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선교역사
II. 세계 선교역사의 파노라마
I. 선교역사
“역사에 나타난 실수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그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1. 선교역사를 왜 연구하는가? (폴 피어슨. 2009)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 정체성 확립
역사 연구는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성경을 어떻게 보는지 바로 알게 한다. 또한 역사는 우리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영적 후사임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선지자와 신약교회의 계승자이며, 우리는 중세교회,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 복음적 부흥운동의 계승자들이다. 역사 연구는 기독교 선교를 태동시킨 부흥운동들이 우리 신앙의 뿌리를 형성시킨다. 또한 역사의 특정 운동은 무언가에 저항하는 반항운동으로 시작된다. 역사상 교회가 성경적 기준을 떠나 왜곡되고 타락하였을 때 성경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저항운동으로 시작된다(주: 칼빈주의는 타락한 중세교회에 반항하였다. 오순절 운동은 칼빈주의의 성령론이 약함과 고등교육을 강조하는데서 반항하여 생겨났다. 감리교운동은 빈곤층에서 이루어졌고 평신도사역을 고취하는데 생겨났다)
2) 역사적 안목
역사는 안목을 제공한다. 역사에 나타난 선교운동의 역할을 분석해 볼 때, 하나님께서 오늘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부르실 때, 구체적인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부르신다. 언제나 변하는 세상 속에서, 육체적으로, 영적, 심리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르신다. 상황과 역사가 없이 환상이나 이상 속에서의 부르심은 없다.
(1) 복음이 왜 다른 곳으로 전해지지 않고 특정 지역에 사는 특정 인간집단에게 전해졌는가?
(2) 복음전달에 있어서 어떤 요소들이 작용하였는가?
(3)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집단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복음에 적대적이었는가? 아니면 복음전도자들이 그들을 지나치고 말았는가?
3) 역사적 통찰력
역사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우리가 간혹 문제에 빠져 당황할 때 역사는 해답을 제시한다. 역사를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에 강하게 저항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는 극한 어려움 속에서 놀랍게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은 인구 이동이 잦은 세상이다.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현실은 비극이다. 하나님이 비극을 의도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극을 자주 사용하신다. 민족이동, 유배, 핍박, 도시문제들이 있는데 이런 문제 상황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통찰력을 제공한다.
4) 인식적 도구
역사는 이슈를 인식하는 도구를 제공한다. 새롭게 일어나는 선교운동 전체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역을 분석하는 도구를 제공한다. 역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하고 새로운 선교운동 가운데 성령께서 그 운동을 통하여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창의성을 나타내고 계신지 모른다. 역사는 그런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들로 가득하다.
C&MA(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는 장로교 목사인 심슨(Simpson)이 창설했다. 그는 부흥과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과 선교를 주장하는 세력과 함께 새로운 교단을 탄생시켰다. 예수 전도단(Youth with a Mission. YWMA)은 하나님의 성회 출신의 로렌 커밍햄이 새로운 선교방법과 훈련방법으로 시작하였다.
어느 단체의 총제가 1934년에 “이제 선교단체의 숫자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선교단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한지 3주 후 윌리엄 카메론 타운젠트(Townsend)는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어 성경판매를 시작했다. 현지어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타운젠트에게 현지인 가운데 반수 이상이 스페인어 성경을 읽지 못한다고 말해 주었다. 충격을 받은 카운젠트는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를 조직하였다. 성경번역선교회는 선교운동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역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하고 새로운 선교운동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령께서 그 운동을 통하여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창의성을 나타내고 계신지 모른다. 역사는 그런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들로 가득하다.
5) 선교적 이슈
역사는 선교적 이슈들을 제공한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지만 역사에 등장하는 이슈들은 반복된다. 케냐 기독교인들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서양 양장을 해야 하는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꼭 개명을 해야 하는가? 초기 스코틀랜드와 영국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의 이름을 유럽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복음전도를 위해서 문화적 이슈들을 지혜롭게 잘 다루어야 한다. 복음 전도를 위해서 선교사가 가진 문화를 어느 정도 사용할 것인가? 현지 교회를 조직할 때 복음을 수용한 현지 문화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슈는 반복된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다. 할례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유대인들이 주장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거부하고 유대인이 되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방인들은 그들이 가진 문화적 가치관을 유지하면서도 유대인 메시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잘못된 도덕적인 행위들은 금하였다. 그들의 성적 부도덕은 거부해야만 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다룬 선교적 이슈들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합한 지침이 된다. 오늘날 미얀마에서 예배드릴 때 미국이나 한국에서 하는 식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이런 이슈들은 새로운 문화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할 때 반복해서 다루어야만 한다.
6) 개방적 태도
역사는 새로운 사건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갖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창조성은 고갈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것은 아직도 수없이 많이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만든 선교기관과 조직이 최고가 아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제일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든 선교조직이나 기관이 최고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선교운동이 주된 선교운동이 될 수 있다. 역사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선교단체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교단 정치의 변두리에 있는 선교단체들이 생겨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계속하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유명했던 선교단체는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선교단체나 교회가 생겨나는 것보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2. 역사란 무엇인가?(폴 피어슨. 2009)
역사는 사건보고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오늘 우리는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이 말은 특정 사건 때문에 또는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역사적 사건으로 보고되지 않았던 사건들은 그보다 덜 중요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건을 선택한다. 역사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은 선택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건은 남겨둔다. 사건을 선택하는 판단기준은 따로 없다. 역사가의 몫이다. 나의 다리가 부러진 것은 일간지에 보고가 안 되지만 대통령의 다리가 부러진 것은 보고된다. 역사는 사건 보도임과 동시에 사건선택과 연관되어 있다. 역사가는 특정사건을 선택하고 다른 사건은 남겨둠으로써 사건에 대한 해석을 이미 내린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어떤 사건이 더 중요한지 판단하고 선택한 것이다.
역사는 사건을 해석한다. 사건해석은 특정사건이 다른 사람들과 갖는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건의 결과로 일어날 일련의 다른 사건들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수도 맴피스에서 발간된 기원전 1300년 6월 6일자 신문 기사를 스크랩한 것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기자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어제 홍해 바다가 갑자기 범람하여 수많은 바로의 군대가 물에 빠져 숨졌다. 바로 람세스 2세는 도망치는 불법 외국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국경을 넘어와 고센 지방에 정착했으며 벽돌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황실 대변인은 홍해 바다의 갑작스런 범람은 얼마 전 나일강 계곡에서 일어난 자연재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자라면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별한 방법으로 개입하신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로 믿는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성령께서 사건에 대한 조명을 통하여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바울의 감옥행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적 목적을 성취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역사 속에서 구속사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사와 구속적 목적을 이해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 속에서 영감 있는 해석을 하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이다.
3. 선교역사 질문(폴 피어슨. 2009)
역사를 연구하면서 던지는 질문에 따라 연구를 통하여 무엇을 배울 것인지가 결정된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질문하는 습관은 연구의 수준을 높여 줄 것이다.
교회는 어느 곳에서 성장하고 있는가? 성장하는 교회는 유럽이나 북미에 있지 않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있다. 1900년 케냐 기독교인 숫자는 수 천 명에 불과하였지만 지금은 66%인 8천만에서 1억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중국도 현재 1억 명의 그리스도인 인구가 있다. 지구상의 어느 교회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하나님의 교회다.
우리가 가진 편견은 없는가? 누구나 편견을 가지고 산다. 사건을 기록하는 역사가에게도 편견은 있다. 역사가가 가진 편견은 사건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979년에 이란혁명이 일어났다. 수도 테헤란에서 미국인들이 인질로 잡혔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만약 소련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기술한다면 소련 정부입장에서 쓸 것이다. 그러나 이란 학생이라면 그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될 것이다. 미국 정부는 또 다를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해서 세속적인 휴머니스트들은 종교개혁운동을 사회과학적 용어로 기술 할 것이다. 제 2바티칸에서는 반란으로 볼 것이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운동으로 볼 것이다. 무슬림이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각자의 신념이 있다. 기독교 역사가들의 신념은 성경이 진리라는 것과 교회는 선교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전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성경말씀과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신학적 교리가 진리라는 확신이 있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일하고 계신다.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부르시고, 역사 속에서 그분을 섬기게 하신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하늘에 승천하셨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신다. 교회는 선교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선교해야 한다. 인간과 교회의 유일한 사명은 선교이다. 존 맥케이 교수는 “선교하지 않은 교회는 진짜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인식해야 한다.
4. 교회사와 선교역사의 차이점(이현모. 2003)
교회사는 커다란 단위로서의 기독교회가 교리적, 조직적으로 발전, 성장, 쇠퇴하는 것을 기술하는 것이다. 기독교회의 핵심부의 발전과 성장을 중심으로 기술하게 되므로 초기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출발하지만 이후로는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의 역사를 기술하게 되고 18-19세기 이후에는 미국교회들의 역사를 기술하게 된다.
선교역사는 교리적, 조직적 발전보다는 지리적 팽창을 중심으로 역사를 평가 서술하게 된다. 교리적 발전을 이룬 사건보다는 지리적 팽창을 가져오게 된 사건과 인물, 새로운 지역으로 교회가 전파되어지는 방법과 교회가 그 지역에 뿌리는 내리게 되는 전략 등에 주로 관심이 있다.
II. 세계 선교역사의 파노라마
(주: <퍼스펙티브스>에서 나눈 시대구분으로 정리하였다)
1. 선교역사의 다섯 시대
역사를 400년씩 5번으로 나누어 세계 선교역사를 기술한다. 이는 역사가 정확히 400년 주기로 나타났다는 의미보다는 역사의 전체를 기억하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구분한 것이다.
1) 제 1기 초대교회와 로마 선교 시대(AD 0-400년)
복음은 사회 계층 전반에 골고루 침투했을 뿐 아니라 여러 무역로를 통해서 확산되어 나갔다. 초기에는 기독교가 민족주의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띠지 않은 종교였지만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됨으로 인해 로마를 적대시하는 나라들에서는 복음 진보가 둔화되었다. 만일 로마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AD 310-410년 기간 동안 복음 확장을 위해 자신들이 가진 재물의 힘을 조금만 더 사용했더라면 로마 사회의 운명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며, 기독교 복음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급속하게 발전되었을 것으로 본다.
역사상 기독교의 가장 눈부신 승리는 약 200년 만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정복한 일일 것이다. 이 시대의 초기 단계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바울을 통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와 여자, 그 누구라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속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헬라인이 할례를 받거나 유대인 절기나 성일이나 유대인들의 음식 규정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지만 바울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며, 새로운 문화권 속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파송교회가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그들의 입는 옷과 같은 옷을 입거나 그들의 모든 관습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헬라인들이 더는 유대 율법의 세세한 문화적 관습을 필수적인 의무로 지켜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대할 때 바울은 ‘모세의 율법 아래’ 계속 남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반면 모세의 율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할 때는 그들 각자가 처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역동적이며 온전히 성취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법’을 전파했다.
이 시기의 선교활동은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바울은 바리새인들이 사용하던 선교 팀 구조 안에서 일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을 파송(send out)했다기 보다는 전송(send off)했다. 바울의 모든 선교 팀은 지역 교회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은 비자발적으로 흩어져나갔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핍박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아리우스파도 핍박으로, 울필라스와 패트릭도 포로로 잡혀가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독교 전파는 로마 제국 무역로를 따라 이루어졌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선교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없다. 이는 복음 자체가 갖는 본래적 권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 켈트족의 문화적 인맥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그가 전한 복음은 순식간에 그들 친구들과 친척들, 상업적 접촉을 통해 서쪽의 먼 지역까지 전파되어 나갔다.
2) 제 2기 중세 초기 선교(AD 400-800년)
로마제국을 침공한 야만족들은 이후 로마인들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복음화 되었다. 이 시기 후반부에 최초의 수도회들이 설립되었다. 대부분 수도원 전통은 수도원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믿음을 유지하고 확장되었다. 이들 수도원 선교 공동체 출신으로는 켈트족 혹은 아일랜드족 순회수도사 선교사인 ‘페레그리니’(Peregrini)와 그 뒤를 이은 콜럼반(Columban), 보니페이스(Boniface), 패트릭(Patrick)등 유명한 앵글로 색슨족 선교사들이 있었다. 로크족, 비시고트족, 반달족, 앵글로색슨족 등과 같은 야만족들은 서유럽과 중부유럽 대부분을 침공했다. 로마는 제국을 절반이나 잃었지만 이 과정에서 야만족들은 기독교 신앙을 얻게 되었다. 게르만 야만족의 후예인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는 교육과 경제발전을 촉진시켜 지도자 없이 혼란에 빠진 유럽을 일시적으로 구해냈다. 샤를마뉴는 그 당시 수도원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유럽 전역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지켜 온 수도원 선교 센터들의 기능을 더 강화했다. 샤를마뉴가 기독교 신앙을 널리 확산시키기는 했지만 북쪽에서 그 나라를 공격해 온 바이킹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은 너무 미약했고 또한 때도 너무 늦었다.
3) 제 3기 중세 후기선교(AD 800-1200년)
복음은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기타 북유럽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교황 그레고리 7세(Gregory VII)에 의한 교회 개혁은 클루니(Cluny) 수도회, 시토(Cistercian) 수도회, 그리고 여러 연합 영성 운동들로 강화되었다. 다음 시대에서처럼 왜곡된 형태의 선교가 이루어졌다.
