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1. 주님은 다가올 핍박을 말씀하십니다(1~4). 이제 곧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2). 그때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십니다(1). 저들이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 15:21). 주님께서는 이제 떠나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말씀하십니다(4). 제자들은 주님이 어디로 떠나시는지 묻는 대신 근심만 하고 있었습니다(5). 그러나 주님이 떠나심은 그들에게 유익할 텐데, 주님이 떠나셔야 보혜사가 오시기 때문입니다(7).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8~11). 성령님은 신자들에게는 해석자와 안내자가 되시지만(13), 불신 세상에게는 고발자(검사)가 되십니다. 불신의 죄를 지적하시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시며, 심판의 날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님은 신자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주님의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14~15). 성 삼위 하나님은 완전한 조화 가운데 일하십니다.
2. 이어서 주님은 부활과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6~24). 16~19절에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이 반복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고 멀리는 성령의 강림과 재림을 암시합니다. 부활 후에, 제자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묻지도 않을 것입니다(23). 그때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뀌고, 제자들은 기도라는 놀라운 수단과 특권을 통해서 충만한 기쁨,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24,22,20). 기쁨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주어집니다(요일 1:3~4). 오늘날 성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이런 사귐을 가지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3. ‘때가 이르면’(25)은 십자가를 넘어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때에는 주님의 정체가 드러나므로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25). 그날에는 제자들과 신자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감으로써,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26~27). 물론 이것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줄 믿음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이후 기도에 전념하게 됩니다(행 1:14).
4.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너무 앞서 나가는 고백을 합니다(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는 말씀은 칭찬이 아니라 책망에 가깝습니다(31). 제자들은 아는 체 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곧 주님을 버리고 각각 흩어질 것입니다(32).
5. 이제 주님께서 잡히시고 죽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주님을 홀로 둘 것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제껏 긴 말씀을 하심은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33). 제자들이 ‘주님 안에’ 있으면 평안을 누리겠지만,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은 실패자로서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승자로서 십자가로 나아가십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든 주님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승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그들을 패자와 실패자로 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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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교할 뿐 아니라(1-4)
예수님은 제자들과 십자가 지시 전날 밤을 보내시면서, 자신이 떠나셔야 하는 이유와 떠나신 이후에 벌어질 박해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주님이 단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아 아쉬운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주님을 구원자로 믿었다는 것만으로 박해를 당하고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3)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출교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포쉬나고고스”입니다. “쉬나고고스”가 “회당인데, 아포가 붙어서 ”회당에서 내쫓김 당하다”는 뜻이 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신앙의 영역에 국한된 부침이 아니라 그 공동체 속에서 비토되어 유대인의 소망과 공감대에서도 끊어질 것입니다. 지인들로부터 이방인들보다 더 나쁜 자로 간주될 것이고, 직장을 잃어버리고 가족들에게 추방 당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출교는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더이상 회당에 나오지 마”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축적해왔던 사회적 자산을 모두 잃게 되는 큰 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때가 이르면, 실질적으로 제자들을 죽이는 데까지 이를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이런 벌을 받게 된 원인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 참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어온 유대교의 시각에서, 예수도 하나님이라는 예수 자신과 제자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성모독, 불경죄를 뒤짚어 씌웠습니다. 박해를 행했던 사람들은 그 박해 행위조차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주님을 죽인 사람들부터가 그랬습니다.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에게 뒤집어 씌운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참람하게 불렀다며, 신성모독죄를 씌워죽였습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를 잡아오려고 했던 이유도 그 나름의 충만한 신앙심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도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일어나는 박해에 믿음을 잃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굳은 심지가 흔들리지 말라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미래를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았던 까닭은, 지금까지는 주님께서 함께 계셨으나 이후로는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주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1절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실족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미리 경계해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박해에 실족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과연 주님의 손에 있는가라며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의 떠남을 미리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닥칠 박해마저 예언하심으로써 제자들은 후에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비록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갑자기 떠나신다는 주님의 말씀과 너희의 인생에 크나큰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조리가 만연한 세상과의 갈등은 필연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여러 어려움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직면했던 원색적인 시련이 우리에게 없다고는 하나 우리도 굳은 심지로 말씀을 따르다보면 여러 갈등에 직면합니다. 원칙과 소신대로 일을 처리하다가 이익을 편취했던 상급자들로부터 원인 모를 어려움에 시달리기도 하고, 외골수로 몰려 안좋은 평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관행을 거부했을 때, 모두에게 돌아갈 이익을 거절했을 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살며, 신앙생활할 때 박해 받는 이야기들, 신실하지 못한 배우자의 삶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 어린 이야기들 모두가 바르게 살려는 신앙인들이 받는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고통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말씀 따르는 참 사람의 길을 걷다가 만나는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계시(5-15)
주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5절에,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오직 주님만 자신이 어디로 가셔야 할지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은 이제 그 길로 가시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주님께서 가셔야 성령께서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너희에게 유익이라.” 주님께서 떠나시는 것, 주님께서 죽으시는 것이 주님의 백성들에게 더 나은 이유는, 보혜사, 또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언급되는 성령 하나님께서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가지신 주님은 시공간의 한계를 가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물 위를 걷고,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는 능력이 있으시다고 해도, 다시 말해서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주님으로서는 자기 백성 모두와 함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차원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을 바꾸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하시지는 않지만 믿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실 수 있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지속해서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떠나셔야 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 주님의 사역의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승리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더 급진적으로 왕성하게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베푸신 십자가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나게 하시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오신 성령 하나님은 8절 말씀대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세상을 정죄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죄인인 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이들을 죄인이라고 단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감을 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핏대 올려 외칩니다. 그러나 그랬던 모든 이들이 성령 하나님의 내주를 경험한 이후에는, 자신만큼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 없다고 목놓아 웁니다. 감히 구원받을 수 없었던 자신이 구원 받았음에 감사합니다. 바울도 주님을 믿게 된 이후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성령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가야바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씌웠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죄인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답니다. 신명기 21장 23절 율법을 비틀어 적용한 이 말씀대로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는 성공합니다만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3일 만에 부활시키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 보좌로 승귀하게 하심으로 의로운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어 11절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는 말은 주님을 심판했던 이들이 도리어 심판받을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며 그리스도를 배척한 죄를 다루고,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며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적대시한 자들이 심판받을 것을 말한 바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폭넓게 주님의 백성들에게 공간을 초월하여 일어나지만 사역의 방향은 한결 같습니다.
