습니다. 우리를 쫓아내셨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수풀과 엉겅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저주 가운데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자리입니다. 수많은 죄가 일어납니다. 나라가 발전할 수록 죄도 더 기가 막혀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가 무엇인지 모를 때는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무화과 잎으로 가렸습니다. 하지만 무화과 잎으로는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완전히 가릴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나를 위해 에덴 동산을 열기로 그 때부터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그 구원 프로젝트가 바로 나를 위해 죽어주신 메시아 예수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한 사람 아담 때문에 불행이 시작되었지만
두 번째, 한 사람 예수님 때문에 행복이 약속되었습니다.
바울이 세상의 죄가 사람 때문이라고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그 죄 값을 치를 자가 사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도, 동물도, 식물도 내 죄 값을 대신 치를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개에게 굉장히 인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방송에서 봤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면서 자기 개와 함께 한강에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개가 누구입니까. 헤엄의 명수 아닙니까. 그 뛰어난 개헤엄으로 주인을 물고 헤엄쳐 나와서는 주인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역시 개에게 인격이 있는 것 같죠? 그런 착각을 줄만한 일화입니다.
그러나 오직 죄를 범한 사람만이 죄 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13~14절 말씀을 보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고, 예수님이 둘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지어야 할 짐을 다 져주셨습니다. 내가 갚아야 할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됩니다.
15절 -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16절 -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15절과 16절에 "같지 않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무슨 말일까요.
아담과 예수님은 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순종과 아담의 범죄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아담의 범죄의 결과와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범죄하고, 한 사람이 범죄하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15절부터 21절까지 은혜, 은사, 선물이라는 단어가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일방적인 사랑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에게
은혜로, 은사로, 선물로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관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시겠습니까.
로마서 5장까지, 인생이 100% 죄인이라고 귀가 닳도록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의 사망으로 연결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살려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준비하셨고, 그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이 온 인류의 대표이면서 인류와 연합관계에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대표이면서 우리와 연합관계에 있습니다. 그 결과 첫 사람 아담은 우리에게 온갖 저주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갖 은혜와 은사와 선물만 주셨습니다.
즉, 아담은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언제나 해결해주시는 분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모든 것들이 2004년도에는 해결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다시 15절 말씀을 보면
-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뚫어지게 봤더니 "많은" 사람이 죽었지 "모든" 사람이 죽지는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선물을 받았지 "모든" 사람이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죄가 들어오고, 한 사람의 순종이 우리를 의로 이끈다고 할지라도 이것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집에 불이 나기 시작해서 다 타버리는 것이 심판이라면,
다 타버리기 전에 끄는 것이 은사입니다.
범죄한 인생, 다 죽어야 하는 인생이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불이 났는데, 한 사람 때문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17절 -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한 사람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했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한 사람 때문에 죽을 일이 많습니다.
집집마다 아들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시어머니 때문에, 시아버지 때문에, 장모님 때문에, 장인 어른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한 사람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했지만 "더욱", 이 단어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노릇의 주체가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예수 믿으면 다 착하게 살고요, 돈도 잘 벌고, 좋은 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거부 반응이 없습니다.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면 다 돌아가시는 겁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기분 나빠합니다.
인간의 죄된 습성은 진화론적 사고 방식에 젖어있습니다.
원숭이가 변해서 사람이 됐다고 합니다. 과거의 내가 변해서 지금이 됐다고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고 합니다. 그런 사고 방식에 꽉 잡혀 있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예수 못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과 내 생각, 경험, 지식으로 믿는 예수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진화론적 사고 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체질을 바꾸기 전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성경 공부를 해도 예수를 못 믿습니다.
내가 아무리 사망에 둘러 싸여있어도 "더욱"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더욱"이라는 말이 9절, 10절, 15절, 17절에 네 번 나옵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이전보다 훨씬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적당하게 믿고, 적당하게 은혜 받으면 되지 너무 광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런 '적당한' 은혜는 없습니다. 측량할 수 없도록 풍성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넘치도록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아담인 내 모습, 믿기 전의 내 모습인 채로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100억 부도가 나서 예수를 믿었다면 그 100억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없는 은혜로 회복시켜주시는 주님입니다. 100억뿐이겠습니까. 전세계를 주시는 주님입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인생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언제 이렇게 넘치도록 준다고 하십니까.
"사망이 왕노릇할 때"라고 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마음껏 철권을 휘두를 때, 내가 죽고 싶을 때입니다.