4) 제 4기 : 무슬림 선교?(AD 1200-1600년)과 로마 가톨릭 선교(1492~ 1793년)
일단 바이킹족이 ‘복음의 반격’에 항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자마자 그들은 역사상 가장 왜곡된 형태의 선교인 ‘십자군 전쟁’에 앞장서게 된다. 흔히 사라센으로 부르던 무슬렘들에게 기독교 복음의 축복을 확장하는 일을 시도했으나 영토를 파괴하고 정복적인 선교를 전개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본질상 선교적인 새로운 유형의 수도원주의가 생겨났다. 그 단적인 예가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탁발 전도가(Friars) 운동이었다. 하지만 순회전도자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때 페스트가 창궐했다. 특히 순회전도자들은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십자군 운동은 복음 진보를 가로막았다. 이 시대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꽃피는 시기였다. 종교개혁으로 기독교가 여러 지역에서 활발하게 성장함에 따라 종교개혁은 기독교 중심부를 철저하고도 극적으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수도원 형태의 선교구조가 확대되면서 사방 가톨릭교회는 해외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발전했다. 새로 탄생한 개신교회는 생존을 위해 신학적 교리를 재형성하는 일에 열중했는데 사실상 타민족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선교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5) 제 5기: 땅 끝까지 선교(AD 1600-2000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계속 확장되다가 1800년 경 나폴레옹이 유럽을 약탈하고 무신론, 이신론, 인본주의 등이 점차 인기를 얻으면서 주춤하게 된다. 이와 달리 개신교에서는 자발적으로 가는 유형의 선교운동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지구상 모든 지역으로 복음을 들고 나아갔다. 개신교 선교운동은 먼저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혹은 식민지 확장과 상관없이 해안 지대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내륙 지방에 두 번째 선교운동 물결이 밀려들었으며, 이들은 마침내 땅의 모든 종족에게 복음 전파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이 시기는 서구 문명의 모든 풍요로움과 타락함이 가장 극에 달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복을 나누지 않고 계속 갖고 있으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열방을 복 주시려는 목적의 성취를 위해 이전 다른 나라에게 행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물질적 복의 상당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으실까?’ 하는 것이다.
III. 세계 선교 역사의 내용
1. 제 1기 초대교회와 로마 선교 시대(AD 0-400년)의 주요 사건과 특징(이현모. 2003)
이 시기는 기독교가 공인되어진 31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 기독교 공인 이전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선교는 성부께서 시작하시고 성자에 의해서 기초가 마련되어지고 성령을 통하여 실현되어진다고 말하는데 초대교회 초기는 철저하게 성령께서 직접 선교를 실현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시기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복음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적은 무리의 제자들에게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명하신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위임이었다(주: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고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복이 되라’는 말씀이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이루어진 것과 같다. 초대교회는 이 불가능이 실현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 이 시기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준비가 있었다.
로마의 평화 시기(Pax Romana)였다. 로마 시대 이전의 중동 지역은 끊임없는 부족 간의 전쟁의 시기였다. 부족 간의 갈등시대에는 한 부족의 종교나 신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압적인 방법으로 전파된 종교는 그 지역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쉽게 종식되어 버리곤 하였다. 그러나 초기 선교가 이루어진 시기는 독특하게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천하 통일하므로 부족 간의 대립과 전쟁이 일시적으로 그친 로마의 평화시기였다. 이러한 시기가 아니었다면 기독교의 복음이 로마 각 지역으로 전파되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로마의 교통망이다. 로마는 제국을 형성할 때 각 지역마다 통상을 장려하고 로마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하여 도로를 건설하였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좁은 길들이지만 이천년 전의 기준으로는 간선 도로에 해당하는 도로들이 각 중심도시와 지역을 연결하게 되었다. 이 로마의 도로들은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언어의 통일이다. 로마 제국이 지배하게 되면서 일상 헬라어인 코이네 헬라어가 공식 언어로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어 지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고유 토착 언어가 있었지만 헬라어가 제국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어지는 일상어가 되어 있었다. 바울을 포함한 초기 사도들은 모든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기에 각 지역에 갈 때마다 그 지역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은 초기에 복음의 지리적 전파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유대인의 분산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시기에 바벨론은 각 민족들이 집결하여 민족주의적인 독립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정책적으로 민족들을 분산시켰다. 유대인들도 이에 따라 당시 제국 내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독특하게 이방민족과 혼혈되어지지 않고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집단거주 지역을 형성하고 회당 중심의 유대교를 발전시켜갔다. 이러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구약 성경을 믿었고 무엇보다도 메시아의 도래를 간구하고 있는 초기 복음 전파의 접촉점들이었다. 바울은 가는 곳 마다 먼저 이 유대인들을 접촉하여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였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사역을 하였다. 이러한 접촉점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 초기에 조직화되지 않았던 교회가 지리적으로 팽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적인 준비가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의 팽창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준비를 마치시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복음을 완성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고 대위임 명령을 주신 것이다.
(2) 성령께서 계획하시고 수행하시는 성령의 선교였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예비하신 이러한 과정을 따라가면서 초기 선교사로서의 훈련과 준비를 거쳐 가게 되었다. 이 기간에 오순절 사건이 있었다. 오순절에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다. 이 때 성령의 임함을 경험한 제자들이 나아가서 타문화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토착어로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게 된다. 이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던 사람들로서 이들에게 전해진 메시지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가 바로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선포였다. 그 증거로서 구약의 약속들과 부활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이를 이적적인 방법으로 각 토착어로 선포하였다. 이날 삼천 명의 사람들이 제자가 되었다. 이들이 모여들은 지역을 보면(행 2:9-11) 이는 로마 제국의 동편 절반에 해당하는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오순절에 회심하고 돌아가서 아마도 교회를 형성하는 핵이 된 듯하다. 로마 교회를 보아도 로마서를 기록할 때까지 어떤 사도도 방문한 적이 없지만 교회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오순절에 회심한 사람들이 돌아가서 세운 교회인 듯하다. 사도들의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성령께서는 회심이 준비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여 회심시키고 이들을 돌려보냄으로 각 지역에 교회 개척의 씨를 뿌려 놓으신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일어나 핍박으로 인한 제자들의 흩어짐이었다(행 8:1). 아직 제자들은 교회의 지리적 팽창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의 핍박을 이용하여 제자들을 흩으시고 이들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게 되었다(행 8:4). 이 핍박도 하나님께서 초기에 사용하신 하나의 방법이었다.
예루살렘 종교회의의 중요성이다. 성령은 바울을 사용하셔서 선교의 흐름이 이방인에게로 흘러가게 하셨다. 이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리게 하는 신학적 기초가 바로 예루살렘 종교회의다.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이 알려지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곧 이어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신학적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반발을 일으킨 사람들을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행 15:5)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율법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 다는 것에 동의 할 수 없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가운데 들어가는 표시이므로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한 구속의 언약에도 포함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한 것은 이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대단한 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최초의 종교회의가 열리게 된다(행 15장).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서 성령께서 미리 준비시킨 베드로의 중재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의 중재로 이방인들이 할례 받지 않아도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는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 가히 혁명적인 신학적 도약을 이룬 것이다. 성령의 특별한 섭리였다. 이 결과로 인해 이방인 선교의 신학적 합리성이 형성되어진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방인 선교는 문이 열리지 못하였을 것이고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조그만 지역종교로서 존재하다가 사그라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2세기 초가 되자 교회 내에서 유대인들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종교회의는 특별한 선교신학을 형성하게 된 초기 선교시대의 결정적인 전환점 중의 하나이다.
(3) 사도들의 선교활동을 통한 복음 전파다.
사도들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다. 바울을 중심으로 한 미개척지에 교회를 개척하는 개척선교활동과 다른 하나는 기존에 흩어져 있던 신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화 하는 일이다. 바울은 주로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바돌로메는 지금의 아라비아 사막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인도에까지 초기에 도달하였다고 하였다. 마드라스 지역에서 발견된 ‘도마의 교회’나 ‘성 도마의 산’과 같은 지명을 보면 도마가 인도에 갔었고 기간은 아마 주후 50년경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까지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4) 예루살렘의 함락이다.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 예루살렘의 함락은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퍼져 나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야고보에 의해서 인도 되어진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하였으나 70년 이후에는 이전과 같은 지역적 중심점을 갖지 못하고 어느 지역에서든 주님의 임재하심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후에 로마가 기독교회의 조직적 중심위치를 차지하지만 결코 이슬람교의 메가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하였다.
(5) 초기 기독교 선교의 요인은 기독교 핍박이다.
네로 황제 시대로부터 시작되어진 기독교 핍박은 주기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3세기 중반의 데시우스 황제 시기에서 4세기 초의 디오클레산 황제 시기까지 조직적인 핍박이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기독교 핍박은 수많은 순교자를 만들어 내었고 선교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지만 실제 선교적 차원에서 볼 때 오히려 이 핍박은 초기 기독교 교리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신앙의 깊이를 만들어 준 공헌이었다.
초기 300여 년은 교리적인 면에서 많은 위험성을 가진 기간이었다. 니케아 공의회가 325년에 개최되어지는데 이때에 가서 비로소 교리적인 체계가 잡히고 정경이 확정되어진다. 그러므로 이전의 시기는 실제 정경이 확정되어지지도 않았고 구원의 복음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하지도 못한 시기였다. 문서보급이나 통신이 극히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교회가 지리적으로 급속히 팽창해감에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이 변질되어지지 않고 원형을 보존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수성을 보존케 한 것이 실제로는 핍박이었다. 핍박으로 인해서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결단이었다. 만약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한 핍박이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회는 로마제국 내에서 쉽게 그 순수성을 잃고 혼합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어지기 이전 300년 동안을 철저하게 성령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섭리적 손길을 발견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교회는 로마의 교통로를 따라서 로마제국 내 대부분의 지역에 전파되어지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지역에까지, 서편으로는 북아프리카와 스페인까지,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 고울, 브리튼(현 영국)까지 전파되어졌다. 물론 교회의 전파는 지역마다 균일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로마 등지에서는 교회들이 급성장을 하였고 고울이라든지 다른 변방지역에서는 제한적인 전파만이 있었다.
(6) 이시기의 선교의 다른 특징들도 있었다.
이 시기는 조직적인 선교는 없었다. 교회가 조직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선교를 계획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대부분의 선교는 자발적이고 비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무명 선교사들의 활약이 있었다.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역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교회의 지리적 팽창의 대부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무명의 평신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군인이거나 노예, 혹은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훈련도 받지 않았고 교회의 특별한 위임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하고 이들의 사역으로 교회는 멀리 브리튼 섬까지 전파되었다.
이 시기의 선교는 행함과 사랑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체계적인 교리가 정리된 때가 아니었다. 복음은 죄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단순한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나타난 위대한 사랑과 행함, 높은 도덕율 등이 당시 굳어져 있던 로마인들이 마음을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 그 자체가 복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서머나의 폴리캅이라든지 카타콤의 순교자들이 삶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2) 기독교 공인 이후
주후 303년에 디오클레산 황제의 박해 명령에 의해 시작된 로마 제국의 마지막 기독교 탄압은 1,500명이 넘는 순교자를 내고 생명을 위협하는 고문행위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배반하게 만들었지만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실권을 잡게 된 311년에 기독교 관용령을 내리고 313년에 유명한 밀란 칙령을 내려서 기독교 박해를 종식시킨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의 하나는 자신이 신앙체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로마 황제의 위(位)에 오르게 되었을 당시에 이미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특히 제국의 핵심인 군인, 귀족층의 부인, 상인 등에 기독교인이 많아서 제국을 통일된 힘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기독교를 공인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가 공인됨으로 이전의 초기 선교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장점은 이전과 다르게 자유롭게 선교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제국 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밀란 칙령 이후 한 세기만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대략 4배가량 늘었다. 500년경까지는 로마제국 내의 선교는 완성되어진 것으로 보였다. 또한 로마제국의 쇠퇴로 인하여 중부 유럽 이민족들의 로마 침입은 교회에 위협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는 중부유럽으로의 선교의 문을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단점은 교회가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 후에 국교가 되자 이전과 달리 참된 회심체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부는 이교신앙의 행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대거 교회로 유입되어지자 그동안 핍박을 받으며 지켜왔던 복음의 순수성이 급속하게 혼탁해지게 되었다. 이에 니케아 종교(325년)와 칼세돈 종교회의(451년) 등에 의해서 신학의 발전과 교리의 정립을 가져오게 되기도 했지만 실제 교회는 점차 모든 신자들이 나서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다. 교회로부터 훈련이 되고 인정된 사람만이 전도와 설교를 하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 일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받게 됨에 따라서 성직자 계급이 급속하게 형성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전체적으로 이전 시대의 열정적인 복음전파가 식어들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고 교회가 제도화되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로마 교회의 선교적 열정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시기에는 교회의 조직적인 선교활동이 등장하게 된다. 교회의 감독으로서 이 시기 선교활동을 한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울필라스(Ulfilas)와 투어스의 마틴(Martin of Tuors), 밀란의 엠브로스, 존 크리소스톰 등이다.
