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수) 12:50
청화대학을 나와 우다코우로 향했다. 부근의 북경어언학원 등 한국학생들이 중국유학의 본산이라 부동산, 음식점, 술집, PC방, 세탁, 상점 등이 한글로된 간판들이 즐비하다.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단단면 과 만두를 시켰다. 학생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라 깨끗하긴 한데 주방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식당내에서 담배를 피우며 돌아다니고 있다. 아직 흡연문화가 개선되지 않아 아무곳에서나 담배를 피운다.
‘북경자전거’는 이런 골목(후통)이 영화의 배경이다. 생활이 어려워 배달회사에 취직을 한 주인공은 회사에서 준 자전거를 도둑맞게 되고 북경시내를 헤메이다 찾게 된다. 그 자전거를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주인공은 자기 자전거를 훔쳐가는 것을 보고 친구들과 몰매를 준다. 결국은 두 사람이 한대의 자전거를 공유하여 사용하게 되는 영화인데...
미로와도 같은 이런 골목은 북경시내 곳곳에 있고 골목골목마다 인력거가 호객행위를 하는데 관광객을 태운 줄지은 인력거의 행렬은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5.26(수) 17:50
고루(敲樓)근방 전철에서 내려 西海, 后海, 前海를 지나 천안문광장으로 돌아나왔다. 아침 열한시부터 걸었으니 여섯시간째 걷고 있다. 사진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천안문 앞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곱시반에 있을 국기하강식을 구경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서단 커피전문점에서 책을 읽다 여덟시반 기차까지 시간이 많이 남고 갑자기 천안문
국기하강식이 생각이 나서 왔는데 한시간반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 광경이 볼만하다고 하던데..
위용이 대단한 북경서역이다. 역위로는 호텔이 있고 중국의 서쪽방면으로 가는 열차의 출발역이라 사람도 많아 북경역보다 규모가 크다. 역 바로 앞에서는 전체가 들어오지 않아 길 건너편 육교위에서 잡았다.
소음의 나라 중국 어느 곳을 가던지 중국인들은 소란스럽다. 몇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소음이 일기 시작한다. 상점, 음식점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우린 남대문시장이나 재래시장에 가보면 - 요즘에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 손바닥이나 두드리는 물건정도 인데, 이들은 연속 테잎을 튼다던지 기계음을 내는데 매우 짜증스럽게 들린다. 거리를 걷다보면 유난히도 클락숀을 울려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데 - 물론 그래야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겠지만 - 내가 봐서는 ‘난 차가 있다.’라고 자랑하는 듯 시끄럽게 한다. 전에 상해에 갔을 때도 전철역 안에서 관리원이 갑자기 호각소리를 내며 전철이 들어오니 주의하라고 하는데 굳이 호각소리까지 낼 필요가 있을까? 또한 버스나 전철안에서 핸드폰을 받는 음성은 평소의 음량보다 훨씬 커서 주의사람들에게 지금의 통화가 어떤 통화내용인지를 알게 할 정도로 목소리가 크게 이야기를 한다.
조금 일찍 도착을 하였기에 북경서역 광장에 있는 快餐(이곳은 쌀밥과 반찬을 가격대별(8, 10, 13원)로 차별하여 준다)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캔을 사서 대합실로 들어갔다. 오늘 타는 기차는 롼워(부드러운 침대)로 열차좌석중 가장 비싸고 안락하다. 그동안 한번도 이 좌석을 이용해 보지 못했는데, 역시나 대합실부터 깨끗하고 조요하다. 터치스크린으로 열차편과 시간을 조회할 수 있게도 되어 있고 화장실도 관리인이 계속 쓸고 닦고 있어 깨끗하다. 대합실 의자도 여느 열차 대합실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5.26(수) 20:00
열차 내부는 1량에 10칸정도의 룸이 있고 1룸안에 4개의 침대가 놓여져 있다. 아랫칸의 침대가 조금 더 비싸다. 윗칸의 침대는 서안까지 400원이고 아랫칸의 침대는 417원으로 차이가 난다. 비싸다 보니 열차이용객들은 외국인들과 비교적 상류층의 중국인들이 이용을 한다. 1량마다 복무원들이 배치되어 있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먼저 침대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아랫칸 사람들이 들어왔다. 오십대와 이십대의 여자둘이 들어와서 짐을 문 위 시렁위에 올리려고 해서 들어 받아 올려주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는데, 오십대의 여자분이 ‘한국인이야’하고 같이 온 젊은 아가씨에게 이야기를 한다.
- “어떻게 제가 한국인인걸 아세요”
- “가슴에 써있는 글씨 한국말 아니어요?”