오늘 1부 예배 말씀을 전하면서 학생들에게
'죽고 싶으냐? 죽어라, 다 한강에 가라', '집 나가고 싶으냐? 나가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은혜가 뭔지 모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한강에 가려다가도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집 나갔다가도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죽음을 경험해보면 그것이 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집 나가서 이 추운 겨울에 고생을 해보면 집의 소중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할 때", 죽음이 내 코앞에 있을 때,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어려움이 내 앞에 있을 때, 그 때 은혜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인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이 때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은 현재 동사이고, "생명 안에서 왕노릇"은 미래형입니다.
현재 내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누리고 있을 때 생명 안에서 왕노릇을 영원토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직면해본다는 것이 이 땅에 살면서 가장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삶에서 죽음이, 사망이 철권을 휘두르며 내 앞에서 왔다갔다할 때, 이 때가 가장 긴장해야 될 때이고, 가장 은혜가 넘치게 될 때입니다. 그러니 그 환경에 있는 사람을 육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제 아들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 달 정도 백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제가 어쩌고저쩌고 할 텐데 나가든지 들어오든지 너무 가만히 있으니까 '왜 내가 나가고 들어오는데 아무 말씀을 안 하시느냐'고 묻습니다. '말씀'을 안 하시니까 갑자기 자기가 철이 들려고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 방법을 좀 써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아담의 자리가 있고 예수님의 자리가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 사람, 나 때문에 행복이 널리 널리 확산되는 것입니다.
18~19절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됩니다.
또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문제는 집집마다 괴롭히는 이 한 사람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이든지, 남편이든지... 저 사람만 없었으면 좋겠다는 한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때문에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부터 1부 이른 예배 - 중고등부 열린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사실 괴롭히지 않았으면 그 아침 일찍부터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습니까. 편안하게 해주고, 공부 잘하고, 모범생이면 여기 데리고 왔겠습니까. 속을 썩이는 것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음으로 얼마나 집안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제 기사를 보니 22살 시동생이 27살 형수님과 불륜 관계를 맺다가, 시아버지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격분한 시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자기 아들을 칼로 찔렀고 결국 구속이 됐습니다. 누구를 구속해야 하는 사건입니까.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자리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감정과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가 계신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집안의 막내딸인 글의 저자를 낳다가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집안은 엉망이 되었고 여러 날을 술로 지내던 아버지는 '어미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며 갓 태어난 딸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씩 굶기고, 한 여름에 두꺼운 이불에 싸서 벽장 속에 넣어둔 것을 언니, 오빠들이 발견해서 겨우 살아난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 눈의 뜨이기만 하면 매를 맞았고, 말리던 언니, 오빠들도 같이 매를 맞았습니다. 결국 참다 못한 큰오빠는 집을 나갔고, 큰언니도 꼭 데리러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느닷없이 새 옷을 사다가 그녀에게 입히더니 신작로 한 가운데 앉혀놓고 '차가 피해갈 거니까 꼼짝없이 앉아 있어라'고 하고는 좀 떨어진 곳에서 딸을 감시했습니다. 지나가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비키라고 야단을 했지만 그 딸은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저도 간혹 보았습니다.
그렇게 어쩔 줄 모르고 앉아있던 그녀는 달려오는 커다란 트럭을 피하다가 그 차에 치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비정한 아버지는 그런 방법으로 딸을 죽이려했고, 먼저 새 옷을 사 입힌 이유는 딸이 죽지 않고 다쳤을 때 보상을 많이 받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운이 나쁘게 걸린 트럭 운전사는 아버지의 억지에 못 이겨 많은 보상금을 내놓았습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큰오빠는 그 충격으로 월남전에 자원 입대했다가 그곳에서 전사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큰언니는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심하게 매를 맞은 후에 아버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장례식에도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집을 나갔습니다.
막내딸의 사고로 받아낸 보상금과 큰오빠의 전사보상금으로 목돈이 생긴 아버지는 자주 읍내에 오가더니 세련되고 상냥한 여자를 새엄마로 맞았습니다. 처음에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한 후로 태도가 달라져서 그녀와 형제들을 구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둘째 오빠에게 기술을 익혀서 돈을 벌어야 한다며 공장으로 갈 것을 회유했고, 도시락도 안 챙겨주고, 용돈도 주지 않았습니다. 한참 사춘기를 지내던 오빠는 집을 나가서 절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제 셋째 오빠, 작은언니, 그리고 막내딸인 그녀만 남았습니다.