울필라스(311-383)는 갑바도기아인 부친과 고트족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는데 341년에 고트지역(오늘날 독일)의 감독으로 임명되어서 평생을 고트족 가운데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초기에는 로마인과 고트족인의 혼혈인 기존 기독교인들의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지만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고트족에게 나아가서 선교하는 일에 30년 이상을 헌신하였다. 그는 고트족 문자와 문법을 만들어 주었고 이를 사용해서 성경의 상당한 부분을 고트족 언어로 번역하였다. 울필라스를 아마도 최초의 번역 선교사라고 지칭할 수 있다
투어스의 마틴(316-397)은 이태리 출신으로 부친을 따라서 군인이 되었다. 20세에 그는 군대를 떠나 수도원에서 수련을 쌓은 후 투어스(현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고울지역(현 프랑스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이교 사원을 허물고 교회를 세워갔다. 그는 주로 고울의 시골지역에 수백 개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수도원제도를 고울에 도입시켰다. 엠브로스와 크리소스톰은 자신들이 선교지에 가서 사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영향력으로 티롤 지역과 고울 지역의 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니니안(Ninian)은 수도승으로서 현 영국 지역인 브리튼 섬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커다른 공헌을 하였고 가자의 힐라리온은 팔레스타인에 수도원을 세워서 아랍족에게 선교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공인 시기의 선교의 특징은 주로 수도원 중심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로마제국은 기독교가 국교로서 제도화되어지고 이교지역을 향하여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히 시작되는 시기였는데 이 중심역할을 수도원이 점차 차지해가게 되었다. 이 수도원 중심의 선교는 중세시대에까지 지속되어지게 된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한 시기였다. 이는 로마제국이 불안정해지면서 교회가 이들에게 안전과 안정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인정이 되어졌고 국가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교의 다신론이 급속히 와해되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 주요한 요인이다. 선교사들이 많은 이적을 행함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던 ‘능력대결’의 시기였다. 투어스의 마틴과 같은 초기 선교사들은 시골지역의 미신들에 대항하여 많은 능력대결을 행하였는데 이는 이 시기의 선교의 중요한 요소였다.
2. 제 2기 초기 중세 선교(AD 400-800년)의 특징
대략 주후 500년을 지나면서 로마제국은 그 화려했던 명성을 잃고 퇴보하게 되어 천 년 동안의 중세가 시작된다. 기독교회는 초기 500년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하는데 성공하지만 아직 세상의 나머지 부분은 미전도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는 중부유럽이 기독교화 되는 시기로 상당한 선교적 열정이 살아나는 시기이다. 동시에 초기 기독교회의 요람이었던 팔레스타인과 북아프리카를 잃어버리는 변화의 시기이기도 하다.
중세(800-1500년) 후기는 주로 북유럽과 러시아 지역이 기독교화 되는 시기로서 선교적 열정이 상당히 식어들게 되는 때이다. 이 시기에 기독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타락하고 영적 세력을 잃게 되는데 선교의 모판인 교회가 영적 힘을 잃으면 선교도 따라서 쇠퇴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중부유럽이 기독교화 되는 시기이다.
1) 성 패트릭(St. Patrick: 389-461)
패트릭은 브린튼 섬에서 출생하여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집사였고 할아버지는 장로였다. 어린 시절 패트릭은 신앙적으로 깊은 헌신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16세 되던 해에 아일랜드인들이 침략하여서 그의 마을을 약탈하고 어린 패트릭은 노예로 잡혀서 아일랜드로 가게 된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6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가축을 기르는데 이 고통의 기간 동안에 그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다. 이 기간이 육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는 깊은 기도생활을 통해 많은 신앙체험을 하게 된다. 마침내 아일랜드를 탈출하지만 다시 고울에서 노예가 된다. 그러나 다시 탈출하여 수도원에서 수련을 쌓고 브리튼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 때 부터 패트릭의 마음에 자기를 노예로 삼았던 아일랜드에 대한 선교적 부담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그는 “거룩한 젊은이여! 이리로 와서 이전처럼 우리 사이를 거닐어 달라”는 환상을 보고 아일랜드에 선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아일랜드는 패트릭 이전에 기독교가 소개는 되었지만 신자나 교회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이교 사제들의 저항과 적대적인 통치자들의 위협을 받으며 패트릭은 30년 이상을 아일랜드에서 선교하는데 그가 생애를 마칠 즈음에 아일랜드는 거의 기독교 국가가 된다. 그는 아일랜드에 켈틱 교회를 세우는데 이는 수도원 중심의 교회로서 이후 중부 유럽 선교의 기지가 된다.
2) 브리튼의 선교
브리튼 섬은 이미 콘스탄틴 황제 이전에 기독교가 소개되어 졌었고 성장한 교회들이 존재했었지만 5세기의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웨일즈 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이 선교에 먼저 앞선 사람들은 아일랜드의 켈틱 선교사들이었다. 콜롬바(521-597)와 그의 일행은 563년에 스코틀랜드 지역에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아이오나 섬에 수도원을 세우는데 이 아이오나 수도원 출신의 선교사들이 브리튼 섬과 유럽대륙 선교의 주요한 자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로마 교황인 그레고리가 영국 선교의 꿈을 가지고 596년에 베네틱트 수도승인 어거스틴과 40명의 수도승을 영국으로 파견하게 된다. 이들은 켄터베리가 있는 켄트 왕국에 도착하여서 왕인 에델버트(Ethelbert)로부터 허락을 얻어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에델버트의 부인은 고울에서 온 기독교인인 베르타(Bertha)였는데 그녀의 도움으로 왕국 내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오래지 않아서 이들의 설교에 감동된 왕의 개종으로 1만 명의 사람들이 대거에 집단개종을 이루게 되었다. 콜롬바와 선교사 어거스틴의 선교로 인해서 영국은 기독교화 되게 된다.
브리튼의 선교의 특징은 당시의 선교사들은 개인적으로 파송되어지지 않았고 그룹으로 파송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선교사들은 젊은이보다는 경험이 많은 나이든 사람들이었다. 어거스틴은 집단개종 자체를 하나의 전략으로 삼아 이들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집어넣고 서서히 교육을 통하여 깨달아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물론 이런 집단개종은 성공적인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없을 경우 교회를 형식적 신앙으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회심의 대개의 경우 집단개종이었다. 비서구지역은 집단의 개념이 강한 곳인데 이런 곳에서는 집단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
이들은 ‘문화수용(accommodation)’을 사용하였다. 문화 수용이란 이방 문화적 요소를 철폐하기보다는 받아들이되 그 내용을 기독교화 하는 방법이다. 이는 타문화권 내의 사람들에게 좀 더 이질감을 적게 주면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다. 문화수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타문화권 사람들은 거부감이 별로 없이 기독교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실패하면 기독교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실제 교회는 역사 가운데 상당한 문화수용을 허용해 왔었다. 대표적인 예가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출생일이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를 알기는 불가능한데 아마도 추운 12월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날짜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에서 지키던 절기였다. 12월 25일은 실제 동지를 의미하는 날짜였는데 태양신 종교에서는 동지를 어두움의 신이 물러가고 빛의 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로 기념하는 절기였다. 이 의미를 교회가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로 문화수용을 행한 것이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교적 개념을 떼어버리고 기독교회에 소용함으로 당시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쉬운 방법으로 성탄절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성공적인 제도가 되었다. 선교사 어거스틴은 현지인의 절기를 그대로 지키되 내용을 기독교화 한다든지 혹은 이교 사원을 부수지 않고 교회로 사용하는 등 문화수용을 전략으로 사용하였다.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수도원 운동을 통한 선교였다. 수도원 운동의 배경은 기독교의 세속화이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제도와 되고 세속에 물들자 영적 생명력이 상실되기 시작했고 선교의 열정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제도권 밖의 사람들은 온전한 기독교 공동체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원 운동은 영적인 생명을 잃을 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소극적으로는 해이해진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응이었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고자 하는 삶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학문 연구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고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동방교회 수도원은 은둔형 수도 생활이 주된 특징이었다. 반면 서방 수도원은 철저한 집단생활과 엄격한 수도규율을 따르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는데 이들은 팀 선교, 집단개종, 토착 지도자 양성을 하였다. 수도원의 약점은 선교지에서 교회 설립이 아닌 공동체 생활 확산이 주된 선교였다는 점이다.
3) 프랑스 지역의 선교
프랑스 지역은 클로비스(Clovis)의 회심을 통하여서 기독교화 된다. 클로비스는 프랑크족의 왕이었는데, 그 이름으로부터 현재의 프랑스라는 이름이 유래되어졌지만 이들은 게르만 민족이었다.
493년에 클로비스는 그리스도인이었던 부르군디의 크로틸다(Clotolda)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크로틸다는 자신의 남편이 회심하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의 첫 아이가 병으로 죽게 되자 클로비스는 크로틸다가 믿는 신은 아이를 살리지 못하였다고 더욱 완강하게 기독교를 거절하게 되었다.
496년에 알레마니와의 전쟁에서 위기에 몰리자 클로비스는 “만약 나를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준다면 기독교 신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하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클로비스는 이 약속을 지켜서 496년 성탄절에 자신의 전사 3,000명과 함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서 현 프랑스 지역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5) 켈틱 선교사들의 활동
콜롬반(Columban, 550-615, 그의 실제 이름은 콜롬바이지만 스코틀랜드의 콜롬바와 구분하기 위해서 콜롬반이라고 불리운다)은 프랑스 동부로부터 시작해서 북부 이태리 지역을 선교하였고 역시 켈틱 선교사인 성 갈(St. Gall)은 스위스의 북동부를 선교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는 독일의 사도라고 불리는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다. 당시 에니미즘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독일인들을 위해서 보니페이스는 40년 이상을 사역하다가 이교지역을 선교하였다. 724년에 가이스마르 지역의 이교신앙의 중심이었던 토르 참나무를 베어버린 사건으로 그 지역을 기독교화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보니페이스는 여자 수녀들을 선교에 참여시킨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의 선교적 열정은 70살이 넘는 나이에도 그로 하여금 감독의 편안한 행정직을 거부하게 하고 북부지역의 미개척지 선교에 나서게 하였다.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마침내 도쿰 지역(현 벨지움)에서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서 보니페이스와 그의 50여명의 동역자들이 모두 순교하는 사건으로 일생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대략 800년경에 중부 유럽 지역은 기독교화가 완성되게 된다. 이 당시 선교의 특징은 주로 수도원의 수사들이 중심이 된 선교활동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특히 선교적 열정을 가진 켈틱 교회는 위대한 선교적 교회였다. 800년을 지나면서 중세 전기의 선교적 열정과 역사는 조금씩 식어들게 되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은 모하메드(570-632)의 사후 백년도 되기 전에 기독교의 탄생 지역인 팔레스타인을 포함해서 전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 핵심지역들을 차지하고 무서운 기세로 유럽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732년 투어스 전쟁에서 샤르마텔에 의해서 겨우 유럽 중심부로의 진입을 막아내지만 이미 이슬람은 스페인으로부터 북아프리카 전역, 이집트, 팔레스타인, 소아시아까지를 포함하는 거대한 이슬람의 초생달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중세가 끝날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대륙선교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5) 중국 선교
전승에는 주후 34년에 마원이라는 사람과 일부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중국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이는 역사성을 확인할 수 없는 사건이다. 공식적으로 중국에 최초로 도착한 선교사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사였던 알로펜(Alopen)이었다. 635년에 중국의 장안에 도착한 알로펜은 당시 당 태종의 환영을 받고 기독교를 경교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왕실은 외국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이었지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불교의 저항을 받으며 포교활동을 하여야 했다.
초기의 네스토리우스 선교사들은 언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으며 주로 수도원 중심의 신앙형태를 유지하였다. 수도원의 벽 안에서 주로 생활하는 형태의 활동이 당시 중국 사회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 지는 의문시된다. 네스토리우스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동양문화에 상황화 시켜보려는 시도에서는 상당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주로 불교의 개념과 상징, 용어를 빌려서 기독교를 중국문화에 소개하려고 하였다. 기독교서적의 이름을 불경과 유사한 이름으로 붙이고 자신들을 승으로 불렀고 연꽃 등을 경교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상황화 시도에는 엇갈린 평가가 있다. 지나친 상황화 시도로 기독교의 본질이 혼탁해지고 혼합주의에 빠져서 결국 선교에 실패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300여 년 전 서구라는 세계를 전혀 모르고 또 서구와는 전혀 틀이 다른 철학과 종교, 문화가 고도로 발달해 있던 중국에 기독교를 소개하려고 시도할 때 그만큼 과감한 상황화 노력이 없었다면 뿌리를 내리는 것이 가능하였겠느냐 하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경교의 선교는 845년에 도교신자였던 무종이 강제로 모든 출가 형태의 신앙인을 환속시킴으로 일단 선교의 세력이 꺾이게 된다. 그러나 경교 교회는 힘을 잃었지만 12세기경까지도 중국 내에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네스토리우스 선교사들은 인도와 현재의 중앙아시아와 몽골 지역에서도 선교활동을 활발히 행하였다.
3. 제 3기 중세 후기선교(AD 800-1200년)의 특징
9세기 이후에 들어서면서 주로 북부 유럽과 러시아 지역의 선교가 이루어지지만 선교적 열정은 중세 전기에 비해 많이 식어든다. 9세기에 들어서자 중부유럽 지역의 기독교는 거의 완성되어지게 되고 유럽에서 남은 지역은 북부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바이킹족의 거주지로서 바이킹은 9세기 내내 유럽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용감한 선교사들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페인 등에 대한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펴나갔지만 열매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에서 특기할 만한 선교사는 북구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안스카(Anska. 810-865)이다. 안스카는 콜롬바가 세운 콜리 수도원 출신의 프랑스인으로 북독일의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평생을 북유럽 지역의 선교활동에 헌신하였다. 교회도 그를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북유럽의 슬라브족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중세전기와 같은 즉각적인 기독교화는 이 시기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스카도 죽을 때까지 이 지역의 기독교화를 성취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의 기독교화는 12세기까지의 긴 기간에 걸쳐서 주로 왕족들의 개종으로 인하여 서서히 이루어지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로부터의 영향으로 개종한 왕들은 때로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회유책을 사용하여서 자신의 나라에 기독교를 정착시켜 나갔다.
노르웨이는 올라프 왕가에 의해서 11세기 경 기독교화가 이루어지고 덴마크는 1104년 스웨덴은 1164년에 기독교화가 이뤄진다.
