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어느 산골에 커다란 구렁이가 한 마리 살았다.
이 구렁이는 몸집이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토끼정도는 한입에 꿀꺽 삼킬정도였고 멧돼지도 쉽게 조여 죽일 정도였으며, 그 무서운 백두산 호랑이조차도 이 구렁이하고 한번 싸웠다하면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돌아가는 정도였다.
겉모습 또한 새까만 피부색에 갈색 얼룩무늬가 날카롭게 수놓아져 있으니 그 자태가 강력한 힘에 걸맞았다.
이에 그 산골주변에 사는 모든 구렁이는 그 구렁이를 '뱀 사' 자를 써서 사왕이라고 부르며 섬기며 두려워했다.
하루는 사왕이 멧돼지 사냥을 마치고 막 식사를 하려는 찰나였다. 멧돼지가 쓰러진 자리에서 조그마한 무언가가 꿈틀거리지 않겠는가. 사왕은 멧돼지를 들어올려 꿈틀거리는 것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무엇인가?"
사왕이 물었다. 꿈틀거리는 것은 사왕의 눈을 보자 재빨리 고개 바닥에 쳐박고는 말했다.
"예이~, 사왕이시여. 저는 저기 북쪽산 너머에서 온 칠점사라고 하옵나이다."
"칠점사? 자네는 겉보기에 구렁이 같은데 어찌 북쪽산 너머에서 왔다고 하는가?"
"사왕이시여, 저는 구렁이와 닮았지만 구렁이와는 다른 존재이옵니다. 뱀이 구렁이만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네. 그렇다면 자네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여러 뱀을 만나보고 싶어서 여행중입니다."
그러던 와중 칠점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런데 그런 여행 중에 이렇게 커다랗고 강력한 사왕을 만나뵙게 되니, 이 제 인생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칠점사의 말에 사왕은 우쭐한 기분이 들어서 괜히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흠, 그러한가? 그런데 그대는 어쩌다 여기 바닥에 몸뚱아리를 박고 있는가?"
"그게 말이옵니다, 오랜 여행길에 지쳐서 잠시 잠을 청한다는데 너무 깊게 잠들어 사왕께서 사냥하시는데도 그 소리를 못들어 일어나지 못했사옵니다. 혹시 제 미천한 몸뚱이가 사냥을 방해했다면 너무나 송구스러워 어찌할 도리를 모르겠습니다."
칠점사의 태도에 사왕은 흡족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난 그대가 있는지도 몰랐네. 나처럼 몸집 크고 강력한 구렁이가 겨우 그것 때문에 사냥에 방해받았다고 한다면 쓰겠는가! 전혀 방해한 바가 없으니 너무 괘념치 마시게. 이것도 인연인데 짐이 잡은 멧돼지 고기를 나눠 먹겠는가?"
칠점사를 과장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아이고~~ 제가 또 멧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지는 어떻게 알고! 사왕께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멧돼지 고기를 직접 하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멧돼지 고기를 가장 좋아하는가? 그런데 그대 작은 몸집으로는 멧돼지를 사냥하는 것은 꽤 벅차보이는데, 그렇지 아니한가?"
그 말에 칠점사는 사왕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저 또한 사왕님처럼 큰 몸집으로 멧돼지를 칭칭 감아 멋있게 사냥하고 싶었으나 제 몸집이 크지 못하여 '독'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칠점사의 말에 사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독'이 무엇이오?"
그 말에 칠점사는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마침 저기에 멧돼지가 한 마리 더 지나갑니다. 사왕님께 '독'을 이용한 제 사냥실력을 감히 보여드려도 괜찮겠사옵니까?"
"흥미가 생기는구려. 어디 한 번 마음껏 보여주시구려."
칠점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멧돼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멧돼지를 향해 날카롭게 쉿- 소리를 내자, 멧돼지는 칠점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내 멧돼지는 칠점사에게 달려들었다. 칠점사는 멋있게 멧돼지의 돌진을 슬쩍 피하고는 뒷다리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러자 몇 초 지나지 않아 멧돼지는 다리가 풀려 주져앉고 말았다. 사왕이 놀랄 틈도 없이 멧돼지는 완전히 쓰러져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고 죽어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요? 그저 한 번 물었더니 픽 쓰러져 죽어버리다니?"
"이게 바로 '독'을 사용한 사냥입니다."
