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
人之愛正士(인지애정사)-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아끼는 것은
好虎皮相似(호호피상사)-호랑이 털가죽을 좋아함과 같아.
生則欲殺之(생칙욕살지)-살았을 땐 잡아 죽이려 하고
死後方稱美(사후방칭미)-죽은 뒤엔 아름답다 떠들어대지.
조식(曺植)
국립현대미술관과 천경자 화백의 진실 싸움 저승까지
참 요상한 세상이다.
나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는데,
옆 사람이 “네가 낳은 자식이다”라고
우기니 기가 찰 노릇이다.
“내가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내가 낳은 자식을 모르겠는가?
내가 혼수상태에서 자식을 낳았더라도 내 자식을 모르겠는가?”
아래 글은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인 천경자(千鏡子) 화백에 관한 신문기사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는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약 40여년전 신문기사를 통하여 일찍부터
천경자(千鏡子) 화백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림을 볼 줄도 모르면서 천경자(千鏡子)의 전시회는 구경을 갔었다.
그림을 볼 때마다 색채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강력한 인상을 받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슬픈 느낌을 주는 그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문기사 내용이나 그림을 통하여 “천경자(千鏡子)”의 이름을 들을 때 마다
내 뇌리(腦裏)속에는 묘하게도 우리나라 근대 개화기(開化期)의 신여성들,
시(詩)에는 김일엽(金一葉)
그림에는 나혜석(羅蕙錫)
성악에는 윤심덕(尹心悳)
여류소설가 김명순(金明淳)
여성 의사 허영숙(許英肅)
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생 기독교인 하란사(河蘭史) 등의 인물들을 연상하게 된다.
이들 신여성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같이
“여성의 자아(自我)”를 실현시키기 위해 몸부림 친 인생역정과는 반대로
한 여성으로서의 따뜻한 행복을 얻지 못하고 불행으로 인생을 마감한 인물들이다.
위에 있는 표지의 “미인도”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그림이다.
천경자 화백은 본인이 그린 “미인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1991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까?
본인은 안그렸다는데
국립현대미술관측에서는 “천경자가 그렸다”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천경자 화백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평생 그림을 안그리겠다고 절필(絶筆)을 선언하고 딸이 사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후 국내에서는 24년간 천경자 화백의 근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전 신문에 천경자(千鏡子) 화백이 2015년 8월 6일에 91세로
미국의 딸집에서 별세 하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래 내용은 천경자 화백의 신문기사 내용을 보고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천경자(千鏡子) 화백은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1941년 의대에 가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 간다.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2015.10.22 조선일보)
★천경자 화백은
부산 출신 전남여고 교사 김임년 선생의 그림 권유에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
(2015.12.12. 조선일보)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의 말
[왜 명화(名畵)인가] 천경자 “목화밭에서”
1973년 현대화랑 전시에서 처음 만난 “길례언니”의 환상적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천경자 선생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
슬프지만 길고 아련한 여운이 느껴지는 작품마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화려하고도 고독한 인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천경자 선생님은 나에게 '화가 천경자'라기보다 '여자 천경자'로 느껴진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당면한 삶과 사랑 속에서 관심과 주제를 찾았기 때문이다.
(2014.03.06. 조선일보)
★“미인도” 위작 논란
1991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산이 국가로 환수되면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달되었는데, 그때 함께 온 것이 “미인도”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유명 화가의 작품을 모사한 복제품을 몇만 원에
판매하였는데,
시중에 나도는 복제품을 본 천경자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직접 연락해
“위작을 복제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건이 불거졌다.
천경자는 작품 제작 연도를 표기할 때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는 점,
여인의 어깨 위에 나비를 그린 적이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감정 결과 위작이라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양측의 주장은 여전히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논란이 이어지고 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천경자는 창작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화단에
염증을 느껴 절필(絶筆)을 선언한다.
(2015 12 17 여성중앙)
★천경자씨의 “미인도”는 진품(眞品)이다.
화랑협회 감정서 만장일치로 “기법 화풍 같다”
천경자 화백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승복할 수 없다”
가짜 시비로 절필(絶筆)을 몰고 왔던 국립현대미술관소장의 천경자 작
“미인도” (4호 29×26cm)가 위작이 아닌 “진품(眞品)” 결정이 내렸다.
한국활아협회 회장 김창실(金昌實) 감정위원회는 10일 하오 전체 회의를 갖고
그동안
작가측의 위작주장으로 진위(眞僞)논란을 벌려온 “미인도” 에 대한 2차 감정을
실시, 만장일치로 진품판정을 내렸다.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가 작가측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진품판정을 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감정위원회는 자체 결론을 내린 후 하오 6시에 천경자씨를 직접 방문 진품의
감정결과를 통보했으나 천경자씨는 즉각 거부했다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
(1991년 4월 11일 경향신문)
★천경자 화백은 1998년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며
자신의 작품 93점과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2014.08.19. 조선일보)
★1991년 6월 천경자 화백으로부터 엽서를 받았다.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저의 불행한 사건이 가끔 식도(食道) 부분에
둔통(鈍痛)을 줄 때가 있습니다”
1991년 봄 “미인도”를 둘러싼 가짜 그림 논란을 겪고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작가가 “내 작품 아니다” 하는데도 미술계에서 “당신 작품 맞다”고 몰아붙이는
데에 그는 무거운 충격을 받았다.
(2015.10.23. 조선일보)
천경자 화백(90세)이 받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당의 지급이 중단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천 화백은 1998년 섬유공예가인 맏딸 이혜선 씨(69)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예술원은 6월 11일
“예술원 회원(현재 21명)은 월 180만 원씩 수당을 받는데,
천 화백의 경우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올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중단했다”
고 밝혔다.
천 화백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말 예술원 개원 60주년 전시 ‘어제와 오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예술원에 따르면
이 씨는 ‘미인도’ 위작 시비와 관련된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에
작품을 낼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천 화백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0여 점을 기증해 미술관 2층에
‘천경자 상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지난해 초 한국을 방문한 이 씨는 ‘관리 소홀’ 등을 이유로 기증 작품의 반환을
서울시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4.06.12 동아일보)
★한국의 대표적 여성 예술가인 고(故)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6일 미국에서
91세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미술계는 큰 별을 잃었다며 슬퍼했다.
(2015.10.30. 조선일보)
★천경자 화백 별세 소식이 알려지면서 “미인도” 위작(僞作)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1999년 “내가 미인도를 그렸다”고 진술했던 권춘식(68)씨가 29일
“틀림없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
1999년 권씨의 고미술품 위작 사건을 수사한 검사였던 최순용 변호사도
이날 전화 통화에서 "위조해 놓고 안 했다는 사람은 있어도
진짜라는 그림에 위조했다는 사람은 없다.