러시아의 선교는 동방교회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된다. 954년 서방교회와 분열된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 형제인 키릴(Cyril)과 메소디우스(Methodius)가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인 모라비아에 선교를 행한다. 이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예배에서 헬라어나 라틴어 대신 현지어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영향으로 불가리아의 왕이 개종하고 불가리아가 슬라브 세계의 교회 중심지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곳으로부터 러시아와 폴란드 기독교화가 12세기까지에 걸쳐서 이어지게 된다. 러시아는 올가 공주의 개종으로 영향을 받고 마침내 블라디미르(황제)가 988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므로 기독교화가 이루어진다. 블라디미르는 백성들을 키예프의 근처 강가로 데려가서 의식문을 읽어 들려준 후 집단으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는 백성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사제들, 성자들의 유골, 성스러운 그릇, 성스러운 물건들을 수입하였다. 교회 법정이 세워졌고, 교회 십일조 세금도 제정되었다. 수도원들이 산 위에 세워졌으며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을 없앴다. 이런 과정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무력으로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해서 기독교 학당을 세웠다. 의무교육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젊은 세대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그가 사망하기 전 국민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교역자들을 다른 지역에 파송하여 키예프에서 시작된 기독교를 전했다. 그는 자신이 선교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원래 그는 호전적이었고 음식과 술을 좋아해서 부요한 자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었고 많은 부인을 두어 자식도 많았지만 개종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완전히 변하여 고아, 가난한 자, 병자들을 돌보았고 노인과 병자들을 위한 수용소를 세웠다. 또한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깨닫고 사형 제도를 폐지하였다.
1) 십자군 운동
(1) 원인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서유럽은 한 세기 이상 흉년에 시달리며 경제적인 사정이 극도로 침체되어 있었다. 서방 사람들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며 동방으로 진출을 모색하는 가운데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는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은 모슬렘의 공격에 대비하여 서방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동방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으로부터 동방제국을 보호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것이 전쟁이 되었다.
종교적인 요인으로 기근과 흉년으로 타계적인 신앙이 일어났고 경전과 종교적인 열정이 생겼다. 이러한 열정이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다. 또한 서방이 동방 교회를 모슬렘 터키로부터 보호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작용하였다. 서방 교회는 계속하여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동방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를 원했다.
1095년에 시작된 전쟁은 1098년에 안디옥을 점령했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1272년까지 약 180년 동안 8차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제 1차 성지를 탈환하고자 하는 십자군 목표는 끝까지 이루지 못하였다. 오히려 예루살렘과 십자군의 본거지는 대부분 이슬람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특히 4차 십자군 원정대는 십자군에 반대한 동방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 갇히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기독교 형제자매들을 살해하는 등 각가지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영원히 갈라지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2) 십자군 운동의 부정적인 면
십자군 운동으로 말미암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관계는 영구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즉, 4차 십자군 당시 서방 교회의 십자군이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동방 교회의 영역 위에 라틴 제국을 수립하고자 함으로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십자군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나타난 원한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처 정치, 경제,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특히 기독교 세계의 도덕적인 기준을 낮추게 되었다. 이 전쟁은 십자군이라는 하나님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맹목적이고 편협하며 독선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였다.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를 외치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대인들을 무참히 죽이고 무슬림들의 배를 가르기도 하며 인육을 먹고 같은 기독교 국가 뿐 아니라 동료 기독교인까지 해쳤다. 십자군 원정대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때로 너무나 무모하고 단순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시작한 전쟁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들어주실 것이라 기대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수많은 국가와 민족이 성지탈환 외에 자국의 이기적인 요소와 천박한 욕구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들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2) 성 프란체스코
(1) 생애
성 프란체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 남부 중북부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반니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아버지가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프란체스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청년 시절 두 번이나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지만 포로로 잡히거나 병에 걸리는 등의 이유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209년 20대 후반에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마태복음 10장 7-10절의 말씀봉독을 통해서 사도들처럼 청빈하게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때부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형제애와 회개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주변에 점차 많은 추종자가 생기자 1209년 간단한 수도회칙을 작성했고 1212년 인노켄티우스 3세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수도회의 규모가 커지자 1223년에 스스로 공직을 사임하고 1224년 몬테 알베르노의 암자에 들어가서 여생을 은거와 기도로 보내다가 1226년 10월 3일, 40대의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성 프란체스코의 선교
성 프란체스코는 제 5차 십자군 전쟁 중 이집트 원정대에 동행했으나 군사적인 일들과는 거리를 두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 두 번의 선교사역은 실패로 끝났지만 1219년 세 번째 시도가 성공하여 이집트 술탄 앞에 서게 되었다. 언어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성 프란체스코는 어렵게나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비록 이를 통하여 직접적인 회심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는 무슬림들에게 평화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3) 성 프란체스코의 규율
1221년에 제정된 프란체스코의 첫 번째 규율은 무슬림 지역에 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였다. 프란체스코회 회원들은 평화롭게 살아야 하며 심한 토론이나 논쟁을 피할 것을 강조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한 다음 그런 판단이 설 경우 준비를 잘해서 전도할 것을 강조한다.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신체를 포기하면서 적에게 스스로 노출할 것을 주문한다.
4) 프란체스코의 교훈
프란체스코 선교 운동은 가난한 삶을 모토로 하는 기동성 있는 선교였다. 그는 수도회 영성 운동의 특징인 수도원을 짓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영성 수련에만 매달리는 전통을 깨고, 민중들 속에 직접 들어가 그들의 도움으로 삶을 영위하는 탁발 수도 운동을 일으켰다. 프란체스코는 기존의 교회조직과의 협력을 통한 선교를 했다. 그는 교회와 전혀 무관한 성격을 가진 조직을 구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수도회칙을 정하고 그 회칙을 교황청에 의뢰하여 승인을 얻었다. 공동체를 통한 선교를 수행했다. 프란체스코는 사막의 수도사처럼 혼자서 은둔하며 수도 생활을 하거나, 혼자서 전도하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그에게 모여드는 많은 수도사를 위해 수도 회칙을 정하고 그들과 함께 공동체의 선교를 수행했다. 그는 삶을 통한 선교를 하였다. 그의 삶의 원리를 네 가지로 요약한다면 ‘겸손, 단순함, 청빈,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주님의 삶을 그대로 따르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말씀을 전할 때도 행함과 말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온전히 전하려고 하였다.
4. 제 4기 무슬림 선교(AD 1200-1600년)와 로마 가톨릭 선교(1492 ~ 1793년)의 특징
1) 무슬렘 선교
12세기에 유럽은 완전히 기독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의 사라센 세력이 유럽의 기독교를 외곽에서 포위하고 있는 형세가 되었기에 기독교는 유럽에 고립되어지고 적극적인 다른 대륙에 대한 선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1095년에서 1277년 사이에 7번의 원정이 이루어지는 십자군 전쟁은 선교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커다란 장애를 남기게 되었다. 모슬렘들은 기독교를 더욱 적대시하게 되었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모슬렘들에게는 십자군 전쟁의 잔인함이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모슬렘에 대한 선교는 레이몬르 룰(Raymond Lull, 1235-1315)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룰은 십자군에 의한 사라센 정복에 반대하며 대신 모슬렘에게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하였다. 룰은 선교역사에서 최초의 선교학자로 인정되어진다. 그의 세 가지 접근은 오늘날 모슬렘에게 접근할 때도 변하지 않고 요구되는 기본사항들이다. 1276년에 모슬렘에게 선교하기 위한 프란체스칸 수도승들은 훈련기관을 건립하고 자신도 직접 세 번 북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다녀오고 네 번째 선교를 떠났다가 순교하였다. 레이몬드 룰은 언어의 중요성으로 아랍어를 철저히 배울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유럽 내에 아랍어를 배울 수 있는 언어학교를 개설하였다. 또한 문서사역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오랜 인내와 사랑을 가진 끈질긴 전도를 요구하였다.
2) 중국선교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는 몽골제국이 일어나서 징기스칸이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장 큰 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징기스칸의 군대는 동부 유럽에서 시베리아 끝까지의 엄청난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해 갔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을 점령하여 원(元)나라를 세우고 원의 세조가 된다. 이 때 쿠빌라이 칸의 고민은 군대의 세력으로 중국을 점령하였지만 몽골이 문화가 없는 나라로서 자연히 문화적으로 조만간 중국에게 점령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었다. 여러 선택 중 쿠빌라이 칸은 서구의 문화에 대하여 듣게 되었고 교황에게 100명의 기독교 신앙에 신실하고 교육을 받은 선생들을 보내주면 서구의 문명과 종교를 중국에 받아들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의 요구대로 100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면 세계선교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로마 교황청은 이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세월이 지나서 쿠빌라이 칸이 죽은 후 로마 교황청은 2명의 사신을 중국에 보내는데 한 명은 도중에 죽고 몽테콜비뇨의 존(John of Monte corvino)이 1324년에 중국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였을 때 절호의 기회는 이미 지나가 있었다. 로마로부터의 선교사들을 수년간 기다리던 쿠빌라이 칸은 응답이 없자 결국 진노하고 대신 티벳의 라마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몽테콜비뇨의 존은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1328년에 죽을 때까지 약 10만 명의 개종자를 얻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선교활동은 명(明)에 의해서 몽골족이 중국에서 축출되어지는 1362년에 순교자를 내며 종료되었다(주: 이런 역사를 보면서 선교는 인간의 방법과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3) 가톨릭 선교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과 바스코 다가마의 희망봉 발견(1497년)으로 인해서 새로운 선교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신대륙의 발견은 로마 가톨릭 선교에 새로운 발전기를 만들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은 유럽에서 상당한 감소를 맛보지만 실제로는 유럽에서 잃은 교회와 신도보다 몇 배 더 많은 교회와 신도들을 신대륙 선교에서 얻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의 황금시기를 18세기까지 300년 동안 누리게 된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이 신대륙 선교에 뛰어들게 되는 데는 세 가지 중요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로마 가톨릭의 교회관이 선교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가톨릭교회라는 말은 보편적 혹은 우주적 교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교회관에서는 새로운 대륙과 사람들이 발견되었을 때 당연히 그곳도 가톨릭교회의 교구가 되어야 된다는 개념이 있었다. 신대륙에 선교사와 사제들을 보내고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초기 로마 가톨릭이 발 빠르게 신대륙 선교에 참여하게 된 기초였다.
둘째는 수도원 제도였다. 수도원이 주요 선교사 자원의 공급처가 되었다. 수도승들은 여러 면에서 선교 참여에 유리한 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청빈, 순결, 순종의 서약을 해야만 한다. 청빈이란 자신의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자신의 소유재산이 없으므로 이들은 언제든지 새로운 지역으로 부담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명령을 받으면 자신이 입던 옷 몇 가지와 담요 한 장을 싸서 미련 없이 즉시 발을 옮길 수 있었다. 순결 서약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실제 하나님의 일에 모험적인 헌신을 할 때 가장 걸리는 것이 가족들이다(주: 만약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가족이 전혀 없다면 사람들은 좀 더 쉽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이다. 로마 수도사들은 이런 면에서 강점이 있었다). 순종의 서약은 주님께 순종하겠다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로마 교회의 교권에 순종하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예수회와 같은 수도원은 군대와 같은 조직과 명령 계통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지에서 인력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으면 수도원 원장은 즉시 떠날 사람들을 선별해서 파송을 명령하면 되었다.
세 번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발견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두 기둥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이들이 15세기 중엽에 해상세력을 장악하면서 마침내 사라센 세력을 넘어선 지역에까지 탐험과 발견을 하게 되었다. 탐험에 나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배들은 항상 사제나 수도사를 동승시켰고 이들이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이는 즉시 교황청에 보고되어지고 선교사역이 시작되어지게 되었다. 이 제도는 후에 빠뜨로나또(Patronato)라는 독특한 로마 가톨릭의 신대륙 선교 정책으로 발전되어진다. 이런 유리한 요인들을 십분 활용하여 로마 가톨릭은 16세기 초부터 신대륙에서 선교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하게 된다.
로마 가톨릭의 신대륙 선교는 세속 정치세력과 결합된 독특한 새로운 선교정책을 만들어낸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세속권력보다 위에 있다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교황은 세상의 모든 땅이 자신의 권위 아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신대륙의 점유권에도 직접적인 권세를 발휘하게 되었다.
1454년에 교황 니콜라스 5세는 포르투갈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독점 점유권을 허락해 주었고 1456년 교황 갈릭투스 3세는 앞으로 포르투갈이 발견하게 될 새로운 신대륙에 대한 점유권까지도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으로 포르투갈의 독점권에 위협이 가해지게 되었다. 분쟁을 막기 위해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1493년에 칙령을 내려서 대서양의 아조레스 섬을 중심으로 북극에서 남극까지 선을 그어 이 선의 서쪽은 스페인 왕에게 독점권을 허락하고 동쪽은 포르투갈 왕에게 독점권을 허락하였다. 이 선이 그 다음해에 다시 서쪽으로 370해리 이동하게 됨에 따라서 1500년에 포르투갈인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하게 되고 브라질은 포르투갈 왕의 점유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점 점유권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교황으로부터 독점 점유권을 받은 두 나라의 왕은 소유하게 되는 신대륙 지역에 반드시 자신들의 경비로 교회를 세우고 사제를 임명하여 선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를 빠뜨로나또라고 불렀다. 빠뜨로나또를 통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대륙 발견의 속도와 동일하게 신속한 선교를 이루어가게 되었지만 이는 후에 교회의 타락 및 정치세력화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힘을 가지고 원주민들에게 강제로 개종하도록 했던 것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중대한 오점이 되었다. 복음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가톨릭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수도사 출신들이었고 이들은 자신의 교단에 의해서 통제를 받았다. 유명한 선교 교단들은 도미니칸, 프란체스칸, 어거스티니안, 제수잇 등이었다. 이 중 특히 1534년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서 시작된 제수잇은 엄격한 군대적 조직과 함께 문화에 대한 수용정책으로 신대륙 선교시대에 가장 커다란 공헌을 이루었다.