년초 국토종단달리기대회에 참가하여 받은 옷을 입고 있는데 그 글씨가 한글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눈가에 장난기가 서려있는 젊은 아가씨는 무엇이 좋은지 나를 보며 싱글싱글이다. 그리고 아랫칸 주인이 들어왔다. 회사원인 듯한 30대의 젊은 남자인데 인상이 좋아 보인다. 외국인이며 여행중이라고 간단히 소개를 하니 서안의 치안이 좋지 않으니 항시 조심하라고 당부를 한다. 그들 대부분은 빈곤한 사람들이라 외국인들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어떠한 일을 할지 모르니 역 앞이나 길에서 아무에게나 끌려가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화번호를 적어줄테니 혹시 곤란한일이 생기면 전화를 주면 도와주겠다고 하며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옆에 있는 오십대의 여자분도 곤란하지 않더라도 전화를 해라. 저사람 좋은 사람이니... 사실 그 정도는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해주는 충고이니 귀담아 듣는 수 밖에.... 아랫칸 남자는 출장중이었고 두 여자분은 같은 회사 직원으로 서안에 회의에 참가코자 가는 길이란다. 오십대는 의사인데 현재 생활용품과 관련된 회사에서 연구를 하고 있고 젊은 아가씨는 그의 수행에 도우미인 듯 하였다. 젊은 아가씨는 한국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지 이것저것 물어오기에 대답을 해주었다. 특히 남북한 관계에서 북한이 현재 많이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지원해 주고 있느냐? 무역 등 교류는 하느냐? 일반인들이 북한을 갈 수 있느냐? 그들도 지금 본토와 대만과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남한과 북한의 관계에 대하여 약간의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대화가 재미가 없는지 오십대 여자분이 노트를 하고 있기에 관심을 보이니, 회의때 질문할 내용을 적고 있는데 이해할 수 있느냐 묻는다. 단지, 글씨를 흘려써서 못알아 보는 글씨를 제외하고 대충은 알아 보겠다.
잠시 후 같은 량에 타고 있는 프랑스인(?) 한사람이 우리 룸에 들어오더니 복무원이 놓고 간 헤드셑(각 침대마다 액정텔리비젼이 설치되어 있고 콘트롤러에 헤드셑을 꼽아야 들을 수 있다)을 보며 헤드셑을 어디서 받았냐고 묻는다. 아마도 그 이야기를 나만 이해를 하고 있고 그들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고 있는 듯 하다.
- “저 사람은 지금 이 헤드셑을 어디서 받았냐고 묻는 거여요.”
- “아까 복무원이 갖다주고 갔는데...”
젊은 아가씨가 문을 나서며 복무원에게로 가기에
- “저 아가씨 따라 가세요”
를 처음 중국어로 했다가(? zhe 女+他), 짬봉으로 했다가(following 女+他) 영어로 다시 반복해서 그에게 알려줬다. 참 헷갈린다.
돌아온 아가씨가 영어를 아느냐고 묻는다? 아까 그 정도는 이해를 하는데 막상 대답을 하는데 중국어로 대답이 나온다. 영어를 사용한지 오래되고 최근엔 중국어만 공부해서 영어는 다 잊어버린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줬는데 이 사람들도 고등교육을 받긴 했어도 영어교육은 받지 않았는 듯 하다. 예전에 상해인들은 영어를 곧잘 사용하던데... 그러니 상해인들이 북경인들보다 우월감을 갖고 있고 북경에서 열릴 예정인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배 아파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5.27(수) 08:10
밤새 달려온 기차는 西安역에서 멈추었다. 역사의 도시, 천년 고도인 서안 秦과 唐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 서안에 도착하였다. 새벽 차창을 보니 비가 흩뿌리기에 윈드자켓을 가방에서 꺼내 옆구리에 걸쳤다. 이제 그들과 헤어지고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한다. 좋은 여행하라는 인사를 뒤로 하고 출구로 나섰다. 밤새 달려온 기차와 마찬가지로 아침을 나서는 여행객들도 힘들어 보인다. 비는 그쳤지만 - 아니 비가 많이 오진 않았었나보다 - 하늘은 여전히 뿌옇게 흐리다. 어제 ‘쯩웨이’(그 젊은 친구의 이름)의 말이 서안은 이틀이면 모두 볼 수 있다고 해서 내일저녁 기차표를 살까? 아니면 모레 북경으로 들어가는 비행기표를 살까? 고민에 빠져있다. 기차표를 살려면 잉워(272원)를 사야하는데 전광판에는 잉워는 없고 롼워(400원)만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롼워도 사치라면 사치인데... 그렇다고 서안까지 와서 이틀있다가 훌러덩 가버리면 아쉽기가 그지없고. 이래저래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 모레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보기 위해 항공티켓팅이 되는 여행사로 가보았다. 문앞에 북경 840원이라 표시가 되어 있기에 모레 북경은 얼마냐고 물으니 890원이라고 한다. 아마도 평일과 주말 가격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몇 번이나 기차역과 항공여행사를 왔다갔다 하다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 같아 식사를 하기로 했다. 어차피 아침을 먹긴 해야 하기에. 역시 아침식사를 하고도 결정이 내려지지가 않았다. 다시 항공여행사로 가서 이번엔 서울로 바로가는 항공편을 물으니 2,640원이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어차피 북경을 가더라도 특별한 스케쥴은 없고 단지 쇼핑밖에 할 일이 없기에 29일(토)에 서울로 바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하고 여행사 직원에게 지금 돈이 없으니 예약을 해놓고 오후에 들러 돈을 지불하겠다고 일러놓고 숙소를 찾아 나섰다.
