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
1. 18과 19장에 기록된 주님의 수난 기사는,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진행되는 일들입니다. 주님은 잡힐 장소를 알고 그곳으로 가십니다(1~2). 주님은 당하실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4). 주님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주님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자(‘내가 그로라’), 그들은 뒤로 넘어집니다(5). 이것은 모세를 호렙산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포하실 때, 바로 그 ‘여호와’의 이름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2. 주님은 선한 목자가 양떼를 보호하듯 제자들을 보호하시는데, 이는 제자들이 아직 순교할 때가 아니며,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성경을 기록해야하는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기에 제자들은 여전히 인간적인 성정과 만용으로 행동합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입니다(10~11). 이렇듯이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인간의 열심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육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그렇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에 따라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3. 주님은 그 밤에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흩어졌으나, 베드로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는 요한일 것이다)은 안나스의 집 뜰까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17~18, 25~27). 인간의 용기와 열심이 아무리 가상해보여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무기를 든 군사가 아니라, 한낱 연약한 여종에 의해 무너지는 열심일 뿐입니다.
4. 이날은 목요일 밤이었고, 유월절이 시작하는 안식일 전에 모든 처형을 끝내야했기에, 공회 지도자들은 조급했습니다. 새벽에 주님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셨고, 이른 아침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왕이라고 말씀하시나, 진리에 속하지 않은 빌라도는 알아듣지 못합니다(36~37). 주님의 무죄함을 아는 빌라도는 유월절 사면의 관습을 따라 주님을 방면하려 하지만, 결국 백성들의 요구를 따라 강도인 바라바를 방면하기로 결정합니다(39~40).
5.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왕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에게 잡히시고 모욕을 당하시며 재판을 받으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 제자들에게 배신과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은 독자들에게 왜 이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묻습니다. 죄인이 당해야 할 영원한 운명을, 주님이 대신 홀로 감당하시되, 조금도 경감되지 않은 죄의 대가와 삯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주님은 말씀대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묘사대로,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1:29) 성도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 겸손 속에 나타나는 영광, 그 받으신 굴욕과 수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견디지 못할 고난과 수치가 없습니다. 복되신 주님의 영광을 묵상함이 모든 성도의 유일한 능력이고 힘이고 기쁨이고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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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1-14절)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의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기드론이란 지역은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곳입니다. 이 명칭은 ‘어둡고 침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성전으로부터 흘러내려온 희생 제물의 피가, 기드론 시내로 유입되는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희생 제물의 피로 얼룩진 기드론 시내를, 예수님은 어린양의 되어 직접 건너신 것입니다. 기드론 시내 건너편의 동산은 겟세마네입니다. 이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가끔 제자들과 함께 오셔서 기도했던 곳입니다. 사실 이 곳은 감람나무들이 많은 숲이며, 사람들은 이곳에서 감람나무 열매를 압착하여 기름을 쭉 짜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의 뜻은 ‘기름을 짜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름을 쥐어짜듯, 이곳에서 자신의 진액을 다 바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감람산을 오르고 넘으면,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광야가 펼쳐집니다. 예전에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눈물을 흘리며, 감람산을 넘어 광야로 도망갔었습니다.(삼하15:23) 이와 같이 이 동산에서 멈추지 않고 감람산을 오르고 넘으면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피할 기회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막14:36에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하시며,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고, 또 피하지 않고, 멈추셨던 겟세마네 동산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하자면,
첫째는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가정이 될 수도, 직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관철시키는 곳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붙잡히시려는 결단처럼, 이곳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즉 순종의 동산인 것입니다. 에덴은 아담과 하와로 인해 불순종의 동산이었지만, 겟세마네는 순종의 동산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의 순종으로 생명의 기름이 흐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기름이 흐르는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약해져야 합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처럼 우리가 약하고 부족할 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설사 우리 인생의 열매들이 찌꺼기가 될 지라도, 그 찌꺼기를 통해 새로운 기름으로 만드시고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순종의 삶이란, 예수님의 생명을 믿고 거기에 동참하겠다는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 삶에서 겟세마네 동산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곳.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변화되는 곳, 또한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순종으로 생명이 기름처럼 흘러가는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교사가 된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동료 교사와 갈등이 생겨 관계에 어려움이 생겼고, 상대방의 언행으로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 악화되어 스트레스로 인해 탈모도 생겼다고 합니다. 매일의 출근길이 곤욕이었습니다. 그 친구에게는 학교가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휴직을 고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출근길 라디오에서 찬양이 흘러나왔는데, 그 찬양이 438장이었습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 찬양을 들으면서 갑자기 울컥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동안 힘들고 괴로웠는데, 그때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구나! 매일 마다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구나!’ 