(1) 라스 까사스(Las Casas)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혹독하게 다루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집단으로 죽이기도 하였다. 일례로 멕시코에서는 정복자들의 착취로 1,800만 명의 원주민 가운데 1,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글에 살면서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살던 사람들을 집단농장에 가둬놓고 한계 이상의 노동을 강요한 결과였다.
라스 카사스는 한 때 원주민을 노략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명목으로 토착민들을 무참히 짓밟으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심각하게 반 기독교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514년 오순절 주일날 모든 노예를 다 풀어주고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노예들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 후로 자신이 누리던 특권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토착민의 권익을 위해 전적으로 투신했다.
라스 카사스는 다섯 번에 걸쳐서 대서양을 오가며 정부와 여러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디헤나들에 대해, 또한 그들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식민정복자들의 만행을 중지시킬 수 있는 입법 활동을 전개하고 토착 원주민들의 인권과 온전한 복음 전파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노예를 사랑하며 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면서 복음을 전했던 인물이었다. 법에 밝았던 그는 지역에서 토착 인디언들에게 자유와 저항권을 주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많은 비난과 반대에도 황금에 눈이 먼 당시 스페인 지배자들의 부패와 억압에 저항하며 오직 복음의 참 실천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 선교사로 평가받고 있다.
(2) 프란시스코 사비에르(Basque Francis Xavier: 1506-1552년)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친구로서 예수회를 설립한 일곱 명 중 하나다. 15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서품을 받고, 1540년에 시몬 로드리게스 신부와 함께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로 선교사로 임명받아 동인도로 파견되었다. 그는 인도의 고아 지방과 남부 지방에서 선교를 하였다. 인도의 타밀어로 교리 문답서를 만들어 사람들을 교육하면서 봉사와 헌신으로 선교하였다. 그의 선교 전략은 어린아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통하여 부모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었다. 신분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상위계급인 브라만은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반면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개종을 해도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쉽게 개종을 하였다. 어떤 날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사비에르는 피곤하여 팔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인도의 남쪽 끝 타밀나두에 있는 코모린에서 3년을 지내면서 파라바족을 사목하여 수천면의 개종자를 얻었다. 1545년에는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를 찾아갔고 1546년부터 1547년까지는 뉴기니와 인접한 몰루카제도와 필리핀과 가까운 모로타이 섬을 왕래하였다. 그는 자신을 개척자로 생각하였고 어느 곳에서나 예수회 회원들이 일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일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했다. 1547년에 인도 고아에서 ‘야지로’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야지로는 “왕과 귀족들과 모든 현명한 사람들은 이성을 존중히 여기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쉽게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사비에르에게 일본에 가서 선교할 것을 설득하였다. 1549년에 일본에 입국해서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여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초창기 불교의 문화와 전통에 젖은 일본인들은 사비에르 일행을 인도에서 온 천축승으로 알았고 사비에르 역시 불교의 용어를 사용해 일본인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였다.
당시 일본은 기독교가 들어가기에 좋은 절호의 기회였다. 아직 전국이 통일되지 못하고 250명의 지방 군주들이 통치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들은 서구세력과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불교는 대중에게 불신당하고 있었고 기독교에 대적할 만한 조직적 종교 세력이 없었다. 초기 선교는 고통스러웠다. 야지로의 엉터리 통역(초기에 선교사들은 이를 몰랐지만)과 예기치 못했던 혹독한 겨울 추위, 식량의 부족, 언어습득의 어려움 등으로 고생하였지만 자비어의 불굴의 열정은 이를 서서히 극복하며 선교의 열매를 얻어갔다. 27개월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자비어는 세 개의 작은 개종자 그룹을 형성하였다. 자비어가 떠난 이후 제수잇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게 되었고 지방 군주들이 개종하게 되면서 가속화되었다. 1575년경에는 5만 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생겨났고 16세기 말에는 30만 명의 개종자가 생겼다.
그러나 1590년에 500년 만에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후손 천황들은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가톨릭에 호의적인 듯했으나 1587년부터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1597년 2월 에 이른바 ‘26성인 대순교’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1596년 12월 교토 오사카에 있는 프란체스코 계통의 신부 6명, 일본인 신자 17명, 예수회 일본인 수사 3명 등 모두 26명을 체포하여 전국에 구경거리로 만들어 끌고 다니다가 1597년 2월 5일에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사건이었다. 그 후에 가톨릭에 대한 핍박이 심해 일본에서 순교자가 약 5만 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가톨릭인 색출 방법, 고문, 박해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고 잔악했다. 마리아상이나 예수의 십자가상을 밟게 함으로써 교인이 아니라는 것과 신앙을 버렸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후미에 제도’가 사용되었다. 또한 단순한 십자가형이나 화형은 역효과를 낸다고 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뜨거운 물을 붓는 고문, 거꾸로 매달아서 구멍에 머리가 들어가도록 해놓고 그 구멍에 오물을 넣는 구멍 매달리기 고문 등 잔악한 일들이 벌어졌다.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이때로부터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문호를 개방할 때까지 일본은 외국세력과 문을 닫는 쇄국정책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박해의 기간 동안에도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을 고수하며 남아 있었다. 1552년 일본을 떠나 고아로 돌아가던 도중의 자비어는 마카오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 그는 마카오에서 유명한 기도를 하고 죽는다. “하나님. 이 앞에 엄청난 중국 땅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죽지만 제 대신 이 일을 위해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정확히 응답하여 주셨다.
(3)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
자비어가 죽던 해에 이태리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다. 그도 역시 제수잇 선교사가 되어 고아의 신학교에서 사역하다가 중국선교를 위해서 마카오에 도착하게 된다. 그가 바로 자비어 이후 가장 위대한 가톨릭 선교사로 불리는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이다.
몽골족의 원 왕조를 몰아내고 염 제국을 수립한 주원장은 황제로 즉위한 후 몽골족은 물론이고 여진족, 거란족 등 이민족들을 모두 중국 영토 내에서 추방하고 고립정책을 시행했다. 명 제국이 이처럼 중국을 고립화하는 동안 세계는 대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서구는 문예부흥을 거쳐 과학, 예술, 문학 등이 급속히 발달하고 신항로를 개척했으며, 교황지상주의의 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 거듭나면서 새로운 성서 해석 신학이 발달하고 가톨릭 자체 내에서도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테오 리치는 1552년 10월 6일 중앙 이탈리아 마체라타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6세의 나이로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가 그곳에서 예수회의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1571년 예수회에 가입했다. 당시 예수회 회원들은 과학과 신세계 탐험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578년 9월 13일 인도의 고아에 도착해 신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1580년 코친에서 신부로 서품을 받은 후 다시 고아로 돌아와 1582년 3월 중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게 되었다.
중국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1538년 <곤여만국전도>라는 세계지도를 만들었고 이듬해에는 그보다 정교한 <여지산해전도>를 만들었다. 그가 이처럼 세계지도를 제작한 것은 세계지도를 상류층 지식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명나라 말기의 중화사상에 일침을 가하고 진보된 서양의 문명과 가톨릭의 연관성을 보임으로써 선교에 유리하게 하고자 하는 고도의 선교전략이었다. 그는 한문으로 된 서학서를 저술하는 한편 관리들에게 천문학, 지리학, 수학 등 서양학문을 가르쳐 학자로서 신망을 얻게 되었다. <천주실의>, <기하원본>, <교우론> 등의 저서를 펴냈다. <천주실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릿치는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언어와 중국 습관을 배우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유교의 학문과 관습에 통달하게 된 릿치는 중국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점차 중국의 수도인 북경 쪽으로 이동하며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1600년에 마침내 북경에 들어가는 허락을 얻게 된 릿치는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10년 동안 북경에서 사역을 하였다. 중국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던 릿치는 중국인의 종교심의 핵심이 하늘(天)임을 알게 된다. 적극적으로 기독교의 상황화를 시도하던 릿치는 예수를 중국인들에게 이렇게 소개하였다. “당신들이 하늘을 숭배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나는 새로운 신을 소개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숭배하는 그 하늘에 주인이 있음을 알려주려 왔다”. 그는 예수를 천주(天主)로 소개하였고 이 개념은 중국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이해되고 수용되어졌다. 마테오 릿치가 죽은 1610년에는 중국에 약 2천 명의 가톨릭 신자가 생겨났다.
마테오 릿치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생각하여 예수회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의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논쟁은 17세기 초에 ‘중국 의식논쟁’이라고 알려졌는데, 로마 가톨릭의 선교 역사상 최대의 격론을 불러 일으켰다. 교황청은 주로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의 편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가톨릭들은 공자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서는 안된다”고 공포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는 예수회를 지지하여 만약 조상의 제사에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추방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논쟁은 근본적인 해결 없이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 같은 토착화의 문제는 여전히 오늘날도 중요한 선교적 이슈다.
이후 많은 제수잇 선교사들이 들어와 사역하게 되고 1650년경에는 25만 명에 달하는 개종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 내의 선교사들은 선교사들끼리 제수잇파와 타교단간의 신학적 정치적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제사제도와 릿치가 시도하였던 문화수용, 하나님을 天 혹은 上帝로 부르는 문제 등에 대한 싸움이 지속되어지고 로마 교황과 중국 황제에게 서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상소하게 된다. 교황은 마침내 1742년에 칙령을 내려서 제수잇의 모든 문화수용 시도를 정죄하게 된다. 이는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되고 그 동안 황제의 호의 아래서 진행되던 선교는 다시 문이 닫히게 된다.
(4) 가톨릭의 인도선교
노빌리도 (Roberto de Nobili, 1577-1656) 제수잇 선교사는 마테오 릿치와 같이 적극적으로 인도문화를 수용하는 정책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고아에서 시작하여서 마두라(Madura)로 옮겨서 42년 동안 선교사역을 감당한다. 그는 인도인의 음식과 의복을 포함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자신이 지킴으로 로마인 부라만(Roman Brahmin)으로 불렸다. 적지 않은 인도인들이 노빌리를 따르게 되었고 수천의 개종자들이 생겨났다. 노빌리의 뒤를 이은 제수잇 선교사들은 적극적인 문화수용 정책을 사용하였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결국 교황청에 의해서 문화수용 정책이 정죄를 받게 된다.
(5) 가톨릭의 필리핀 선교
마젤란의 필리핀 발견에 이어 필리핀에 어거스티니안 선교사인 레가스피(Legaspi)가 1565년에 도착하게 된다. 필리핀은 당시 기독교에 대항할 만한 발달된 문화와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어거스티니안과 제수잇 선교사들은 빠른 속도록 필리핀을 기독교화 시켜 나갈 수 있었다. 선교 100년 이내에 필리핀에서 어거스티니안 선교사들은 200만이 넘은 개종자를 얻었고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된다.
(6) 아프리키와 남미 선교
아프리카와 남미는 빠트로나또의 방식에 의해서 선교가 이루어진다. 이 신대륙 선교에는 두 부류의 사역자가 참여한다. 선교사들은 미개척지에 들어가서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일을 감당하였는데 주로 수도사들이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개척 정복자들과 함께 들어와서 기존의 교회를 맡게 되는 사제들이었다. 세월이 지나자 이런 사제들은 점차 정치인들과 타협하고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고 선교사들과 교회의 관할권의 문제를 가지고 부딪치게 된다.
대부분의 개척 정복자들은 신대륙에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온 사람들로 원주민들을 착취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는 등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개척정복자들과 선교사들 간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초기의 선교사들은 용감하게 미 개척자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지와 정글을 뚫고 전진하였다. 프란체스칸 선교사들은 이미 1500년부터 브라질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1502년에는 하이티, 1531년에는 콜롬비아에서, 1532년 페루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의 빠트로 나또 선교에 의해서 기독교화 되지만 유럽인이 생존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과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잔혹함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 아프리카는 아시아에 비해서 제비어라든지 마체오 릿치, 노빌리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가 등장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기독교화가 진행되어지다가 18세기에 들어서는 가톨릭 선교의 열매가 급속히 쇠퇴하게 된다.
(7) 가톨릭 선교의 쇠퇴
16세기 초 이후 전성기를 누리던 로마 가톨릭의 선교는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급속히 붕괴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더 이상 신대륙에서 독점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교황의 칙령으로 신대륙을 양분해 준 것도 더 이상 그 효력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과 화란, 덴마크 등이 신대륙에 진입하게 되었다.
아시아 지역에서의 가톨릭 선교는 주로 통치자들의 호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가 되자 이런 호의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는 본격적인 박해의 시기를 맞이하고 중국에서는 제수잇과 타 교단 선교사와의 싸움이 황제의 총애를 잃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가톨릭 선교의 급속한 쇠퇴를 불러왔다.
제수잇 교단의 강제 해산이 있었다. 초기부터 제수잇은 세속사제 그룹과 다른 교단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해 왔다. 다른 교단과 세속 사제들은 제수잇 선교사들에 대하여 부적절한 선교방법, 교만, 정치에의 간섭, 부의 축척에 대한 의심 등 여러 문제를 끊임없이 교황청에 고소하였다. 결국 1773년 7월 21일에 교황 글레멘트 14세는 칙령 Dominus ac Redeptor를 발령하여서 제수잇 교단을 해체하고 그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이후로 어떤 교황도 이를 다시 회복시킬 수 없도록 명령하였다. 이로 인해서 3천 명에 가까운 제수잇 선교사들이 선교지로부터 강제 철수되어진다. 이일 이후로 신대륙 선교는 크게 위축되어지고 그 전성기의 막을 내리게 된다.
