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보고서
서민웅
잠에서 깨면 이층 옥상으로 올라간다. 먼저 현관문을 열고 편지함에서 신문을 꺼낸다. 옥상은 몇 평 되지 않지만, 화분 수십 개, 플라스틱 상자 텃밭 열 개가 놓여있다. 나머지 공간에는 평상이 차지했다.
요즘에는 어둑새벽부터 매미가 극성이다. 밤새 참았다가 한꺼번에 공명통을 울리는지 시끄럽다. 현관문 앞 1차선 도로에는 비둘기가 아침을 먹고 있다. 건넛집 폐가 지붕 위로 길고양이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걸어 나온다. 이 고양이는 주민들의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고 산다. 어린이나 젊은이는 귀여워하고, 어른들은 슬금슬금 눈치 보는 모양새와 특이한 울음소리를 즐겨지 않는다.
국민체조를 순서 없이 시작한다. 내가 더 넣은 허리 운동, 무릎 운동도 포함해서 한차례하고 나면 날이 훤해진다. 도로를 행인들이 지나가며 체조하는 나를 흘끔 올려다보기도 한다. 인근이 원룸촌이어서 대개 젊은이들이다.
화분과 상자 텃밭에 물을 준다. 팔월 들어서면서 봉숭아는 누런 떡잎이 생기고 생명력이 쇠잔해진다. 그래도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흔히 분꽃, 백일홍 같은 화초가 오랫동안 꽃이 피는 거로 아는데 봉숭아도 이에 못지않다. 초여름에 처음 꽃이 핀 뒤 가지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여름이 다 가도록 핀다.
올해 큰 스티로폼 상자에 옮겨 심은 도라지가 건강하다. 보라색과 흰색이 섞여 무더기로 핀 꽃이 볼만하다. 지방에서 유채나 메밀, 코스모스나 백일홍 같은 걸 심어 꽃이 피는 절정기에 축제를 여는데 도라지를 많이 심어 축제를 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 꽃대가 1미터는 크고 뿌리(한약재:桔梗)까지 거담 등 효능이 있는 약초이니 좋지 않은가. 더구나 도라지는 씨가 떨어진 곳이면 이듬해 마구잡이로 싹이 터 나오는 생명력도 대단하다.
평상에 앉아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일간지 하나를 구독하는데 경제지 하나를 더 끼워준다. 매일 아침 미화원이 현관문 앞 도로를 거쳐 간다. 옥상에서 신문을 읽다 보면 미화원이 큰 쓰레받기를 끄는 소리가 난다. 그는 도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쓸어 모은다. 쓰레기를 버리면 법에 따라 조처한다는 구청장의 경고문 앞에 매일 쓰레기가 쌓인다. 버리는 사람도 헛 경고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아 묶어 놓고 다음 장소로 간다.
미화원이 도구를 끌고 사라지면, 깡마른 여자 노인이 나타난다. 그는 부대를 들고 다닌다. 원룸의 쓰레기통을 뒤져 깡통을 꺼낸다. 폐지보다 깡통이 더 값이 나간단다. 이미 여러 곳을 거쳐 온 그녀의 손에 든 부대가 부풀어 있다. 그 부대를 길바닥에 놓고 잘각잘각 밟는다. 그 소리가 고요한 동네에 늦잠 자는 사람을 깨울 정도로 요란하다.
그때쯤 산책하러 나갔다 돌아오는 노인 몇 사람이 차례로 불편한 걸음걸이로 빈 등산 가방을 메고 도로에 나타난다. 한두 사람은 축대 계단을 오른다. 한 계단 한 계단 난간을 붙잡고 힘에 겨워한다. 그래도 이승이 좋다고 했는데…. 나도 게을러지는 마음을 다잡는다.
신문을 제목 위주로 넘기다 눈에 띄는 몇 기사만 자세히 보는데 신문 하나를 다 보기도 전에 냄새가 올라온다. 국이나 장을 끓이는 냄새가 열린 주방 창문을 통해 이층으로 솔솔 올라오는 것이다. 아침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므로 신문을 접어들고 내려간다. 이런 일상은 겨울만 빼고 반복한다.
나에게 옥상에서 아침 일상만 있는 건 아니다. 낮이나 초저녁에도 옥상에 올라가 있기를 즐긴다. 요즘 같은 여름엔 한낮을 빼고는 방보다 옥상이 바람이 불고 공기도 나은 것 같다.
우리 집은 거의 매일 우편집배원이 다녀간다. 그들은 붉은 커다란 함을 오토바이 짐받이에 싣고 다닌다. 옥상에서 그들이 보이면 우리 집 편지함에 넣는지 지켜본다. 정기간행잡지, 동창회보, 고향 신문, 청첩장, 각종 고지서류, 지인들이 보내오는 수필집 등. 내가 반가워하고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집 앞 도로는 택배 차량, 쓰레기 차량, 소방차가 다니는 큰길 역할을 한다. 수시로 택배 차량, 승용차가 오가고 이따금 택시까지 지나간다. 이런 차량은 오가도 큰 불편은 없다. 조심하면 된다. 시끄러운 건 오토바이다. 오토바이는 그렇게 시끄럽게 매연을 뿜으며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이따금 마이크 소리가 들린다. 못 쓰는 냉장고나 텔레비전, 컴퓨터 같은 전자제품을 수집하는 사람도 있고, 참외, 마늘, 양파 같은 농산물을 팔거나 갈치, 전복 같은 수산물을 파는 차량에서 들리는 소리이다. 농촌에서 자란 나는 농산물은 관심이 많다. 농사를 짓던 십 대 후반, 러닝셔츠를 흠뻑 적신 땀을 짜던 기억이 슬그머니 머릿속을 점령한다.
다른 곳에서는 못 볼 것 하나. 헌 옷 슬쩍 하기다. 도로 한쪽 귀퉁이에 사람 키만 한 헌 옷 수집함이 놓여 있다. 원룸에서 이사 가는 젊은이들이 수집함에 헌 옷을 넣는 것을 자주 본다. 수집함 주인은 일주일에 한 번 트럭을 가지고 와서 수거해간다. 그런데 주인 아닌 몇 사람이 또 꺼내 간다. 여자 노인도 있고 남자 노인도 있다. 그들은 옷 투입구로 팔을 뻗어 손이 닿는 것만 꺼내 간다. 집게를 사용하면 많이 꺼낼 수 있을 텐데, 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매미는 낮에도 때때로 소리를 맞춘다. 어디 매미뿐인가. 좁은 옥상에서 나비도 화초 사이를 날고 잠자리도 난다. 고춧대에는 알록 거미가 줄도 쳐 놓는다. 지난봄 비둘기는 상자 텃밭에 뿌린 열무 씨를 모두 빼먹고 폐가 나무에 앉아 내 행동을 감시하기도 했다. 장마 전에 줄을 지어 옮겨가던 개미는 어디로 갔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옥상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들이다.
옥상은 다른 사람이 관심이 적은 곳에서 그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깥세상을 엿보고 생각해 보는 창구이고, 넋 놓고 사색을 할 수 있는 자리이다. 아침 하늘을 보고 그날의 날씨를 점치고, 계절에 따라 피는 꽃, 발갛게 익는 몇 개의 고추, 폐가의 가죽나무를 보며 바뀌는 계절을 느끼는 곳이다. 옥상이 있어 좋다.
(2019.9.)
첫댓글 옥상이 서 선생의 아름다운 삶과 문학을 생성시켜 주는 좋은 장소군요.
잘 쓰신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