(13-15)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주님의 백성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십니다. 문자적 의미로, 안내입니다. 이는 인도를 받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가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안내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안내의 도구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궁극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성령은 수줍음의 영입니다. 강력하게 역사하실수록 주님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자신을 숨기시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애쓰면서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하나님이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의 임재 앞에 우리는 더욱 겸손히 자신을 숨기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덕을 드러내며, 말씀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지셨습니다. 이를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칭의입니다. 칭의 이후,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안내를 받아 거룩하게 변모되어 갑니다. 말씀 따르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내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화이고, 수준의 구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늘 곁에 계시기를 원하였지만, 예수님은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또 다른 차원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을 바꾸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후 세상에서 제자들이 받게 될 환난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위로와 격려를 이어가십니다.
해산의 기쁨(16-24)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명확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승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심은 부활 이후 제자들과의 만남과 더불어 앞서 7절에서 보혜사, 즉 성령님을 말씀하신 것처럼 또 다른 차원에서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부활 이후 잠시간의 만남은 경이로움이었으나 완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셔야 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그들 곁에 머무실 수 없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 이후 성령님의 함께하심이 온전히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고 이제 성령 안에서 제자들과의 만남을 위해 오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이미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쳐다보며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하고 물었습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었지만, 중요한 부분을 늘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는 예수님을 알고, 입으로는 예수님을 따라 산다고 말은 하지만, 삶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걱정하며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며 손가락질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성화의 삶, 수준의 구원입니다. 그 수준을 이루어 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깨닫지 못하고 불안에 떨며 근심하는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리고 따스히 설명해 주십니다.
(20-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곡하며 애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는 명확한 대조를 이루며 역전의 말로 바뀝니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함입니다. 비록 죽음으로 인하여 곡하고 애통하겠지만, 우리를 위하여 죽어야만 하셨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이 근심이 변하여 도리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여인의 출산에 비유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출산은 몹시 두려운 일이지만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출산 후 몸이 회복되기까지 얼마간의 고통이 찾아올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생명이 찾아오는 경이로운 기쁨이 동시에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몹시 고통스러움으로 다가오겠지만, 그 고통은 곧 끝날 것이며 오히려 기쁨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오는 참된 탄생이라는 선물처럼, 출산의 고통 역시 새로운 생명이라는 더 큰 축복으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의 날은 부활주일로 인하여 성금요일(Good Friday)로 불리는 것입니다.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뵈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픔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를 기쁨과 환희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단지 부활로 인한 육신의 변화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한 우리의 믿음이 성령 안에서의 성화 된 삶으로 승화될 때 우리 안의 기쁨을 결코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죽음과 상실로 곡하고 애통하는 가운데 받았던 은혜가 이제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십니다. 우리가 받은 이 놀라운 기쁨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슬픔과 고통도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 가운데 모든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셨고,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쁨 가운데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23-24)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것이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기도할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고, 이로 인해 우리에게 감히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자격을 주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성도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여 공허한 슬픔 가운데 빠져 있을지라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25-33)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가 변화된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27-28)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친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자기 아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가운데 초대되어 믿음으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랑의 삶이고, 또한 믿음의 삶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이제야 분명하게 이해했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29-30)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제자들은 자신 있게 지금에야 알게 되었고, 이제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제자들은 어렴풋이나마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시지만, 때늦은 믿음과 작은 믿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 때에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도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기 위해 물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자기성찰의 순간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정말로 믿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하였습니다.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곧 예수님을 홀로 두고 각각 제 곳으로 떠나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떠났다고 해서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을 슬프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안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얻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이 말씀의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담대하라고, 그래서 세상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용기의 원천은 예수님의 완성된 사역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에 의한 용기를 통해서만 담대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영광의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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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5-6)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한 후에 자신이 떠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와 도마는 예수의 행선지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요13:36, 요14:5).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근심만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잠시 잊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질책성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의 군중들의 성대한 환영은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설레게 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각자 앞으로 전개될 핑크빛 인생을 생각하며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이별 통지 앞에서 그것도 앞으로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망연자실하며 근심 중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토록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무지했는지를 1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
