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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생명외경의 서정성과 화해의 시학
-장성자의 따뜻한 감성과 응시의 파상
엄창섭(관동대 교수·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1. 시적 감응(感應)과 시인의 고뇌
대니엘 고들립이 자폐증에 시달리는 『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네모나게 태어나서 둥글게 죽는다.”라고 기술하였듯,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허락 받은 특이하고도 강한 개성(個性)을 지니고 살아간다. 혹여 자기모순, 자기변명일 수도 있지만, 타인이 자신의 사고를 주장하면 편견을 지니고 ‘완고한 것’으로 지적하면서도 자신의 아집을 강조하는 처지에서는 철저하게 자기합리화로 일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인간 관계를 형성하려면, 필연적으로 부딪히고, 깨어지고 또 부서지면서도 물의 생리를 닮은 낮은 곳에 처하는 삶의 지혜를 체득하여야 한다. 이처럼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변모(變貌)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멋진 행위이며, 생명을 허락한 신에게 감사할 일이다. 지식·정보를 공유해야 할 시간대에 생명외경(生命畏敬)의 삶을 향유하는 현대인들에게 후기산업사회의 시간 개념은 형상을 달리 한다. “21세기 문화(수출)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공간에 몸담고 있는 현대인들이 다문화의 충격에서 일탈하기 위해서는 시적 상상력에 대한 깊은 인식이 필요하다.
이 같은 시간대에 폴 발레리가 추구한 시적 기법을 충직하게 효용 화하는 행보(行步)로, 지극히 창의적인 예술작업을 통해 항상 고뇌하던 서송(西松) 장성자 시인이 『별의 안부』(亞松출판, 2009)를 간행하여 우리 시단에 놀랍게도 소통의 도구를 매개로 잔잔한 감동의 파상(波狀)을 교신하고 있다. 그는 <1부 아침, 2부 갈매기, 3부 향기, 4부 꽃피리, 5부 번역시>로 구성된 시집의 책머리에서 천상적인 빛(아침)과 새(갈매기), 그리고 식물성인 풀꽃(향기와 꽃피리)을 즉물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모성적인 음성으로 “잔잔한 바다를 순항해온 삶속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의 사랑을 받아왔기에/ 포근한 정들이 풀벌레의 웃음처럼 곰실댄다.// 밤하늘의 별들처럼 조용히 반짝이는 사연들을/ 한줄 씩 엮은 시집 <별의 안부>를 내놓는다.//...줄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라고 올곧게 천명하였다. <시적 감응과 시인의 고뇌>의 기술에 앞서 존 홀 휠록이 “의식은 거대한 존재의 풍경을 내다보는 창이며, 외부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진동과 손의 감촉, 그리고 별빛을 받아들이는 안테나와 같다.”라고 언급하였듯이 매순간 시적 상상력을 확대하는 『별의 안부』에서, “별은 안부를 묻는 화자와 동일화한 자의식으로 수용되고, 마침내 이 동일성은 그리움과 종교적 대상의 층위로 변형된다. 문학에서 별의 상징성은 다양한 의미로도 확장되지만, 일반적으로 “별=절대적 미=어머니=이상·순수=환상(상상의 세계)” 등으로 해석되며, 또 시학에서는 “시심(詩心), 순수, 용기, 영원성, 희망, 빛, 유구한 정신, 불변의 가치, 이념” 등으로 상용된다. 한편, 항해하는 선원들에게는 ‘길잡이, 구원자’와 동일시 되기도 하며 ‘영혼을 지닌 생명체’로 풀이된다. 마리아 릴케가 “별이 없는 하늘, 꽃이 없는 지구는 암흑”으로 인식한 것처럼 별의 상징성은 그 의미가 다양하다.
홍윤기는 시집의 [작품 해설]-「탁월한 릴리시즘의 뉘앙스와 역사적 통찰력」에서 “시인은 크게 두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천품(天稟)을 타고나서 노력하여 대성하는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천품보다는 의욕에서 출발하여 열심히 시를 쓰는 경우이다. 프랑스문학과 예술에 심취하였고 오랜 세월을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현재도 해마다 장기간 프랑스에 건너가 체재하고 있는 장성자 시인은 자연스럽게 프랑스 시문학적 영향을 받으며 후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프랑스 기행시편들은 전혀 무리가 없이 감각적으로 그 터치가 매우 자연스럽다. 소녀시절부터 프랑스에 오래 살지 않고는 기질적으로도 그런 프랑스적인 발상이 메타포 되어 시적으로 형상화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라며 다행스럽게도 따뜻한 격려의 박수에 인색하지 않았다.
