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19 주일예배설교(부활절 셋째주일을 맞이하며)
말씀: 요한복음 19:26-30; 20:24-29절
제목: 진정한 부활 신앙안으로. 3
하늘품초대교회 주일예배에 함께하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 아버지의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좌우 앞뒤 바라보시며 축복의 인사를 나누길 원합니다.
“당신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자기 자신을 축복합니다. “주님! 오늘도 저로 인하여 행복하소서”
이 시간 “진정한 부활 신앙안으로. 3”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증언하겠습니다.
◨ 목회자 세상 바라보기 “피아노 경연대회를 마치며”
어제 토요일 고양시청 문예회관에서 음악세계 피아노 경연대회가 열렸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3명이나 참석했습니다. 오전부터 학원에 미리 나와 손을 풀며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다들 긴장된다고, 뼈까지 흔들린다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먼저 출발한 아내에게 소식이 왔는데, 2학년 예원이가 특상을 받았지만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부랴 부랴 아이들을 테우고 출발했습니다. 6학년 이진이와 중3 지인이가 순서에 맞춰 연주를 했습니다. 모두들 잘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이 우리아이들보다 더 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들의 준비한 시간들이 보였습니다. 저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땀을 흘렸을까? 잘하면 잘하는 데로 못하면 못하는 데로 선생님의 질타를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이겨내고 저 무대에 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둘 다 특상은 받았지만 더 잘하는 아이들 때문에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위로할까 고민입니다. 그러나 고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약은 써야 효과를 발휘합니다. 아이들에게 오늘의 경연은 분명히 약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조금 쓴 약을 먹었습니다. 분명코 이 약이 효과를 나타낸다면 지금의 결과에 좌절하지 않고 이제부터 이전과는 다른 각오로 준비하리라 보입니다.
하늘품초대교회는 개척한 교회입니다. 저희 가족이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개척한 것이라 여긴다면 망합니다. 무너집니다. 쉽게 좌절합니다. 하늘품초대교회는 주님이 개척한 것입니다. 이 땅 이곳에 교회가 세워져야 함을 알고 저희 가족을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잘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에 민감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끄심에 민감해야만 합니다. 가끔 쓴 약을 주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쁨으로 순종하며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실 교회가 세워질 줄 믿습니다.
◨ 역사/사회 문화/시대
1. 4.19혁명 - 1960년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룬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반정부(反政府) 항쟁.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조작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하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간접원인
4·19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은 종신집권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이승만은 환국(還國) 이후 다른 어떤 민족지도자보다도 가장 두터운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었을 뿐 아니라 탁월한 수완으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신망은 그에게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또한 이것은 그의 끝없는 정권욕과 독재성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신의 종신집권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숱한 정치파동과 정치적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점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그는 6 ·25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死守)를 공언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피난감으로써 국민을 배신하였다. 또한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으로 많은 청년들을 희생시켰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일대 정치파동을 일으켜 국민의 원성을 사기 시작하였다.
세월호참사 1주년과 함께 4.19 혁명을 생각해봅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 자체가 너무나도 간절해집니다. 이승만초대 대통령부터 이러한 생명사랑만 있었다한다면 우리나라는 변해 있었을 것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롤모델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그렇지 못합니다. 권력이라는 힘을 가지면 생명은 그 권력 밑으로 깔려버립니다. 권력에 도움이 되면 썩어 없어질 자가 살아납니다. 권력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간디와도 같은, 마더 테레사와도 같은, 마틴 루터킹 목사와도 같은 생명 사랑의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유머/명언/촌철활인
. 계집녀 자를 잘 아시죠. 여(女) 네이버지식백과 자료
‘女’의 고대 자형은 온순한 여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양인데, 고대 중국사람들은 바닥에 자리를 깔고 그 위에 꿇어앉았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교차해두었는데, 이것은 고대 중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았다는 것을 표현해 낸 것이다.
◨ 허태수목사의 ‘사람이 중심이지요’에서
한문으로 여자를 뜻하는 글자인 계집 녀는 임신한 여자가 무릎을 세우고 가랑이를 벌려 아이를 출산하는 형상입니다. 본시 제집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결혼에서 남자는 장가간다고 했고 여자는 그냥 자기 집에서 산다고 해서 제집 제집 하다가 계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녀(女)라는 글자의 오래 전 형태의 전서체를 보면 무릎을 구부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형태의 글자도 있습니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고통과 등식 관계지만, 여자가 어머니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고통은 존재를 승화시키는 촉매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자는 고통으로 인해서 거룩한 존재인 어머니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왜 거룩한 지를 물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어머니가 거룩한 것은 그렇게 무릎을 구푸리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낳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통으로 생명을 출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출산하지 않은 여자는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생명을 출산한 자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거룩한 어머니가 생명을 출산하는 게 아닙니다. 여자가 생명을 출산함으로써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녀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왜 귀하고 거룩한 것일까요? 그것은 고통 때문입니다. 고통이 생명에 거룩함이라는 광배를 드리우는 것입니다. 생명을 출산하는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고통, 그것이 어머니를 휘감고 여자를 어머니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픔 없이 무엇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아니 도대체 고통 없는 창조가 가능하기는 할까요?
