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놀라운 일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건을 계속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하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세우심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바울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줄 사람을 주님께서 예비해두셨다는 뜻입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본래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그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도 미리 예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빛의 광채’로 인해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갈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서 다메섹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이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입니다(12절). 이미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제자”의 상태에 있었습니다(행 9장 10절).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가는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르면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경건하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누군가를 칭찬할 때는 율법을 가지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나니아가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사람으로 서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맨 먼저 한 일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울의 시력이 다시 회복됨을 알리는 것입니다. 바울 곁으로 와서 “다시 보라”하니까 즉시 그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13절).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줍니다. 먼저 14절에 바울이 무엇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얘기해줍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했다”고 하지요. 보통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썼던 신앙 고백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너를 택했고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그 의인(=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고 실제로 그 분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그 의인”이라고 하지요. 사도행전 3장 14절에도 예수님을 “거룩하고 의로운 이”라고 했고 사도행전 7장 52절에도 “그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의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예수님이 의인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의인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신 이유. 15절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주님)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 =계시)에 증인이 되리라”
‘그를 위한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되어 모든 사람 앞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주저하지 말고 먼저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16절)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에는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말씀을 합니다.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음을 가시적으로 표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행 2장 38절. 10장 48절) 세례를 받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직접 보거나 듣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전한 그 진리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사랑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라는 뜻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증인은 증언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증인 공동체”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증인 공동체. 우리는 그 지체로서 각 처소에서 살고 있습니다. 각 처소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항상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언제든지 복음을 증언하는 자세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증인 역할을 하기 전에 먼저 행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먼저 자신의 죄의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누려야 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명백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세례’라는 것은 주님에 대해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모시고 사는가, 확인하고 표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합니다. 바르게 알고 깨달아야 바르게 증언할 것이 아닙니까! 법정에서 증인을 세울 때는 본 사람을 세우고 아는 사람을 세우지 모르는 사람을 세우지 않습니다(자동차로 인한 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현수막을 보지만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만 가는 것임).
사도 바울은 세례를 받고 주님의 증인으로서 살게 됩니다. 평생을 이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사도행전은 교회는 ‘증인 공동체’로 세움을 받았음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줍니다. ‘증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꼭 어떤 선교사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죄 씻음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증인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증인입니다. 20절에 스데반을 “주의 증인”이라고 했는데,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방인에게 보냄 받음
사도 바울이 아나니아를 만난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17절). 그때에 ‘황홀한 중에’(개역 한글. ‘비몽사몽간에’ 헬, 엑스타세이. 환상. 행 10장 10절, 베드로와 같음)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분명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18절을 보면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게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주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할 테니까 그곳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듣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19-20절에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땡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고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그들이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바울이 변화가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자신이 변화가 되었음을 알면 그 사람들이 받아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더 정확합니다. 그들은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 하신 말씀은 21절입니다. 21절을 보면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증언은 자신이 지금 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이 얘기는 이방인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좋지 않은 자극을 주는 말이지요.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에 대해서 증언할 때에 듣지 아니할 것이니까 떠나서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가지고 주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사역은 주님의 부르심, 주님의 맡기심, 주님의 보내심에 순종해서 하고 있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한 답을 하고 있지요. 자신을 부르신 부활하신 주님과 관계해서.
우리의 삶도 이런 정도의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하는 삶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사는가? 물으면 부활하신 주님과 관계해서 분명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소망의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법을 활용함
유대인들이 이렇게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다가 소리를 지릅니다. 22절을 보면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자극적인 바울의 증언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유대인 너희들이 듣지 않을 것을 알고 떠나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적대시했던 이방인들을 구원 받은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분리 되었다는 의식,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니. 그것도 예수님만 믿고서.
유대인들은 떠들고 옷을 벗어 던지도 티끌을 공중에 날리면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 가라”(24절)고 명하고 무슨 일로 이처럼 이 사람들이 떠드는가 알고자 하여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합니다(24절). 채찍은 그 당시에 무서운 고문 도구입니다. 가죽 끈을 엮어서 만들었는데 날카로운 쇠붙이(금속 조각)이나 뼈를 박아 넣은 짧은 가죽 채찍입니다. 이 채찍에 맞은 사람은 살이 찢겨지고 죽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인이 된다고 합니다. 회복이 된다고 해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하기 위해서 가죽 줄로 매니까 바울이 자기 곁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25절) 이것은 로마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따집니다. 그 당시 로마법에 로마 시민은 죄를 정하지 않고 결박하거나 채찍질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 시민은 재판 과정을 거쳐서 죄가 확실할 때만 형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재판 전에는 이 형벌을 면제 받았습니다. 이 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지요.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하자 천부장이 바울에게 와서 ‘네가 로마 시민이냐?’고 묻습니다. 바울은 ‘그러하다’(27절)고 답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고 28절을 보면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23장 26절에 이 천부장의 이름이 나오는데 글라우디오(Claudius) 루시아입니다. 이 이름을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현금을 주고 시민권을 샀을 것입니다. 그는 부했던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다”고 답을 합니다. 이렇게 되자 바울을 심문하려던 사람들도 물러가고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합니다(29절). 매질은 하지 않았어도 매질하려고 결박한 것 자체가 이미 법을 어긴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해서 채찍을 맞으면 심문을 당해야 할 위기 상황을 벗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법적인 신분을 이용할 것은 이용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심한 핍박을 받았지만 그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런 로마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바울은 제국의 중심인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과 자주 접촉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로마로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요 섭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법적인 상황을 가지고 주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최대한 그러한 기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이 세상의 법의 접촉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법을 잘 활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법을 다 무시해가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법을 활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너무 외면을 하듯이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신령한 것’을 추구한다는 이름 아래 기독교를 이 세상으로부터 소외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신앙이 무슨 훌륭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모습은 주님의 생각을 상당히 오해한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니까 복음을 알아야 하고, 이 세상에 전해야 하니까 이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세상 속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 세상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고, 이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동등한 자격과 실력을 체계적으로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체계적으로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