5.27(수) 09:50
빨리 결정을 하지 못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홀로하는 여행은 항시 그렇지만 갈등의 연속이다. 계획은 하고 왔지만 현지에서 반겨주는 이 없는 여행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을 하여야 하는 여행에서는 상황이 바뀌고 그 상황에 따라 계획도 바뀌어야 한다.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이동거리가 길지 않아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지만 이번여행은 장거리에다 상황이 계속 변하고 있다. 여행사를 통한 기차나 항공티켓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바에야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여야 한다. 이제 결정을 내렸으니 숙소를 찾으러 나선다. 내가 가진 정보로는 feng he lu youth hostel (豊禾路 11번지)로 되어있어 택시기사에게 그리로 가자고 이야기를 했는데 젊은 운전기사 말은 그 동네는 호텔 같은 것은 없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시내에도 많은 호텔이 있는데 왜? 그곳까지 호텔을 찾으러 가느냐? 자기가 소개를 해주겠다. 뭐 그런소리를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계속 지껄인다. 알았으니까. 일단 가보자. 갔다가 없으면 나올테니까. 일단 가자. 호텔이 있던 없던 그건 내일이니까. 넌 내가 가자고 하는데로만 가자.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도 계속 궁시렁거린다. 중간에 그곳 전화번호를 주고 전화를 한번 해서 확인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전화번호 정보가 잘못되었는지 전화가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 친구 더 의기양양하게 주절거린다. 호텔도 없는데... 결국엔 그 거리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이름을 가진 유스호스텔은 없고 중간에 인민공우(人民共寓)라는 중국여행지에 있는 호텔이 보인다. 오는길에 혹여 내가 찾는 곳이 없으면 그곳에서 숙박이 가능한지를 확인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그곳이 보이기에 문 앞에서 차를 세워라 하고 내렸다. 나에게는 지도 한 장 들고 있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길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방향감각 월등하고 후각으로도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동물적인 감각을 갖추었다. 그런 나에게 호텔이 있네 없네 그러니...
* 인민공우(人民共寓, feng he lu youth hostel )
서안역 북서쪽에 있는 豊禾路 9번지에 있으며 버스도 다니지만 시내에서 10원이면 들어갈 수 있으므로 굳이 버스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버스를 안내하는 정보도 있지만 처음에 숙소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고 주소를 보여주며 가자고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숙소는 1박에 45원(4인실)이며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고 짐을 보관하기 위한 열쇄는 개인이 준비를 하여야 한다. 프론트 직원과 호텔앞 카페에서 영어가 되기 때문에 중국어를 몰라도 불편함이 없다. 단지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는 것외엔 ....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유스호스텔의 규모는 갖춘 곳이었다. 프론트에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내가 잘 찾긴 했군. 방을 예약하는데 직원들이 다음 이동할 곳은 어디냐고 묻는다. 조금전 역 앞에서 서울에 가는 비행기편을 예약을 하고 아직 돈을 지불하지 않았기에 오후에 들르기로 했다고 이야기를 하니 직원들이 여기서도 발권이 되니 여기서 하라고 한다. 그래서 조금 전 여행사 전화번호를 주며 이곳에 전화해서 상황을 알려주고 여기서 티켓팅을 한다고 알려주라고 하니 전화를 한다. 비행기편을 알아보던 직원이 轉機(transfer)가 있으니 알아보겠다고 한다. 잠시후 1,900원짜리 서울가는 트렌스퍼가 있다고 말해준다. 서울로 직행하면 2640원(한화 39만원대)이고 북경에서 트렌스퍼를 하면 1930원(29만원대)이니 엄청 싸게 제시되는 가격이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하고 저녁에 비행기표를 받기로 했다. (서울에서 발권한 티켓은 다시 보내주면 일정 수수료를 제외하고 환불을 해준다고 했다)
지도를 보니 서문(安定門)이 가장 가까워 택시기사에게 그리로 가자고 했다. 서역으로 통하는 문 즉, 실크로드의 관문이고 삼장(현장)법사가 천축국(인도)로 경전을 구하러 떠났던 문이다. 중국의 실크는 이곳을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유럽의 문물이 이문을 통해 들어왔다. 사진을 보면 그 웅장함에 놀랄 것이다. 실제의 모습도 과연 대제국을 이룬 국가의 위용을 갖추었음에 놀란다. 사람의 키에 몇 길이나 넘는 성벽과 대형 덤프트럭이 지나다닐 정도의 넓고 높은 문 그리고 그 위로 웅장하게 서있는 성문. 자료에 의하면 성벽의 높이가 12메터, 성의 폭은 12-14메터, 아랫폭은 15-18메터이며 성의 길이는 14키로메터인 그 규모는 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본 성벽위에 오르면 서안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하는데 지금은 많은 현대건축물들이 올라있어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데다가 뿌연 전형적인 중국의 날씨에 서안시내를 맑게 볼 수가 없기에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조용히 성안을 돌아보면 웅장한 소리가 들려온다. 말발굽소리, 실크로드로 향하는 장사치의 소리, 낙타 발자국소리, 변방에서 노략질하러 들어오는 오랑캐의 말발굽소리, 전투에 나서는 병사들의 애절한 흐느낌, 성을 쌓으며 무수히 죽어간 백성들의 절규 . . . . . 그 소리가 벽에 메아리쳐서 성벽 가운데서 흩어져 역사의 중심으로 모아진다.
