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수필이 그리는 그림
안유환
수필은 내게 ‘죽마고우’처럼 다가왔다. 어릴 적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는 격식도 예절도 순서도 꾸밈도 없다. 누가 보든 말든 그 옛날 ‘고향 사투리’를 그대로 늘어놓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산자락이나 풀밭에 제멋대로 자라는 야생화처럼,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처럼―. 고상한 지식이나 정치적인 얘기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지난날 어떤 아이는 여자친구들의 고무줄놀이를 방해했고, 딱지치기, 땅따먹기 놀이를 하며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자고 나면 모든 ‘원한’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나의 살던 고향은~’ 노래를 함께 불렀던 시절이 그림처럼 되살아난다. 어릴 적 얘기를 하다가 금방 사춘기로 넘어가고, 그리고 학업으로, 직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날들을 돌아본다.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고, 어떤 친구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는다. 내가 수필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그러했다.
제멋에 겨워 써놓고 보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그야말로 ‘수필’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수필이란 따로 형식을 취할 필요도 없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틀에 잡힌 형식이나 딱딱하게 규격화된 것은 재미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도 없고, 성형의사의 손이 가지 않은 얼굴보다 더 매력적인 미인도 없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얼마간 ‘수필’이란 것을 끼적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멋에 겨워 써놓고 보면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재미도 있었다. 그즈음 부산에서도 크리스천 문인협회가 태동하고 모이며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다.
30~40년 전에는 요즘처럼 글 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따라서 회원확보도 어려웠을 것이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에서는 등단도 하지 않은 나를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지난날 신문 기사를 쓰던 문화부 기자라는 나의 이력을 등단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시 목회자였던 나는 ‘무면허’로 수필의 운전대를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주눅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학’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면 문학이 되는 줄 알았다. 막연히 글 쓰는 것을 동경하여 기자가 되었지만 사실 기사를 취재할 때는 문학을 깊이 공부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동인들의 글을 읽고 이름있는 수필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나의 무면허에 대해 조금씩 자괴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작법’ 같은 책을 사보거나 특별히 공부를 따로 한 기억은 없다. 등단을 작심하고 두 편의 수필―「雅號 이야기」 「無隻山」―을 차례로 써서 1997년 월간 『수필문학』의 추천을 완료했다. 첫 수필집 『매미 소리를 들으며』를 선보인 것은 1999년이었다. 그리고 15년 후 두 번째 수필집 『마음을 건드리는 노래』를 펴냈다. 그동안 목회에서 은퇴하고 출석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문예교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수필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가르치며 배운다’는 말처럼 비로소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글쓰기 지도에서 윤오영(1907~1976)의 『수필문학입문』을 텍스트로 하며 2~3권의 ‘수필창작론’을 참고했다.
윤오영은 수필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필은 자유로운 산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자유로운 산문이다.……세간에 흔히 수필이라면 신변잡기에 불과한 사소한 문장이라 경시하며 시사 평론적, 문화 평론적인 도도한 문장을 에세이 문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문학적 성격을 몰각하는 말이다.……수필이란 가장 오래된 문학 형태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문학 형태요, 아직도 미래의 문학 형태이다.”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인 하버드 리드(H. E. Read)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수필은 단순한 기성의 언어에 의한 건축물이 아니다. 시나 희곡처럼 탁마되고 정선되어 이루어진 글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가지고 있는 언어에 의하여 이루어진 산문이 수필이다.” 강범우 평론가는 “수필은 소설처럼 허구로 꾸며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현시(顯示)의 글이다. 수필은 체험을 토대로 하는 주관적, 개인적, 심경적인 것들이 그 본바탕을 이룬다. 그러므로 수필은 다른 글보다 독자에게 더 친근감을 주고 있다.”