(검찰 조사 당시)
“미인도” 사건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 화백의 여인 그림에 대해
작가가 위작 의혹을 제기했지만 화랑협회 감정평가단이 '진짜'라고 최종 판정한
사건이다.
당시 천 화백은 "내 자식을 몰라보겠느냐"며 절필을 선언했다.
권씨는 1999년 고서화 위조 혐의로 구속됐을 당시 미인도를 그렸다고 진술했고
일부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조범의 말을 믿느냐"며 미인도가 진짜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015.10.30.조선일보)
그림에 문외한(門外漢)인 필자가 보아도
위작 논란의 “미인도”의 색상이나 눈동자 입술 표현이
천경자 화풍과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강열하지도 않고 카리스마가 없다.
그리고 “境子”라는 싸인의 글자 획이 굵고 글씨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싸인에 쓴 “1977”이라는 숫자가 너무 또박또박 하여 자연스럽지 않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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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천경자(千鏡子) 화백에 관한 중요 신문기사 이다
◆어머니가 떠오르는 그 이름 천경자
한국근현대회화 100선
조선일보
2014.03.06
[왜 名畵인가] 천경자 '목화밭에서'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의 말
1973년 현대화랑 전시에서 처음 만난 '길례언니'의 환상적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천경자 선생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
슬프지만 길고 아련한 여운이 느껴지는 작품마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화려하고도 고독한 인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천경자 선생님은 나에게 '화가 천경자'라기보다 '여자 천경자'로 느껴진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당면한 삶과 사랑 속에서 관심과 주제를 찾았기 때문이다.
미술이 한 사람의 기억과 맞물리고 그 기억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면,
나는 이것만으로도 그 작품의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
천경자 선생님의 '목화밭에서'는 선생님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전임강사 시절
그린 그림으로 대한미협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목화꽃 만발한 풀밭에 가족이 모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린 붉은 옷을 입은 긴 머리 여인은 화가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때를 그린 것이다. 아이 아버지는 목화밭에서 여유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듯하고,
아기 엄마는 행복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고 있다.
바구니에는 소담한 목화가 담겨 있고, 뚜렷한 선과 색채가 평화로운 풍경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운명에 맞섰던 강한 여성 천경자가 꿈꿨던 건 결국 이렇게 소박한 삶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멀리 둥실 떠있는 뭉게구름에서 상념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천경자의 1954년작 ‘목화밭에서’. 세로 114cm, 가로 89㎝.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꼭 20년 전 호암갤러리에서 선생님의 전시회를 열어 드린 인연으로 함께
와인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내가 나이 70이라고 마음도 늙은 줄 알지?
지금 당신 마음과 똑같아.
더 애틋하면 애틋했지"
하시며,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정겹게 말씀하시던 게 생각난다.
내가 지금 선생님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말씀이 마음에 더 깊이 와 닿는다.
또한 천경자 선생님이 화가라기보다 그리운 한 여성으로 떠오르는 것은
지난해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평소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천경자 선생님과 여고 시절을 함께 보내셨던 어머니는
"경자는 공부 시간에도 그저 쓱쓱 그리면 그럴듯한 그림이 되곤 했지"
하시면서 천경자 선생님을 추억하셨다.
'길례언니'는 천경자의 1973년도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는 간호사였던 화가의 선배 언니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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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천경자 화백 어디서 어떻게 지내나?
동아일보
2014-06-12
천경자 화백(90·사진)이 받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당의 지급이 중단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천 화백은 1998년 섬유공예가인 맏딸 이혜선 씨(69)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거동이 힘든 상태로 알려졌을 뿐 가족 외에는 직접 만난 사람이 거의 없어
천 화백의 상태를 놓고 온갖 소문만 무성했다.
예술원은 11일
“예술원 회원(현재 21명)은 월 180만 원씩 수당을 받는데,
천 화백의 경우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올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예술원 관계자는
“천 화백이 거주하는 뉴욕의 총영사관에도 확인을 부탁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예술원 측에서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자
이 씨는 어머니의 회원 탈퇴를 요청했다.
이 씨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사퇴서를 낸 것은 사실이며 이와 관련해 청와대, 국무총리실 등에 민원을 냈는데
연락이 없다”며
“아픈 어머니와 나뿐인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아팠다, 죽었다 별 소문이 다 날 수 있지만
본인과 보호자가 아닌 사람에게 환자 상태를 알려주는 것은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투병 중인 천 화백을 모시고 있는 그는
“어머니의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묻기도 하지만 그런 걸 왜 우리가 밝혀야 하나.
가족이 아팠을 때 남에게 시시콜콜 말하거나 보이기 싫은 게 당연하지 않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예술원이 어떻게 하든 신경 안 쓰겠다”며
“그저 어머니가 옆에 계신 것으로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천 화백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해 말 예술원 개원 60주년 전시
‘어제와 오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예술원에 따르면
이 씨는 ‘미인도’ 위작 시비와 관련된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에
작품을 낼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4월 개막한 전시에는 예술원이 소장한 천 화백의 작품 2점이 걸렸다.
예술원의 윤명로 미술분과위원장(화가)은
“탈퇴 요청이 천 화백 본인 의사인지 확인되지 않은 데다 회원 가입과 탈퇴는
총회 인준을 받아야 할 사항인 만큼 천 화백의 회원 자격은 유효하다”고 말했다.
천 화백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90여 점을 기증해 미술관 2층에
‘천경자 상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지난해 초 한국을 방문한 이 씨는 ‘관리 소홀’ 등을 이유로 기증 작품의 반환을
서울시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미석 정양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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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은 1998년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며
자신의 작품 93점과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2014.08.19.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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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조선일보
2015.10.23
1991년 6월 천경자 화백으로부터 엽서를 받았다.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저의 불행한 사건이 가끔 식도(食道) 부분에 둔통(鈍痛)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해 봄 '미인도'를 둘러싼 가짜 그림 논란을 겪고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작가가 "내 작품 아니다" 하는데도 미술계에서 "당신 작품 맞다"고 몰아붙이는 데에
그는 무거운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상처는 미국 가서도 여전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건강에 이상 없는 한 차원이 다른 작품을 위해 남은 생명을 불태울 각오"라고
했다. 그러나 다시는 그의 신작을 보지 못했다.
위작(僞作) 논란 와중에 천 화백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 같았다.
뉴욕으로 떠나기 전 화실을 겸한 아파트 거실은 어두컴컴했다.