안정문을 나와 고루로 향했다. 지도에서 보듯 꽤 먼 거리이지만 굳이 택시나 버스를 이용하지 않아도 걷는 거리에는 볼거리들이 풍부하다. 서안시민들, 잡다한 상점, 도로위의 표정들...
淸眞大寺이다. 서안은 서역과 중국을 이어주는 매개도시이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들어온 이스람의 문화가 번성하여 온 이곳의 대표적인 이스람 사원인데 건축양식은 중국풍으로 구현되어 있지만 불상같은 우상이 없고 동물모양의 조형물 등은 이스람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스람의 문화를 접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이 없고 단지, 이런 생소한 문화를 접할 수 있음에 만족하 는 수 밖에 없었다.
고루와 청진대사 사잇길에 즐비한 노점상에서 전시되어 있는 탈을 찍었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오고 무대위에서 마스크를 바꾸는 變演의 전통극이 보여지는 듯 하다.
고루 뒷길 먹자골목. 낮임에도 거리가 요리 연기에 뿌였다. 양로촬(羊肉꼬치), 닭꼬치 등 수많은 꼬치종류, 훠궈(火?), 만두집, 면집, 등 수많은 먹거리가 가득차 있다.
‘마눌 미안해. 나 혼자 이런 맛있는 것 먹고... ’ 진짜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이들도 이런 음식 좋아하는데. 밖에 진열된 꼬치를 - 다양한 꼬치가 준비되어 있다. 야채, 고기, 어묵, 어류, 등 꼽을 수 있는 것은 죄다 꼽아놓았다. - 골라오면 원앙처럼 생긴 훠궈를 불판위에 올려 끓인다. 왼쪽은 매운맛, 오른쪽은 담백한 맛 나는 양념으로 되어있다. 아래는 양고기 샤브샤브이다. 양고기는 젓가락으로 집어서 끓는 냄비에 살짝 넣었다가 익으면 아래있는 양념장에 찍어서, 꼬치는 적당히 익도록 훠궈안에 넣었다가... 맥주와 곁들이면 ... 아! 침이 절로 넘어간다.
敲樓에 있는 북과 고루에서 바라본 鍾樓의 광경이다. 고루는 중국의 어느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단지 그 규모인데 북경의 고루보다는 좀 작아 보이지만 역사성은 있어 보인다. 종루앞의 광장이 넓고 편안함을 가져다 주고 있다.
永定門(남문) 정경이다. 멀리 지붕도 보이고.. 높은 성벽, 아련히 보이는 지붕들, 그리고 자동차와 인민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온 도시를 과거가 뒤엎고 그 속에서 현재가 살아 숨쉰다. 시간의 흐름 없이 멈추어 버린 듯한 도시 그 속에서 꿈틀대는 중국. 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한발 한발 조심히 내딛는 나라 중국. 그들의 숨결에서, 발걸음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영정문 왼편으로 비림으로 들어가는 길이있다. 碑林은 쉽게 표현을 하면 여기저기서 발굴해온 비석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내 기준으로는 왜? 저런 짓? 을 했을까? 이다. 각각의 비석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존재해야 제 모습을 갖고 값을 하는 것인데 왜 그곳에서 갖다 이곳에 놨을까? 이다. 해답은 찾기 어렵겠지만. 내 지극한 - 아니 단순한 - 상상력으로는 단하나이다. 관리부재로 인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워낙 도둑이 많다보니, 도굴꾼들이 황제나 왕비, 귀족의 비석들을 도굴하여 외국에 팔게 되면 돈이 되니 당연히 없어질 것인데 이곳 비림에 서안부근에 있는 비석들을 모아놓고 관리를 하고 전시를 하여 관람비를 받으면 재정도 해결되고 분실의 우려도 없고... 뭐 이런 것 아닐까? 수많이 산재되어 있는 비석들을 - 비석하나에 수천, 수억원을 홋가하는 비석들을 - 관리하는 최선의 방책이었으리라. 비석들 중에는 왕희지 등 유명한 서예가가 쓴 글도 있다. 비림안에는 원하는 비석의 탁본을 그 자리에서 떠서 파는 매장이 있는데 비싼 것은 몇천원대(2-3백달러)하는 것도 있다.
