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몸의 회복.
1. 14장은 앞의 13장에서 진단한 몸의 피부병과 집안에 생기는 곰팡이에 대한 처방과 회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병자를 다시 언약 공동체로 받아들이고 교제를 회복하게 하는 은혜와 사랑의 규정입니다. 병에서 나아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정결의식이 필요했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피의 속죄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먼저 피부병의 치유에 따른 정결의식입니다(1~32). 제사장이 깨끗해졌다고 선언한 사람은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가져와 정결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한 마리의 새는 흐르는 물에 놓인 질그릇 안에서 잡아, 그 피를 질그릇 안의 깨끗한 물과 섞이게 했고, 그것을 백향목과 함께 우슬초를 이용해서 예배자에게 일곱 번 뿌렸습니다. 살려둔 새는 피에 섞인 물에 살짝 담갔다가 날려 보냈습니다. 이것은 병자가 죽은 새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하늘을 날게 된 새와 같이 자유를 얻었으며,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3. 이 정결의식이 끝나면 그는 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아직 자기 집(장막)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완전한 회복은 속죄가 완성되어야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8일째 되는 날,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가 거룩해질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제사는 속건제, 속죄제, 번제와 소제가 차례로 드려졌습니다. 속건제가 드려진 것은 그가 진 밖에 있음으로써 정상적인 제사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지 못한 것을 보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4. 속건제물로 수양과 기름을 드리는 것은 빈부를 떠나서 모두에게 동일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가혹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신뢰하게 하는 규정입니다.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예배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에 발랐는데, 기름도 그와 같이 했습니다. 여기서 피가 예배자를 제단과 연결시켰다면, 기름은 그를 제사장과 연결시켜줍니다. 이 기름 바름은 성도들로 하여금 마치 제사장들과 같이 깨끗하고 정결하게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합당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이어지는 속죄제와 번제에서는 양을 드려야 했는데, 속건제와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은 새를 드리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5.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분입니다(출 15:26; 신 32:39). 성도는 모든 회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분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회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6. 본문에는 전혀 치료하는 방법, 병을 낫는 방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회복의 기쁨은 미래의 영광을 미리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치유되고 회복된 사람이 속건제로 하나님의 것을 보상한 것은, 오늘날에도 회복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감사헌금과 같은 형태의 찬미의 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히 13:15). 성경은 결코 영적 치유만을 말하고, 몸의 치유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7. 곰팡이가 생긴 집에 대한 회복을 다루는 것이 본문의 나머지 부분입니다(33~57). 거룩함과 온전함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온전함은 거룩한 것 즉 하나님의 속성의 반영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모든 환경의 온전함이 본문에서 다루어집니다.
8.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집의 오염들을 제거하기를 바라십니다(35~47). 백성들의 거주지는 오염과 타락 그리고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집을 회복하는 것과 사람의 몸을 회복하는 정결의식의 차이가 있다면 집에 대해서는 제사가 드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사람이나 집으로부터 더러움을 제거하실 수 있으시다는 사실을 본문은 교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이런 거룩과 속됨, 그리고 정결함과 부정함의 구별을 하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57).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야 하고,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9. 그리스도인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언젠가 모든 더러움이 하나님의 최후 구속과 회복에 의해 새롭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이나 더러움만이 아니라, 그 원인이 된 죄까지도 치유하시고 고치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믿고 누립니다. 옛 구약 성도들은 그것을 정결의식과 제사의식을 통해서 멀리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삶과 더 나아가 모든 주변이 얼마나 거룩하고 온전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버릴 것과 정리할 것이 있는지, 당신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돌아보고 있다면 회개하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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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3장에서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며,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됨을 증거했습니다(13:45-46). 본문은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병'은 넓은 의미에서의 '악성 피부병'입니다. 그래서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나병'을 '악성 피부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에게로(1-2절)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환자의 악성 피부병이 나았으면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가야 합니다. 제사장은 환자의 질병이 깨끗하게 나았음을 확인하고, 부정하게 되었던 환자가 다시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정확한 정결 의식을 수행하는데 돕는 역할을 합니다. 본문은 '어떻게 병자를 치료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병자를 정결하게, 즉 예배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게 하는가?'입니다. 그럼으로 본문은 나병으로 인해 부정하게 되어 언약 공동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어떻게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바른 절차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언약 공동체의 핵심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질병의 무서움과 그것에서 회복되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질병에서부터 회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한결같이 강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자칫 우리 앞에 놓인 눈에 보이는 문제 해결에만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바른 절차에 대해 무시하거나 무지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아야 하는 것, 우리가 눈을 들어 회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며,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인 것을 기억하십시다.