테이블엔 마시다 만 와인 잔과 담배꽁초 그득한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미완성 그림들이 작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대 있었다.
그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작품은 내 핏줄이나 다름없어요.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 왔다' 하고 말을 건네곤 합니다.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어미가 어디 있겠어요?"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천 화백 삶은 파란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아끼는 가족을 잃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기쁨과 상처를 받았다.
채색(彩色) 그림은 한때 화단에서 따돌림당했다.
이 모든 한(恨)을 그는 화사하면서도 슬픈 그림에 녹였다.
"그림을 그릴 때 광기(狂氣)가 없으면 재미없어요.
하지만 이 광기를 잘 다스려 그림으로 승화시키기도 힘들어요."
그는 나혜석 이래 한국 여성 화가의 흐름에서 가장 우뚝한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
자기 작품이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도 그는 작품을 남발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화랑 주인에게 작품을 한 점 줬다가도
이튿날 "돈 돌려줄 테니 다시 달라" 전화하기도 했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나올 만큼 멋쟁이였지만
어딜 갈 때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교수나 예술원 회원 같은 자리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천 화백은 1998년 분신과도 같은 작품 93점을 서울 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마지막 순간 작품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내 공공(公共)을 위해 희사했다.
천 화백이 8월 초 미국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
딸이 유골을 갖고 들어와 시립미술관을 한 바퀴 돈 것으로 장례 절차는 끝났다.
천 화백처럼 오로지 예술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자존심을 세운 화가도 드물다.
또 하나 전설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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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작품 떠나보낼 때 울던 여린 사람 이제 푹 쉬시길
김미리 블로그문화부 기자
조선일보
2015.10.26 03:07
['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이 기억하는 천경자]
1960년대부터 인연 맺어… 2002년 뉴욕 만남이 마지막
"그림 달란 부탁 거절하면 절교 선언하는 친구도…
그런 날엔 특히 힘들어해"
천경자와 막역한 사이였던 김성환 화백
"천 선생!
가짜 그림도,
그림 달라는 이도 없는 곳으로 가셨으니 이젠 편히 쉬세요."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사랑받아온 김성환(83) 화백이 사진 한 장을 꺼내 들더니
상념에 젖었다.
2002년 7월 19일이란 날짜가 선명히 찍힌 사진 안에는
고(故) 천경자 화백(1924~2015)과 김 화백이 나란히 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계단에서 딱 10분 뵀으려나.
요만한 일 있어도 상의하던 사이였는데
'김 선생' 한마디 못 부르시고 그저 제 손만 꼭 잡으시더라고요.
안타까웠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천 화백이 두 달 전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천 화백은 각종 문화계 인사와 교분이 두터웠지만 막상 속마음 털어놓고
지내는 가까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중 김 화백은 천 화백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2003년 뇌출혈로 병석에 눕기 전까지
연락이 닿았던 몇 안 되는 인사.
그러나 그도 별세 소식은 신문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
"뭐 어차피 나면 죽는 거고,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고…."
24일 경기 분당의 자택에서 만난 김 화백은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화려한 겉모습 뒤 고독했던 예술가의 모습을 하나씩 풀어냈다.
천경자 화백이 스물 두 살 때 모습을 그린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년 작)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중 하나다.
천 화백과의 인연은 그가 신문사에 있던 1960년대 시작됐다.
"우연한 자리에서 알게 됐는데 제가 입이 무겁다고 생각하셨던지
그 뒤로 사소한 고민도 얘기하곤 하셨지요.
미국 가시기 전에도 종종 광화문 '신원' 같은 일식집에서 점심 하며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4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며 그에겐 아무도 모르는 천 화백의 비밀이 쌓여 갔다.
김 화백은
"천 선생은 그 누구보다 자기 그림을 아껴 친한 화랑은 물론이고 친구한테도
그림을 거의 주지 않았다"며
"그것 때문에 '미인도' 사건이 그렇게 흘렀을지 모른다"고 했다.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이 터졌을 때 천 선생이 일이 이상하게 됐다며
하소연하셨어요.
사건 얼마 전에 한 화랑 주인이 (팔) 그림 좀 달라면서 고급 크리스털 잔 세트를 가지고 왔대요. 아무리 친한 사람한테도 그림을 잘 안 주는 천 선생이 이때도 못 주겠다며
크리스털 잔도 돌려보냈답니다.
화랑 주인이 그 자리에서 울더랍니다.
바로 그이가 나중에 미인도 사건 때 감정평가단에 포함됐어요."
당시 천 화백은
"내가 낳은 자식을 모르겠느냐"며 위작이라 했지만 감정평가단은 "진짜"라고 했다.
"그때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크셨어요.
그래서 말년이 그리된 거지요."
김성환 화백의 부탁에 1976년 천경자 화백이 편지봉투에 그려준 여인 그림.
/성형주 기자
고위층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천 선생 장남이 모 대기업에 들어가서 선생이 아들 잘 봐달라고 풍경화를 회장에게
선물했어요. 그랬더니 그 회장이 '난 풍경보단 여자가 좋다'고 했대요.
선생이 어쩌겠냐 투덜대시며 여인 그림을 다시 그려 줬지요.
회장이 말한 여자란 게 그림이었는지 진짜 여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그는 천 화백이
"까칠한 구석은 있었지만 법 없어도 살 사람이어서 당하기도 여러 차례였다"고 했다.
"한번은 화랑 통해 그림 샀단 사람이 선생 그림 정말 비싸더라며 가격을 얘기해줬대요.
그런데 그 가격이 화랑에서 자기한테 팔았다고 말한 금액과는 너무 차이가 큰 거라.
노발대발했더니
그 화랑 주인하고 남편이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더구려."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천 화백이 그림을 기증할 때 주선한 것도 그였다.
연회장에서 우연히 고건 당시 서울시장 옆에 앉았는데 옛 대법원 건물을 고쳐
미술관을 지을 건데 예산 부족으로 채울 게 없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그 길로 절친했던 천 화백과 서울시에 다리를 놓았고 기증이 이뤄졌다.
"목숨처럼 아끼던 그림을 대중을 위해 내놓기로 결심한 거죠.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작업실에서 기증할 그림을 고르는데 선생이
그림 하나하나 끌어안고 얼마나 우시던지…."
그림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면 바로 절교 선언하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천 화백은 어김없이 술 한잔을 기울였다.
"강해 보여도 바스러질 듯 마음은 참 약하셨는데.