나병 환자들을 위해 오랫동안 섬기다가 임종을 맞는 어느 신부님의 기도가 뭔지 아십니까? 주여 저들에게 고통을 느끼는 복을 내려 주옵소서.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얼굴 한쪽이 무너져 내려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고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구원인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런 고통까지 함께 주셨다면 나병 환자들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거룩한 고통 또는 고통의 거룩함, 고통을 아는 일의 가치, 이것을 실현하는 장이 교회이고 이들이 기독교인입니다.
◨ 오늘 본문은 다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26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27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다(마 27:45-56; 막 15:33-41; 눅 23:44-49)
28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시 69:21) 29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부활절이 지난 이 시점에 다시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고통때문입니다. 고통의 십자가 죽음의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스승되시고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추종자들은 다 사라지고, 박해자들은 채찍과 창을 들고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조차 끝내 침묵하고 있는 절대 고독의 시공간에 서 있는 예수님,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요?
잠시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오래전 이등병 군시절, 모두다 피하고 싶은 유격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곳으로 출발하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태양이 내리쬐는 낮에 수백명의 군인들이 행군합니다. 그러다보니 목이 말라옵니다. 수통의 물은 다 떨어졌습니다. 그때 논두렁으로 흐르는 물이 보였습니다. 수 십명이 그곳으로 달려 들었습니다. 그러자 한 고참이 소리쳤습니다. 그 물 마시면 죽는다. 농약물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목이 말랐어도 말입니다.
▶ 허태수목사의 ‘사람이 중심이지요’에서
예수님께서 목마르다 하신 것은 정말 고통스러울정도로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목마르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바로 그와 같은 순간에 예수님에게 덮친 어둠과 무거움에 대한 유일한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통의 고백 이후에 비로소 말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목마르다는 선언 없이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불가능합니다. 목마르다는 선언 없이 다 이루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허구입니다. 목마르다는 다 이루었다를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누구도 그 목마름의 길을 제거하고 “다 이룸”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의 고통 때문에 지나치게 근심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근심해야 하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과 불감증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에서는 도마의 불신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 '디두모'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27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29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불신앙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실제적인 우리들의 이야기라 말해도 무관합니다. 우리도 이런 도마와도 같은 불신앙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을 경험해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부활을 경험한 순간 어떻겠습니까?
도마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도 이 이야기를 삭제하지 않고 기록한 이유도 바로 이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솔직하게 부활을 믿지 못한다 말한 도마가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런 솔직한 신앙이 더 큰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솔직하지 못한 채 어디서나 아멘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아멘합니다. 할렐루야 합니다.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의심은 죄가 아닙니다. 의심은 솔직한 신앙의 출발입니다. 도마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삼일전에 찢겨진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고 만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하라고 할때 도마의 솔직한 신앙이 우리들 모두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게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게 한 것입니다.
부활신앙, 너무 심오한 것 아닙니다. 어찌보면 쉽습니다. 솔직해지는 것 그것이 부활신앙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고통이 있으면 고통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기쁨이 있으면 만양 어린애처럼 떠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고통이 있는 이웃의 그 고통을 같이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예화) 친구의 축의금
결혼식 날, 식이 다 끝나가고 있지만, 내 친구 형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혼식 내내 형주의 얼굴을 찾았지만, 정말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다시 예식장 로비로 나와 형주를 찾았지만 끝내 형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섭섭함 보단 걱정이 앞선 순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형주의 아내가 예식장 계단을 급히 올라왔습니다.
이마에는 얼마나 뛰어왔는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석민 아빠는 오늘 못 왔어요, 죄송해요. 석민 아빠가 이걸 전해드리라고 해서..' 형주의 아내는 미안한 듯 조심스레 봉투 하나를 건넸다.
'철환아, 나 형주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담아 보내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 장수 친구이기에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어제 아침부터 자정까지 사과를 팔았다. 번 돈이 만 삼천 원이다.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날, 우린 흙 속을 야무지게 뚫고 나온 새싹을 바라봤었지. 그리고 희망을 노래했어. 나에게 너와의 행복한 추억이 있다는 게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지금 난,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 글을 쓰고 있지만 가정을 이루는 네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만은 기쁘다. 아내 손에 사과 한 봉지 들려 보낸다. 지난 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 가서 먹어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
편지와 함께 들어 있던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세 장.... 뇌성마비로 몸이 불편한 형주가 한 겨울 거리에서 추위와 바꾼 돈, 만 삼천 원.
나는 웃으며 사과 한 개를 꺼내 들었습니다. "형주 이놈, 왜 사과를 보냈데요." 장사는 무엇으로 하려고... 그리곤 씻지도 않은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댔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걸까요. 새신랑이 눈물 흘리면 안 되는데..
- 연탄길 < 행복한 고물상자> 저자 이철환의 글입니다.
세상식이 아무리 1등만 원한다 할지라도, 세상질서가 아무리 성공만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 기독교인은 달라야합니다. 바로 이런 친구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런 친구 하나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라 말하고 싶습니다.
결단하길 원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속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길 결단합시다.
조금은 어렵더라도 실천해간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씩 변해갈 것입니다.
입술로만 내려놓는다 내려놓는다 하는 것들, 진짜로 내려놓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한 저와 여러분, 진정한 부활 신앙안으로 들어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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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품초대교회(가정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성식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