그 생각을 하며 찬양을 부르며 많은 위로를 받았고, 오히려 상대방 교사를 미워하고 싫어했지,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니, 그의 언행에 상처를 받기보단,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과 동행하는 하늘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문제에서 자유로워지고, 훗날 상대방과의 관계도 개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외로운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장소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4)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3-4절에 유다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들은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신다는 <당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유다가 배반하려는 것, 십자가의 고통, 3일 후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당할 일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혹여나 당할 일을 알게 되면, 그것을 빠져나가거나 피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간구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패배하고 좌절에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할 일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고, 이 당할 일을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풍랑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당할 일>이 분명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당할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고, 그 당할 일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주시고, 보호하시며, 결국 그 당할 일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과 같은 최후 승리의 기쁨을 얻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2008년에 개봉한 <테이큰>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프랑스에 놀러간 딸이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되는데, 딸을 찾는 전직 특수요원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인신매매범들이 딸이 거주하는 숙소에 침입을 합니다. 그러자 무서움에 떨고 있는 딸은 침대 밑에 숨어서,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황급히 알립니다. 여기서 저는 딸의 위기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했던 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딸에게 어디로 숨어있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가라고 하지 않고, ‘딸아 넌 분명 납치 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널 반드시 찾을 것이다. 내가 널 찾을 수 있도록 납치 되는 순간, 범인의 인상착의를 핸드폰에 외쳐라! 그걸 통해 반드시 내가 널 구해줄 것이다.’ 고 차분히 말합니다.
이 장면을 보고, 신앙과 많이 흡사하다고 여겼습니다. 우리 삶에 풍랑과 같은 문제는 분명히 발생합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피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시91:2-3에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삶의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나를 문제에서 분명히 건지시고 해결하여 주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찾는 사람이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고 합니다. 이는 쉽게 말해 예수님의 말 한 마디를 듣고, 놀라 뒷걸음질 치며 땅에 엎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압도되는 권위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그 한 마디에 제자들은 넘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니라”란 말은 혹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들릴 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들에게는 이 말이 두려움으로 들립니다. 주님이 다실 오실 그 날에, 내가 평생을 <신앙인>으로 살면, “내가 그니라”란 말씀이 소망이 될 것이며, 반대로 <신앙인처럼> 살면 “내가 그니라”란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10-11)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0절, 베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으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버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려는 마음에 한 행동이었지만,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동기가 순수하면, 결과가 나빠도 괜찮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만약 ‘누군가를 돕기 위해 물건을 훔쳤으니 정상참작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처럼 모순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명목아래,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별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분별 있는 신앙생활은 영적성숙이 필요합니다. 영적 ‘갓난아이는’ 삶의 자리에서도 ‘갓난아이’입니다. ‘갓난아이’가 아이처럼, 청년처럼, 부모처럼 살려니 얼마나 버겁겠습니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지치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아무도 없을 때, 긴장이 풀릴 때, 혹은 위기의 상황이 생길 때 ‘갓난아이’의 모습이 나타나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성숙이 없으면 삶에서도 성숙이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베드로처럼 우리는 삶에서, 칼을 뽑고 내가 원하는 대로 휘두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 칼은 내 분노와 욕구를 순간적으로는 해소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 아닙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너의 감정대로 휘두르고 있는 칼이 무엇인가? 그것을 도로 집어넣어라!’ 내가 휘두르고 있는 칼을 무엇인지 그 칼로 인해 많은 사람을 베고 상처주지는 않았는지, 그렇다면 그 칼을 집어넣기 위한 노력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12-14)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12절을 보면, 붙잡힌 예수님은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안나스는 현직 대제사장은 아니었지만,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면서, 당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하지 못한 인물이었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해서도 무지한 자였습니다. 그는 14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은 처형해야 한다며 ‘권고 즉 의논’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권고했다’란 헬라어 ‘쉼불류사스’는 예수님을 수난으로 몰고 가는 문장에서 사용된 매우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서는 ‘쉼불리온’라고 쓰이는데, 이는 ‘음모’를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는 장면(마12:14, 22:15), 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장면(27:1,7),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마28:12)’에서 사용합니다. 모두 음모와 계략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목적은 쉼불리온(음모)을 통해,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올무에 걸리게 만들까?’ 라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적대자들의 음모, 계략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음모와 계략을 패망시키시고,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시도록 상황을 뒤바뀌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삶에도 나를 힘들게 하는 ‘쉼불리온 - 음모와 계략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상처받거나, 나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분명 쉼불리온과 같은 <당할 일을>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도 있습니다. 왜 그것을 허락하셨는지 그 뜻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고 의지할 때, 우리를 상처주고 해롭게 만들 것 같은 음모와 계략들이, 우리 삶에 실현 되지 않도록 막아주실 것입니다. 더이상 그것들이 나를 창궐하여 훼방하지 않도록 막아주십니다. 궁극적으로 그 계략들을 전부 선한의도와 은혜의 상황으로 뒤바뀌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감람나무 기름이 흘러 넘치듯이, 우리의 문제는 거두시고 기쁨과 감사의 기름만이 흘러넘치게 만드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다(15-18)
