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오두막집(김한식)
시간의 문이 열리면
추억의 세계가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지고
밤이면
시냇물소리 졸졸거리는
골짜기를 따라
별과 이슬이
꽃비처럼 내리는
작은 집이
그림으로 나타난다.
나지막한 돌담에
야생화
함초롬히 피어나고
가벼운 초록지붕이 있는
고즈넉한 토담집,
보글보글 끓는 화덕 위의
밥솥에는
주걱을 든 아내의
맑은 미소가 꽃으로 피어나고
들판으로 열린
세계의 문을 나서면
환한 길이
하늘까지 닿는
영원의 오두막집이 보인다.
-작품 감상-
나는 어머니라고 말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오, 집이여/ 내 어린 시절의/ 어슴푸레한 아름다운 오두막이여!
어머니와 집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결합시킨 밀로스(Milosz 우승)의 탁월한 싯구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들판과 같은 세계 속에서 보호를 받는 것들은 시 속에서 인간적인 것으로 바뀐다. 집은 아기를 안은 엄마처럼 모든 위협으로부터 나를 감싸고 내 가슴으로 포근히 내려온다. 그것은 정녕 내 어머니이다. '모든 꽃받침은 집'이라고 하지만 '집은 영원한 어머니'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오두막은 영원한 엄마의 품이다.
내 마음에 세워진 집/ 내 침묵의 성전/ 매일 아침 꿈속에서 되찾았다가/ 매일 저녁 버리네/ 새벽으로 덮여 있는 집/ 내 어린 시절의 바람에 열려 있는 집/ 이 집은 시간의 숨결을 타고다니는 구름처럼 가벼운 집이다. 그것은 희망으로 열려 있는 숨 쉬는 집이다. 그것은 매일 아침 우리들을 받아들여 삶에 대한 신뢰를 준다. 장 라로슈(Jean Laroche)의 시편을 읽으며 나는 내 몽상의 오두막을 짓는다. 매일처럼 되찾았다가 매일처럼 버리는 생기(生起)하는 집을 짓는다.
성(城)을 가진 사람은 초가를 꿈꾸고 초가를 가진 사람은 궁전을 꿈꾼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초가를 꿈꾸다가 궁전을 꿈꾸기도 한다. 우리들은 대지 가까이 초가집의 마당에 내려와 살기도 하고 공중누각에서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꿈에 그리는 집은 그 공간이 아무리 넓을지라도 반드시 오두막이어야 하고 비둘기의 몸이고 번데기여야 하는 것이다. 내밀함은 보금자리의 중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꿈꾸는 오두막집'은 두개의 열린 문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추억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간의 문이고 또 하나는 들판으로 열린 공간의 문이다. 문을 통해서 집은 세계와 더불어 소통하며 영원과 대화한다. 집은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계에 몸을 여는 것이다. 별과 이슬이 꽃비처럼 내리고 야생화가 함초롬히 피어나는 오두막에서 아내의 맑은 미소는 꽃으로 피어나 공간의 문을 열고 시간 속에서 영원의 하늘까지 이른다.
첫댓글 城을 갖지 않았지만 늘 초가를 꿈꾼다. 곧 엄마이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풍경이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