‘우 랑 바 리 나 바 롱 뿌 따 라 까 뿌 랑 야’ 들어봤던 주문인가?. 어릴 적 김영남(?)씨의 라디오 연속극 ‘손오공’의 주문이다. 요즘아이들이야 ‘날아라 수퍼보드'이지만, 그때는 여의봉을 휘두르며 머리털 한줌 뽑아 주문을 외면 수많은 손오공이 나와 괴수들을 물리치고 현장(삼장)을 보위하여 인도로 향한다는 ’손오공‘이다. 불경을 가지러 간다는 의미보다 삼장을 보위하며 수많은 모험과 도전을 극복한다는데 더 큰 내용을 담고 있던 연속극이다. 매일 오후 여섯시즈음이면 동네 전파사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고 그 앞에 올망 똘망 앉아서 연속극을 상상속에 담아 두었던 그 모습을 갖춘 곳. 바로 그 慈恩寺로 향한다. 당시에는 가장 높은 건축물로 온 장안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은, 아니 오늘은 뿌연 날씨로 아쉬움이 크다. 아침에 비가 왔음에도 맑지 않은 날씨 아마 늘 이런 뿌연 하늘을 보며 살고 있을 것 같은 서안이다. 이 자은사 안에 대안탑(大雁塔)이 있다. 이 탑안에 삼장(현장)이 가지고 온 사리와 경전을 보존하고 있다. 옆의 사진중 세 번째 사진 가운데 사리가 보존되어 있다. ( 국내에 있는 석가모니 사리는 탑안에 보존되어 그 존재가 확실치 않지만 이 사리는 진실사리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 첫 번째 사진은 정문앞에 현장의 석상, 그 뒤로 자은사 정문 그리고 대안탑이 한 장의 사진에 들어가도록 앵글을 잡았다. 기회가 좋아서 인지 대웅전에서 마침 예불을 드리고 있다. 대승불교(우리는 소승불교)가 저러한 것인가? 노래 하듯한 음율이 흥겹게 느껴진다. 리드미컬 하다. 붉은 장삼을 두르신 스님들중 앞쪽이 삼장법사님이시다. 경내에는 삼장(현장)법사와 오공(후에 보살이 되었음)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탑안의 사리를 훔쳐오고 싶었지만 관리인이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고 있었고 유리장식장안에 들어가 있어서... 참 중국은 복도 많아...
5.27(수) 16:10
“이 x팔x이” 갑자기 쌍욕이 튀어나왔다.
자은사에서 부전님전에 인사를 드리고 나와 산시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건널목에서 차가 우회전을 하기에 분명히 손짓으로 내가 지나가고 있음을 밝혔다. 그런데 채 건너지도 않았는데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순간적으로 피하여 스치지는 않았는데, 차안을 들여다보니 썬그라스를 낀 아줌마?가 어쩌라는 것이냐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미안하다는 의사표시도 없이. 참! 어이가 없다. 우리 같으면 ‘너 나와! x팔!’ 하고 뭐 이런게 다 있어 하고 어떻게 좀 해보겠는데...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주위의 사람들도 그 다음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한지 눈을 놓지 않는다. 이럴줄 알았으면 욕이라도 배울걸..... 아는 욕은 우리 욕밖에 없으니.. 하기사 우리욕이 더 심하긴 하지...
이왕 욕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하자. 이놈의 국가는 교통질서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다. 우선은 다리많은 놈이 최고이다. 다리많은 자동차가 우선이고 다리 세개 달린 인력거, 그리고 자전거, 마지막으로 걸어다니는 사람이 맨 나중이다. 보행자를 위한 배려는 없고 돈이 많아 차를 움직이는 사람이 먼저이다. 그것도 고급차. 도로를 걷다가 차가 오면 자전거와 보행인은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그것이 관례이다. 우리 같으면 - 아니 그럴 상황이 별로 없지만 - 사람이 먼저 지나가도록 기다렸다가 천천히 가야하지만 그들은 먼저 ‘내가 먼저 간다’ 하고 클락숀을 울려댄다. 교통문화가 어지럽기는 대도시나 소도시나 마찬가지이다. 어제 천안문에서 북경서역으로 가는 길에 거의 북경서역에 다왔는데 차장과 운전기사가 소란스러워 창밖을 보니 웬 여자가 피투성이로 도로 한 가운에 쓰러져 있다. 보아하니 육교밑을 무단으로 힁단하다가 차에 치였음이 분명하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여자차장이 한참을 씨부렁거린다. 자본은 챙기지만 인권이 보장되기에는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은 나라이다.
5.27(목) 16:30
박물관의 관람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박물관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매표소에 물어보니 여섯시 반까지 관람이 가능하다는 말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서안의 박물관은 다른 곳과는 달리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있다고 평이 되어있어 입장료를 불문하고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곳이다. 대략 한시간 반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생각에 차분히 구경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들어갔다.
내부는 3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고, 시대적으로는 고대, 秦?漢, 唐, 明?宋으로 구분하여 전시되어 있다. 다른 관람단의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을 하는데, 마침 두 학생이 또 다른 학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을 하기에 같이 듣기로 하고 뒤를 따르는데 이따금씩 우리말이 섞여 들려온다. 한국학생들이군...
인천과 부산에서 청도로 유학을 온 여학생들인데 같이 공부를 하던 서안학생(현지인)이 초대를 해서 서안 관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안학생은 이곳에서 가이드를 한 경험이 있어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우리말을 하고 싶었는지 우리말로 몇 가지 묻기에 대답을 해주었다. 친구들에게 한국말을 배웠다고 하는데 한번 써먹고 싶었는지 몇 번이나 입에서 오물거리다가...