예수님께서 잠시 후에 제자들을 떠나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노라고 힘주어 고백하였습니다. 그날 밤 가룟 유다는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수인들을 대동하여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에게 잡히시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과정에서 베드로는 칼을 빼어 저항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의 칼에 오른편 귀를 다친 말고의 부상을 치유해 주시고 아무런 저항 없이 붙잡히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결박 당하신채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 밤에 뿔뿔히 흩어졌지만 베드로와 무명의 한 제자는 주님을 좇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15-16)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익명의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는’으로 번역 된 헬라어가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일 뿐 아니라 그가 대제사장과의 친분으로 베드로를 동행하여 자연스레 대제사장의 집에 왔다는 사실을 통해 많은 학자들은 익명의 제자가 어떻게 대제사장과 친분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정체는 누구인지 연구하였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이라는 견해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외에 다른 제자였을 것으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은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익명으로 기록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베드로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가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주님과 꽤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고 이제 우리는 과연 그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따를 것인지 기대하며 그의 행보를 주목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한 여종의 질문을 받습니다.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문을 지키는 여종이 익명의 제자를 평소에 알고 있었다면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고 있었을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종은 베드로를 향해 자연스레 질문하였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 여종은 ‘분명희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한 사람은 아니죠?’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의문문의 형태는 ‘아니요’라는 대답을 기대합니다. 베드로는 여종의 질문에 어렵지 않게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곁을 지키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주님 곁을 지키는 대의를 위한 통과의례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한 번 부인한 베드로는 그것이 반복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임을 경계하지 못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시작 된 죄는 관성을 가질 뿐 아니라 가속력을 얻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한 번의 거짓말을 덮어두기 위해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처럼, 한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태연하게 무리에 섞여 불을 쬐며 추위를 떨치려 했습니다.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예수님께서 잡히신 날은 유월절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태양력으로 3-4월경에 해당 되며 그 무렵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밤 공기는 꽤 쌀쌀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의 하수인들은 숯불을 피워 추위를 달래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어두움과 빛의 대조를 통해 진리를 묘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시간임과 동시에 아직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 영적인 어둠을 의미합니다. 어둠에 다니는 것과 대조적으로 빛 가운데 행한다는 표현은 진리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 선포하시며 주님을 따르는 삶은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교훈하셨습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부인하고 무리에 섞여 불을 쬐던 베드로는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숨기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의 영적 정체성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심문을 받고 계셨던 예수님은 몸은 비록 결박 당했으나 조금의 위축됨 없이 주님의 사역과 교훈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분명히 드러났고 은밀하게 한 것은 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다(19-24)
(19-21)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안나스는 예수님께 ‘제자들과 주님의 교훈’에 관해 심문하였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로마에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었고 제자들에 관해 물었던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로마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세력으로 몰기 위해 그 규모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한 로마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위험 인물로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세상에 공개적으로 사역하셨으며 그의 교훈 또한 회당과 성전에서 선포 되었고 반란을 모의하기 위한 은밀한 성격의 모임이나 가르침은 없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위험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주님의 사역과 가르침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위협하고 율법에서 벗어난 삶을 살도록 미혹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직분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백성들을 기만했던 대제사장과 유대의 지도자들이 어둠을 사랑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훈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요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 뿐인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은 그분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거나 그분의 교훈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 어려워서이기 보다는 어둠을 사랑하고 어둠 가운데 사는 것을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이 불법적인 것이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심문이나 증거 조사를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결론 짓고 적당한 구실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고 끊임 없이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 행위를 성찰함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본이 되어야할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배척했던 것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지 않고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 등을 붙들고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 들어가면 그동안 우리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그동안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주인 삼았다면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요청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에게 조금의 어둠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수준의 구원을 날마다 살아내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죄인의 특성은 어둠을 사랑하여 빛을 미워하고 빛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해 저항합니다.