악성 피부병이 완치되었다고 해서 진영 밖으로 격리되었던 사람이 마음대로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 거쳐야 하는 분명한 절차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이 절차에 따라 제사장의 완치 선언을 받아야 하며, 그 후 적절한 제물을 드려야만 다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진행되는 예식의 순서를 보면 먼저 진영 밖에서 진행되며, 그가 치유되었으면 진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최종적으로 성소에서 정결 절차를 마무리합니다. 완쾌된 사람의 공간적인 움직임을 보면 가장 거룩하지 않은 곳(진영 밖)에서 가장 거룩한 곳(성소)으로 가는 순서입니다. 먼저 진영 밖에서의 절차입니다.
진영 밖에서(3-9절)
(3-7)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만일 어떤 사람이 나병, 즉 악성 피부병에서 회복되었으면, 먼저 제사장에게 진영 밖에서 자신을 진찰해 줄것을 요청해야 합니다. 제사장이 보기에 그가 완치되었으면 진영 밖에서 치러야 하는 정결 예식을 위해 두 마리의 정결한 새와 백향목 가지, 홍색 털실 한 뭉치, 우슬초 한 포기를 준비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두 마리의 새들 중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에 놓은 질그릇 안에서 잡았습니다. 여기서 '흐르는 물'을 문자 그대로 표현하면 '살아있는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의 피가 질그릇 위에 있는 살아있는 물에 떨어져 섞이면, 남은 새 한 마리와 백향목 가지, 홍색 털실, 우슬초에 물과 섞인 피를 적셔서 완치된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리며 '정하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새는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들에 놓아주었습니다.
진영 밖에서 이루어진 이 의식은 염소를 제물로 바친 속죄일 의식(레 16장)과 유사합니다. 속죄일 의식의 경우에는 염소 한 마리가 속죄 제물로 바쳐지고, 다른 염소는 속죄의 염소가 되어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죽은 염소의 피가 죄를 대속하고, 광야에 풀어준 염소가 죄를 짊어지고 떠나 죄가 잊혀지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나병에서 완치된 사람이 부정에서 정결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한 생명이 죽음으로 그의 부정을 대신해야 하며, 그의 부정은 죽은 새의 피를 통해 살아있는 새에게 옮겨지고, 그 새가 떠나감으로 다시는 그의 부정했던 것이 기억되지 않은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살아있는 물’에 피를 섞어 뿌리는 것과 ‘살아있는 새’를 들에 놓아주는 예식을 통해 죽은 자 같은 취급을 받았던 악성 피부병 환자의 회복이 곧 생명의 회복이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켜줍니다. 이를 통해 진영 밖에서 진영 안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회막으로의 회복은 곧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회복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8-9)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진영 밖에서 진영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두 마리의 새 의식을 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목욕을 하고 진영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진영 안에 들어와서도 바로 장막에 출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진영 안에는 들어 왔으나 7일 동안 장막 밖에서 머물러야 했고, 일곱째 날에 다시 진영 안에 들어올 때처럼 털을 밀고,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덜째 날 드디어 장막 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진영 안에서(10-32절)
진영 안에 들어온지 여덜째 날, 드디어 여호와 앞에서 각종 제사를 드림으로 정결의식의 절차가 마무리 됩니다.
