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사슴벌레
사슴벌레 한 마리
자기 먹이만 한
붉은 화두 하나 던지고
나무속으로 몸을 숨긴다
나는 서걱이는 불립문자를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게 나무 틈새만 보고 있다
알을 슬고 나무를 갉아 만든
이끼와 낙엽
안개가 숲을 삼켰으므로
나무도 창을 닫았다
사슴벌레도 나도 함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얼굴을
빼꼼 내미는 숲
사슴벌레가 안개를 부르는 걸까
창을 빠져나온 내 배가
만삭이다
일렁거리는 꽃잎을
가슴에 담으려 해도
얕은 사색으론 힘든 일이어서
배만 불렀다
임신중독증에 걸린 나는
까칠한 입술로
노을 한 모금 베어 마신다
일인극
꿈속에 아이의
눈망울과 쏟아지는 별빛과
헐거운 자루가 보인다.
길바닥에 떨어진 눈물과
시커먼 빗방울이
섞이는 순간,
매질 당한 아이
가까스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복화술처럼
꿈은 자루와 함께
어디로 흩어지고,
반쯤 닫힌 아이의 입안으로
이교도의 구슬픈 소리만
악몽으로 남아 있다.
삶과 죽음을 파고드는
아이의 눈빛
알 수 없는 발음과
슬픈 핏줄과 폭력이
쏟아내는 원두
첫 별이 빛나고
검은 구름과 함께
아이 하나 사라졌다.
우린 순교자의
혈통인가 봐.
검은 피가 흐르는
울음은 나의 전생
(대표시)
네안데르탈 12
-수호성의 회귀
나는 풀과 나무를
사랑하고
초원을 뛰어다니며
꽃을
꺾네
아이들은
자꾸
태어나고
여자들은 어머니가 되어
늙어가네
그리하여 입술이 붉은 별들이
낙타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면,
초원의 별이여
모든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밤이 올 것이네
나는 모래바람 속에
얼굴을 씻고
초원을 뛰어다니며
꽃을 꺾네
해독할 수도 없는 난해한 문장들이
밤하늘에 떠 있네
구름 트렁크
구름이 여자를 어둠으로 포갠 후
마을은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임산부 침대 위에서
여자가 빗방울로 녹아내릴 때
가냘픈 몸은 여행 중이었었다
가죽 가방의 지퍼가 이음새 없이
여자를 여닫았으므로
흘러가지 못한 빗물이 좁은 몸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물방울이 터질 때마다
들고 있던 구름의 주소지가 지워졌다
겨울이 메스처럼 여자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
여자는 보이질 않고
마을엔 얼음 우는 소리만 쩡쩡 들리어 온다
북극성
1
공이 도는 건, 지구가 돌고 별이 도는 건, 북극성 때문이지. 너의
까만 눈동자가 돌고 있기 때문이지.
까만 네 눈동자를 보고
나는 찰나에 북극성으로 갈 수 있지
2
설탕이 녹는 온도는 몇 도일까?
먹다 만 옥수수 알갱이처럼
드문드문 별이 박혀 있는 저녁,
나는 시간의 송곳으로 북극성을 찔렀지
가봉 중인 내 두개골이
덜거덕거리며 부풀어 올랐지
3
나는 별 사냥꾼. 시간의 화살을 날리지. 화살이 날아가는 건, 시간
이 흐르는 건, 네가 매일 걷고 내가 매일 뛰기 때문이지.