5. 제 5기: 땅 끝까지 선교: 개신교 선교의 도약기(AD 1600-2000년)의 특징
1) 종교 개혁시기에 개신교 선교가 소극적인 이유
가톨릭교회의 선교가 쇠퇴하는 18세기 후반부터 개신교회가 세계 선교 사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지만 개신교 선교는 초창기에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때문이다. 마틴 루터와 초기 종교 개혁자들의 지상위임명령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인한다. 루터는 마태복음 28장에 주어진 위임명령은 열한 제자에게 국한하여 주어진 것이지 교회에 주어진 명령은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로마서 10장과 시편 19편을 인용하여 이 명령은 사도들의 시대에 이미 완수되어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타민족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명령도 없고 그럴 책임도 없다고 보았다. 루터가 이런 해석을 하게 된 이유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루터의 신학적 지상과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성경적으로 비판하고 개신교회의 성경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특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최종 권위로서 교회의 ‘사도 세습권’에 대하여 신랄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성경해석에서는 사도 세습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구절도 해석의 정당성을 부인하였다. 마태복음 28장의 지상위임명령이 열한 사도에게만 국한되어지고 이후의 교회에 연결되지 않도록 해석한 것도 바로 이런 의도로서 어떤 형태의 사도 세습권적인 해석을 거절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루터의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이견이 없지만 당시 이러한 루터의 해석은 개신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적 책임에 대하여 등한시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고 오직 관심은 가톨릭 신자를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에 국한되어졌다.
둘째, 초기 개신교회들이 로마 가톨릭 세계 가운데서 수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고 생존 자체에 급급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협과 핍박 가운데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에 급급했었고 이어지는 오랜 종교전쟁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에너지를 다른 부분에 쏟아야 했다. 개신교 지도자들도 주된 관심사가 로마 가톨릭과 구분되어져서 자신들의 성서적,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교 지역에 대한 관심까지는 대부분이 이르지 못하였다.
셋째,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정보가 부족하였다는 점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지리적으로 주로 독일과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싸여 있었고 또 외곽으로는 회교의 사라센 세력이 둘러싸고 있었다. 초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같은 해양세력도 개신교회는 없었기 때문에 신대륙이나 타종교인들과 접촉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접촉기회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이들로 하여금 타종교 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리적 고립은 신대륙에 대한 정보도 로마 가톨릭에 비하여 부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정보의 부재도 선교적 열정이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넷째, 개신교가 선교조직을 갖지 못한 것도 하나의 주요 이유이다. 로마 가톨릭은 수도원제도를 효과적인 선교의 조직으로 십분 활용하였다. 개신교회는 수도원 조직에 대응될 만한 어떤 대체물도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결혼하여 가족이 있었고 자신의 재산이 있고 특히 교구를 책임지게 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선교의 도전이 주어져도 그런 제도하에서는 쉽게 선교지로 떠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들은 윌리엄 케리가 근대 개신교 선교를 일으키기까지 오랫동안 선교적 열정을 잃고 있었다.
2) 윌리암 케리 이전의 개신교 선교
16세기에서 18세기 후반까지의 근 250여 년 동안 개신교회가 선교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선교적 열정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 선교적 열정을 불태운 소수의 그룹들이 있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그룹은 할레 대학 출신들과 모라비안 교도의 선교 활동이다.
(1) 할례 대학 출신들의 선교 참여
개신교회들의 정통주의 시대가 고비를 지나자 독일에서 필립 스펜서(Philip Spencer)를 중심으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들은 기도모임과 성경공부 모임을 통하여 새로운 영성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스펜서의 제자였던 어거스트 프랑케(August Franke, 1663-1727)에 의하여 1694년에 시작되어진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센터가 되었다. 영성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신앙으로 훈련되어진 할레 대학 출신들은 이교지역에 있는 복음 없는 영혼들에 대하여 부담을 가지게 되고 이들 가운데서 선교적 열정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경건주의 신앙에 영향을 받은 덴마크의 프레드릭 4세는 덴마크의 식민지역에 선교사를 내어보내서 선교활동을 하기를 명하고 파송될 선교사를 찾았지만 구하지 못하였다. 결국 덴마크인이 아닌 할례대학 출신들이 선교사로 나서게 되어서 데니쉬 할레 선교부(Danish- Halle Mission)를 형성하게 된다. 발돌로뮤 지겐발크(Bartholomew Ziegenbalg)와 하인리이 플루챠우(Heinrich Pltschau)가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되고 이들은 1705년에 남부 인도로 파송되어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이어서 이 선교부를 통하여 여러 선교사들이 계속 파송되어졌다.
(2) 모라비안들의 선교
모라비안들은 17세기 내내 반종교개혁 운동의 핍박을 받으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방황하던 무리였다. 이들은 독일 삭소니 지방의 헤른후트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이 땅의 영주였던 진젠돌프 백작(Count Nicolaus Ludwig von Zinzendorf)은 이들의 신앙에 감명을 받고 헤른후트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하였고 진젠돌프가 모라비안의 지도자가 되었다. 할레 대학의 설립자인 프랑케의 제자였던 진젠돌프는 이때부터 자신의 생애와 모든 것을 세계선교에 투자하게 된다.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들과는 달리 모라비안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기꺼이 자발적으로 선교적 도전에 순종하였다. 1732년에 토기장이였던 레너드 도버와 목수인 다이빗 니츠만이 최초의 선교사로 서인도제도의 세인트 토마스섬에 도착하였다.
1733년에 그린랜드에, 1734년에 미국 인디언들에게, 1735년에 수리남에, 1736년에 남아프리카에, 1837년에 북구권의 에스키모족에게, 1740년에 스리랑카에, 1742년에 중국에, 1747년에 페르시아에, 1752년에 아비시니아와 라브라도르에 선교사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첫 선교사를 파송한 이후 150년 동안에 작은 모라비안 교회는 2,158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는 그동안 전체 모라비안 교인의 12분의 1이었다. 모라비안들은 특히 당시 서구인들의 접근하기에 환경적으로 열악하였던 오지 지역으로 헌신적으로 들어가서 생애를 다 바치며 사역하였다. 모라비안 선교사들 중 가장 유명한 선교사 중의 하나인 데이빗 자이스버거(David Zeisberger)와 같은 이는 62년 동안을 거친 현지인들 가운데서 사역하며 섬겼다. 이 모라비안의 선교는 이어지는 윌리엄 케리 선교와 웨슬레 부흥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윌리암 케리(William Carrey, 1761-1834)
(1) 생애
윌리암 케리 선교사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서 40년 간 사역을 하였다. 그가 사망하면서 한 말은 화초들을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화단을 기르는 것이 취미였다. 취미가 화초였는데 그는 꽃의 상태를 눈으로가 아니라 냄새로 알았다.
윌리암 케리가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하였고 자생적인 교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이다. 현대 선교의식을 가지고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했다는 것이 현대 선교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세람포의 아버지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불렀다.
윌리암 케리를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가? 크리스토프 스미스는 나머지 두 사람이 없었다면 윌리암 케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세 사람(주: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 1768-1837), 윌리암 워드(William Ward, 1764-1823)을 모두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윌리암 케리의 연구하는 자세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다. 구두 수선공으로 일할 때 가죽으로 세계 지도를 그렸다. 공교육은 초등학교가 전부다. 그러나 교수가 될 만큼 학구열이 뜨거웠다. 번역, 언어학에 탁월했다. 산스키리트어, 라틴어들,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영향을 받았다. 브레이너드의 일기책은 헨리 마틴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가족을 돌보지 않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2) 사역
1799년부터 팀 사역을 16년 동안 사역을 하였다. 그의 동료 두 사람이 없었다면 윌리암 케리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마쉬맨은 말씀에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들은 보완적인 협력을 하였다. 윌리암 케리는 협조적이었고 열심히 했지만 몸을 낮추고 책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다. 마쉬맨 부인 해나 마쉬맨의 역할이 좋았다. 윌리암 케리에게 너무 많은 공적을 돌림으로 나머지 두 사람에게 공적을 덜 돌리게 되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외톨박이 선교사가 되지 않았을까? 팀 사역이 효과적으로 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윌리암 케리는 자비량 선교를 목표로 삼았다. 완전 자립을 못했지만 세속 직업을 통해서 그렇게 했다. 교수, 인쇄물, 염료, 학교를 통해서 재정적으로 자립을 하였다. 성경 번역은 중국어 까지 번역 하였고 세람포 대학을 세웠다. 윌리암 케리는 현지 중심 선교부를 하려다가 좌절 되었다. 윌리암 케리는 전략가인가? 선교의 원리, 현지 문화 존중, 교육 사업 구도, 성경 번역들을 하였다. 후세대 선교사들은 식민지 세력을 등에 업고 사역을 했다.
(3) 공헌
윌리암 케리는 선교에 대한 신학적 장벽을 해결해 주었다. 윌리암 케리 당시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인 면까지 연장시킨 일부 칼빈주의 신학이 선교에 장애가 되고 있었다. 침례교 목사였던 윌리엄 케리가 침례교 목회자 모임에서 선교적 필요를 강조하였을 때 당시 영국 특수침례교회 지도자의 응답은 “만약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의 회심을 기뻐하신다면 당신이나 나의 도움 없이도 주님은 그들을 회심시킬 것이요”라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특수침례교회를 붙잡고 있던 신학이 어떤 것인가를 잘 반영시켜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케리는 1792년에 소책자를 쓰는데 제목은 “이교도의 회심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하여야 할 그리스도의 책임에 대한 질문”(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이었다. 이 책에서 케리는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주권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함을 보였고 또한 당시 사람들에게 편만하던 지상위임명령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생각을 단호히 부인하였다. 이 작은 책자는 당시 선교신학의 방향을 바꾸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일이다. 위의 소책자에서 그는 세상의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며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도전을 행하였다. 이는 당시 선교지에 대한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무지에 상당한 도전이 되었다.
선교단체의 조직이었다.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이미 언급된 대로 개신교회는 가톨릭과는 달리 효율적인 선교조직이 없었다. 이에 케리는 교회의 조직 이외에 선교회(Mission society)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선교라는 구체적 목적을 위해서 소수의 헌신자들로 조직되어서 성도들의 자발적인 재정 지원을 받는 파라처치(parachurch)의 형태였다. 케리의 제안에 의해서 1792년에 열두 명의 특수침례교회 목사들로 구성된 최초의 선교회인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BMS)’가 구성되어져서 케리는 이 선교회의 첫 선교사로 파송되어진다. 침례교 선교회에 이어서 1795년에 최초의 초교파 선교회인 ‘런던선교회(Lundon Missionary Society, LMS)’가 구성되어지고 이후로 다양한 선교회들이 구성되어져서 선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활동이 번창하게 되었다. 케리의 마지막 공헌은 성경번역과 보급 활동이었다. 케리가 최초의 성경번역자는 아니지만 그는 성경번역과 보급을 선교의 중요한 전략으로 확립시켰다. 이는 근대 개신교 선교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윌리엄 케리의 공헌들로 인해서 18세기말에 유럽의 교회들은 비로소 선교에 눈을 뜨게 되었고 위대한 선교의 시기가 문을 열게 된 것이다
4) 개신교 선교의 1기
제 1기는 윌리암 케리에 의하여 시작되어진다. 케리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아니다. 이미 이전에 모라비안이라든지 소수의 개신교 사역자들이 선교지에서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케리의 ‘이교도의 회심을 위한 질문서’와 선교회의 조직은 이후 지속적인 선교 시도가 대서양 연안과 유럽과 북미주 교회들로 하여금 일어나도록 하는 시초가 되었다. 케리의 파송 이후 25년 내에 유럽과 북미주에 12개 이상의 선교기관이 형성되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선교의 제 1기라고 불리우는 시대가 시작되게 되었다. 케리 자신은 1793년에 인도로 파송되어져서 수많은 역경과 자녀들의 희생을 경험하면서 세람포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하였다.
침례교 선교회에 이어서 파송되어진 죠수아 매쉬맨과 윌리엄 워드와 함께 유명한 ‘세람포의 삼총사’를 이루어서 사역에 매진하였다. 케리의 선교전략은 다섯 가지 주요 활동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다섯 가지는 설교, 현지어로 된 성경의 번역과 보급, 교회개척, 타종교에 대한 연구, 그리고 사역자 훈련이었다. 케리는 파송이후 영국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고 40년의 사역을 마치고 인도에서 죽었는데 그 동안에 그는 40권의 성경을 번역하고 열두 개의 미션 스테이션을 개척하며 인도의 다양한 언어들에 대한 문법과 사전을 편찬했다. 또 힌두교의 사회적 악습들을 철폐시키고 인도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케리의 자녀 중 3명이 선교사가 되어서 사역을 이어 나갔다.
케리의 사역은 인도 현지에 영향을 끼친 것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을 깨우치는 역할을 하였다. 미국에서는 케리의 책에 도전을 받은 5명의 학생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기도모임을 하다가 후에 ‘건초더미 기도모임(Haystack Prayer Meeting)’으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선교운동이 시작되어진다. 미국 해외선교회(America Board of Commissioners of Foreign Missions)가 형성되어지고 최초의 선교사들의 파송되어진다. 이 초기 그룹에는 미얀마에 기독교를 전한 아도니럼 져드슨 부부가 포함된다. 보스톤에서는 케리의 도전을 받은 여자들이 여성 기도모임(Women‘s missionary prayer group)이 선교의 후원자로 적극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1865년에는 독신여성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회가 구성되어졌다.