(10-13) 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정결하게 하는 제사장은 정결함을 받을 자와 그 물건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어린 숫양 한 마리를 가져다가 기름 한 록과 아울러 속건제로 드리되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그 어린 숫양은 거룩한 장소 곧 속죄제와 번제물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이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진영 안으로 들어온지 여덜째 날, 제물을 가지고 장막의 한 중앙에 있는 성소로 나아갑니다. 기나긴 격리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하나님 앞에 제사,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이 사람은 얼마나 감격이었겠습니까? 악성 피부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드려야 하는 제사는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 이렇게 네 종류의 제사입니다. 즉, 화목제를 제외한 모든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이 때 제물로는 흠 없는 숫양 두 마리, 일년 된 흠 없는 암양 한 마리, 곡식 가루 10분의 3 에바(6.5리터), 기름 한 록(1/6리터)를 가져와야 합니다.
진영 밖에서 진행된 예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리기까지 모든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모든 절차를 통해 부정으로부터의 회복이 당사자에게 감격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결코 쉽지 않은 순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환자의 정결 의식이 가진 장엄함과 복작함은 그가 육신의 부정으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또한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녀가 된 것도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겪으신 고난의 발자취가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한지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는 외인이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엡 2:12). 그런 우리를 은혜의 자리로,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그리고 이 자리까지 주님의 값비싼 은혜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있었음을 늘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정결함을 받은 자 답게 살아가기로 결단하십시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대해 증거합니다.
(14-20) 제사장은 그 속건제물의 피를 취하여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바를 것이요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왼쪽 손바닥에 따르고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 손가락과 오른쪽 엄지 발가락 곧 속건제물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아직도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물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번제와 소제를 제단에 드려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정결하리라
여기서 속건제물을 드리는 방식이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이 절차는 놀랍게도 레위기 8장에서 소개하는 대제사장의 위임식 때의 절차와 유사합니다. 대제사장의 위임식처럼 제사장은 속건제물인 어린 숫양 한 마리의 피를 받아다가 완치된 환자의 오른쪽 귓볼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랐으며, 기름도 오른쪽 귓볼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랐습니다. 차이라면 아론의 대제사장 취임식 때 모세는 제물의 피와 특별히 준비된 기름을 사용했는데, 이곳에서는 제물의 피와 완치된 사람이 가지고 온 일반 기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위임식 때에 모세가 아론의 오른쪽 귓볼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피와 기름을 바른 것을 통해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완전히 정결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을 치르는 악성 피부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 역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신체가 다 깨끗함을 받았음을 의식을 통해 선포됩니다. 앞서 레위기 13장에서 나병, 즉 악성 피부병 환자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고, 죽은 자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즉,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이제 악성 피부병으로부터 회복된 자는 이런 면에서 볼 때 새로 태어난 자와 같습니다. 그는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자처럼 다시 한번 부여받은 생명을 누립니다. 이제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자, 새 생명을 부여받은 자 답게 새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우리 모두 또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삶을 새롭게 가꾸어 가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잠드는 순간까지, 모두 정결하게 그리고 새롭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총 아래에서 새 생명을 얻은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21-23)만일 그가 가난하여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는 흔들어 자기를 속죄할 속건제를 위하여 어린 숫양 한 마리와 소제를 위하여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그의 힘이 미치는 대로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삼아 여덟째 날에 그 결례를 위하여 그것들을 회막 문 여호와 앞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21절부터 32절은 피부병에서 완치된 사람이 가난하여 세 마리의 짐승을 제물로 드리기 어려울 경우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속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숫양 한 마리를 동일하게 드려야 하지만, 속죄제와 번제는 비둘기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소제로 바칠 곡물도 10분의 3에바 대신 10분의 1에바를 가져오면 됩니다. 모든 제물의 규모가 줄어들었으나 속건제로 드리는 숫양 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속건 제물은 같아야 하며, 앞서 살펴본 절차와 동일하게 속건제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결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의식을 치뤄야 합니다.