이 같은 정황을 고려할 때, 비열한 이기주의가 팽배한 지식·정보화 사회는 역사인식과 안목의 확장이 요청된다. 먼저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인 장성자 시인은, 자신의 모교 효성대학교에 출강(佛語)하면서 계간 『아세아문예』로 등단하였다. 현재 현대시문학연구소 이사, 아송문학회 부회장, 아세아문예기획위원장 등을 담당하며 삶의 일상에서 감동을 회복시키는 감성적 존재이다. 특히 『별의 안부』는 현대시의 생산을 위한 “성공적인 미래 전략(blue ocean strategy)”과 그 맥을 함께 하는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 까닭은 국가나 기업, 그리고 개인은 후기산업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업문화(목적의식)와 미래상품의 개발에 동력이 되는 시적 상상력을 확장해 나가야 할뿐더러, 모국어의 속살을 소통의 기호로 감동을 회복하고 국가의 기강이 뿌리 채 흔들리는 현상에서 역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말의 덩어리로 사회적 공유물’인 문학의 개념에 대해 M.H. 에이브럼즈는 희랍시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유럽의 근대문학사에 이르기까지, 산재해 있는 다양한 이론들을 체계화 하여 문학의 본질에 관해 나름대로 기술하였다. 한편, 시드니가 ‘시는 말하는 그림이며, 가르침과 즐거움을 주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라고 역설한 바의 진의(眞意)는 청중(독자)에게 시문학은 그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소수의 인문학자들이 표현인문학을 주장하지만, 시 창작의 실제와 이론에 관심을 보이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작은 일깨움을 안겨주려는 극소수의 창조자로서의 한결 같은 열망은, 이질감을 공감케 하여 이중적 거리의 틈새를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까닭에 시 창작에 있어 주제의 선명성을 확증 짓기 위한 현대시의 창작을 위한 다양한 시적 이론이 실험되는 우리 시단의 토양에서 <생명외경의 서정성과 화해의 시학>과 같은 일련의 행위는, 시의 모형인 미적주권이 확립된 서정시의 틀 위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시 창작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에 해당한고 할 것이다. 이 같은 현상에서 그나마 작은 인자(因子)로서의 역할 론을 담당하는 ‘장성자 시인의 시 읽기’는 다이돌핀(dydorphin)을 생산하는 감미롭고 행복한 작업에 해당한다.
2. 순백의 언어와 감성의 시학
폴 발레리(1871~1945)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설』(1895)에서 “시는 우선 빼어난 천품을 바탕으로 사유의 깊이를 음악적, 건축적 해조(諧調)를 이루어야 한다.”고 기술한 바 있듯이 그 어느 시간대보다 순수 서정시를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대다수 시인들의 치러야 할 열병이지만, 그 같은 고뇌와 시련 속에서도 ‘극소수의 창조자’로서의 시대적 역할과 소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보다 생명적이되 푸른 식물성 언어로 정신적 기후를 따뜻하게 조성시켜 예술적이되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이 땅의 독자들은 기억 흔적에 다음과 같은 배경 지식(schema)을 담아두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이 ‘파괴와 폭발의 전장에 던져진 존재’로서 소중한 삶을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과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시 쓰기의 물꼬를 트고, <순백의 언어와 감성의 시학>으로 시의 종자를 발아시키는 주의집중은 필수적이다.