제 1기 선교는 주로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에는 유럽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거점도시들이 발달해 있었다. 제 1기 선교는 이러한 유럽의 문명과 접촉이 이루어진 아시아와 아프리카 해변지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개신교회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윌리암 케리와 동연배인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동인도 회사의 목사로 인도에 도착하여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은 1807년 중국에서 개신교 선교사역의 문을 열게 되었다. 중국어 성경도 이 시기에 번역 된다. 1796년에는 일단의 선교사들이 LMS 소속으로 남태평양의 섬으로 파송되어지기도 하였고 1799년에는 존 디도어 반더캠프(John Theodore Vanderkemp)가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 지역 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2년에 파송되어져서 미얀마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시기의 선교 특징은 선교사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으로 빛을 발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생소한 환경과 풍토병 등에 대처할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였던 시절에 선교사들의 희생은 클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초반 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평균 생존기간이 단 2년에 불과하였다. 10년 이상을 사역지에서 생존할 확률은 20명 중 1명뿐이었다. 그러나 유럽 젊은이들의 아프리카로 향한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고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점차 어두움의 대륙에 빛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특징은 선교전략에 대한 통찰력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헨리 밴과 같은 선교학자들이 나오게 되고 선교지 교회의 구조에 대한 이해들이 발전되어 갔다.
그 때 당시의 선교사들은 어떤 종류의 대우를 받았는가? 선교사들은 사역을 하는 동안 무관심, 의심, 적대감, 핍박, 투옥 등을 당하였다. 그들의 집이 수없이 약탈당하였고 불태워졌으며 교회가 황폐되었고 생명이 위협받았다. 수천 명이 건강이 상해 집으로 돌아갔다. 또한 다른 수천 명은 열대병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였다. 수 백 명이 순교자가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주저함이나 후회함 없이 견디었다. 그들의 사랑에는 끝이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들은 성자도, 천사들도 아니었으나 대개가 훌륭한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었다. 통상적으로 선교사들은 환영을 받지 못하였고 호감을 얻지 못하였으며 신뢰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는 배척받았다. 눈먼 이방인이 그저 선교사가 와서 자기를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기를 기다렸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그들은 암흑 속에 있었으나 그들 스스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빚을 붙잡아야 한다고 서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라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뿌린 씨앗이 옥토 밭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수많은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인내와 정력이 요구되었다.
미국인 최초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3년 랭군에 도착하였다. 시작 때부터 그의 삶은 강한 영혼을 파괴하려고 계획된 듯한 어려움과 좌절에 휘말렸다. 그러나 이 모든 적대상황 속에서 그는 꿋꿋이 참아내어 마침내 6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중국에 갔던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은 첫 개종자를 얻는데 7년을 기다렸다. 잠비아의 원시감리교회는 최초로 아프리카인 한 사람을 세례 주기까지 13년 동안이나 피땀 흘려 노력하였다. 태국에서 미국 회중교회 선교사들이 1831년 도착하여 18년 동안이나 노력했으나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노력에 힘을 잃고 1849년 퇴각하였다. 미국 침례교인들도 17년 동안 헛수고를 하고 그곳을 떠난 후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 장로교회도 1840년에 19년 동안 노력한 끝에 최초로 태국인 개종자를 얻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 황달병, 장티푸스, 이질 등이 살인자였다. 아프리카 선교 비화는 모험과 인내, 궁핍, 질병, 쇠약, 죽음으로 점철되는 눈물겨운 이야기들이다. 선구적 선교사들은 이 거대한 암흑의 대륙 심장부에 위험을 무릎 쓰고 고생과 고통을 견디며 관통하였다. 그들이 남긴 자국은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우간다로 떠나기 위대 중국 선교부에 고별사를 할 때 알렉산더 맥케이는 말하기를 “6개월 이내에 당신들은 아마 우리들 중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을 때 낙담하지 말고 다른 누군가를,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즉시 보내십시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3개월 안에 8명 중에 한 명이 죽었고 1년 안에 5명이 죽었으며, 2년이 되었을 때는 맥케이 자신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몰려드는 죽음의 위협을 대면하면서 그는 12년간을 투쟁하다가 결국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서부 아프리카는 ‘백인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에 아프리카를 방문했던 아들라이 스티븐슨 2세는 그가 본 선교사들의 무덤 숫자에 아연실색하였다. 그는 “오! 하나님 이토록 많은 선교사들이 여기서 죽은 줄 몰랐습니다”라고 외쳤다. 최초의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멜빌 콕스는 1833년 리베리아에 도착하였는데 4개월 안에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천 명이 죽더라도 아프리카를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였다.
5) 개신교 선교의 제 2기
제 2기 선교의 시대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에 의해서 열리게 된다. 제 1기 시대와 제 2기의 주요 차이점은 선교지역이 해변지역에서 내지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도 서구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내지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전염병과 풍토병에 대한 공부는 가히 이해가 될 만한 수준이었다.
(1)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
허드슨 테일러는 믿음과 기도로서 지속적으로 진취적 기상을 세워나간 영적 거장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통한 기도만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믿었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계신다. 그는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는 약속하신 것을 이룰 수 있으시고 또 이룰 의지가 있으시다”.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5월 21일 영국 요크셔 지방 본슬리의 경건한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테일러는 어렸을 때 중국 선교사로 결심하였다.
허드슨 선교사를 흠 없는 영웅으로 묘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는 15세에 선교사가 되겠다는 바람을 표시했다. 18살 때 회심을 경험 하고 의학을 시작하였다. 스스로 선교사역을 염두 해 두고 자기 부인의 훈련을 하였다. 약국 조수로서 월급을 받지 못했지만 기도만 하고 기다리는 자기 부인의 신앙 훈련을 하였다. 기도만으로 사는 훈련을 하였다. ‘비’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결국 하지 않고 21세의 나이로 선교지로 홀로 떠났다. 이른 나이에 안수 받지도 않고 선교지로 떠났다. 나이가 어려서 무시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중국식 복장을 강조하는 것은 갈등 요소가 되었다. 성품적으로 섬세한 사람이어서 향수병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재정 후원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다. 중국어를 빨리 마스터하려고 하다가 좌절감도 있었다. 스트레스의 출구는 식물 재배 곤충 채집이었다.
테일러는 1853년 중국 복음화 선교회의 후원으로 선교지로 떠났다. 그 선교회를 이끄는 독일인 카를 구출라프 선교사는 중국 해안선을 따라 폭넓은 여행 경험으로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구출라프가 테일러에게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구출라프의 용기, 성품, 모험심, 중국관습에 대한 적응성, 선교원칙과 방법들은 그를 따르고자 했던 젊은 테일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테일러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테일러의 행동과 태도들은 그가 구출라프를 잠재의식적으로 본받으려 했음을 시사한다.
중국 복음화 선교회가 그의 연간 선교활동비 400달러를 감당 못하게 될 때 그는 시시때때로 예민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아주 수치스러운 경험을 겪으며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그의 태도와 삶의 양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를 경솔하고 무모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삭발하고 변발을 기르며 중국옷을 입기로 결정한 그의 모습 때문에 외국 사회에 소문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동료 선교사들까지도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1857년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사퇴한 후에 믿음으로 살기로 하였다.
그는 선교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하는데 은사가 있었다. 성품 면에서 감화력이 있었고 매력 있는 인물이었다. 1865년 중국 내지 선교회를 탄생시켰다. 중국 내지 선교회는 혼자서 개발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른 선교사와 어울려 지내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선교사들을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내륙 선교를 꿈꾸었다. 중국식 복장을 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었고, 마테오릿치 같은 경우는 중국 승려의 복장을 하였다. 염색을 할 때 염색약이 눈에 들어가 실명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좋았다. 현지인들이 호응을 하였다.
마리아 다이어를 상해에서 만나서(중국 선교사 자녀, 어려서 홀로 지냄, 언니가 있었음) 결혼을 하게 되었다. 청혼을 할 때 거절을 하더라도 너무 빨리 거절하지 말라고 했는데 거절을 빨리 하였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남을 격려해주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러셀 목사가 영국에 있는 마리아의 친척에게 편지를 써서 결혼을 방해 했지만 비밀리에 만나고 약혼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허드슨은 선교사 모집을 할 때 일반인을 모집하였다. 선교사들에게 강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모든 사항을 현지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이 아닌 중국에 선교 본부를 두었다. 본국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에서 선교정책을 결정하기를 원했다. 모집 선교사 15명 중에 7명이 여성 독신자였다.
그는 자신만이 중국식 복장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니꼴이라는 대장장이 출신 선교사가 중국식 복장을 거절했다. 이 선교사와 고생을 하면서 2년을 끌었는데, 결국 이 사람이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8살 된 딸이 아프게 되고 치료를 하게 되지만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사역을 하였는데 결국 딸이 뇌수막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이 단합이 되는 기회가 되었다. 1868년 양주에서 중국 내지 선교회(CIM) 선교사들이 공격을 받는 일이 있었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보복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가 침체기를 겪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을 못하게 되어 우울증, 영적 침체기가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하겠다. 그런 역사를 깨달아가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주님에게 의존하고 그 안에서 쉬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새사람으로 만들었다” 영적인 갱신에 대해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내고 떨어져 보냈다. 그렇게 떨어져 교육 받도록 준비 하는 과정에서 5살의 아들이 사망하게 되었다. 3명의 자녀를 영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이별의 충격으로 병을 앓게 되고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남자를 낳게 되고 남자 아이가 두주가 되지 않아 죽게 되고 마리아가 출산 후유증으로 죽게 된다. 그 후 허드슨 테일러는 가깝게 지냈던 27살의 제니 포닝과 재혼을 하였다.
CIM이 성공적으로 일어났지만 선교사 자질 문제로 영국 교회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세상적인 지혜는 부족했지만 헌신은 탁월했다. 엘리자벳 윌슨이라는 사람은 부모를 부양하느라 오지 못하다가 부모가 세상 떠난 다음에 50세가 되어 CIM에 조인하였다. 싱글 선교사들이 선교사로 많은 지원을 하였다. 부인 선교사도 동일한 선교사로 준비되지 않으면 선교사로 오지 말라고 하였고 여성은 주부로만 오지 말라고 하였다. 1830년 어간에는 중국 전체에 640명의 선교사를 가진 선교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선교사 분산 정책을 펼쳐 중국 전역으로 분산시켰다. 테일러가 살았을 때 CIM 선교사의 숫자는 800명 정도에 도달하였다.
의화단 사건으로 153명의 선교사들과 자녀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중에 91명의 선교사가 CIM 선교사였다. 이 사건이 영국 의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무모한 선교사가 되었다. 헨리 밴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조지 뮬러는 끝까지 허드슨을 지지했고 선교비도 보냈다. 1902년허드슨은 CIM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스위스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1904년에 부인이 사망하였다. 그 후 CIM은 1914년 세계에서 가장 큰 선교 단체가 되었다. 1964년에 OMF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교회 개척이 선교 전략이 되었고 전도 중심의 선교 단체가 되었다. 나중에 전략이 바뀌게 되어 미종족 전도 선교 전략 등을 하게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해안선 선교에서 내륙 선교를 하게 된 것이다. 풀러 신학교 교수인 아더 글레서는 테일러를 이렇게 칭찬하였다. “그는 교만하지 않고 열심이 있었으며, 편협하지 않고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는 피상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며 이기적이지 않고 카리스마적이었습니다.
(2) 2기 시대의 특징
제 2기 선교는 제 1기에 비교하여 느린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이는 이 선교운동에 대하여 많은 질문과 회의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선교기관들이 많은데 왜 또 새로운 선교기관을 구성해야 하는가?”. “아직 해변도시 중심 지역에도 선교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내지로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나 선교는 서서히 서구 문명이 자리를 잡지 않은 내지와 오지를 향해서 방향을 잡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학생자원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일어나게 되었다. 지금부터 100 여 년 전의 미국의 대학생 숫자는 현제 숫자의 1/37밖에 되지 않았지만 학생자원운동의 열매로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고 이 중 실제 2만 명 이상이 선교사로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서 비로소 지구상의 구석구석에 개신교회가 설립되어지게 되었다. 떠나지 못한 8만여 명의 헌신자들을 통해서도 미국교회 내에 든든한 선교헌신의 기초가 만들어지고 평신도 선교운동이 시작되어지게 된다.
제2기 선교는 주로 미국교회가 주도하는 시대였다. 특출한 선교사로서는 50년 이상을 중국 지식층 가운데서 선교한 티모디 리챠드와 중국 산동지방에서 사역한 장로교 선교사로서 그의 선교정책이 한국 선교에 절대적 공헌을 한 존 네비우스(John Nevius), 일본인으로서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가서 선교활동을 한 죠셉 하디 니시마(Joshep Hardy Neesima), 인도에서 선교사로 섬긴 여선교사인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그리고 이슬람의 사도로 유명한 사무엘 쯔웨머(Samuel Zwemer)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전형적으로 서구 식민통치의 보호를 받은 때였다. 식민통치하의 선교활동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장점으로는 비기독교권에 기독교가 합법적으로 교두보를 형성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하였고 선교사들의 신분과 안전이 보장되었다. 선교지 교회는 식민정부의 보호 아래서 유리한 성장의 기회들을 누렸다. 이에 비해 단점으로는 선교사들이 쉽게,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인식되어지게 된 것이다. 서구 선교사들에게는 가부장적 선교개념이 쉽게 자리 잡게 되었다. 문화우월주의에 따른 현지 문화의 서구화에도 선교사들이 앞장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지상위임 명령이 구체화되어졌고 라토렛이 표현한대로 ‘개신교 선교 도약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 시기의 선교의 특징 중의 하나는 신앙선교회들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확실한 후원처를 갖지 않고 그들의 필요를 오로지 주님께만 의지하는 선교이며, 이런 정신을 모토로 생겨난 선교회가 바로 신앙선교회(Faith Mission)이다. ‘제나 의료 선교회’, ‘영국 시리아 선교회’, ‘중국 내지 선교회’등이 있다. 이 밖에도 ‘여성 연합선교회’, ‘수단 내지 선교회(SIM)’등도 유명한 선교회들이다.