진영 밖에서 부정한 삶을 살아가던 나병 환자가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회복의 은총을 누리듯, 죄 많고 부정하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셨음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오늘도 눈을 들어 나를 위해 조롱과 멸시를 받으신 주님의 사랑에 진정한 마음으로 무릎 끓어 응답하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레위기 14장 33-57절은 집에 발생한 악성 곰팡이의 진단과 처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4절에 ‘나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사람과 연결해서 사용할 때는 ‘나병’으로 번역하고 집과 연결해서 사용할 때는 ‘곰팡이’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을 보면 33절 상단에 ‘집에 생기는 곰팡이’라는 소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집에 발생한 곰팡이에 대한 진단과 해결을 제시함으로써 사람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환경에 의해서 사람이 부정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그 부정을 제거하고 거룩을 회복할 것인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집을 볼지니(33-42)
(33-3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를 때에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떤 집에 나병 색점을 발생하게 하거든 그 집 주인은 제사장에게 가서 말하여 알리기를 무슨 색점이 집에 생겼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 색점을 살펴보러 가기 전에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 그 집을 비우도록 명령한 후에 들어가서 그 집을 볼지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거룩한 삶을 요청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400년 이상 집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애굽은 거룩한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아직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는 도상에 있었지만, 가나안 땅의 등기부등본에는 이미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의 주인으로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이라는 표현에서 ‘주는’으로 번역된 분사 형태는 히브리어 문법에서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업은 ‘소유’나 ‘재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물로 주셔서 그 땅의 실제적인 유익들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는 장막 생활을 했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살게 될 것이며 자연스레 장막에서 돌로 지은 집으로 주거 환경의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살 때에 거주하고 있는 집에 어떤 색점이 발생하면 그 집에 거주하는 사람은 제사장에게 집에 나타난 색점에 관하여 알려야했습니다. 제사장은 건축이나 방역에 관한 일을하는 사람이 아닌데 집에 발생한 색점을 제사장에게 알려서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리를 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집에 발생한 색점에 관한 처리를 제사장이 주관하게 한 것은 집에 발생한 색점이 사람의 위생적 차원의 위협뿐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위협이 됨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은 집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에 발생한 색점을 살펴보러 가기 전에 그 집의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집을 비워놓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레위기에서 발견되는 ‘부정한 상태’는 원래부터 부정한 상태와 일시적인 부정으로 구별됩니다. 일시적인 부정은 하루 동안에 제거될 수 있는 수준(11:27-28,31; 15:16-18)부터 장기간에 걸쳐 처리해야 하는 수준(12:2-5)으로 다양합니다. 부정한 것, 부정한 상태는 방치하면 죄가 되기에 즉시 제거해야 했는데 만약 이스라엘 자손이 부정한 상태가 되면 반드시 정결 의식을 통해 부정을 제거한 뒤에 이스라엘 진영 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집에 발생한 색점으로 인해 집이 부정한 상태로 진단을 받으면 부정을 제거하고 정결을 회복해야 했으며 부정한 집으로 인해 사람이 부정하게 된 경우에도 정결 의식을 치러야 했기에 집에 나타난 색점의 문제를 제사장이 처리했던 것입니다.