(22-24)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예수님의 심문 현장에 있던 대제사장의 하수인 하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쳤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의 전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법적인 체포와 심문을 받으셨고 폭행과 수치를 당하기까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공정한 재판을 요청했으나 안나스는 공정한 재판에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을 자신의 사위이자 공식적으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신 것은 놓임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드러내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는 자기 죄를 인함이 아니요 죄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대신한 대속적 형벌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요한은 대제사장 안나스의 불법 재판과 강압적인 심문 속에서도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내시고 숨기지 않으신 예수님을 조명한 이후에 다시 안나스의 집 뜰에서 숯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를 조명합니다. 함께 불을 쬐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며 물었습니다. 불을 쬐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 있었고 그는 사건 현장에 있었기에 베드로에게 재차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닌지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재차 부인하다(25-27)
(25-27)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마태복음은 베드로에게 질문했던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을 모두 단수로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은 세 번의 질문 모두 각각 한 사람씩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에게 질문했던 첫 번째 사람이 문을 지키던 여종이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두 번째 질문은 함께 불을 쬐던 사람들이 했으며 세 번째 질문은 예수님의 체포 현장에 있었던 대제사장의 하수인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베드로가 무리에 섞여 불을 쬐던 중에 어떤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였고 함께 불을 쬐던 사람들이 일제히 베드로를 주목하며 베드로의 대답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반복 되는 질문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성찰과 돌이킴의 기회였지만 끝내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가 유대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표자의 성격을 지녔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로서 예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결단하고 고백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실패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분깃으로 삼고 사는 것이 우리의 결단과 고백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시편119편의 시인이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아 주님의 은혜를, 주님의 얼굴을 구했던 것처럼 성도는 세속적인 유혹과 위협 속에 살아가면서 매 순간 주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신앙을 지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저지를 죄로 인해 통곡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습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동안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교훈이 세상을 위한 것임을 당당하게 드러내시는 장면을 대비시킴으로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고난 당하시고 자발적으로 대속적 죽음을 감당하시는 주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기는 힘은 우리의 결단과 노력이 아닌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비결은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 예수 여전히 우리를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주님을 분깃으로 삼아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맡기길 원합니다.
피할 수 없는 질문 (28-38절)
어떤 생각과 행동이 본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 모순적인 상황을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 발생하는 기상천외한 아이러니가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듭니다. 저자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우리 역시 그러한 아이러니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도록 요구합니다. 우리의 왕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생각과 행동을 돌이키는 회개의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항상 역설적이라고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맛있게 먹던 음식인데 먹는 사람이 배가 불러 숟가락을 놓는 순간 산해진미라도 쓰레기로 전락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식당이나 뷔페에서 남긴 음식을 한데 모아 놓기라도 한다면 정말 더러운 폐기물이 됩니다. 같은 대상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주체가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서 입에 넣을 정도로 깨끗한 것이 만지기도 싫은 오물로 전락해버립니다.
오늘 말씀의 첫 번째 아이러니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선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백성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이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거하는 관저까지 예수님을 끌고 간 유대인들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기 위해 그 관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방인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규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 유월절을 제정하신 분, 유월절의 주인을 죽이려고 애쓰는 중에 잔치에는 참여하기 위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무엇이 깨끗함과 더러움을 만드는지 망각한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생각과 삶으로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외적인 조건만 지키려고 애쓴다면 하나님도 숟가락을 딱 놓고 참 역겹다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먹는 이의 생각에 따라 같은 대상이 음식도 되었다가 쓰레기도 되었다가 하는 것처럼, 우리 믿음도 언제나 우리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가장 성스러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악하다는 말처럼 우리의 믿음 생활이 하나님의 의도에 잘 맞춰있지 않으면 가장 더러운 자기기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이 형식인지 본질인지 정확히 분별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삶을 꾸려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은 음식처럼, 버려진 소금처럼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관저 밖으로 나가 왜 이자를 고발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오히려 행악자가 아니면 넘기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는 죄목이 빈약하다고 생각했거나, 빌라도에게 강한 압박을 주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아이러니가 나타납니다. 악에서 가장 먼 분이신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자신이 골치 아픈 일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에게 죽이는 권한이 없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여러 차례 죽이려 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실제로 자기 법을 따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사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일 수 있었지만, 로마의 처형 방식에 따라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예수 운동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역설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 죽으심을 예언한 말씀까지 응하게 하셨다고 밝힙니다. 요한복음은 인자가 들리셔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낼 것임을 밝힙니다. 가장 참혹한 저주가 가장 큰 복이 됩니다.