피라밋 돌산 머리 드높이 올라앉은/ 정반달의 웃음소리 낭랑하게/ 하늘과 바다 감청색으로 곱게 물들이 고/ 산도 깊숙이 발 담군 지중해 바다 향해/ 마구 달려가고 있는 커다란 별 하나/ 이 밤 달마저 바다에 풍덩 잠그고/ 너희들 무슨 재미 소곤거리느냐/ 지구 저 반대쪽에서 바람 몰려올 때/ 안부의 목소리 따사롭 게 내 가슴 적시고.//
-<별의 안부-그리스 시프노스 섬 여행길에> 전문
인용한 기행 시는 공감각적인 시적 형식미가 가미되고 이국적인 센티멘털이 고국에 대한 정한과 맞물려 감각적 이미지가 깔끔하게 처리된 포스트 모더니즘적 색채가 돋보이는 그의 표제 시로 놀랍게도 새로운 서정시의 의미 재현은 물론, 그 향방을 가름 하는 시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뛸러리* 공원 회전목마에서/ 세 살 박이 “클레아”*가 나를 향해 돌아가며/ 손을 자꾸 흔든다 작은 단풍 잎을 자꾸 날린다/ 아가들의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 어린 우주가 퍼져/ 답답한 세상의 새 문을 열어주며/ 그림엽서를 띄워 준다/ 만국기 휘날리는 아슴한 기억을 더듬는 빅람회장에서/ 일곱 살 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장 아장 걸어와/ 오늘은 “클레아”의 자그만 손잡네//
-<마네쥬>에서
위의 시편 <마네쥬>는 은유적 수사의 다채로움을 아포리즘의 우의적(寓意的) 표현기법으로 처리되고 있다. <마네쥬>-유원지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노는 손녀 “클레아”와 화자의 유년시절이 더블캐스트로 오버 랩 스크린 영상기법이 시적 기법으로 특이하게 다루어져 공감각적으로 처리되고, “오늘은 ‘클레아’의 자그만 손잡네” 마침내 따뜻한 감성이 투명한 눈물을 정감의 틈새로 반짝이게 하는 시적 효과의 가중성은 더욱 놀랍다. 특히 “금빛 몸매 / 뽐내는 화초붕어// 바람결처럼/ 물빛이 빨갛다// 살랑살랑/ 꼬리 춤 새의 화사함// 치맛자락 잡으려던/ 어제의 나를 잊었네(연못가에서)” 못가에서 물속의 화초붕어의 한가로움을 모성(母性)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시인의 눈길은 못내 자애로움을 안겨준다는, 김광한의 지적처럼 “금빛 붕어의 하늘거리는 지느러미의 섬세한 움직임을 통해 연상되는 무희의 부채춤은 분명 아름다운 영상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것은 소멸된다.”는 라아킨의 시론을 떠올리면, 한순간 연민의 정이 살아나 가슴에 통증을 안겨주는 이치를 결코 털어버릴 수 없다. 때문에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장성자라는 개체가 비로소 한 사람의 시인이 되어서 비로소 자아를 발견하는 작업, 즉 삶의 존재(to be)로서 내면인식을 통해 “남을 위한 삶에서부터 나의 본질을 찾는 삶은, 시라는 매개체가 없으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 제기는 거부감 없이 긍정적으로 수용될 것이다.
비록 공허한 자위나 도로(徒勞)일 수도 있지만, 오랜 날 평자 역시 시적 토양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과 모순에 이끌려 늘 마음이 편치는 못하였다. 그것은 21세기의 화두(話頭)가 ‘공동체 의식(inter-being)'에서 비롯된 '보다 천천히 라는 미끄러짐의 시학'에 근거하여 정신적으로 피폐한 이 시대의 시인이라면, 주위의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등을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시인의 역할을 절감한 탓이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것은 평자의 지론이지만, 미래사회를 열어가야 할 시인들은 인간소외의 고통을 겪는 이웃을 향해 관심을 지니고 애정을 쏟아야 한다.