피천득(1910~2007)은 그의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다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이런 말들을 살펴보면 ‘수필’은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죽마고우’처럼 다가서는 글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남기고 싶은 마음
“왜 글을 쓰는가?”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내놓는 답은 대체로 “쓰고 싶어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라는 말이다. 틀리지 않은 답이지만 올바른 답이라 할 수는 없다. 어떤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뜻이 있기 마련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이 없는 소리는 없다”(고전14:10)고 말했다. 온갖 소리가 다 뜻이 있다면 마음을 펼치는 글쓰기에 의미가 없을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이 많고, 그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다 알아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다 표현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참 좋다!” “아름답다!” “멋있다!” 한마디로 평가해버린다면 아마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유를 찾으면 답이 보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현미경으로 찾아보고, 알 수 없는 것은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우주의 수많은 별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천체망원경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데도 분명히 소중한 이유가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무언가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귀중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여 메모를 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먼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렌즈에 담는 사람처럼 보고 들은 좋은 생각을 메모하고 그것을 누구에게 얘기하고 싶어진다. 그대로 흘려버리기는 아쉬운 자기 생각이 붓을 따라 글로 모습을 바꾼다. 아무런 형식이나 계획도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옮기다 보니 한 페이지의 글이 되었다. 그 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 글은 그에게로 와서 한 편의 ‘수필’이 되었다.
살다 보면 어렵고 답답한 마음이나 감동적인 느낌을 털어놓고 얘기하고 싶어도 그런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나 그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때도 있다. 가까운 이웃들과 함께 살면서도 그런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럴 때 우리는 한 장의 종이를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듯 지면에 자기 모습을 그려낸다. 그 모습은 외출하려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친 것이 아니다. 나들이에서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몸을 던진 모습이다. 그럴 때 글을 쓰는 사람은 해방감을 맛보고 자기가 쓴 글에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치유와 ‘구원’으로 이어진다. 그 남겨진 글―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이야기―을 읽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작가의 모습을 대하는 것처럼 그 진솔함에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예지에 수필을 발표하거나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때는 그 모습도 매만지고 단장도 하며 퇴고를 해야 한다. 나의 첫 수필집 서문은 “수필은 정돈된 마음의 행로이다.……”로 시작되고 있다. “……때로는 해수욕장이나 휴양지에서 벌거벗거나 아무렇게나 차린 모습들을 스냅으로 카메라에 담기도 하지만 정식으로 인물사진을 찍을 때는 대체로 머리모양도 손질하고, 화장도 하고, 정장을 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아무도 가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필을 쓰는 것도 이런 일들과 흡사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마음의 정장을 하고 그 표현도 화장을 하는 셈이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제하며 가장 아름다운 마음들을 정리한 것이 한 편의 수필로 완성된다. 그러기에 수필을 읽으면 그 안에 예절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감격과 기쁨을 발견한다.”
생활 속에 널려있는 소재들
어떻게 한 편의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려면 우선 시상이 떠올라야 하고 은유와 직유 등을 적용할 방법을 고안하고 흙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듯 오래도록 고심하며 알맞은 시어(詩語)를 발굴해야 한다. 시를 쓰는 장소는 외딴곳이나 골방이 적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가 한 편의 소설을 쓰려면 플롯을 구상하고 소재를 관찰하고 묘사하여 주제를 살려내기까지 한동안 일상생활과는 담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가는 삶의 현장을 떠날 수 없다. 소재가 생활 속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수필의 소재는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특별한 주제를 미리 설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계획된 주제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수필이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논설문이 되고 말 것이다.
수필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자기가 태어난 자리와 유년, 소년, 청년 시절의 성장 과정,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미래의 꿈 등 그가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든 일이 수필의 소재가 된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수필가인 페이터(Walter Pater)는 “만 가지의 경험을 함께 쓸어모으면 영원한 생명체가 된다”고 말했다. 수필은 소설처럼 꾸며낸 서사가 아니라 진솔한 자기 이야기이다. 누구에게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기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이다. 글(수필)을 쓴다는 것은 잊어버린 자기를 되불러내는 것이며, 달아나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일이다. 우리의 삶은 곧 이야기이다. 서로가 만나면, 앉으면 온갖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이야기를 골라서 잘 정리하면 한 편의 수필이 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자기가 쓴 글을 읽으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역지사지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한다.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의무와 책임도 소홀히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도 찾지 못하고 마침내는 소중한 자유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글을 쓰면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 상황을 파악하여 주제를 알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다. 글을 쓰며 생각하는 것은 삶의 자리를 돌아보는 것이며, 어디서나 자기 좌표를 확인하면 방향감각을 되찾고 나아갈 길을 바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는 자아의 옳고 그름은 판단하고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극적인 질문을 하는 자리에 이른다.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으면 흐트러진 삶은 바로잡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글 쓰는 방법을 배우는 이유는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탐욕과 질투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경탄과 애착을 가지기 위해서다.” 미국의 작가 나타리 골드버그의 말이다.