(37-38) 그 색점을 볼 때에 그 집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제사장은 그 집 문으로 나와 그 집을 이레 동안 폐쇄하였다가
색점이 발생했다는 신고를 받고 해당 집을 방문한 제사장은 집 안팎의 벽을 자세히 살펴 보면서 색점의 상태와 벽의 상태를 진단하였습니다.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고 우묵하게 들어간 상태를 발견하면 제사장은 곧장 그 집에서 나와 그 집을 일주일 동안 폐쇄 조치하였습니다. 이와같은 조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점이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다는 것과 거룩의 기본적인 의미가 세속 혹은 부정으로부터의 분리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9-42) 이레 만에 또 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그는 명령하여 색점 있는 돌을 빼내어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또 집 안 사방을 긁게 하고 그 긁은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에 쏟아버리게 할 것이요 그들은 다른 돌로 그 돌을 대신하며 다른 흙으로 집에 바를지니라
제사장은 색점이 나타나 폐쇄 조치를 하였던 집을 다시 방문하여 집의 상태를 진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색점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퍼지게 된 것을 발견하면 색점이 발생한 돌을 빼내어 부정한 곳에 버리게하고 모든 벽의 표면을 긁어내어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였습니다. ‘성 밖 부정한 곳’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성 밖은 부정한 장소로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거룩의 공간적 개념이 하나님과의 거리와 관계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께 가까울수록 출입이 제한되고 부정한 장소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는 거룩한 장소로 오직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 밖에 있는 성소는 제사장만 출입이 가능했으며 성소 밖에 있는 회막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 밖은 부정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성 안의 어떤 집에 부정이 발생하면 부정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즉시 부정을 제거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곳에 부정이 확산 되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정결하리라(43-53)
(43-45) 돌을 빼내며 집을 긁고 고쳐 바른 후에 색점이 집에 재발하면 제사장은 또 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만일 집에 퍼졌으면 악성 나병인즉 이는 부정하니 그는 그 집을 헐고 돌과 그 재목과 그 집의 모든 흙을 성 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 갈 것이며
색점이 나타난 집을 폐쇄 조치한 이후에 색점이 나타난 벽돌을 제거하고 벽의 표면을 긁어 내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였음에도 다시 색점이 재발하게 되면 그 집을 허물고 모든 폐기물을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려야 했습니다. 집은 사람이 생활하는데 필수 요소이지만 당장 비를 피할 곳을 얻기 위해,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부정한 장소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건물을 폐쇄하거나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건물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거나 건물의 벽을 통해 확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타난 장소는 사람에게 위협이 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타난 장소에 있었던 사람은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 판정을 받아야 격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얻은 교훈 중의 하나는 사람과 환경이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특정 장소에 출입하는 것을 주의하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머무는 곳과 출입하는 곳을 구별하며 깨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며 부정한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할 수 없는 레위기의 원리를 우리가 머물고 출입하는 장소에 적용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결코 죄와 함께하실 수는 없습니다.
(46-53) 그 집을 폐쇄한 날 동안에 들어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그 집에서 자는 자는 그의 옷을 빨 것이요 그 집에서 먹는 자도 그의 옷을 빨 것이니라 그 집을 고쳐 바른 후에 제사장이 들어가 살펴보아서 색점이 집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색점이 나은 것이니 제사장은 그 집을 정하다 하고 그는 그 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새 하나를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과 살아 있는 새를 가져다가 잡은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그는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살아 있는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로 집을 정결하게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성 밖 들에 놓아 주고 그 집을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러면 정결하리라
색점이 발생하여 폐쇄 조치 된 집에 출입한 사람은 부정한 자로 간주 되었고 정결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부정하다고 진단을 받아 폐쇄된 집에 출입한 사람은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의 시작을 일몰 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부정한 집에 출입한 사람은 하루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되었고 부정한 집에서 잠을 잤거나 음식을 먹은 경우에는 입고 있던 옷을 빨아서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폐쇄 된 기간 동안 색점이 집에 퍼지지 않았을 경우 제사장은 그 집을 정하다고 선언하였고 앞서 한센병으로 부정한 상태였던 사람이 회복된 이후에 가졌던 정결 의식과 동일한 방식으로(14:4-9) 정결 의식을 진행했으나 제사는 생략되었습니다.