모름지기 문화의 지역구심주의의 시각에서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산촌과 살을 부비고 살아가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 문인들은, 동시대에 몸담고 있는 불행한 이웃에 대해 한결같이 사랑의 불을 짓 피는 필연적인 운명체이어야 한다. 특히 민족의 혼이요, 문화인 한글과 국사를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안타까운 실사회에서, 장성자 시인이 [일본속의 백제] 역사기행을 통해 형상화 한 감명 깊은 기행시편은 우리 역사의 정체성(Identity)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조용한 항변’으로 가슴 뭉클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에 더없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거문고 현의 그윽한 떨림일세/ 수려한 녹나무(樟木) 자태가 일어서/돌과 쇠로 승화하여 역사의 장(章)을 / 징소리로 우리 가슴 울리고 있네//
백제(百濟)의 오묘한 그 솜씨는/ 나라(奈良) 땅에 백제겨레 숨결로 이어져/ 일본이 세계에 내보이는 문화 재 되었거니/...생 략.../ 오늘, 백제관음상의 광채를 바르게 응시하는 이 누구이랴//
-<구다라관음상의 광채>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국보 불상은, 백제가 7세기 초에 나라(奈良)의 일본국에 보내준 녹나무 불상인 구다라관음(百濟觀音)이다. 이 불상은 현재 일본의 호류지(法隆寺) 경내의 구다라관음당 내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 관광을 맹목적으로 다녀온 이 땅의 지식인들이 외면한 겨레의 혼 불을 강도 높게 “오늘, 백제관음상의 광채를 바르게 응시하는 이 누구이랴”고 ‘백제겨레의 숨결’을 우리의 역사요, 혼의 표징인 “거문고 현과 징소리” 담아 각인시키며 크게 질책할 줄 아는 장성자 시인의 결의에 찬 시적 형상은, 시격의 담백함을 새삼 돋보이게 하는 골격이며 큰 틀에 해당한다.
순간 뜨거운 불덩어리가 내 가슴을 친다/ 한국 국어학의 태두 이응백 박사도 그 날 칭송하시길/ “일본 천왕을 신(神)이라고 불렀지만, 우에다 박사야말로/ 일본 역사학의 신(神)“이라고//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님 -박사댁에서 강의를 듣고>에서
인용한 시는 격조 높게도 장성자 시인이,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하며 학문적으로 백제의 눈부신 역사를 예리하게 실증하는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댁에서 강의를 듣고 그 당시의 피가 뜨거운 감동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날의 자리에는 화자와 함께 홍윤기, 이응백을 비롯한 몇 사람의 시인들도 동석하였다.(SBS-TV 박종필 PD 촬영, 2007.5.4). “일본 제30대 비타쓰 천왕은 백제 왕족입니다”고/ 순간 뜨거운 불덩어리가 내 가슴을 친다” 애써 일본 속의 백제사를 강조하지 아니하더라도 그 자신의 이 같은 <기행시편들>이 한국현대 시단에 새삼 관심을 일깨우는 문화콘텐츠로서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을 칠순(七旬)을 훌쩍 넘긴 시간대에도 힘겹게 수행하고 있는 점은 자성의 시간을 상실하고 있는 절명의 시간대에 처한 시인의 항변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바로 왕으로부터 400년간 지배를 믿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백성에게 임하는 여호와의 저주를 사하게 하여 줄 것을 목숨을 걸고 신 앞에 강청(强請)하며 눈물겹게 호소를 한다.(출애굽기 32:31-32) 이와 같이 21세기 문화의 지역구심주의에 대한 정체성은 자긍심의 확립이기에 복효근의 시적 변명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절실히 공감된다. 폴 틸리히는 <현대의 특징>을 ‘공동의 세계가 무너져 아무 것도 믿을 것이 없는 현대의 불확실성’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이 점에 비추어 장성자의 시편 <꽃피리>는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바로 이것은 직면하는 삶의 현상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되, ‘진분홍 할머니 웃음과 모시옷의 하얀 얼굴’을 대비시켜 ‘달랑달랑 매달린’ 초조·불안 의식을 끝내는 풍경까지도 사랑할밖에 없음을 시적기법으로 각인시켜준다.
졸고 앉아있는 한낮/ 샹땅브르 돌담 곁에/ 할머니의 꽃 분꽃 한 대//
엷은 미소를 담은/ 진분홍 할머니 웃음과/ 모시옷의 하얀 얼굴//
꽃 술 따서/ 만들어주시던 꽃 피리/ 어리광 떠는 소리가 귀엽다//
아직도 돌담 어귀에/ 달랑달랑 매달린 채로/ 한낮의 고요를 흔들고 있다//
-<꽃피리> 전문
이처럼 한낮으로 침잠(沈潛)된 시간은, 오수(午睡) 뒤의 고요이며 안식의 흔적이다. 한순간 구도 화 된 풍경(즉물 현상)이 정적(靜寂)의 파상으로 ‘한낮의 고요’를 흔드는 시간, 그 자신이 숨죽이며 <꽃피리>를 통해 사랑의 기쁨을 되살리게 하는 미적주권의 확립은 시적 역할에 해당된다. 모름지기 어려움에 처한 인간소외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삶의 소망이며 용기의 표징인 변주의 통로인 감미로운 예술작품을 통한 다이돌핀의 생성이다. 이것은 우리네 삶이 공존하는 공간과 시간대에서 수고와 노력을 요하는 정성스러운 결과물이다. 까닭에 생명의 촛불이 연소되기 전에 보다 인간과 진리,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열정을 쏟던 젊은 날의 그 순수한 감동이 항시 심장 깊이 내재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중한 일상에서 지극히 감동을 눈물겹게 파상적으로 회복시키려는 심성이 선한 이들에게 허락된 삶은, 절박한 기도와 꿈을 추구하는 일관된 노력이다.