"마치 요술을 쓴 것 같구려! 굉장히 아름다운 사냥이었소!"
"저의 미천하기 그지 없는 사냥 실력에도 그리 감탄을 해주시니, 이 칠점사는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칠점사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겸손을 떨었다.
"그 '독'이라는 요술, 어떻게 쓰는지 나에게도 알려줄 수 있겠소?"
칠점사는 입을 쩌억 벌린 상태에서 말했다.
"이 긴 송곳니 보이십니까? 저의 독은 이 송곳니에서 나오는 겁니다. 아마 사왕님의 송곳니에도 있을 겁니다."
"흐음... 그런가? 혹시 북쪽산 너머의 뱀들은 '독'을 사용하오?"
사왕의 말에 칠점사는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아휴~ 쓰다마다요. 사왕님께서 보셨다시피 아름답기도 하고 군동작도 없어서 사냥도 빨리 끝나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저기 북쪽산 너머 뱀들 사이에서는 독을 안 쓰는 뱀은 뱀이 아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소? 흐음...?"
사왕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칠점사여. 혹시 그대가 나에게 '독'을 잘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들은 칠점사는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쭉 찢어진 눈 사이로 탁한 색깔의 눈동자가 빛났다.
"암요. 그러문입죠~. 사왕께서 이 비천한 칠점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이 한 몸 바쳐 돕겠습니다~. 우선 사왕이시여, 독을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건 절대 먹지 않되, 독충과 독개구리만을 먹어야 하옵니다."
"알겠소. 그대의 뜻대로 하겠소."
그렇게 사왕은 칠점사의 말대로 다른 고기는 모조리 끊고 지네, 거미와 같은 독충과 독개구리만을 찾아 다녔다. 충분한 음식을 먹지 않은 사왕의 몸이 멀쩡할리 없었고 사왕의 몸집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몸집이 줄고 줄어 어느덧 멧돼지 몇 마리는 거뜬히 조일 수 있을 만한 큰 몸집은 멧돼지보다 약간 큰 정도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칠점사는 멧돼지를 꾸준히 사냥해 먹으며 몸집을 키웠다. 그렇게 넉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칠점사는 낮잠을 자고 있던 사왕을 물어버렸다. 사왕이 허둥대는 틈을 타 칠점사는 자신의 송곳니를 이용하여 최대한 많은 독을 사왕의 몸에 넣었다.
"칠점사, 네 이놈!"
사왕은 자신의 몸을 이용해 칠점사를 칭칭 감았다. 그렇지만 짧아진 사왕의 몸으로 칠점사를 감아 죽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칠점사는 비열하게 웃었다.
"사왕이시여, 힘이 예전같지 않구려."
"이 놈! 내 독 맛을 봐라!"
사왕은 자신의 송곳니를 칠점사에게 꽂아 독을 주입했다. 하지만 칠점사는 가소롬다는 듯이 사왕의 송곳니를 부러뜨려 버렸다.
"사왕이시여, 당신 같은 구렁이의 약한 독으로는 우리 칠점사를 죽일 수 없소이다. 태어날 때부터 당신들 구렁이는 우리 칠점사를 이길 수 없소이다. 물론 우리 칠점사는 사왕 당신의 힘을 못 이겨 냈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왕의 몸에 독이 돌기 시작하면서 사왕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 틈을 타 칠점사는 사왕의 조이기에서 벗어났다.
"쯧쯧쯧, 이 산골의 많은 구렁이들 중에 '독'을 사용하는 놈이 한 마리도 없었으니, 사왕께서도 구렁이의 독은 사냥에 쓰일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터인데... 당신의 욕심 때문에 내 꾐에 넘어간 것이구려. 괜히 독을 쓰겠다는 욕심을 안 부렸다면 나처럼 몸집 작고 약한 뱀쯤이야 큰 몸집으로 쉽게 조여 죽였을 터인데... 이제 몸집도 작아졌으니 사왕께서는 더 이상 왕이 아니시구려."
사왕은 분했지만 이미 독이 온몸에 퍼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당신의 육신은 맛있게 남김없이 먹어드리리다. 사왕이라고 불리는 구렁이의 고기를 먹을 수 있어 황공하기가 그지 없소, 구렁이 양반."
사왕은 대답이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뒤였다.
칠점사는 흡족하게 웃으며 사왕의 몸으로 포식을 하고는 통통해진 몸집을 이끌고 굼뜨게 자리를 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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