규례가 이러하니라(54-57)
(54-57) 이는 각종 나병 환부에 대한 규례니 곧 옴과 의복과 가옥의 나병과 돋는 것과 뾰루지와 색점이 어느 때는 부정하고 어느 때는 정함을 가르치는 것이니 나병의 규례가 이러하니라
레위기 13-14장은 사람의 피부와 집에 발생한 부정을 다루었습니다. 피부에 발생한 피부병과 집에 발생한 색점을 동일한 단어로 표현한 만큼 14장 마지막 부분은 13-14장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있습니다. 집에 발생한 색점의 진단과 처리를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머무는 장소와 출입하는 장소에 영적인 주의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삼아 주셨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죄의 지붕 아래에서 자연스레 죄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처가 되어 주셔서 주님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 우리의 부정을 가리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은 부정한 집에 머물 수 없다는 레위기의 교훈을 기억하여 잠깐의 유익과 안정을 위해 부정과 타협했던 삶에서 돌이켜 우리의 가정과 일터를 거룩하게 가꾸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일터에서 부정을 제거하고 거룩한 장소로 가꾸어 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물건이나 장식을 제거하고 그곳에 십자가나 말씀 액자를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환경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수치를 통과하여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선물하신 주님께서 세상을 맑히고 밝히고자 헌신하는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한 복음송의 가사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저 영원한 천국 소망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합니다. 거룩한 환경을 위해 세상과 등지고,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삶을 가꾸어 가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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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4장은 13장에 이은 나병이 나았을 때의 정결예식과 집에 생긴 악성 곰팡이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13장에서 잘 살펴본 대로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병은 넓은 의미에서의 악성피부병입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악성피부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몇 번의 치료로 쉽게 나을 수 있는 피부병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악성피부병이 나았을 때의 정결예식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악성피부병과 관련해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에는 이 세상이라도 부족할 판에 하나님은 ‘왜 악성피부병과 관련해 적지 않은 몇 장의 분량을 할애하고 계시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악성피부병과 관련해 갖게 되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몇 천 년 전에는 환경적으로 악성피부병이 많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도 가난하고 열악한 나라들이 비위생적인 환경적 상황으로 인해 어린이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여러 질병들과 함께 피부병이 많이 있는 것처럼 당시의 환경적 상황으로 인해 악성피부병이 많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악성피부병은 한 귀퉁이의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는 어느 한 지역이나 민족이나 나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의 문제는 전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이며 인간 역사의 문제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부색의 차이를 떠나 역사와 인류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근본적이며 최우선적이며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왜 많은 병들 중에 유독 나병을 악성피부병을 말씀하시는가? 입니다. 분명 모세 당시에도 여러 가지 질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하필 악성피부병인가?’입니다. 다른 질병은 조금 덜 나쁘고 악성피부병만 나쁜 질병이라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악성피부병은 강한 전염성을 갖고 있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13장에서 잘 살펴보았듯이 악성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은 격리시켰습니다.
죄의 무서운 속성 중 하나는 전염성입니다. 죄는 전염됩니다. 죄는 일회성으로 그치거나 개인적으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유전되고 전염되었듯이 죄는 전염됩니다. 그러기에 죄인 된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전염시킵니다. 선함보다 악한 것을 전염시키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전염시키고,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전염시킵니다.
끔찍한 금연 광고를 하면서 담배 판매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내며 흡연을 전염시키고, 금주 광고를 하면서 술 판매로 엄청난 이익을 남기며 음주를 전염시킵니다. 마음을 자극하며 전염시킵니다. 결국은 인생과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참으로 악에 쉽게 동화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전염성을 끊어야 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야 합니다.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인간의 죄의 사슬은 끊어집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의 사슬을 끊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십자가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인간의 죄의 사슬은 완전하게 끊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이며 능력이며 은혜이며 약속입니다.
세 번째로 악성피부병은 결코 저절로 낫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정결예식의 중요한 점은 악성 피부병이 낫는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악성피부병을 어떻게 치료하라는 처방전이 아닙니다. 악성피부병이 나았을 때 그 사실을 확증하고 선포하는 절차입니다.