천 선생, 이제 그렇게 괴롭히는 인간들 없을 테니 편히 눈 감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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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미인도 僞作 논란 당시 수사 검사 위작 진술 사실로 보여
조선일보
2015.10.30
-위조범 주장 권춘식 인터뷰
"틀림없이 내가 그린 그림
천 화백, 金粉 쓴 곳에 난 노란 물감으로 채색… 나비는 그림 '고'서 베껴"
'미인도' 위작을 진술한 권춘식씨.
천경자 화백 별세 소식이 알려지면서 '미인도' 위작(僞作)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1999년 "내가 미인도를 그렸다"고 진술했던 권춘식(68)씨가 29일
"틀림없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
1999년 권씨의 고미술품 위작 사건을 수사한 검사였던 최순용 변호사도
이날 전화 통화에서 "위조해 놓고 안 했다는 사람은 있어도 진짜라는
그림에 위조했다는 사람은 없다.
(검찰 조사 당시)
공소시효도 지난 사건에 대해 본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던 걸 보면 사실인 것 같다"고
말해 권씨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
권씨는 "천 화백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그림을 관두고
도망가다시피 한 천 화백에게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었다"며
"이렇게라도 밝혀 천 화백이 마음 편히 눈감으셨으면 한다"고 했다.
'미인도' 사건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 화백의 여인 그림에 대해
작가가 위작 의혹을 제기했지만 화랑협회 감정평가단이
'진짜'라고 최종 판정한 사건이다.
당시 천 화백은 "내 자식을 몰라보겠느냐"며 절필을 선언했다.
권씨는 1999년 고서화 위조 혐의로 구속됐을 당시 미인도를 그렸다고 진술했고
일부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조범의 말을 믿느냐"며 미인도가 진짜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 말 관훈동 13평 한옥에서 어렵게 살고 있을 때 알고 지내던 화상이
선물용으로 쓸 거라며 부탁해 달력에 있는 천 화백 그림 여러 개를 여기저기
조합해 그림 3점을 그려줬다.
그 후 다른 화상이 부탁해 천 화백 그림을 또 1점 그렸다"고 했다.
권씨는 자신이 그림을 그렸다는 증거를 조목조목 댔다.
"천 화백은 눈동자에 금분(金粉)을 쓰는데 나는 싼 노란 물감으로 채색했다.
얼굴의 음영도 내가 그린 건 딱딱하다.
머리카락도 뭉뚱그려서 그렸다. 나비는 천 화백의 다른 그림('고'·1974년작)을 보고 따서
그렸다"고 했다.
그는 "1999년 청전 이상범 그림을 위조해 검찰 조사를 받을 때 천 화백 그림을 내가 그렸다고 진술서를 써서 제출했는데 다음 날 다른 조사관이 와서 '네' '아니요'라고만 답하라고
했다. 제대로 사실을 전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 언론에 그의 주장이 실렸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인도'를 소장한 것은 1980년인데
권씨가 그림을 그린 시기가 1984년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구치소에서 한 주간지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정확한 제작 연도가
기억나지 않아 대충 말했더니
기자가 1984년 제작이라고 썼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3년 8월 천 화백 큰딸 이혜선씨 요청에 따라 '미인도'를 미술관 홈페이지의
소장 작품 사진에서 제외했다"며
"'미인도'를 보유하고 있으나 위작 여부에 대해선 입장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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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 그리고 커피 커피
조선일보
2015.11.19.
천경자 화백은 예전에
"내가 밥 먹는 줄 아세요, 내 끼는 커피와 담배뿐이요.
그래도 이렇게 기운 있지"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커피와 담배를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끼니로 드실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신 천경자 화백!
이분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게요~
커피와 담배를 늘 곁에 두고 작업을 하셨다던데,
어떤 커피를 좋아하셨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그런 이야기는 없더라고요.
아마 미국에 계실 때는 아메리카노를 즐기시지 않으셨을까 짐작해 봅니당~
천경자 화백의 작품은
여성으로서의 잠재된 슬픔, 고독, 소외들의 심리적인 요인들이
작품 전반에 반영이 되어 있어요.
슬픈 삶의 애착과 고난,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고
정신적으로 초월하려는 모습을 작품에서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더 감정이입이 잘 되는 작품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천경자 화백은 17세에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되요.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쳤던 서양화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모델을 관찰하고 섬세하게 그리는 법을 집중적으로 배웠다고 해요.
1944년 제22회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가 입선을 하고
다음해에는 외할머니를 그리 '노부'가 입선을 하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게 되죠.
두 작품을 보면 일본에서 유학했지만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50년대 이후의 천경자 화백 작품을 보면,
여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픔을 드러낸 작품이 위의 생태라는 작품이에요.
자서전에 보면
"죽을 것처럼 숨이 막히던 그 여름에 뱀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고
몸서리치는 뱀을 그리는 동안 인생의 고통 하나를 뛰어 넘을 수 있었다."
라고 적혀있어요. 어둡고 힘든 시절을 극복하려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데요,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운 생태라는 작품을 통해서 화단에 주목을 받게 되요.
천경자 화백은 당시에는 드물게 해외여행을 즐겨다고 해요.
사진을 보니 정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같은 느낌이 풍겨나네요.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 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하게 되요.
여인들의 작은 꿈과 사랑을 소박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작은 아씨들"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천경자 화백의 문학적 취향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에요.
이때의 작품들은 샤갈풍(위의 작품)으로 보는 분들도 많이 계셔요.
적색과 주황색, 청색 그리고 백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요.
세밀한 사실주의의 화풍에서 벗어나 환상적인 색채를 통한 초현실적인 서양화의 화풍이 나타나게 되요.
이른바 '천경자 풍'의 모태가 된 <길례언니>라는 작품이에요.
인물 묘사나 채색기법에서 독특한 천경자 화백만의 세계를 드러냈죠.
이 작품을 이어서 연이어 여성들의 인물화와 꽃무리들의 사실적 표현,
구체적인 소재의 형상들이 이어지게 된다고 해요.
어쩌면 천경자 화백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요.
꽃, 여인, 뱀 등 평생 애착을 둔 소재들이 다 있는 작품으로
자전적인 여인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해요.
뱀은 우울하고 힘든 시절을, 꽃은 청춘의 환상을 표현했어요.
고독과 우울함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천경자 화백의 내면세계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어요.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10명을
파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천경자 화백은 종군화가로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소총을 들고
스케치와 담채 작품을 남기게 되요.
소총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꽃나무 그늘 아래에서 적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
모습을 그린 <목적>은
천경자 화백의 신기한 감흥을 구현하여
그녀만의 특별한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에요.
이 작품은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심화된 스케치와 단순한 시각적 형태, 색채의 미적 감각을 또 다른 차원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신비감을 더욱 강조했다고 볼 수 있어요.