심지가 굳은 셋째 오빠는 새엄마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집안 일을 도왔고, 작은언니는 새엄마에 의해 남의 집 식모로 보내졌습니다. 새엄마에게서 얻은 늦둥이로 딸을 본 아버지는 아이를 너무 예뻐하면서 신혼부부처럼 놀러 다니고 농사일과 집안 일은 셋째 오빠가 도맡아 했습니다.
얼마 전엔 빚에 몰린 아버지가 두 자녀를 한강에 던져버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버지고, 어머니고, 남편, 아내인 것 같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아담의 자리에 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묵묵히 일만 하던 셋째 오빠는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읍사무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오빠의 도움으로 글의 저자인 그녀도 무사히 여고를 졸업하고 면사무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냐고 그녀는 썼습니다.
언니들도 좌절하지 않고 공부를 마쳐서 지금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녀는 언니, 오빠의 도움으로 뒤늦게 대학에 입학하여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아담의 자리가 있고, 예수님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글을 맺었습니다.
'나의 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희망을 가진 나에게 장애는 아무 것도 없다. 목발을 짚은 성치 못한 왼쪽 다리도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우리가 고향집에 찾아가도 달가워하지 않는 새엄마와 이제는 너무나 초라하게 늙어버린 아버지. 새엄마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를 무시하고 구박한다. 지금도 큰언니는 내 왼쪽 다리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고향에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도 사랑하고, 언니도 불쌍하다. 언니가 어서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새엄마가 낳은 막내까지 우리 육 남매가 부모님 모시고 사이좋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소원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오늘도 나는 부지런히 하루를 보낸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버지, 그 구박을 받고도 부모님 모시고 사이좋게 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아버지처럼 아담의 자리에 가있는 한 사람의 저주가 예수님의 자리에 가있는 그녀 한 사람 때문에 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축복으로 그 한 사람이 되는 2004년이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리와 예수님의 자리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한 사람 예수님의 자리는 순종의 자리입니다.
믿음-'faith'는 'faithful'- 충성스러움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결론은 순종과 충성으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보고자 할 때 '무슨 일을 맡겨도 충성스럽게 하는가'를 보면 믿음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을 의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순종의 반대는 불순종입니다.
때마다 일마다 불순종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담의 자리에 가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는 불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는 자녀가 최고의 자녀입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부모가 무서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좋아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원 때문에 순종하는 자녀는 최고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무조건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저도 불순종할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부도가 나고, 돈이 없고,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하는데 저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공부하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똑같이 힘든 환경에 있어도 저에게는 불평과 불만이 없었습니다.
괜히 화가 나고, 소리 지르고, 산만하고, 짜증난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면
빨리 체질을 바꾸고 회개해야 합니다.
20절 -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을 보고 자기 죄를 보게 되면 씻으려고 세면대에 가지 않겠습니까.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모릅니다. 그래서 씻을 줄도 모릅니다.
큐티를 하면서 내 죄를 보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고난이라고 하는데 가서 씻으면 됩니다.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죄가 더 많아진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것입니다.
드러나는 병이 드러나는 거니까 좋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괜히 교회에 와서 죄 드러내느라고 고생이다, 오픈하느라고 고생이다 하는데 병은 감추고 있으면 죽습니다. 드러나면 고칠 수 있고, 처방이 나옵니다. 율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죄책감이 들 때마다 풍성하신 은혜를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령충만은 갈등충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데 어떻게 은혜를 안 받겠습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쳐다볼 때마다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로 인해서 평생을 풍성하게 사역한 베드로와 사도 바울에게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저주해서 부인한 베드로,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바울. 평생 사역을 하면서 누가 뭐라고 할 때마다 그 생각만 하면 은혜가 넘치지 않았겠습니까. 과거의 죄도 우리를 은혜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을 '사도 중의 작은 자'라고 했다가, 조금 지나고 나서는 '성도 중의 미미한 자', 죽을 때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죄를 날마다 쳐다보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말씀을 보고 내 죄를 생각하면서 악에 대해 생각할 수록 은혜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은 은혜가 안 넘칠 것입니다. 계속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지으면서도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럼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계속 죄를 지어야하겠습니까?' 묻습니다.