그윽한 정에서 피는 향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좋은 수필은 문학성이 있어야 한다. 귀한 교훈이 가득한 경전을 두고 문학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내용이 좋다고 다 문학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란 아름다움을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예술적 언어의 구조를 말한다. 그리고 모든 예술적 표현은 우리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바바라 애버크롬비(Barbara Abercrombie)는 그의 『글 잘 쓰는 기술』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로 붐비는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 맹인 두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표지를 목에 걸고 있는 사람의 깡통에는 각박한 인심을 반영이라도 하듯 동전 몇 개만 덩그러니 담겨있었다. 그러나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저는 봄이 와도 꽃을 볼 수 없습니다’라는 팻말을 세워놓고 앉아있는 맹인의 깡통에는 동전이 가득했다. 이 사람의 단 한 줄 팻말이 행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수필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피천득은 ‘수필’을 차를 마시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이는 이의 특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씌어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가 필요하지 않다.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문학이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는 수돗물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 편의 수필은 마음을 끄는 향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오영은 문장의 품위를 두고 “마음이 담담하게 가라앉아야 그윽한 정이 고이고, 그윽한 정이 있어야 문장이 방향을 머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수필가 김용준(1904~1967)은 그의 「예술에 대한 소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술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다반사에 불과하다. 식탁 앞에 앉은 사람이 어떠한 태도로 어떻게 밥술을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 곧 예술창작의 이론과 실제이다. 점잖게 먹느냐 얄밉게 먹느냐, 조촐하게 먹느냐 지저분하게 먹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결국 완성된 인격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되기 전에 예술이 나올 수 없다.” 참으로 수필가다운 정의이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P 학장은 첫 강의 시간에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시던 말씀을 기억한다. 인간이 되려면 누구에게서나 배워야 한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공자는 논어에서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말했다. 이 말은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좋든지 나쁘든지, 어쩌면 세상 만물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수필을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아무도 수필에 부끄럽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적어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잊지 못할 사람, 머무르고 싶었던 추억,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아름다운 지역과 그런 마음들을 정리하면 한 편, 한 편의 수필이 된다. 글의 서두는 열리는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워야 한다. 피천득은 그의 「수필」의 서두를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한다.
아름다움과 새로움은 문학의 본질이다. 윤오영은 “평범한 생활 속에 묻혀있으면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면 참신한 수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예술가의 참된 작업이란 이미 있는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했다. 반드시 새로운 사물이 아니라도 진부한 문자를 그대로 쓰지 않고 표현을 새롭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붓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한 편의 수필이 되는 것이니까. 붓이 가는 길을 알려면 지난날 붓이 걸어간 길을 걸어보아야 한다. 그 길은 수많은 책―고전 속에 있다. 자칫 직설적인 자기 자랑이나 변명, 남을 비난하는 내용은 글의 품위를 떨어트릴 뿐만 아니라 글 쓰는 이의 인품을 훼손할 수도 있다.
수필의 매력은 제멋대로 걸어가던 붓이 마침내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데 있다. 돌아보면 수필을 쓸 때는 즐겁고 감사할 일이 많았다. 수필이 그리는 그림은 작가의 가장 순수하고 고운 마음이다. 나는 좋은 글을 쓰며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이태준도 이러한 마음을 그의 수필집 『무서록』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쓰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天命)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枯淡)의 노경(老境)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아마 수필을 쓰는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바람이리라!
안유환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