마치 대지의 여신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에요.
멕시코에 프리다칼로가 있다면 한국에는 천경자 화백이 있다고 할 수 있죠.
개인적인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독 등 아픈 마음을 작품으로 승화하였고
깊은 내면의 성찰을 작품을 통해서 엿볼 수 있기에
천경자 화백의 작품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 해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천경자 화백의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리라고 생각해요.
천경자 화백의 작품 중 93점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을 하셨다고 해요.
서울시립미술관에 가면 상설전시로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어요.
자세한 내용은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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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 그녀가 남긴 수수께끼
별세소식 제때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여성조선
2015-12-03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 화백과 관련한 미스터리는 두 가지였다.
생사 여부와 위작 논란이다.
이번에 별세 소식이 알려지면서 생사 여부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지만,
새로운 미스터리도 생겼다.
유족들, 구체적으로 장녀 이혜선 씨를 제외한 그녀의 자녀들은 엄마의 별세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 씨는 왜 동생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제때 알리지 않았을까.
스스로 절필까지 선언하게 했던 위작 논란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미궁 속에서만 존재할 운명일까.
궁금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 꽤 많다.
천경자 화백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천 화백의 별세 소식이 보도되고
며칠 후 벌어진 기자회견에서 출발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다.
최근 몇 년간 거취와 생사 논란이 있었던 천경자 화백과 함께 살던 큰딸이 미국에서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전해왔고,
‘유족’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천 화백의 장남
이남훈(팀-쓰리 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회장) 씨 부부,
차녀 김정희(미국 메릴란드주 몽고메리 칼리지 미술과 교수),
사위 문범강(미국 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
며느리 서재란(고 김종우의 처, 세종문고 대표)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희 유족 5인은 어머니가 2015년 8월 6일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10월 19일 접하게 됐다.
장녀인 이혜선 씨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한국의 모 은행으로부터
천경자 화백의 은행계좌 해지 동의를 요구하는 전화를 받고 그제야 알게 됐다.
갑작스런 비보와 기가 막힌 소식에 슬픔과 함께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할지
며칠 시름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8월 천 화백의 유골함이 서울시립미술관 수장고를 한 바퀴 돌고 갔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아무런 장례 혹은 추모 행사도 없이,
애도의 뜻을 표할 기회도 없이 어머니를 보내야 하는지 망연했다.
장례식 유무 확인은커녕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장녀 이혜선 씨가
“엄마의 유골은 생전 강아지들과 함께 산책했던 뉴욕 허드슨 강가에 뿌렸다”는
사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형제자매도 모르게 혼자서 어머니를 세상에 보냈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의 비보를 은행을 통해서, 그것도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듣게 되었다니.
그간 거취 논란이 있어왔던 천 화백인지라 더욱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유족들은 천경자 화백이 끝내 풀지 못했던 숙제인 위작 논란도 이슈로 꺼냈다.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궁금해하는 사건,
<미인도> 위작 논란이다.
작가가 “내가 그린 작품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기관에서 진품이라고 규정하는 코미디 같은 일.
유족들은 기자회견 당시 고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위작 논란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그녀가 작품을 기증한 특별한 공간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추모식을 진행해주십사 건의했다
(유족들의 청원으로 10월 30일 오전 10시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추모식이 진행됐다).
유족들의 기자회견 덕분에 천경자 화백을 둘러싼 몇 가지 의문이 남게 됐다.
장녀 이혜선 씨는 왜 동생들에게 엄마의 죽음을 제때 알리지 않았을까?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던 천경자의 미국생활은 어땠을까?
스스로 절필까지 선언하게 했던 위작 논란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만
남게 될 운명일까?
자녀 간의 재산분쟁이라는 억측을 낳게 할 정도로,
천경자의 작품은 금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화가 천경자는,
그녀의 진짜 작품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실제 세계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걸러 창출된 가상의 여인이다.
천 화백은 4차원 세계에 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언급했다.
비현실적이면서 섬뜩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절필 선언하게 한 위작 논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미인도>가 논란에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0.26사태로 국립현대미술관이 김재규의 재산을 환수한 후 인수받았다.
천 화백은 이 작품이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닌 위작이라고 주장했고,
현대미술관은 이것이 진품이라면서 한국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이후 현미경 분석, 적외선과 X선 촬영 등 정밀감식을 통해 감정위원 전원 일치로
진품 판정을 내렸다.
작가는 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진품이라고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천 화백은 “내가 낳지도 않은 자녀를, 당신 자녀라고 윽박지르면 어떡하냐”고
결과에 대항했지만 ‘정신이 이상해져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천경자의 선택은 절필 선언이었다.
본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환멸을 느낀 천경자는 그길로 미국으로 떠났다.
작품활동도 끝났다.
그렇게 한국의 작가 하나를 잃어버리는 슬픈 일로 규정되려나 싶었지만,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8년 뒤 위조범이 자백을 하면서 다시 이슈가 됐다.
본인이 위작을 그렸다고 실토한 것이다.
위작 판명으로 코미디 같은 일이 끝나려나 싶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고,
감정 결과를 뒤집을 만한 공신력 있는 기관이 없다는 점을 들어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
추모식이 열린 시립미술관에서 만난 고인의 차녀 김정희 교수와 사위 문범강 교수는
“천 화백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위작 논란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한다”면서
의지를 내비쳤다.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천 화백의 별세로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기관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나서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제로 <미인도> 위조범으로 지목된 권춘식 씨를 수사했던
전직 검사 출신 최순용 변호사는 한 강연에서
“위조가 맞다고 본다”는 발언을 했고,
권춘식 씨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위조한 게 맞다.
위작사건으로 절필한 고인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추모식 이후 분위기가 환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판명이 날지는 미지수다.
미술계는 1991년 사건 당시 진품으로 판명이 됐으며,
더 이상 재조사가 불필요한 사건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상황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천 화백의 타계를 계기로 국회에서도 <미인도>에 대한 재감정 요청이 제기됐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앞으로
‘천경자 미인도의 재감정 요청의 건’을 우편으로 발송한 상태다.
재감정 가능성이 열렸다는 말이다.
한국 화단에 천경자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자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
천 화백은 뱀에 대한 남다른 경험이 많은데,
그중 결정적인 것이 1949년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마치고
광주로 귀향하던 중 화사한 뱀 두 마리가 찔레꽃 밑으로 지나가는 환각을
경험한 것과
당시 35세의 뱀띠 연인과의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뱀을 그리면서 당시 한꺼번에 밀려온 생활고와 혈육의 죽음,
순탄치 못한 결혼과 연애 등의 시련을 극복했다.