또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스스로 죽으시기로 작정하고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진정한 현실을 드러냅니다. 3절입니다.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평행구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가 왕이라고 주장하며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는 모반에 해당하므로 로마법에 의하여 죽여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불러 묻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주장을 확인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비웃기 위해 하는 질문입니다. 지금 네가 왕이라고 하는데, 나의 처분을 받아야 하는 처지를 보니 오히려 내가 왕 같구나. 게다가 밖에서 네가 왕으로 다스린다고 주장한 너의 백성들은 너를 왕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아냥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연 엄숙하게 말을 꺼내십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네가 그렇게 생각해서 묻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하여 그렇게 얘기한 것이냐? 예수님은 도전하십니다. 네가 직접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느냐? 아니면 저들의 주장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빌라도만 이 질문을 받겠습니까?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은 네가 스스로 나를 왕이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의 주인이신지 아니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기꾼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말을 듣고, 다른 이의 경험에 따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우리가 스스로 하는 말은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은 다른 이의 믿음과 생각에서 나오지 않은 나만의 신앙 고백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대답을 회피합니다.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창조 세계의 왕이신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질문과 자리에서 벗어나 버리고 맙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왕인지를 밝혀야 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넘겨버립니다. 지금 네가 왕이라고 주장한 그 나라의 백성들이 오히려 너를 나에게 넘겼는데, 네가 감히 나에게 질문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네 죄목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독촉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누구인지 고백해야 한다는 질문을 회피하는 전형적인 답변입니다.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왜 이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왜 저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네가 예수 그리스도인 나를 왕으로 모시느냐고 물으시는 질문에서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36-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이 설명하십니다. 내가 말하는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며, 내가 왕이라고 하는 표현도 네가 뜻하는 왕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이 세상은 진리에 속한 세상이 아니지만, 자신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는 공간이 아닌 통치권의 차이를 말합니다. 나라는 바실레이아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속한 곳, 예수님께 속한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소 주의를 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별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답답해진 빌라도는 그래서 네가 왕이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구분하고 이분법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편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을 포섭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자신이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진리를 위함이며,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진리에 속하지 않은 빌라도는 우리 모든 사람이 품는 최후의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진리가 무엇이오?”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38절입니다.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의 모든 고뇌와 역사를 대변하는 질문이면서, 오늘 말씀의 가장 큰 아이러니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진리인 예수님을 그 앞에 두고 빌라도는 어리석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오늘 우리에게 진리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습니다. 우선 진리가 있기는 있느냐? 라고 묻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쾌락을 최대화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는 이 시대에 진리가 무엇입니까? 아니면 진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너 따위가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느냐? 총독인 나도 모르는데 라고 말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이가 진리를 찾아 헤맵니다. 어떻습니까? 진리가 있습니까? 진리는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리입니다. 진리는 어떠한 명제도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도 아닙니다. 다만 살아 움직이는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 분이 진리이십니다. 진리를 바로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역설. 우리는 이 역설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밖에 있어 진리를 보지 못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듣고 보고 알았는데도 그러한 역설에 빠져 있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불쌍한 정신 이상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가서는 그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보상책을 마련합니다.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 (38-40절)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기도
빌라도는 아직도 그들의 반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면을 베풀 것인데, 이왕이면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조롱하듯 묻습니다. 하지만 바라바를 대신 풀어줄 것을 외치는 장면으로 오늘 말씀은 마무리됩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예수님 대신 죄인 바라바를 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로 아이러니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 대신 많은 대상이 바라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가 우리의 죄악된 욕심을 채우고 우리의 왕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또 우리 역시 그를 예수님 대신 원합니다. 스포츠 스타, 연예인, 정치가, 재력가 등등이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나서고 우리는 열광합니다.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바람은 공허할 뿐입니다.