나 파블로 피카소/ 당신의 눈 속에서 나를 건저/ 또 하나의 나 살아 오네/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 터 져도/ 아직 나붓이 오므리고 있는 장미꽃이여/ 눈감고 천천히 천천히 입술 갖다 대고 싶고나/ 화성(畵聖) 이라 이름 붙은 때론 주책바가지/ 나 파블로 피카소는/ 당신 품에 안기네//
-<도라 마알>(Dora Maar)에서
그의 관조적 사유와 느낌이 해맑은 에스프리(espri)가 영롱한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빚어진 ‘산수유는 장미꽃’으로 변형되고 마침내 깔끔한 서정성으로 정수(精髓)되어 도도한 성채(城砦)로 정제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추상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그의 회화를 시적 대상으로 하여 고도의 수사적 처리를 구사한 시편 <도라 마알>(Dora Maar)은, 혹자의 지적처럼 ‘빼어난 시적 테크닉의 제시임’에 틀림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다양한 생산물이 어지럽게 양산되는 우리 시의 풍토에서 그의 시 <비 오던 날> 또한 “몽말트르 언덕에서/ 구레나룻 화가가 그려준/ 스무 살의 초상화// 이슬비 손잡고 같이 걷던/ 렘불란트의 미루나무길/ 먼 산 소나무엔/ 아직 겨울 매달려 있는데// 그날의 이슬비가 여기까지 따라와/ 머잖아 연두빛 아지랑이 피우겠지/”에서 몽말트르 언덕의 나라타쥬(회상)를 응축시켜 긴장미를 다시금 일깨워주며 서정시의 절창(絶唱)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순수 서정성을 거부감 없이 빚어내어 서정미가 다시금 발현되는 현대시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아직 겨울이 매달려 있는데→머잖아 연두빛 아지랑이 피우겠지’라는 시적 수사는 침잠과 단절의 시간대에서도 소생과 부활의 생명을 단적으로 소망하는 그만의 시정신이, 생명의 이미지(image, 心象)로 이행되어 눈부신 꽃을 개화시키는 비법과 접목된 점이다.
3. 자의적 은폐와 목가적 서정
인간은 어떤 운명의 별 아래 태어나서 저마다 인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네 짧은 생애를 통해 중요한 것은 ‘길은 가까이 있다.’는 맹자의 가르침처럼 자기의 분수에 만족할 줄 아는 평범한 삶 속에서 진리의 소중함을 깨닫는 존재로 수분(守分)의 철학을 확인하여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서산대사의 “눈 덮인 들판 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지적은 교시적 의미를 지닌다. 좋은 시인이란, 꼬인 전통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항시 정신기후를 따뜻하고 풍요롭게 조성하는 존재로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며 어느 만큼의 독자에게도 만족을 주는 비공인 된 입법자이다. 차지에 코카콜라의 회장 더글러스 테프트가 <인생의 의미>에서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그 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하는 여행이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신비이며,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이다.”라는 역설도 기억 흔적으로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다.
표현론자들은 문학의 개념을 작가의 정신적인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심리적 충동이나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일상에서 감동을 회복한다는 것은 보다 홀로 있기라는 사유(思惟)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행위이다. 따라서 “마음에 묻은 금가루도 닦지 않으면, 먼지가 된다.”라는 성철 스님의 법어도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한다. 이점에 있어 칼릴 지브란이 『예언자』에서 “서로 사랑하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 그보다는 사랑이 그대들 두 영혼의 기슭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는 서있지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지적은 인식의 망을 확장시켜준다.