결과적으로 뱀은 천경자 인생의 구원자이자 수호신이 됐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종이에 채색, 43.5×36㎝, 1977
천경자의 트레이드마크인 꽃, 여인, 뱀이 한 화면에 모두 나오는 대표작이다.
22살에 한 결혼과 첫딸을 낳았던 과거의 경험을
슬프고 우울한 기억으로 회상하는 작품이다.
베일에 싸인 미국생활, 최근에는 사망설
위작사건을 계기로 천 화백은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 시절에는 흔치 않은 유학파 여성이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그림을 배웠고, 이후에도 세계를 여행하면서
그림 작업을 했다.
그녀에게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위작 논란으로 인한 갈등으로 선택한 길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미술계에 환멸을 느꼈다면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98년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후 미술관은 부분적으로 레퍼토리를 교체하면서 천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대표작의 대부분이 이곳에 있다.
미술계에서 천 화백이 이미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2003년 미국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거동이 불가능해 10년 넘게 큰딸의 간호를 받으며
투병 중이던 천 화백에 대한 소문은 최근 몇 년 사이 더욱 구체적인 내용으로 돌았다.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면서 수당 지급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큰딸 이 씨는 예술원에 탈퇴서를 제출했다.
이때 천 화백을 둘러싼 의혹이 더욱 커졌다.
예술원은 이 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 화백의 의료기록 등을 요구했으나,
명예훼손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예술원은 천 화백 본인의 의사를 알 수 없어 탈퇴 처리를 하지 않았다.
추모식에서 만난 차녀 김정희 씨는
“언니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수년째 지속해서 유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어머니의 명예에 누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참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98년 미국 어머니의 집을 방문했다가
경찰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런 직접적인 멘트가 없더라도, 가족끼리 얼마나 소통이 없었으면 엄마가 돌아가신
사실도 공유하지 않을까라는 상식적인 의문이 든다.
일련의 정황들을 되짚어 보면,
장녀 이혜선 씨와 형제들 간에 소통이 되지 않거나 깊은 갈등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마지막을 함께했으며,
유골함을 뿌리고 보관까지 한 주체자인 장녀 이 씨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한 일.
사실 그녀가 입을 열면 천 화백의 미국에서의 거취 논란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장녀 vs 나머지 형제들, 유가족 분쟁 왜?
어떤 접촉도 없었던 장녀 이 씨가 시립미술관에서 추모식이 끝나고
한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덕분에 몇 가지 미스터리가 풀렸다.
천 화백의 유골은 뉴욕 허드슨 강,
그러니까 그녀가 살아생전 강아지와 함께 즐겨 산책을 하던 곳에 뿌렸다.
유골함의 위치는 말하지 않았지만,
뉴욕의 작은 성당에 봉안했다는 사실만 알려졌다.
인터뷰에는 동생들과의 갈등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도 있었다.
이 씨는 “앞으로 내게 남은 일은 엄마의 유해와 작품을 지키는 것이다.
동생에게
‘내가 집을 비워야 하니 하루만 엄마를 봐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오지 않았다.
동생들이 엄마를 모시기 힘들다고 해서 뉴욕에 머물렀다.
12년 동안 병간호를 했는데,
힘들 때는 동생들이 모른 체하다가 이제 와서”라면서 그간의 서운함을 내비쳤다.
이 씨는 어머니 천 화백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직접 주사 놓는 법까지 배울 만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녀 이 씨와 유족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서로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고인의 명예를 운운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두고
작품을 둔 유산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천 화백의 그림 가치는 대폭 상승했다.
11월 10일 마감한 온라인 경매에서 고 천경자 화백의 <무제> 작품이 1천5백50만원에
낙찰됐다.
낙찰금액에 판매수수료를 더한 판매 금액은 1천8백5만원이다.
6백만원에 경매를 시작해서 시작가의 3배에 달하는 가격에 팔려,
이날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했다.
<무제>는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작품으로 가로 17.5㎝, 세로 14㎝의 작품이다.
한국미술품시가감정협회는 천 화백의 작품은 평균 호당 가격이 8천2백50만원이라고 밝혔다. 작가가 세상을 떠나면 시세가 그 이전과 달라지는 것이 미술계 관례다.
따라서 앞으로 천 화백의 작품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직 유가족의 재산 분배와 관련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쉽게 정리가 될 이슈는 아닐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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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의 작품 1000여점… 부경大에 기증, 미술관 생긴다
연합뉴스 조선일보
부산=박주영 기자
2015.12.12 03:00
장녀 "어머니가 작가로서 토대 쌓았던 곳이 부산… 여기로 오는게 운명적 인연"
옷·안경 등 유품 3000점도
고(故) 천경자 화백의 장녀 이혜선씨가 11일 오후 부산 부경대 대연캠퍼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천 화백의 작품과 개인 소장품 등 4000여 점을
이 대학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지난 8월 미국 뉴욕에서 작고한 고(故) 천경자 화백의 작품 1000여점을 소장할
기념미술관이 부산에 생긴다.
천 화백의 장녀인 이혜선씨는 11일 부산 대연동 부경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어머니의 드로잉 작품과 개인 소장품 등을 부경대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국민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어머니의 예술 세계를 국민과 대중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
이라며
"평소 어머니가 원해온 일을 하고 나니 마음 편하고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부경대에 기증되는 천 화백의 작품은 스케치성 드로잉과 미완성 작품 등 1000여점이다.
이씨는 "식물과 동물, 인물 등 갖가지 소재를 담은 이 작품들은 어머니가 작품을 구상하고
실제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며
"그림을 공부하는 후학이나 그림을 사랑하는 대중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옷, 신발, 안경 등 천 화백이 생전에 썼던 개인 유품 3000여점도 함께 기증된다.
앞서 장녀 이씨는 지난 10일 오후 부경대에서 김영섭 부경대 총장과 작품 기증 협약을
체결했다.
부경대는 2020년까지 60억원을 들여 대연캠퍼스 내에 연면적 1320㎡(400평) 규모의
천경자기념미술관을 건립해 작품과 유품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전남여고(당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천 화백의 기념미술관이 부산에 건립되는 데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부산은 전남여고 교사로 천 화백에게 화가의 길을 열어준 김임년 선생의 연고지이다.
김 선생은 천 화백이 1941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해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녀 이혜선씨가 작품 기증을 상의한 윤광운(66) 부경대 명예교수도 김 선생의 자제이다.
부산은
'일본식 채색화를 그린다'는 오해를 받았던 천 화백이 1952년 35마리의 뱀을 그린
'생태'라는 작품을 전시해 국내 화단의 주목을 받게 한 곳이기도 하다.