깜빡이는 네 눈동자를 보지 않고도
나는 찰나에 북극성으로 갈 수 있지
박우담
2004년 《시사사》 등단
시집 『구름트렁크』, 『시간의 노숙자』, 『설탕의아이들』,
『계절의 문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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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재생되는 회복을 위한 궤도
박주택
“사라지지 않는 그 화두가/밤의 이끼에 절어 있다.”(「사슴벌레」) 오늘날 우리는 쏟아지는 화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을 켜면 알고 싶지 않더라도 오늘의 이슈를 알게 되고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타고 무수한 취향과 개인의 일상이 코스 요리처럼 펼쳐진다. 이제 우리는 보다 현명한 체험자가 되어 누군가가 던진 화두 혹은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방식을 알기는커녕 “멍하게 나무 틈새만 보고”(「사슴벌레」) 있는 것처럼 의식에서 분화된 세계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박우담의 시 「사슴벌레」는 “자기 먹이만 한/붉은 화두 하나 던지”고 “몸을 숨기는”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해 그것을 냉철한 승부 논리 속에서 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내밀한 공간으로 “개울”을 택한다. 개울의 공간성은 크게는 숲의 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끼·나무·꽃잎·낙엽의 상생을 돕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것은 안개나 노을과 같이 때로는 숲이라는 세계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화두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추체험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개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곳에서 “부화”했다는 한 사람의 일인극을 살펴보자. “꿈속에 아이의/눈망울과 쏟아지는 별빛과/헐거운 자루가 보인다.”(「일인극」) 이 자루 속에는 “슬픈 핏줄과 폭력이/쏟아내는 원두”가 담겨 있다. 그것의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는 일순간 취향을 자극한다. 그러나 커피 한 모금의 여유 속에서 환기되는 무의식은 폭력이라는 단어에 휩쓸린다. 이는 커피콩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 미성년자의 노동 착취라는 화두를 자연스럽게 유추해낸다. 쉽게 사 마시는 커피 한 잔에도 작동할 수 있는 윤리 의식은 이 세계가 얼마나 많은 폭력을 내재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나”와 “아이”는 꿈속에서 관찰자와 체험자의 암묵적인 대화를 통해 사연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채택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목에서도 주지할 수 있듯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어 있는 공간성보다는 공존하는 주체의 공간성의 맥락으로 읽어봄 직하다. “이교도”와 같은 처지에 놓인 “우리”가 늘 이방인이었고 소외된 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순교자의/혈통인가 봐”라는 말로 ‘나’와 아이의 자기동일성이 발견되는 지점에서 ‘나’와 ‘아이’는 비로소 숭고한 존재로 승화되며 “울음은 나의 전생”이라는 선언과 함께 세계와의 화해를 용인하게 된다.
두 편의 신작시 「사슴벌레」와 「일인극」을 통해 알 수 있는 박우담의 시적 세계는 이처럼 엄폐된 공간성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비밀스러운 공간 속에서 발화되고 있는 사건은 비밀을 모른 채 참혹한 상황과 장면들이 윤리적으로 재생된다. “매질 당한 아이”의 “구슬픈 소리”(「일인극」)가 쉴 사이 없이 들려오고 “살아있는 것들의 발길질”(「사슴벌레」)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처럼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도 주체로서 ‘나’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끊임없는 화두로 던지는 주체의 의지로부터 가능해진다.
이와 함께 기 발표작 「북극성」에서 보여주는 ‘나’와 ‘너’의 관계성은 오늘날 우리의 속도감 있는 인간관계의 군상을 화두로 던지고 있다. 북극성이 “너의 까만 눈동자”(「북극성」)로 치환되는 순간에는 어떤 개연성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찰나적인 것이고 이 찰나의 순간을 통해서 “북극성으로 갈 수 있지”라는 언명은 자못 비장한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관계성이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만 볼 수 없는 까닭은 “나는 별 사냥꾼. 시간의 화살을 날리지. 화살이 날아가는 건, 시간이 흐르는 건, 네가 매일 걷고 내가 매일 뛰기 때문이지”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가 서로 다른 공간성에 놓여 있는 만날 수밖에 없는 비애를 통해 관계의 군상을 되돌아보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시인의 별 유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풀과 나무를/사랑하고/초원을 뛰어다니며/꽃을”(네안데르탈 12 – 수호성의 회귀」) 꺾는 원형적인 존재로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화두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은/자꾸/태어나고/여자들은 어머니가 되어”가는 세대의 순리 속에서 시인은 “낙타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없는 유랑의 끝에서 도착한 “초원의 별”이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 세계이자 시인 앞에 놓인 수많은 질문들이 사는 곳일 터이다.
박우담의 시세계는 어떤 문면에서는 갇혀 있는 자아의 상처로만 이루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늘을 천정으로 삼은 개울처럼 시인의 내면은 꿈과 별을 향해 닿아 있고 이 두 가지 방식의 혼재 양상을 통해 시인은 비로소 폭력성 짙은 화두의 홍수 속에서 순수한 꿈과 의지를 지닌 날카로운 비판자가 된다. 시인처럼, 우리도 결국엔 폭력인지도 모르고 노출되어 있는 갖은 형태의 “송곳”(「북극성」)에 찔리면서도 지구라는 별이 우리를 이끄는 회복 궤도에서 영원히 꿈꾸며 살아가야 할 터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회복을 위한 궤도 속에서 시인으로서 ‘나’라는 원형은 지워지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박주택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시집 『꿈의 이동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 『시간의 동공 』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