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들뫼 에피소드 1-1
피아노
어제 피아노를 주웠다.
시민위원회를 마친 점심자리로 가던 중 마을 쓰레기 수집장에 버려진 피아노가 눈에 들어와 가서 건반을 두드려보니 소리가 생생하고 몸체가 모두 멀쩡하다.
'아니, 이렇게 멀쩡한 피아노를 버리다니....' 혀를 찬 뒤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데 마침 앉은자리 창밖으로 피아노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어 자꾸 눈이 간다.
마치 '나 이대로 둘 거요?' 하는 것 같다. '그래 내가 너 데려가마.' 작정을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점심을 끝내고 얼른 집으로 가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작은 트럭을 빌려 피아노에게 갔다. 다시 보니 너무나 멀쩡한 피아노다. 삼익 제품의 가정용으로 디자인도 이쁘게 된 것이 지난밤 비를 맞았다. 다행히 많은 비가 아니었는지 건반과 내부에는 젖지 않았다. 예전 피아노를 다루던 경험으로 혼자 들어 버티는데 쉽지 않다. 마침 쓰레기 운반차가 와서 이들 용역인부들에게 손을 빌려 싣고 왔다. 물론 마당을 지나 거실까지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들여놨다.
풍금이 있던 자리에 피아노를 바꿔 놓으며 먼지를 훔치고 털고 닦고 해서 앉히고는 건반을 두드리니 제대로다.
'아, 이렇게 다시 피아노를......' 스스로 감동에 젖는다.
'피아노'
나와의 관계는 영화 같은 것이 아니다.
53년에 나서 시골교회 목회만 하시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풍금만 보고 살았다. 6학년 새 학기에 도회지로 전학을 했지만 변두리학교여서 피아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합창부에 들어서 합창을 했는데도 그랬다. 그런데 동네 담 높은 어느 집을 지나며 낯선 음악 소리를 들었고 이것이 피아노라걸 알았다. 하지만 높은 담의 경계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늘 궁금했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강당 단상 한쪽에 우아하고 육중한 무엇이 있었는데 이것이 '피아노'라 했다. 그때 그 시절엔 보기 드문 그랜드피아노였다. 이 '피아노'는 늘 잠겨져 있어서 내가 동네서 듣던 소리와 같은 것인지 누가 연주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5월이 되자마자 다시 시골, 섬마을로 전학을 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였지만 섬 시골이라 그랬는지 초등학교 시절 같이 음악시간이 되면 우리는 풍금을 옮겨 와 수업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도시를 들락날락하며 어쩌다 '피아노'를 가끔씩 볼 수 있었고 만져 볼 수도 있었지만 풍금만 만지던 나에게는 역시나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였다. 아무나 만질 수 없는, 특별한 사람, 우아하고 고상한, 희고 부드러운 손을 가진 사람만이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이것은 학식 있고 부유한 집의 귀한 고명딸 같은 사람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이런 환상이 고교를 입학할 즈음에는 옅어졌지만 내겐 여전히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등학교엔 음악실이 따로 있고 이 음악실엔 어플라이드 피아노가 있었다. 남고에서는 드문게 중창을 할 만큼 음악 선생님께 사랑을 받던 터라 피아노를 쉽게 만질 수는 있었지만 영 어색했다. 풍금으로 찬송가 4부를 치던 내 손가락은 피아노를 두드려 치는 데는 맥이 없었다. 또 한창 자존심을 세울 때라 피아노를 못 친다는 티가 나서 존심을 구길 것 같아 가까이하지를 않았다. 교회에서는 성가대, 학교에서는 중창단, 교외에선 합창단으로 늘 노래를 하며 피아노 반주가 곁에 있었지만 '피아노'는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했고 반주자나 음악회에서 독주를 하는 사람은 대단히 톱아보여 나와는 별개의 고귀한 사람으로 알았다.
이런 내가 고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성가대 지휘를 맡았다. 이때쯤에는 웬만한 도시교회는 피아노가 다 있었고 이로써 피아노반주자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지휘를 했지만 내가 연주 못하는 피아노이기에 반주자 대하기가 늘 어려웠다. 지금도 그렇다.
헌데 세상에 피아노바람이 분다 싶더니 피아노학원 가는 것이 아이들 기본 과정이 되고 집집마다 바이엘이 기본이더니 어느 사이 집집마다 다 피아노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1970년~90년 대지 싶다.
내 집에도 이즈음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처외가에서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고 쓸 일이 없다며 가져가라 해서 얻어 온 것인데 하도 오랫동안 묵혀둔 것이라 조율을 해도 금방 음이 쳐져버리기 일쑤인 피아노였지만 그래도 피아노였다. 큰 아이 서너 살 때 부산 살다 함안 시골로 이사를 했는데 이 시골 동네에 피아노가 우리 집이 유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