장녀 이씨는 "어머니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작가로서 토대를 쌓기 시작한 곳이 부산"
이라며
"어머니 예술 세계의 마지막을 부산에서 마무리하는 것은 하늘의 섭리이자
운명적 인연"이라고 말했다.
신옥진 공간화랑 대표는
"작가의 고향과 지역성을 따지는 미술계 관행으로 볼 때 부산에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만들어지는 것은 참신하기까지 한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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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前 세상 떠난 천경자
조선일보
2015.10.22
지난 8월 6일 뉴욕 자택서 별세… 맏딸 '조용한 장례' 뒤늦게 밝혀
천경자 화백 사진
그동안 생사 여부 논란이 잇따른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千鏡子·91·사진) 화백이
두 달 전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밝혀졌다.
1998년부터 천 화백과 뉴욕에서 함께 살며 그를 간호해온
맏딸 이혜선(70·섬유디자이너)씨는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2003년 7월 2일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줄곧 병석에 계셨는데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지셨다'며
"지난 8월 6일 새벽 5시쯤 현저히 맥박이 떨어지더니 의사가 보는 가운데
잠자는 것처럼 평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씨는 "어머니 시신은 화장해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극비리에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렀고 한국과 미국 양쪽에 사망 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천 화백의 마지막 여정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그의 그림이 함께했다.
이씨는 "어머니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93점을 자식처럼 아끼셨다"며
"미국에서 장례를 치른 뒤 8월 중순 서울시 측에 협조를 구해 어머니 유골함을 들고
그림이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시실과 수장고를 한 바퀴 돌고 보내드렸다"고 했다.
사망 사실을 늦게 알린 것에 대해 이씨는
"그간 경황이 없었고 어머니나 나나 생사 논란,
위작 논란 등으로 맘고생이 심해서 말하지 않았다"며
"서류상 정리할 것들이 있어 잠시 한국에 들어온 차에 고심 끝에 밝히게 됐다"고 했다.
이씨는 천 화백의 유골이 안치된 장소에 대해선 함구했다.
"중요한 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고,
장소는 언젠가 알려 주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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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 영혼의 꽃밭 속으로
조선일보
2015.10.22
[천경자 91세로 타계… 그녀의 인생과 그림]
사랑하는 남자와의 거듭된 이별, 여동생은 폐병으로 숨져
고통 잊으려 그린 '뱀 그림'… 화단이 주목하는 계기 돼
남태평양 타히티 여행후 꽃의 여인, 트레이드 마크로
"작업 잘되는 날은 '클로버',
뜻밖의 돈이 들어온 날은 '다이아몬드',
우울한 날엔 '스페이드'를 그려 넣어요.
지금까지는 끊임없는 시련이 계속된 인생이지만 앞으로는 가계부에
'클로버'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1996년 2월 1일자 본지 인터뷰 중)
쓰러지기 전 거실 소파 옆 손 닿는 곳엔 늘 가계부가 있었다.
금전 출납 기록용이 아니었다.
하루 일과를 자신만의 암호로 기록하는 일기장이었다.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화백이 '스페이드' 가득한 아흔한 해 슬픈 일생을 마감하고
'네 잎 클로버' 가득할 천국의 꽃밭으로 여행을 떠났다.
천경자는 주로 자화상과 자신이 만나거나 본 여성들의 모습을 화폭으로 옮겼다.
작가의 인물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그녀의 분신으로,
자신의 자아와 성찰을 그들의 모습에 투영해 그렸다.
사진은 1994년 본지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이다.
천 화백의 딸은“어머니가 예쁘게 나온 사진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큰 사진).
천경자 대표작‘청춘의 문(1968년·오른쪽 위)’과‘
길례언니(1973년·오른쪽 아래)’.
1969년부터 해외여행을 다니며 여러 나라를 탐방한 천경자는
이후 본인의 작품에 노랑, 빨강 등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거듭된 이별,
여동생의 급작스러운 죽음….
굴곡 많은 삶을 살아간 천 화백은 세상의 편견에 맞서 평생 화폭에
드라마틱한 장면을 담았다.
슬픔과 신비에 가득한 이국적 여인,
꿈과 환상의 세계 가득한 이국적 풍경화 등 원시적이면서
서정적인 그림으로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류 화가로 손꼽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1941년 의대에 가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 간다.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가 즐겨 썼던 작품 제목처럼 '슬픈 전설'로 가득했다.
1944년 귀국해 동경 유학 시절 만난 이형식씨와 결혼해 남매를 뒀지만
시어머니의 구박을 못 참고 집을 나왔다.
이후 지방 신문기자인 김남중씨와 사랑에 빠져 그 사이에서도 남매를 낳았지만
그는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여동생마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천경자 화백 연표
아픔을 견디지 못한 천 화백은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택해 화폭을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운다.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 뱀 그림 '생태(生態)'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일본적 채색화'로 폄하됐던 천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천경자는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여행을 즐겼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은 타히티 여행 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1973년작 '길례언니'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황금의 비'(1982) 등을 그렸다.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1998년 11월 일시 귀국해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해 맏딸 이혜선씨가 사는 뉴욕으로 간 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2003년 봄 뇌출혈로 병상에 누운 뒤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는다"던 여인.
이 여인의 '슬픈 전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흔한 해를 끝으로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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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느껴지나요 화폭에 스며든 그녀 작품전시
조선일보
2015.10.30.
꽃·여인으로 사라지는 아름다움 그림에 담아
꽃뱀으로 머리 장식한 '천 화백'의 22세 자화상
그녀 내면의 이중적인 감정, 화폭에 표현했어요
한국의 대표적 여성 예술가인 고(故)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6일 미국에서
91세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어요.
미술계는 큰 별을 잃었다며 슬퍼하고 있어요.
천 화백은 채색화 전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화가로 유명해요.
특히 천경자표 화풍으로 불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여인상은 큰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천 화백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공통점이 있는데요,
한 사람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모델로 삼은 인물은 누구인지 함께 살펴볼까요.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린 이유는
작품 1에선 여인이 꽃동산에서 꺾은 꽃들을 품 안에 가득 안고 서 있군요. 여인의 주변에도 눈부시도록 화려한 꽃들이 활짝 피어났네요. 이 그림은 천경자표 여인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여인과 꽃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장식하지요. 천 화백이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여인상을 즐겨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꽃은 흔히 아름다운 모양과 고운 색깔, 달콤한 향기를 지녀 아름다운 여성으로 비유되곤 해요. 꽃과 여인은 생명의 아름다움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상징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름다움도 행복도 영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덧없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림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게 한 것이지요.