그 대답은 다음 주일에 6장 말씀에서 보겠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1절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죄가 왕노릇하는 것의 반대는 의가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에게 가서 '당신이 예수 믿어야 한다'고 죄를 이기려면 나의 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식한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너는 이렇게 해, 저렇게 해, 돈 쓰지마, 일찍 일어나.... 이래서 그 사람이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 끊임없이 사랑하는 은혜.
우리의 신앙은 '100% 죄인'에서 출발해야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은혜가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의인'에서 출발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지은 게 없다고, 말만 하면 네가 잘못했어, 당신이 잘못했어 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날마다 '나는 잘하는데 너는 왜 잘못하느냐'고 합니다.
남편이 이단 종교에 출석하는 어느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도 아직 믿음이 없을 때 그 종교 모임에 나갔는데 남편 자체가 흠 잡을 것 없는 사람이고 그곳 사람들이 모두 너무 경건해서 보통 교회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 남편은 자기 할 일 너무 잘하고, 술도 안 마시고, 커피도 안 마시고, 심지어 콜라도 안 마시는 사람입니다. 한 번 뵈었는데 얼굴에도 천사 같은 미소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나는 술도 안 마시고, 커피도 안 마시고, 콜라도 안 마시는데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냐'는 말이 나옵니다. 언제나 기본이 의인에서 출발을 하는 겁니다. 본인이 너무 의롭습니다. 근본적으로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오늘도 눈을 뜨면 죄인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가장 은혜 받는 비결이 바로 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요, 엄마가 부족해서 그래, 내가 잘못했어,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내가 아직도 욕심이 많아요, 열등감이 많아요.... 이렇게 출발하는데 은혜가 없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이기려면 은혜로 나가야 합니다.
자신이 악하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집에서도 아프고, 약하고, 속 썩이는 자식은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아들이 학생 때 하도 공부를 안하고 잠만 자서, 어딜 가나 그 이야기를 하니까 십 년이 지나도록 저에게 묻는 문안 인사가 '그 아들 어떻게 됐어요'하는 것입니다. 딸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 딸은 그게 불만입니다. 엄마가 자기 기도는 덜 해줬다는 겁니다.
사실 그 말도 맞는 것이 우리는 아프고 속 썩이는 자식을 위해서 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집에서 말 잘 듣고 편한 아이보다 속 썩이고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더 기도가 나옵니다. 보기만 해도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말을 안 들을까요? 아플까요?
우리 조카는 '내가 엄마를 기도시키기 위해서 안 나가는 거 알지?' 이런 답니다.
그래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미리 그런 이야기를 하면 반발이 일어납니다.
나의 이성과 자기 경험으로는 이 기적의 사건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죄를 고백할 때 은혜 주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는 어떤 한 사람입니까.
집집마다 있는 힘든 한 사람입니까.
온 집안이 사망 가운데 있지만 은혜로 왕노릇하는 한 사람입니까.
우리 집을 영생에 이르게 할 2004년도가 되기를 소원하는
그 기도제목이 있는 한 사람입니까.
죄의 고백을 날마다 해서 은혜가 넘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하는 한 사람입니까.
나 한 사람 때문에 내 자신이 변하고, 내 가정이 회복되고
나 한 사람 때문에 회사가 번창하고, 나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는 복을
누리기 원하는 한 사람입니까.
그 한 사람이 되는 2004년도를 위해서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란의 천 번이 넘는 지진 가운데서도 죽어도 고치지 못하고 앞날을 예비하지 못하는 그 나라에 주님을 아는 지도자 한 사람이 없고, 그것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어서 수많은 백성이 죽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빚을 지고 날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데도 아직도 예수님의 자리, 행복의 자리로 가고자 하는 한 사람이 못 돼서 또 때가 되면 빚지고, 술을 마시고, 또 때가 되면 거리를 방황하는 그런 한 사람은 아닙니까. 내가 그 아담의 자리에 앉아서 온갖 저주를 다 받아내고 있는 한 사람은 아닙니까.
주님, 이란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믿고 모든 것을 보수한다면 똑같은 사건에서 한 집만 파괴되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진처럼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늦지 않았습니다. 수천년 역사 속에서도 고치지 못한 이란이 있는데 이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의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될 것을 믿습니다.
2004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부부와 모든 가족을 원망하며 낙심하며 절망하며 날마다 불순종의 자리에서 비판하는 자리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합니다. 한 사람이 되어서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행복하게 하며, 회사를 번창하게 하며, 교회를 부흥시키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한 사람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제 그만 복음에 대해 비판하고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의 인생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참으로 2004년도를 주님 안에서 잘 출발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