관람을 하던 중 漢시대 전시관초입에 당시 세력권을 표시하는 지도가 있는데 그 지도에 우리 고구려가 한의 속국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고 唐시대 전시관의 지도에는 백제 역시 속국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이에 세 명이 서안학생을 몰아붙이며 ‘어디 저게 너희나라냐 저건 분명히 독립된 국가이고 한국의 조상이다‘ 라고 하니 샐쪽해져서 토라졌는데 분명한 것은 서안학생과 우리 세명이 언쟁을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최근 고구려의 유적에 대하여 중국 사학자들의 연구가 많아졌고 - 특히 동북3성 학자 - 얼마전 고구려?발해의 중국역사 편입 왜곡 보도만 하더라도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대하여 중국의 역사로 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 걸려 있는 지도를 중국인과 우리한국인만 보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인이 보고 있을 지언데 우리정부나 학자들이 어떠한 조치나 대응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몇해전 박영규씨의 고구려본기(웅진출판)를 보노라면 고구려의 지배세력이 엄청나서 가슴터질 듯 한 그 뭔가를 느꼈었는데... 여섯시반까지 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실상은 여섯시가 되기도 전에 관리인들이 토끼몰이를 하듯 관람실 밖으로 내몰아 간다. 다행히도 우리외에 다른팀도 있어 조금은 여유있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나오면서 학생들하고 저녁이나 같이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안녕히 가시라하며 손을 흔든다. 그래 열심히 공부하라고.
낮에 갔었던 먹자골목이다. 저녁에 오니 불야성이 따로 없다. 넘치는 사람들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는데 밤하늘이 온통 연기로 가득하다. 음식점마다 양고기꼬치가 산처럼 쌓여있다. 어젯밤 ‘쯩웨이’가 알려준 개고기집을 찾아 봤는데 못 찾고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하러 왔다. 볶음밥과 양꼬치, 맥주를 주문했다.
저게 뭐였더라? 아~..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길에서 노인부부 두 분이 찍어서 팔던 빵인데... 색도 화려하고 케익 (?) 맛이난다. 틀안에 있는 것을 대나무 꼬챙이에 끼어준다.
숙소로 돌아오니 카운터에서 항공권을 준다. 오전에 돈을 지불하며 영수증을 받지 않아 조금 찜찜했었는데... 복무원이 내일아침에 진시황릉, 병마용으로 가는 일행이 있으니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한다. 요금은 35원이고 여덟시 반에 오라고 한다. 어차피 서안역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15원이라 하니 왕복교통비를 감안하면 이것도 괜찮겠다 싶다.
5.28(금) 08:30
밤새 모기한마리가 앵앵거려 깊은 잠을 자지 못하였다. 아침을 정리하고 식사를 하기위해 밖으로 나섰는데 숙소주변은 인민들이 사는 곳이라 음식점이 열려있지 않아 먹을 만한게 없다. 빵 몇 개와 우유를 사들고 휴게실에서 간단히 때우고 침대를 정리하는데 학생둘이 들어온다. 동양인이고 ‘경주빵’봉지를 들고 있기에 우리 학생들인가 했는데 캐나다 학생들이라 한다. 여기 오는 길에 한국에도 들렀단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로비에 내려가 출발을 기다렸다. 오늘은 유럽남녀 한쌍과 방금전 숙소에 들어온 캐나다 학생, 이렇게 다섯명이 진시황릉, 병마용 등 동쪽루트를 관람할 예정이다.
잿빛도시. 중국도시의 대부분은 잿빛으로 색이 바래어져 있다. 개발의 중심인 도심중심부의 화려한 곳 일부 와 산업단지를 제외하고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풍화와 매연 때로는 서북부에서 불어오는 황사로 인해 처음의 불그스름한 벽돌담장들이 회잿빛의 색깔로 변하여 있다. 낮은 집, 좁은 골목, 층 낮은 빛바랜 아파트, 희뿌연 거리, 퀘퀘한 음식냄새(특히 향채) . . . 중국의 대부분의 도시가 이럴 것이다.
5.28(금) 10:00
고속도로가 있음에도 기사는 지방도로를 달려 진시황릉앞에 멈추었다. 기사에게 언제까지 돌아오면 되느냐고 묻는데 네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왜? 날 보지? 돌아오는 시간을 영어로 답을 해주니 - 끄덕이며 매표소로 향한다. - 이날 다니는 곳마다 통역을 해주느라... 힘들었다. 기사와는 중국어로, 이들과는 안 되는 영어하랴...
<진시황릉> <조감도>
이름은 정(政).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진시황의 무덤이다. 13세에 즉위를 하여 韓.魏.楚.燕.趙.齊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황제.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을 정비하고, 전국적인 군현제의 실시, 문자와 도량형, 화폐를 통일하고 전국적인 도로망을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분서갱유(焚書坑儒, 모든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땅속에 산채로 파묻은 사건)를 감행하여 사상을 통일하려고 하였다. 만년에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기 위해 바보스러운 과오를 저지르고, 순행을 통하여야만 민심을 어우른다고 생각하여 수차례의 전국순행을 한 황제. 결국은 마지막 순행 중 산동을 돌아 사구로 나오면서 그가 타고 다니던 온량거위에서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뜬다. 불행히도 황제의 죽음은 곧바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환관 조고의 간책에 의해 수개월을 시체로서 방황을 하여야 했고, 환관 조고에 의해 둘째아들인 호해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민심이반이 된 秦은 급속하게 와해되어 진다.