본문에서 사용된 “실족하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믿음이 위태한 상태가 아니라 아예 신앙을 저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핍박을 당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2)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에게 대한 유대교의 핍박의 방법들 중 하나는 “출교”였습니다.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는 회당 출입을 금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유대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인에게 행하는 가장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출교 당한 사람은 당연히 회당 모임에 나갈 수 없었고, 그에게 2m 이내의 접근을 금지했고, 교제도 금하였으며, 물건을 팔거나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죽으면 우는 것도 금하였으며 시체에 돌을 던졌습니다. 출교도 모자라서 믿는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가혹한 처벌을 행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갈라디아서 1:13-14)
회심 이전의 사울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투철했고, 당연히 예수를 믿는 교회 공동체는 유대 사회의 뿌리를 뒤흔드는 이단 중의 극악한 이단이었기에 발본색원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가 그토록 핍박했던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낙담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자신들의 일들을 미리 예수께로부터 들은 후에 실제로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위로와 확신의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 때에 제자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인데, 이 보혜사는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서, 예수님이 보혜사를 보내셔야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는 이유는 바로 이 세상에 보혜사를 보내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보혜사가 이 세상에 오셔야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16:8).
둘째, 성도를 진리로 인도하신다(16:13),
셋째,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16:14-15).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보혈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대속의 대상은 인간이지만,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닫고 십자가 대속의 보혈에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과 결단은 보혜사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불신앙 자체가 죄라고 책망하시고(9), 세상이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의의 성취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죽임 당한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두셔서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드러내시고(10),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 임금 즉 사망 권세가 심판받았다는(11)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이십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성령님은 믿는 사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견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주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4)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당신과의 관계, 보혜사와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즉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근심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제시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속에 늘 근심과 걱정이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본문 속에서 제자들이 근심 중에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선이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예수를 향했던 모든 기대와 소망은 지극히 세상적이었습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골고다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의 삶은 180도 변화되어, 출교와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복음의 용장으로 살았습니다.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를 살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영원한 진리이심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그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가 이미 우리 안에 영으로 임해 계시고, 벌써부터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품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혹 본문의 제자들처럼 여전히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내 야망이 성령님의 뜻과 상치되기에 오는 걱정과 근심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의 죄에 대해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불쌍한 우리를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함께 있다는 것, 특별히 누구와 함께 있는가 하는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함께하는 존재로 인해 자신의 삶을 실패의 자리로 몰아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하는 존재로 인해 절망의 나락에서도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이 있기에 함께하면 어디에 있으나 어떤 상황에 있으나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무엇을 많이 소유하였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와 함께하셨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위기의 시간,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는 그 때에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체포와 고난, 그리고 죽음 앞에서 자신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질 것을 미리 아셨으며, 그렇게 당신 자신은 철저히 홀로 남겨질 것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비난하거나 배신감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실패 이후 흩어질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들이 죄책감으로 자신을 파괴하고 낙심치 않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절)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이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33절)
본문 속의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말씀을 포함하면서도 직접적으로는 바로 앞서 말씀하신 32절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여 도망친 후 처절하게 홀로 남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하시기에 괞찬으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 또한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며 그렇게 철저히 홀로 되어 낙담과 두려움 가운데 있을 터인데 당신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그 때에도 동일하게 신실하심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참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미 당신께서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세상을 이기셨기에 세상에서의 환난이 결코 제자들에게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방해 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세상에서 완전한 평화가 존재할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평화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고 '사람'을 의지합니다. 이와 동일한 선상에서 영원하지 않는 보이는 것에 자신의 피난처를 두고 그 기초위에 안전한 성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흔들리는 기초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과 염려 속에 휩싸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온전한 '평화'는 세상이 결코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과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결코 혼자이지 않으며, 그 하나님으로부터 평화를 덧입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약백성이 된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을 살면서 배반당하는 것, 홀로 된다는 것 을 경험하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크던 작던, 가까운 이로 말리암든 멀리 있는 이로 부터 이든 그러한 경험을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힘들고 괴로운 경험입니다. 철저히 홀로되었던 엘리야가 죽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호렙산에서 세미한 음성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만났을 때 그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평화의 힘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지지 못하고 잃어버린 어제와, 불확실한 내일의 무엇을 위해 오늘을 고민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오늘 속에서 허락하신 삶의 현장에서 신실하신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그분과의 참된 사귐과 연합이 우리의 세상을 향한 참된 승리와 평화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