그들이 바라바를 원하는 순간 예수님은 최후의 아이러니로 자신이 대속물 되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바라바를 대신해서 자신이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이러니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진리를 밝히시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과 부딪쳐 아이러니를 만들어냅니다. 때로 우리는 그 소리를 날카롭게 인식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둔감하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역설 뒤에 있는 예수님이라는 진리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예민함과 실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추는 미친듯한 춤에 몸을 맡기지 않고, 크게 내지르는 소리에 넋이 나가지 않은 채 그 뒤에 있는 영적인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거하여 나의 분깃이 되시는 하나님을 나의 언어로 고백하고, 나는 과연 주님을 나의 진리이시며 왕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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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과 앞으로 믿게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나서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셨습니다. 18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아가신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으로(마26:36,막14:32)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기도하러 가던 곳이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하수인들이 예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를 앞세워 그곳으로 들이 닥칩니다. 그 상황을 3절이 설명합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군사들의 무리가 자기를 찾으러 온 것은 그것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시작이었습니다. 이어서 수모와 모욕, 재판 그리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것을 이미 아신 예수님의 행동을 오늘 본문 4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제자들과 함께 있던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들을 보고 앞으로 나아가 가장 먼저 대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피하여 계시다가 군인들에 붙잡혀 끌려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군인들을 만나셨고 그들과 직접 대화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눈앞에 닥친 위험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제자들의 무리 뒷편으로 뒷걸음치지도 않으셨고, 제자들속으로 숨어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도 않으셨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당당하게 묻고 또한 대답하셨습니다. 4-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1.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군인들의 무리를 피하지 않으신 것은 이것이 그가 반드시 걸어내야 할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닥쳐오는 위험을 정면으로 대면하십니다. 전혀 회피하지 않으시고 부정하시도 않으십니다. 단순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한걸음 앞으로 나가서 마주하십니다. 그들이 묻기도 전에 누구를 찾는가 먼저 물으시고 "내가 그니라" 자신의 신분을 밝히십니다. 이것이 죽음의 위험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4절에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는 문구에서 쓰인 단어 "당할" 의 헬라어 단어 "에르코메나"는 그 뜻이 오다, 가다, 나타나다 입니다. 그 단어의 원형이 "에르코마이"입니다. 그런데 "나아가 이르시되" 라는 다음 구절의 단어 "나아가"에서 다시 사용된 단어의 원형 또한 “에르코마이”입니다. "나아가" 라는 단어에서는 '앞으로' 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가 첨부된 채로("엑셀덴") 말입니다."나아가"라는 헬라어 단어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 본다면 '앞으로 나아가 '입니다. 앞의 문장과 이어서 그 뜻을 살펴보면 그 "당할" 일 또는 "나아갈" 일을 다 아신 예수님이 앞으로 "나아가"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단어를 한 문장에서 두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아갈 길을 아셨기에 스스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신 것입니다.이렇듯 예수님은 수동적으로 잡혀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하셨습니다. 오늘 이시대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주의 백성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할 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에게 밀려올 위험과 고난을 절대로 수동적으로 피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위험을 정면으로 대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풍랑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마주해야 합니다. 군중의 무리와 민회의 무리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참된 엑클레시아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이 걸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위험과 고난을 직시하고 앞으로 한걸음 나서 대면하여야 합니다. 고생을 마다해서는 안됩니다. 숨거나 회피하지 않는 주의 제자들이 오늘 이 시대에 예수의 제자들이요, 참된 엑클레시아의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시대의 크리스쳔을 살펴보십시요.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피하고 도망가버립니다. 부담 되는 일은 회피합니다. 부담없고 편리한 곳으로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조금만 고생스럽게 여겨지면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기는 커녕 뒷 걸음치고 도망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된 엑클레시아의 사람들은 다가올 고생을 알면서도, 맞게 될 어려움과 고난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이겨내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고생과 역경을 무릎쓰고 그 모든 것을 견뎌낼 각오로 세상을 향하여 '너희들이 찾는 자가 바로 나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마7:25)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위험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시는 예수님의 위엄앞에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집니다(6절). 우리에게 달려드는 위험과 위기를 피하거나 숨지않고 정면으로 대하는 믿음의 사람들앞에 세상사람들이 오히려 흔들릴 것입니다. 그 위엄앞에 엎드려지게 됩니다.
2. 제자들을 끝까지 보호하시는 예수님.
스스로 앞으로 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시고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하신 예수님은 이제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 자신은 죽음의 길을 가게 되더라고 제자들은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말씀하십니다. 본인은 체포되더라도 제자들은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17장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17:12) 비록 예수님이 붙잡혀가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뒤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을 끝까지 보호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그들은 다시 한번 제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이 그 은혜를 모르고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삶입니다.