후대 사람들은 秦은 한족 혈통이 미미하다고 정통성(?)을 인정치 않고 유방의 漢을 한족의 정통성으로 인정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유물은 지금 중국이 받고 있는 문화유산의 혜택으로 엄청난 자원으로 남아있다. 가욕관에서 시작되어 산해관에서 끝나는 만리장성과 이곳 그리고 오늘 관람을 하려는 병마용이 그 대표적인 진시황이 남긴 유물이다.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유적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관광수입을 얻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5.28(금) 11:40
진시황이 사후세계에 자신을 보위케 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병마용이다. 병마용은 3개의 전시관, 영화관람관, 병마용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제1관은 80년에 발견된 것으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2관과 3관은 발굴중으로 아직 지붕이 덮여있어 그 형상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제 1관의 병마용들은 그 보존이 너무도 현실적이라서 믿겨지지가 않는다. 표정, 자세, 얼굴 모든 모양이 일치되는 형상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이 병마용으로 당시의 복식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병마용 이들이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그들이. 한순간 어둠 속에 묻혀있다 깨어나기 시작한다. 거대한 군대의 진용을 갖추기 위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다. 머리 위, 어깨 위, 갑옷에 묻어있던 먼지를 털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굳어있던 얼굴근육을 움찔거리고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그들이 단장하기 시작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움직임이 없던 그들이 조심스레 일어나 호흡하고 있다. 대오와 진용을 갖추고 선봉장의 북소리에 발맞추어 우렁찬 발소리를 내며, 뭉게구름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진군하기 시작한다. 물밑에서 수면 위를 관망하던 용처럼, 움츠리고 도약을 준비하던 호랑이처럼 튀어 오르려고 하고 있다. 세계를 군림하던 선조들의 기운을 이어받아 눈빛 번득이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
벌써 그들은 세계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이라는 지엽적인 무대를 벗어나 세계의 중심으로 활동을 옮기고 있다. 수천년간 닫혀있던 장막을 걷어내고 세상으로 진출하고 있다. 그 진출은 어느덧 세계의 중심에서 군림하기에 충분하게 힘이 깃들여져 있다. 아세아에서의 중국이 아닌 세계의 중국이 되어버린 나라. 이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하여 강국으로 발돋움을 한 중국. 그들의 저력이 이곳 병마용에서 그 힘을 느끼게 하고 있다.
5.28(금) 14:00
‘밥 안 먹어요?’ 기사의 물음에 글쎄 식사는 해야겠는데... 모두들 식사를 하자고 한다. ‘갑시다. 싼 곳으로 안내해주세요’하고 기사에게 부탁을 하였다. 모두들 외국여행객들이니 비용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각기 나온 금액을 비례해서 내면 되니까... 기사도 같이 해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기사는 따로 식사를 하겠단다. 메뉴판을 집어든 유럽여자(이들과는 별로 대화가 없어서 이름도 안물어 봤다)가 두가지의 요리를 시키더니 내려놓는다. 이렇게 시키면 안되는데... 캐나다 친구들은 면종류를 찾기에 내가 메뉴판을 집어들고 탕과 면, 공기밥을 추가로 시켰다. 혹시 모자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대충 량은 적당하였다.
5.28(금) 16:00
반파박물관(모계사회에 관한 박물관인데 아직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를 거쳐 졸다보니 유스호스텔로 도착하여 있었다. 각기 숙소로 돌아가고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모자란 잠을 잠시 보충하였다.
5.28(금) 18:00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종루부근으로 나왔다. 특별히 쇼핑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여행을 나왔는데 선물(?)이라도 사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기에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종일 설사에 시달리고 있다. 아침에 먹은 우유가 맞지 않는 듯 하였다. (매일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이곳 우유는 생우유가 아니고 분유우유이다. 그런 우유를 먹어서인지 변 색깔이 푸르팅팅하다. 화장실을 자주 찾다보니 힘도 빠지고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여행은 힘이 있어야 즐거운데 몸이 늘어지니 가족생각이 절로 난다. 지난해 상해 여행중 무지하게 덥다보니 그곳을 찾은 청도유학생이 힘이 든다고 여행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간다고 했었다.
여행객에게는 아픈 것이 치명적이다. 건강한자만이 여행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래야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가이드의 깃발아래 이끌려 다니는 여행. 중요한 포인트만 보고 다니는 주마간산식의 여행은 참다운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없다. 걷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는 그들(현지인)과 호흡을 할 수 없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생활상을 알 수가 없다. 이번 여행에서도 하루에 다섯시간 이상을 걸어 다니는 강행군을 행해왔다. 그 날의 목표를 설정하고 먼 거리가 아니면 가급적 걸어서 이동하였다. 늘 여행을 하면서 생각나는 것은 우리 젊은 세대들이 여행목표를 갖고 계획을 세워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 많은 것을 얻는다. 무수한 자기와의 대화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계기도 되겠지만, 여러 상황에 접하는 기회를 갖게 하고, 난관에 부딪히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해결을 해야 할 시점에서 정확한 판단을 하게하는... 중요한 것은 그 국가의 국민들과 호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많은 세계의 젊은이들이 배낭하나 메어들고 중국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들은 언어의 장벽을 물리치고 중국의 맛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이들이 단순히 역사 관람이나 하려고 몰려들겠는가? 이제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기에 이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계속 앞서기 위해서는 중국인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많은 중국 관련인들이 중국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들에 앞서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중국. 이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저녁시간 이곳 서안의 하늘은 매우 분주하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수많은 제비들이 날아다니고, 하늘 곳곳에 연이 날리고 있다. 특별히 놀이 공간이 없는 많은 시민들이 이곳 종루공원에 삼삼오오, 연인들이 짝을 지어 공간을 메우고 있다. 아직은 사회주의의 그늘자락에 있는 이곳이지만 멀지 않아 이곳도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사회주의와 권력의 질서에서 인권의 질서로, 문화시민을 이룩하자는 제청을 하면서 서서히 변화할 것이다. 동부 연안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서부로, 이곳 陜西로 자본이 들어올 것이다.