신앙 선교회의 특징들은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선교했던 점이다. 신앙 선교단체들은 선교사가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런 선교원칙은 재정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사역 수행에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선교를 수행하였다. 신앙 선교회원들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에 더 민감하게 순종하였다. 따라서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선교를 수행하였다.
신앙선교단체들은 토착교회 설립을 강조하였다. 신앙선교단체들은 영혼 구원을 가장 중요한 선교의 목적으로 생각했고 이 일을 위해서는 토착교회 설립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실례로 수단 내지 선교회는 서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서부 아프리카 복음주의 교회(ECWA)를 설립했는데, 수단내지 선교회의 선교정책에 따라 토착교회 설립을 강조한 결과 수 백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영혼 구원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교의 목적은 영원한 형벌에 고통 받을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하고 지옥 불에 빠지는 영혼들의 처절한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하며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들 역시 현지인들의 사회적, 인간적 필요를 채우는 의료 및 교육 사업 등에 적극적이었지만 여전히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가 가장 우선적인 사역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선교전략을 개발하였다. 신앙선교단체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바쳐서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기에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있어서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효과적인 선교전략들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6) 개신교 선교의 제 3기
1945년에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어지면서 20세기는 급격한 변화들을 경험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를 현대선교의 시기라고 부르는데 선교에서도 여러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개신교 선교는 제 3기에 들어가게 된다. 개신교 선교 3기는 제 1, 2기와 달리 지리적 영역의 관심을 떠나 종족 단위의 선교시대로 들어가면서 미전도 종족(unreached people, hidden people)에 대한 선교의 시기이다. 이 제 3기 선교시대의 문을 연 사람들은 학생자원운동의 열매로 등장한 카메론 타운젠트(Cameron Townsend)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d McGavran)이다. 제 2기 선교시대는 문화에 대한 개신교회들의 개념이 변화되는 1980년까지 지속되어지지만 제 3기 선교는 타운젠트가 위클리프 선교회를 창시한 193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카메룬 타운젠트는 윌리엄 케리와 허드슨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복음이 도달되지 못한 사람들을 발견해내는 선구자의 역할을 한다. 1917년 과테말라로 선교를 떠난 타운젠트는 스페인어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이 적었고 타운젠트는 그 원인이 언어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스페인어는 이들에게 통용어이기는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토착어(heart language)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인디언이 타운젠트에게 도전하기를 “당신의 하나님이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우리의 토착어로 말을 하지 못합니까?” 라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타운젠트는 선교의 대상이 언어와 종족에 따른 그룹이어야 함을 발견하게 된다. 타운젠트는 1934년에 캠프 위클리프를 설립하고 언어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캠프 위클리프가 하계언어학교와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s, WBT)가 되었다. 이때로부터 새로운 선교의 시기가 시작되어진 것이다.
타운젠트보다 조금 늦게 도날드 맥가브란도 비슷한 발견을 하게 된다. 2대째 인도 선교사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맥가브란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도 선교사로 헌신하여 인도에 오게 된다. 선교부의 총무로서 인도에서의 선교사역이 부진함을 알게 된 맥가브란은 총무직을 사임하고 자신이 직접 교회개척선교사로 섬기면서 그 원인을 연구하였다. 맥가브란은 연구결과로 사회는 각 개인의 구성체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으로 구성되어진 종족그룹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맥가브란의 가장 큰 공헌은 종족그룹(People group)이라는 개념을 발견해 낸 것이라고 하겠다. 타운젠트와 함께 이 맥가브란의 발견은 새로운 선교 시기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로부터 선교는 국가 단위로부터 벗어나서 종족 단위의 선교로 발전하였다. 아직 이 제 3기 선교 시기가 진행 중이므로 3기의 특징을 단정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 대두된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제 3기 선교시대는 제 2/3세계 교회와 서구 교회의 동역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선교의 인적 자원은 2/3 세계 교회가 더 많이 배출하게 될 것이되 서구교회의 선교가 완전히 퇴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서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들은 철저하게 이 제 3기 선교의 특징을 따라가며 긍정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2/3세계 교회들의 분포에 따라서 지역별로 다양한 학생선교운동들이 일어나게 될 것으로 예상되어진다.
제 1기와 제 2기의 고전적인 선교접근과는 달리 제 3기는 다양하고 새로운 선교접근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평신도, 단기, 전문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향상되어졌다. 국제적, 초교파적인 선교의 연합과 네트워킹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발전하는 미디어의 도움을 받아서 정보의 공유, 동일 프로젝트에 교파나 국적의 벽을 넘어서는 참여, 교회개척과 지도자 양성 등에 있어서의 협력 등의 새로운 특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200년의 교회 선교역사를 돌아볼 때 팔레스타인 땅의 적은 무리에서 출발한 선교의 흐름은 이제 전 대륙에 전파되어지고 마지막 남은 미전도 종족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단계에 있다. 또한 현시대를 표현할 때 혼란과 도전의 시대로서 넘어야 할 과제와 도전은 산적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머지 선교역사의 장을 채워야 하는 책임이 있는 때가 되었다.
7) 역사를 통해 본 선교 활동에 대한 회고(허버트 케인. 1993))
기독교 선교활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그것이 시도되었다는 것조차 놀라운 일이다. 이토록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실수가 저질러졌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스티븐 니일. 1980)
(1) 선교사들의 과오
선교사들은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서구 문명이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문명과 기독교를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면서 기도편지에 그들이 게으르고 더러우며 부정직하고 무책임하고 신용할 수 없다고 묘사하였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하층민이었기에 이 말이 한편으로 사실이기도 하였다. 문제는 그들이 본 어두운 면만을 말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방 종교’에 대한 견해가 부족했다. 그들은 이들 종교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듣는 이들에게 매우 무례한 말로 우상숭배에 대적하여 설교하곤 하였다. 토착종교를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그것들이 전적으로 거짓이라 하여 즉석에서 배척하였다. 나중에야 그들은 그런 방법들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구별하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문명을 그대로 가지고 갔다. 도덕적 사회적 금기들과 개인적 편견과 편애, 윤리적, 법적 규범, 경제적, 정치적 제도,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그들의 개종자들에게 그들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그들의 목에 둘러놓았다. 제 3세계에서 자라난 기독교는 ‘미국산’이었다. 외국 종교였을 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백인들의 종교라고 하였다. 그것은 서구적 관습의 특징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복음과 함께 교단주의를 수출하였다. 처음에 선교사들은 교단을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교파를 알리는 것에 힘을 쏟았다. 선교지 사람들은 교단주의에 많은 혼란을 느꼈다. 교단주의는 서구에서는 필요할지 모르지만 교회가 들어가는 곳에는 별로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인만 되면 되었는데 장로교인, 침례교인이 되느라 사람들은 많은 혼동을 느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가 토착화하도록 격려하는데 실패했다. 선교사들은 교회 건물을 지을 때, 뾰족탑, 종, 십자가등으로 끝마무리를 하였다. 그들은 서양식 가사와 곡조의 찬송가를 소개하였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아주 고상한 것인 드럼과 춤은 선교사들에게 금기사항이었다. 그 대신 그들은 악기들을 서양에서 들여왔다. 예배 의식도 서양식이었다. 이점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가장 심했다. 그들은 세계 모든 지역이 라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신학교육까지 서구에서 행해지는 고전적인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선교사들의 또 다른 잘못은 간섭주의다. 19세기에 아프리카에서 초기 개종자들은 대부분 도망한 노예들이나 부족사회의 무례한 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들을 ‘선교센터’에 들여와 음식, 의복, 주거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고 농토를 만들 땅과 씨앗, 연장을 주었으며 무역을 가르쳤다. 그 대가로 선교사들이 요구한 것은 순종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공동체의 훈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은 징벌을 받았다. 드문 얘기이지만 매질도 하였다. 최악의 징벌은 축출이었다. 이것이 극심한 간섭주의다. 간섭주의가 초기에는 어느 정도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잘못은 계속해서 간섭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교지의 기독교인들의 응석을 받아주고 자극을 주고 보호해주어야 하는 어린아이들로만 생각하고 직책을 맡고 훈련 받은 채로 행동하며 교회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어른들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서구에서 지원한 자금을 사용하는데 현명하지 못했다. 서구의 자금이 너무도 자유로이 오랜 세월 동안 개발도상국에 있는 교회들에게 해롭게 사용되었다. 선교사들은 돈을 가지고 관대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개종한 현지인 기독교인들은 직업을 얻거나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선교지 사람들에게 선교사들은 엄청난 부자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식민제도와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선교사들은 19세기 유럽 국가들의 거대한 외압세력의 일부였으며 그것을 통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남태평양의 모든 지역의 제국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식민주의 행정관들과 기독교 선교사들은 같은 배를 타고 여행했으며 같은 국기 밑에서 봉사하였고 같은 나라에서 활동했고 상호 협조적이었다. 선교사들은 문명화하는 선교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중산계급의 시민들이 서양세력에 호의적이 되도록 하고 서양법률에 순종하도록 유도하여 결과적으로 식민주의자들이 그 영역을 통치하기에 용이하도록 해 주었다. 식민 행정부는 선교사들에게 땅을 주어 선교본부를 삼게 하였고 학교 부지를 허락하여 위험시에 보호해주는 등 그들의 호의에 친절하게 보답하였다.
(2) 선교사들의 공적
선교사들은 그들이 사역한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선교사들의 간섭주의 마저도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이 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8). 그들은 그들의 자녀를 사랑함 같이 그들을 사랑하였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에나 평화시에나 전쟁 중에나 역경 중에서나 번영할 때나 살아서나 죽어서나 선교사들은 항상 사랑하고 도우며 관심을 가지며 나누어 주었다. 신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라면 그들 자신의 자녀들과도 1년 이상 떨어져 살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많은 잘못은 있었지만 사랑의 결핍은 없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장티푸스, 황달병, 선 페스트 등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할 때 선교사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병든 자들을 간호하고 죽은 자들을 매장하느라 그들의 선교부를 떠나지 않고 지켰다. 한 현지인의 고백이다. “그는 우리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우리들을 대단히 사랑했습니다. 예, 너무너무 많이 우리를 사랑했지요”.
선교사들은 토착문화에 대한 진실한 평가를 하였다. 선교사들이 토착문화를 파괴하고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선교사들은 선교지 문화를 보전하려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토착 언어를 습득하였다. 사람들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의 경외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언어를 배우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언어를 배웠다. 많은 선교지 언어는 문어체가 없었다. 구어를 배우고 난 후 선교사들이 출발선에서 시작하여 입문서나 사전의 도움 없이 문자를 고안하여 그들의 개종자들에게 그 문자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성경을 번역하였다. 성경 번역 작업은 엄청난 작업이다. 번역 작업을 하기 위해 능숙한 언어 실력을 얻으려고 선교사들은 보통 10년을 준비한다. 문법, 구문, 어형론을 포함한 언어의 세밀한 부분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민족의 문화를 철저히 익혀야만 하는 것이다. 번역의 기술적인 문제는 엄청나게 많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 17:3). 어떤 문화에서는 금이나 은이나 도가니나 풀무를 본적이 없다. 이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성경 번역은 다니엘의 지혜와 욥의 인내가 필요하다. 오늘날 성경번역가들은 훈련받은 언어학자들이다.
선교사들은 제 3세계 사람들에게 근대 과학적 교육을 시켰다. 나라들마다 최초로 개설된 학교들은 기독교계 학교였다.
선교사들이야 말로 원주민들의 잠재력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남미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인권을 인정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깨닫게 해준 것은 선교사들의 엄청난 공로이다.
선교사들은 병원, 보건소, 의과대학들을 설립하였다.
선교사들은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소개하였다.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방법이 아닌 간접적인 방법을 통하여 이 일들을 해냈다. 조용히, 꾸준히, 조심성 있게 그들은 혁명적인 메시지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임무를 수행해갔다. 인도에서의 천민학대제도, 과부의 화형, 중국에서의 전족, 축첩제도, 기타 다른 나라에서의 쌍둥이 살해 등은 이제 국가법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이러한 악습에 대항하여 최초로 굉장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도 통렬한 비난을 했던 이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이 동서양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상호관련을 갖도록 도왔다. 세계의 상호이해는 세계평화에 필수불가결하다. 선교사들은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선교사들은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교회는 진실로 세계적인 기관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들의 최고 목적은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졌고 성경이 번역되었으며, 기독교 문서가 전파되었고 초신자들이 신앙교육을 받았고 개종자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목사, 전도자들, 전도하려는 부인들이 훈련받았고 교회들이 조직되었고 성례전이 집행되었다.
“선교사들은 서양의 영향력을 중국인들에게 끼치려고 최대의 노력을 했던 일단의 외국인들이었다. 고집불통이고 편협하기도 했으며 가끔 미신적이기도 하고 때때로 거만하기까지 했던 이들은 서양문화와 그들 특유의 기독교의 우월함을 확신하였다. 선교사들을 비판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상당한 아니 대단한 희생을 치르면서 비위생적이고 참기 힘든 환경에서 불충분한 봉급을 받으며 때로 그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의 생명과 자신들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중국에 와서 그들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원하지 않는 이방인들을 위해 불굴의 의지로 노동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선교사업의 주요 전제들과 방법, 결과에 어떠한 최종판결이 나든지 간에 순수한 박애정신과 영웅적인 신앙은 인류역사의 가장 밝은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라토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