요13:1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한번 품으면 끝까지 품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품는 사랑은 위험도 대면하게 하고 죽음도 감수하게 합니다. 끝까지 품는 사랑은 위험앞에서 죽을 각오로 자신을 던져 사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당하는 위험과 위기앞에서 끝까지 품는 사랑으로 자신을 던져 위험을 대면하는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엑클레시아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십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로마군대와 바리새인, 대제사장에 의해 주님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연행되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4명의 인물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시몬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이 반석 같은 믿음과 행동이 수반되길 원하셨기에 새로운 이름, '게바' 베드로를 주셨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최후 만찬 중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예언을 거부하듯 베드로는 겟세마네에서 주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쳤습니다(요18:10). 그리고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으로 따라 들어갑니다. 긴장감 속에서 시몬 베드로는 추위를 느껴, 장작불의 온기에 이끌려 사람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고, 예수와 일행이 아니냐고 되묻습니다. 베드로는 극구 부인합니다. 누가는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9-62절입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뜰에 계셨고,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음을 밝힙니다. 그가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웠겠습니까. 3년간 주님을 따라 다니며 경험했던 많은 이야기들, 가슴 뜨거워진 모든 사건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베드로, 반석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참 부끄럽습니다. 성도는 신앙 여정에서 적당한 환경만 조성되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무너집니다. 신앙의 중심은 자신의 의지나 결단일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신앙의 초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통곡하며 돌이킵니다. 교우님. 오늘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경험과 의지, 결단, 전통이 아닌 그리스도께 초점 맞추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인물은 ‘다른 제자’입니다. 본문 15~16절에는 ‘다른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대제사장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를 들어올 수 있도록 부탁하였고, 대제사장과의 친분도 있고 꽤 유력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본문에서 익명으로 처리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그는 어둠 속으로 익명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성도는 많은 유혹을 경험합니다. 가장 큰 유혹은 현실의 마찰을 피하는 것입니다. 무릉도원으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입니다. 변화산에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베드로처럼, 그곳에 머물고 싶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려가자고 명하셨습니다. 인류는 어려운 일을 경험하면 도피하고 싶습니다. 문제를 대면할 용기도 해결할 능력도 지니지 못한 까닭입니다. 성도가 되어서도 여전히 문제를 대면하면 도피하거나 문제를 부정합니다. 그때 익명 속으로 어둠 속으로 숨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군중 속으로 숨으려는 성향이 짙습니다. 군중 속에서 안도하지만, 군중 속에서는 결코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대면할 기회가 없습니다. 에베소 원형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처럼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떠밀려 다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는 진정한 엑클레시아로 스스로 가꾸어야 합니다. 교우님들. 오늘도 당당히 현실과 문제에 대면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더욱 주님께만 의지하게 될 것이며,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 엑클레시아를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 인물은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대제사장을 모시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믿고 평생 헌신했습니다. 22절에 따르면 대제사장의 물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불손하다고 생각하여 그는 예수님을 쳤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향해 헌신한다고 믿었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불경한 행동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진리를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종교제도로 규정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시적인 종교제도와 전통에 시선을 빼앗겨 하나님을 놓쳤습니다. 성도는 자주 우리의 틀 속에 진리를 가두는 오류를 범합니다. 진리 속에서 자유로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인물은 불을 쬐던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 집의 뜰에 모인 사람들은 직간접적으로 유대 종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참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 사람들은 기뻐하며 모였고, 병자를 치유해주셨을 때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목표는 부와 번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등을 돌렸습니다.
지금 그들의 관심사는 새벽이면 재로 변할 불붙은 장작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리석습니다. 당장 나의 기대, 나의 필요에 눈이 멀어 정작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썩어질 것에 시선을 빼앗겨 영원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엑클레시아, 주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의 두 눈은 한 눈은 세상을 향해, 또 다른 한 눈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교우님의 눈은 혹시 사라질 불붙은 장작에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이 주님께 고정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시몬 베드로. 다른 제자, 대제사장과 아랫사람, 불을 쬐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과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습니다. 대제사장 집의 뜰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시몬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주님을 부인합니다. 때로는 다른 제자처럼 익명 속에 숨어버리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대제사장 집 아랫사람처럼 자기기만으로 삶을 허비합니다. 때로는 불을 쬐던 사람들처럼 원초적 욕구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참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뜰에 모인 사람들은 안쓰러운 모습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행보를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부활이 그들에게 필요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 다른 제자, 또한 뜰에 있었던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맞이했습니다. 세상으로 부름 받은 삶, 엑클레시아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 뜰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비록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 곁에서 우리 각자를 엑클레시아로 부르신 주님께서 붙드시고 이끄실 것입니다.
‘웃프다’ 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웃기고 슬프다’의 합성어입니다. 그 웃픈 현실이 우리 인생에 제법 심심치 않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은 ‘그들이’라는 주어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바로 무고한 예수에게 사형 죄를 덧씌우며, 십자가 처형으로 몰고 가는 주동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뭐가 그리 다급하고 촉박하다고 이제 겨우 동이 트는 시간인 새벽녘에 부리나케 빌라도가 있는 관정으로 예수를 끌고 갔을까요?(28절)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다급히 모여듭니다. 모여든 이는 신속하게도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합니다. 그리고 부리나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는 죽여야 할 죄인이라고 고발합니다. 상황이 무척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고요한 침묵의 새벽에, 무슨 선한 일이라고 저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일까요? 그 새벽, 한 사람을 때려잡겠다고 분주히 뜀박질을 하는 ‘그들이’ 가소롭기도 하고, 우스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냥 우습지만은 않은 것은 그 죽이겠다는 대상이, 그리스도이니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참 웃픈 현실입니다.
