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가을
김붕래
자꾸만 낮이 야위어가는 몸짓으로 저녁을 향하여 기울어가면
당신은 더욱 더 나의 신이요
당신의 왕국이 지붕마다에서 연기처럼 솟아오릅니다.
금년 가을은 너무 갑자기 찾아 왔기에 이 가을에는 고독을 운명처럼 달고 살았던 릴케의 시집을 뒤적이게 됩니다. 릴케의 <기도시집>에 나오는 이 구절은 지금도 그 뜻을 잘 모르겠으면서도 그냥 좋습니다. 그러나 나는 저녁을 향해가는 이 나이에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신을 만날 수 없어서 또한 외로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대 관능의 십자로에서 마력이 넘쳐흐르는 이 밤에
그 낯선 해후의 마음이 되어라.
그리하여 현세가 그대를 잊을 양이면 고요한 대지에 말하라.
나는 흐른다고. 급류를 향하여 외쳐라. 나는 존재한다고.
제가 가지고 있는 시집에 붉은 밑줄이 쳐진 이 시의 부제는 <베라 오카마 크누프를 위한 묘비명>입니다. 크누프라는 소녀는 15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그 소녀가 춤 출 때는 꽃송이가 흔들리듯 아름다웠습니다. 병으로 더 이상 춤을 출수 없게 되자 대신 노래를 불렀는데 모두 신의 소리라 감탄했습니다. 건강이 더 나빠지자 그림을 그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는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시는 그 소녀를 위한 묘비명 형식으로 쓰여졌지만, 릴케 자신의 다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흐른다 - 나의 예술적 탐구심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존재한다 - 나의 실존(實存)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내 시 위에 빛난다. 아마 이것이 릴케의 시적 증언이 아닌가 생각하면 이 시는 참으로 감격스럽게 제 가슴을 채워줍니다. 베토벤의 <로망스>를 듣거나 천경자의 <미인도>를 볼 때처럼 이 시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연한 느낌 이지만 참 좋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라는 키이츠의 증언이 릴케의 시에서도 유효한 듯합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들판 위에 바람을 불어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해 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서
잠 못 이루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나뭇잎 떨어져 뒹굴 때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릴케의 시중 가장 많이 읽히는 <가을날>입니다. 성장과 성숙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만큼 다릅니다. 위대한 여름의 사역(使役)도 가을바람이 스쳐가야 완성됩니다. 아마도 이 시는 영혼의 성숙을 갈망하는 릴케의 기도인 듯합니다. 봄꽃에도 향기는 있지만, 서리 맞은 가을 국화가 그윽한 향을 풍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당신의 그림자’이며 ‘들판 위의 바람’ 일 것입니다.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이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이 항상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을의 벽두에 다시 한 번 릴케의 <가을날>을 읽게 됩니다. 제게도 지금 영혼의 집이 부재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이게 태어났지만 이 가을에 또 얼마나 ‘나뭇잎 떨어진 가로수 길을 방황’해야 할까 걱정이 앞섭니다. 입맛 잃듯, 늙어가며 고독의 색채도 엷어졌으면 좋겠는데 그 고독이란 반갑지 않은 손님의 음영(陰影)은 갈수록 짙어 지니 참으로 고약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진단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 바로 이 가을날의 고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대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나는 그 문을 통해서 비로소 넓은 들판으로 나가게 됩니다.” 릴케가 14세 연상의 연인 살로메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나는 그대를 통해서만 세상을 봅니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이 아니라 당신만을, 오로지 당신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절들을 통하여 릴케가 살로매를 얼마나 의지하고 사랑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릴케야 말로 대문과 같은 존재이면서도 그 대문이 쉽게 열리질 않기 때문에 이 가을에 릴케는 구원이면서 속박이기도 합니다.
김붕래(金鵬來)
010-6647-6875. maiwol@hanmail.net
서울 서문여고 교감, 중국 옌타이대학 교수 역임
현재 한국문화훈련원 교수
저서 : 수필집 <떠나는 것에 대하여> 외 4권
역사 기행문<삼황오제> / 논문집 <한민족문화소고>
대학교재 <문학선독>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