오래 전에 섬겼던 교회에 있던 한 나무로 인해 피부에 알레르기가 생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알레르기로 인한 가려움증을 치료하기 위해 한 달 이상 피부과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악성피부병은 쉽게 낫는 병이 아닙니다. 더욱이 치료 기술과 장비가 낮고 열악했던 고대 사회는 더더욱 고치기 힘든 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병 치료를 위해 주술이나 미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악성피부병은 전적으로 외적인 힘으로 낫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굿을 하고 주술로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낫습니다. 오직 은혜로 치료됩니다. 그러기에 은혜는 그 자체가 이미 신비입니다.
죄의 치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라는 질병으로부터 완전하고 완벽한 치료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높고 크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말씀에서 속죄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리며 인생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33절 이하는 집에 악성 곰팡이가 생겼을 때 악성피부병과는 달리 집을 비우고 악성 곰팡이가 생긴 돌을 빼내고 흙을 다시 바르고 옷을 빨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고치라는 것입니다. 수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의 사슬을 끊고, 죄를 청산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삶을 고치고 수리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합리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는 동안 주님과 함께 좁고 좁은 십자가의 길, 말씀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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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환자의 정결의식과 관련, 1절부터 9절까지는 나병에 결렸던 사람이 정결하게 되었을 때 그 정결을 확인하는 절차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려갈 것이요”
표준새번역에는 동일한 내용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당시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부정한 나병환자는 진 밖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병환자 스스로가 제사장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제사장에게 가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역으로 이야기 하자면 비록 천벌을 받아 징계를 받고 있는 죄인일지라도 신앙공동체는 그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중죄를 짓고 감옥에 수감되어 격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나!’ 하며 그를 정죄하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에서는 주님을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범인(凡人)의 경우보다 더 분개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천형(天刑)을 받은 큰 죄인일지라도 공동체가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회복될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끝까지 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 돌봄을 위해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죄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비록 우리 눈에 큰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정죄하며 그를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밀어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죄로부터 그를 회복시켜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일에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죄에 빠졌었던 그리스도인을 계속 정죄함으로 그를 우리 마음으로부터 분리해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회복시키실 그 날을 기대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10절부터 20절까지는 나병이 나은 자가 드리는 네 가지 제사 -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 - 의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건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져야할 의무에 대해 부적합한 행위를 했거나 그 의무를 거부했을 때 요구되는 제사입니다. 그에 대한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가 바로 속건제입니다. 이와 더불어 나병환자의 정결예식에는 속죄제가 포함되었습니다. 나병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것이었기에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속죄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속건제와 속죄제가 저지른 과거 죄에 대한 청산 절차라면, 번제와 소제는 이제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봉사할 것을 다짐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의 제사란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우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적 나병환자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죄를 아직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을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된 영생을 기뻐하는 축제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통회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속건제와 속죄제의 날로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죄에 대한 통회함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결함으로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결단의 날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를 통해 다시금 겸비함과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1절부터 32절까지는 가난한 나병환자가 낫게 된 후 드리는 제사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특별히 제물과 관련, 우리는 본문 내용을 통해 그가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제물은 달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면제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속 깊은 배려이셨습니다.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로, 제물은 헌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통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고,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물질에 빼앗겼던 마음을 다시금 주님께로 모으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가난하면 오히려 돈에 더 집착하게 되고, 돈의 마력에 (魔力)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일지라도 가난한 자에게도 제물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한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자 함이 아니라 헌금을 통해 그의 심령을 하나님 나라로 채워주심으로, 돈의 마력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특별하신 배려였던 것입니다.
둘째 단락인 33절부터 53절까지는 집에 발생한 나병 색점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지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거주하는 집에서 나병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처리하는 규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지은 집도 나병 발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와 비슷합니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약속의 땅에 들어선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언제 그 공동체에 파고들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교회공동체의 지체인 우리 각 자가 먼저 죄에 대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라는 집 또한 노출된 죄로부터 공동체를 정화해 나갈 수 있는 순결의 능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