5.29(토) 09:30
편한 잠을 자고 싶었는데 낮에 젊은 친구들이 열어놓은 문으로 모기가 들어와 온몸을 뜯어 놓았다. 잠결에 하는 수 없이 두꺼운 이불의 홑청을 뜯어서 뒤집어쓰고 잠을 청해보았지만 이번에는 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제 들어온 캐나다 학생들은 중경으로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고, 나도 짐을 꾸리고 있다. 이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나의 생활, 다람쥐 챗 바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로비로 내려가 퇴방(退房, 체크아웃)을 하여 맡긴 보증금을 받고 복무원에게 인사를 하고 거리로 나섰다. 오늘은 1시에 동방항공을 이용하여 북경행 비행기를 타고 6시엔 북경에서 인천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을 이용하여 귀국을 한다. 남는 시간으로는 다른 지역에서 느껴보지 못하는 이슬람 문화를 조금 더 느껴보기 위하여 서문과 청진대사 사이에 있는 거리로 향했다. 특별한 건축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시장골목에 터번같은 모자를 둘러쓴 아낙들이 뜨개질을 한다던가. 특이한 음식을 진열해 놓고 팔거나 육류(특히 양고기), 과일상을 하는 곳이 대부분인 그곳 우리 육십년대 구멍가게 좌판위에 드문드문 물건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서안에 와서 느낀 또 다른 점은 이곳의 남자들의 키가 유난히도 크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작은 키이기도 하지만 적당히 마른 체형, 긴 허리로 주욱 뻗은 키가, 작고 땅딸한 東岸의 남자들과는 다르다. 단지 가꾸지 못하고 차려입지 못해서 볼품이 없을 뿐이지 성큼 거리며 옆을 스치고 지나갈 때면 바람이 일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곳 출신 장수들이 많았을까?
5.29(토) 10:40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동방항공매표소’로 가자고 했는데 택시기사는 ‘동방항공호텔’에다 내려주고 간다. 그곳에서 공항까지 25원을 내면 공항까지 갈 수 있다고 유스호스텔에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기에 그곳으로 가자고 했는데 그 택시기사가 잘 못 데려다 주었는가 보다. - 아니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데려다 준 것 같다. 호텔 앞에 있는 흰제복을 입은 복무원에게 공항가는 버스가 어디있느냐고 묻는데 이 친구 옆으로 택시기사가 붙으면서 공항까지 150원을 달라고 이야기 한다. 이 복무원도 좀 싸게 해 줄테니 이 택시를 이용하라고 이야기 한다. 말이 통하지 않기에 그 호텔로비로 들어가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어디서 타느냐고 물으니 그때서야 흰제복의 복무원이 자기가 안내를 하겠단다. 그곳에서 멀지 않아 손으로 가르쳐만 주어도 찾아 갈 지언데 이 친구안내를 하며 계속 지껄인다. ‘택시를 타면 빨리 갈텐데... 조금 싸게 해줄텐데.. 120원으로 해줄텐데... ’ 계속 지껄이기에 ‘너! 입 닥치고 있어! 난 그 버스 타고 갈테니까!’ 단호하게 이야기 하니 이 친구 더 이상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 버스로 안내를 해준다. 참으로 안되어 보였기에 팁으로 5원을 주었더니 인사를 하며 돌아간다.
5.29(토) 18:30
북경으로 들어오는 항공편에서 내려 트랜스퍼 승객이 이용하는 게이트에서 좌석표를 부여받고 출국대기석에 앉아 있다. 주변에 한국인들이 없는 느낌이 이상해서 좌석표를 보니 5번 게이트는 맞는데 그 게이트에서는 호주 시드니로 간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스쳐 스케쥴모니터를 보니 인천으로 가는 항공은 다른 게이트에서 대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 넉넉하였기에 망정이지 촉박한 시간이었다면 황당하지 않았을까.....
5.29(토) 21:50
점심과 저녁을 기내식으로 했더니 느끼하다. 서안에서 인천으로 직접 들어왔더라면 벌써 집에 도착하여 다리 펴고 있었을텐데 . . . 인천으로 들어오는 항공편은 한국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한국으로 가는 것이 맞긴 맞군.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고 몸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몇시간이면 아니 공항에서 한시간이내면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 . . 이젠 혼자서 여행하는 것은 자제를 하고 아내와 같이 여행을 계획해야겠다. 같이 여행을 하게 되면 숙박도, 식사도, 교통도, 일정도 조금은 넉넉하게 계획을 하게 되고 다니면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기에...
빨리가자 버스야 빨리가자 버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