‘그들’의 웃픈 짓은 점점 강도가 진해집니다. 이방인과 접촉하게 되면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 어린양을 먹지 못한다는 율법 관례에 따라, ‘그들’은 이방인 빌라도 관정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28절). 빌라도 관정 밖에서, 그리스도 예수만 관정 안으로 밀어 넣고, 예수의 죽음을 선동하고 있는 ‘그들’의 비열한 모습이 치가 떨리기도 하고 우스워 보이기도 합니다. 정결과 거룩을 목숨처럼 지켜가면서, 결벽과 흠 없음을 자신들의 의로 여기고 자랑하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냉혹하게 매달아 버리는 저들의 사악한 속내가 씁쓸하기도 하고, 우스워 보이기도 합니다. ‘겉’은 거룩과 의로 치장하고, ‘속’은 썩은 내가 풀풀 나는 두 얼굴의 ‘그들이’ 참 웃픈 현실입니다.
‘그들의’ 웃픈 현실의 절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확신합니다.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합니다(38절).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과’ 타협점을 찾으려 합니다. 유월절의 전례에 따라 죄수를 사면하곤 하는데, 예수를 사면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합니다(39절). 그러자 ‘그들은’ 소리를 지릅니다. 본문 4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강도’로 번역된 ‘레스테스’는 ‘산적’이라는 의미의 단어로, 로마인들이 열심당원들을 향해 관습적으로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바라바는 열심당원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15장 7절은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의 한 사람으로 바라바를 소개하고, 마태복음에서는 ‘유명한(소문난) 죄수‘(27:16)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라바는 유대인들이 대부분 아는, 유대 독립을 위해 민란을 주도했던. 유대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던, 걸출한 독립군이었던 샘입니다.
또한 ’바라바‘의 이름 뜻이 재밌습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아바‘는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요 복음서 사본에는 바라바의 이름을 ’예수 바라바‘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이름이 동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아버지의 아들 예수 바라바‘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면 대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 예수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내몰고, 죽음을 앞둔 ‘예수 바라바’는 구원해냅니다. 참 우습습니다. 그런데 마냥 우습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예수 바라바’를 선택한 이유를 알면 우리는 이내 민망하고 슬퍼집니다.
유대독립을 위해서 민란을 주도했던 ‘예수 바라바’가 유대인들에게 주려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오매불망 원했던 황금시대, 다윗왕국의 재건입니다. 이스라엘 독립 만세였던 것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진리니’ 하고, 무리와 군중 속에 적당히 숨어 부와 번영을 목적삼아 좀 더 안락한 삶을 꿈꾸며, 화를 당하지 않을 만큼만 종교적 열심을 내는 자신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들으라’ 하고 폐부를 찌르지 않나,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려야 합니까? 교우님들 같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화려한 왕국을 선물로 주기 위해 민란도, 살인도 불사하는 그런 세상 능력과 힘의 상징인 ‘예수 바라바’입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며, 진리의 삶을 위해 자기 부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누구입니까? 솔직하셔야 합니다.
새벽부터 분주히 동부서주하며, 결벽과 거룩을 위해 그렇게도 부단히 노력하고 종교적 열심을 내던 ‘그들이’ 기껏 한다는 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이고 ‘예수 바라바’나 살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런데 마냥 우습지만은 않은 것은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새벽부터 무엇을 얻겠다고 그토록 노심초사 헐레벌떡이십니까?
겉은 그렇게 열심히 씻고 닦고 치장하면서 우리 속사람의 상태는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 일상의 삶 속에서의 선택은 과연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것들입니까? ‘예수 바라바’의 것들입니까? 일상의 삶 속에서 참된 ‘에클레시아’로 살아 있습니까?
사탕을 잃어 비명의 울음을 울던 아이에게 엄마가 달려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꼭 품에 안습니다. 오래토록 안고, 입을 맞추며 엄마의 사랑을 불어넣습니다. 아이는 이내 밝은 얼굴로 뛰어 놉니다.
웃픈 현실의 인생들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왔습니다. 기꺼이 웃픈 현실의 인생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마저도 가차 없이 죽이고 마는 이 웃픈 현실의 인생들을 그리스도는 품어냅니다. 그 웃픔의 현실을 당신의 피로 씻어내시고, 당신의 진정한 생명의 웃음음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 은혜로만 우리는 참된 ‘에클레시아’로 살아 낼 수 있습니다. 그 은혜에만 꼭 붙들려 있는 우리 되십시다. 우리의 어줍지 않은 웃픈 행동과 현실에 붙들려 있지만 말고,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 오직 은혜만 바라고 의지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