새로운 형사(形似)와 건강한 시적 이미지의 작업은 그의 시 <Elle>(엘)이나 <도빌 해변에서> 확인된다. 비교적 페로디(perody)와 패스티쉬(pastiche)의 시적 수사에 익숙한 편은 아니나, 감정이 절제된 이 시편들은 그에게 있어 감동적인 절창에 해당한다. “얼굴 처드는 하얀 파크랫트/ 푸른 날개 날개/ 해 따라 오른다<Elle>(엘)”라는 시적 형상화는 릴리시즘(lyricism)의 정조(情調)를 수용하고 있어 서정성이 빛난다. 뿐만 아니라, “은빛 거문고 줄/ 맑게 튕기는 소리 들린다/...생략.../ 푸른 희망의 큰 바다는/ 넘치는 충만 뿐/ 썰물이란 없다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살에 퉁긴다.(도빌 해변에서)”에서 확인되는 그의 시정신은 이처럼 지극히 생명적이고 건강하다.
기실 장성자 시인의 일상적 삶에 있어 여행이란, 충만한 삶의 표징으로 인체 내의 엔돌핀을 생성하는 경계를 넘어 감미로운 예술작품을 대할 때 쏟아내는 다이돌핀에 해당된다. 이국의 땅에서 일몰의 황홀함을 체득하며, “산더미 채소를 모두 팔고/ 조랑말 달구지 재촉하는/ 행상들도 곡예를 하듯/ 도밍고의 저녁을 닫는다(산토도밍고의 저녁)”라는 한 폭의 정신풍경화를 통해 비록 공간대의 낯 설움, 즉 이질감 속에서도 시간 개념의 동질성을 형이상학적인 이미지와 그 궤를 함께 하는 점을 새삼스럽게 주지시켜 공감하게 하려는 그만의 열중은 실로 눈물겨운 시적 행위에 속한다.
이 땅의 시인 중에서 그 나름의 시혼을 눈부시게 꽃 피우며, 생명외경을 담백하게 노래한 시편을 정갈한 아침 식탁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평안임에 틀림이 없다. 상처 깊은 영혼을 치유하기 곤핍한 우리의 삶 속에서 세상살이의 안부(安否)를 물으며 내면인식을 끄집어내어 삶의 무늬와 무게를 명증하고 일상에서 절감되는 ‘그리움’을 통해 자연의 숨소리를 체득하는 정신작업은,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에 견주어진다. 하나 같이 단절된 도시 공간, 좌절과 회색의 시간대에 몸담으면서도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해 영혼의 닻줄을 당기며 생산한 그의 시편은 신에게 드리는 절절한 기도문처럼 외경스러움이 묻어난다. 상실된 자아의 회복을 위한 그만의 고독한 작업은 언어공해가 심각한 사회현상에서 서정성의 회복과 미적 주권에 대한 가치 있는 식별력을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시적 형상화에 몰두하는 따뜻한 감성시학은 비로소 천상(天上)에 잇닿아 있는 장성자 시인의 시적 매력과 역동성으로 발현되어 생명력을 지닌다.
결론적으로 안이하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발목이 잡혀 언희(pun)에 익숙한 시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우리 문단에서, 혹여 음계가 엇박자일지라도 <자의적 은폐와 목가적 서정>으로 일상적 감동을 회복시키는 그 자신의 지난한 몸짓은 너무 가슴을 저리게 하여 참담하다. 기실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심장 깊이 소중한 삶을 예술처럼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 금속성 언어의 심각성을 식별하는 모국어의 속살에 대한 강직한 신념을 소유해야 한다. 모쪼록 체취와 느낌, 독자적 색깔이 묻어난 푸른 식물성 시어를 조탁하여 따뜻한 정신지리를 조성하여 시인으로서의 본래적 소임의 수행은 물론하고, 오로지 삶의 잠언(箴言)을 영원한 모성적이되 천상적인 선율로 변주(變奏)하여 지극히 선하고 온유한 품격의 장성자 시인만의 시적 토양 조성과 확장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실험정신을 조심스럽게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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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성잔미의 시평에서의 엄 교수님의 시평에 더욱 놀라우며 감사를 드립니다
시평의 오묘함속ㅇ에서 기쁨느껴 봅니다 감 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