▲ 작품1 - 천경자, 꽃다발을 안은 여인, 1981.
한편, 꽃은 색채를 실험하는 도구이자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이기도 했어요. 이는 천 화백이 "꽃은 그 자체가 색채의 화려한 파티이자 내 작품 세계로 이끌어주는 환상의 터전이며 안식처다"고 말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답니다.
◇긴 머리카락과 목, 그리고 황금빛 눈동자
작품 2와 작품 3에 나오는 두 여인을 보세요. 둘 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과 긴 목을 가졌어요. 천 화백은 왜 긴 머리와 긴 목을 가진 여인상을 그렸을까요?
▲ 작품2 - 천경자, 황금의 비, 1982 / 작품3 - 천경자, 길례 언니, 1982 / 작품4 - 천경자, 막은 내리고, 1989.
여인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여성만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을 뜻해요. 즉 자신에 대한 사랑과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의미해요. 그런 이유로 여성 예술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도구로 긴 머리카락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긴 목은 내면의 고독과 높은 품격을 의미해요.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노천명의 '사슴'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천 화백은 예술가는 숙명적으로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려면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믿었어요. 여인의 유난히 긴 머리카락과 긴 목은 고귀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며 스스로 고독한 삶을 선택한 예술가의 심정이 담겨 있답니다.
이번에는 작품 4에 나오는 여인의 눈을 살펴보세요. 노란 화관을 쓰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은 남태평양 타히티 섬 원주민입니다. 두 여인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인데 눈동자는 황금색이네요.
천 화백의 그림에 등장한 여인은 대부분 진한 눈화장을 한 데다 황금빛 눈동자를 가졌어요. 천 화백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나는 여인의 눈동자에 진짜 금칠을 한다. 금가루를 섞어 노란 눈동자를 그리면 더욱 강렬한 빛을 내면서 슬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황금색 눈동자는 여인들을 조용하고도 외롭게 보이게 하네요.
끝으로 천 화백의 여인상에 등장한 여인들은 얼굴이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많은 여인을 그렸지만 결국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는 뜻이지요. 그 한 사람은 천 화백을 말하는 거고요.
▲ 작품5 -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그 근거로 작품 5를 보세요. 천 화백이 53세 때 자신의 22세 때를 되돌아보며 그린 자화상이에요. 앞서 감상한 작품들의 주인공과 많이 닮지 않았나요? 꽃뱀으로 머리를 장식한 점만 다르지요. 알록달록한 빛깔을 가진 꽃뱀은 그녀의 자아를 상징해요. 여기서 꽃뱀은 이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존재예요. 우리는 뱀의 아름다운 무늬에 매혹당하면서도, 징그러운 뱀이라는 혐오스러운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니까요. 천 화백이 강렬한 유혹의 대상이면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한 꽃뱀을 자신에 비유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자신이 싫고 미워지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끔 찾아오기도 하니까요.
러시아 소설가 톨스토이는 "예술은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그들이 자신과 동일한 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천 화백의 여인상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녀 자신의 감정을 우리도 함께 느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이명옥·사비나 미술관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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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미인도 僞作 논란 당시 수사 검사 위작 진술 사실로 보여
다시 불붙은 '미인도' 僞作 논란…
당시 수사 검사 "위작 진술, 사실로 보여"
입력 : 2015.10.30 03:08
-위조범 주장 권춘식 인터뷰
"틀림없이 내가 그린 그림
천 화백, 金粉 쓴 곳에 난 노란 물감으로 채색… 나비는 그림 '고'서 베껴"
'미인도' 위작을 진술한 권춘식씨.
'미인도' 위작을 진술한 권춘식씨.
천경자 화백 별세 소식이 알려지면서 '미인도' 위작(僞作) 논란이 다시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1999년 "내가 미인도를 그렸다"고 진술했던 권춘식(68)씨가 29일
"틀림없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
1999년 권씨의 고미술품 위작 사건을 수사한 검사였던 최순용 변호사도 이날 전화 통화에서 "위조해 놓고 안 했다는 사람은 있어도 진짜라는 그림에 위조했다는 사람은 없다.
(검찰 조사 당시)
입력 : 2015.10.30
공소시효도 지난 사건에 대해 본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던 걸 보면 사실인 것 같다"고 말해 권씨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 권씨는 "천 화백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그림을 관두고 도망가다시피 한 천 화백에게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었다"며
"이렇게라도 밝혀 천 화백이 마음 편히 눈감으셨으면 한다"고 했다.
'미인도' 사건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 화백의 여인 그림에 대해
작가가 위작 의혹을 제기했지만 화랑협회 감정평가단이 '진짜'라고 최종 판정한 사건이다.
당시 천 화백은 "내 자식을 몰라보겠느냐"며 절필을 선언했다.
권씨는 1999년 고서화 위조 혐의로 구속됐을 당시 미인도를 그렸다고 진술했고
일부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조범의 말을 믿느냐"며 미인도가 진짜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 말 관훈동 13평 한옥에서 어렵게 살고 있을 때 알고 지내던 화상이 선물용으로 쓸 거라며 부탁해 달력에 있는 천 화백 그림 여러 개를 여기저기 조합해 그림 3점을 그려줬다.
그 후 다른 화상이 부탁해 천 화백 그림을 또 1점 그렸다"고 했다.
권씨는 자신이 그림을 그렸다는 증거를 조목조목 댔다.
"천 화백은 눈동자에 금분(金粉)을 쓰는데 나는 싼 노란 물감으로 채색했다.
얼굴의 음영도 내가 그린 건 딱딱하다.
머리카락도 뭉뚱그려서 그렸다. 나비는 천 화백의 다른 그림('고'·1974년작)을 보고 따서
그렸다"고 했다.
그는 "1999년 청전 이상범 그림을 위조해 검찰 조사를 받을 때 천 화백 그림을 내가 그렸다고 진술서를 써서 제출했는데 다음 날 다른 조사관이 와서 '네' '아니요'라고만 답하라고
했다. 제대로 사실을 전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 언론에 그의 주장이 실렸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인도'를 소장한 것은 1980년인데 권씨가 그림을 그린 시기가 1984년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주장은 신빙성이 낮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구치소에서 한 주간지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정확한 제작 연도가 기억나지 않아 대충 말했더니 기자가 1984년 제작이라고 썼다"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3년 8월 천 화백 큰딸 이혜선씨 요청에 따라 '미인도'를 미술관 홈페이지의 소장 작품 사진에서 제외했다"며 "'미인도'를 보유하고 있으나 위작 여부에 대해선 입장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