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자는 복 되다.
1. 17장에는 주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기도 중에, 가장 긴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초점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과 영광의 회복, 그리고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의 하나됨입니다. 주님은 창세전에 누리셨던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스러운 관계를 회복해 주시기를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1,5). 이 일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써 가능해질 것입니다(4). 영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의가 여기 나오는데,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십니다(3). 그저 오래토록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이 영생인 것입니다. 영원토록 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2.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교회를 핍박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과 교회를 가르는 차이입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주님은 아버지를 가르쳤고,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 행했으며, 그들은 주님이 행하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 나온 것인 줄 알았고 믿었습니다(6~8). 이 근거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지키고 믿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10).
3.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구하신 것은 보호와 하나됨입니다(11). 보호는 모든 악한 자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달라는 것입니다(15). 성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처럼 저들도 하나되게 해달라고 구하셨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또 주님은 당신이 누리신 기쁨을 저들도 누리게 되기를 구하셨습니다(13). 그 기쁨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는 기쁨이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좇아 행하는 기쁨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입니다(14). 그러나 이 진리의 말씀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만들 것입니다(17,19). 주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처럼 당신도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기도하십니다(18). 주님은 떠나시지만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시던 그 일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4. 주님은 제자들을 통하여 장차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20). 주님이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셨듯이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고, 이렇게 전하는 말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또한 저들의 사랑으로 하나됨에 달려 있습니다(21~23). 교회가 성삼위 하나님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보고, 창세전부터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여 주신 영광도 볼 것입니다(24).
5. 이렇듯이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됨은, 교회의 생사가 결정될 만큼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위해 기도하셨고, 이것을 통해 세상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진리의 하나됨이고(17) 이것은 최고의 선교전략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하나됨을 경험하는 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리는 최고의 복에 속합니다. 이때 교회는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고 예수님께서 아셨던 그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고, 성령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여 기록하게 하셨으며, 그 덕분에 오늘 우리도 주님의 기도소리를 듣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이 소리를 듣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주님의 이 기도소리를 들으십시오. 성도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와 기쁨과 힘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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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때 하신 말씀을 소위 ‘다락방 강화(講話, discourse)’라고 불립니다. 13장에는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선포,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 예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별설교에는 예수님의 7대 선언 중 여섯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와 일곱째 ‘나는 포도나무요’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고별설교를 마치신 후 이어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중 가장 긴 기도가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자 하시는 헌신의 기도, 그리고 이 땅에 남겨질 제자들과 미래 모든 시대에 세워질 교회를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복음서들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와는 별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중 1~5절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성부 하나님의 영화(榮華)를 위한 기도이며,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이며, 20~26절은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영화(榮華)롭게 하게 하소서(1~5절)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고별설교를 마치신 후를 뜻합니다. 이어서 기도를 하셨는데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심은 기도의 대상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심으로 ‘주님의기도’에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이 땅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닌 온 우주 만물에 편만하신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시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입니다. 17장은 예수님께서 성자로서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은 이제 곧 십자가의 고난의 때가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의 때가 가까이 오자, 하신 기도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영화(榮華)’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영광’을 뜻합니다. ‘영화롭게 하다’는 다른 말로 ‘영광스럽게 하다’ 또는 ‘영광을 돌리다’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성자가 성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영화롭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화롭게 하는 일이란 거창하고 화려한 방법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방법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셔야지만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때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자를 죽게 하심으로 성자를 영화롭게 하고, 나아가 성자가 성부의 뜻을 따라 친히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면 그것이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곧 성부와 성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면 큰일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뜻은 오직 죄인들의 구원과 영생에 있습니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예수님께 맡기신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 맡기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분이나 지위나 학력이나 경제력이나 남녀 성의 차별이 없으며 오직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곧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했던 죄인들에게 성자를 희생시키기까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맡기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영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성부와 성자 하나님을 지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깊이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사들이 지식이 부족해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인정하지 못하였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셨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 하늘에서부터 낮고 낮은 자리에 내려오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시고, 목수의 아들로서 인생의 수고를 하시고, 공생애에 갈릴리와 유대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각종 병든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값을 치르쳤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하라고 주신 일’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앞둔 시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이기에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완수하심으로 성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삶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있어서 최고의 일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의 통로가 되는 일입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으로 전하는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가족이나 친지나 이웃 중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의 통로가 되십시다.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삼위 중 한 위격이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존재하였음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8:58). 이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돌에 맞을 뻔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이 있으셨는데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그 순간에도 성부 하나님과 함께 자신이 영화롭게 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받고(6~8절)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 성자께 주신 사람들이 있음을 예수님께서 기도 중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언급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데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의 변화를 미리 염두에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죽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성자께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마십시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들었고 또한 예수님의 기도를 들음으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위탁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사람들에게 주셨기에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오신 줄 알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3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째는 ‘받고’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지만 성부와 성자가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둘째는 ‘아오며’입니다. 알다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단순히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깊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기도하시듯이 영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알아야’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셋째는 ‘믿었사옵나이다’입니다. ‘믿다’는 ‘알다’와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그리로 영적으로 깊이 알아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그 들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즉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과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자가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칭의의 구원을 받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인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실 때, 그 성화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리고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리고,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심을 알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 내용입니다. 1~5절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성부 하나님의 영화(榮華)를 위한 기도이며,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이고, 20~26절은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심(9-11a절)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보내주신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지내셨지만 제자들이 모두 아버지의 것이라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아버지의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것이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도 자신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동일성과 친밀성을 나타냅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를 떠오르게 합니다.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었고, 이 소식을 들은 첫째 아들은 노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다가와 누가복음 15장 31절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 것도 내 것이 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지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잘못된 말과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이 아닌 비난을 받으실 수도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야 함을 말씀하시며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기 위해 떠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떠나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기에 하나님께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보전은 사전적 의미로 ‘온전하게 보호하여 유지하다’ 입니다.
예수님은 17장의 기도 이후 18장에서 잡히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시게 될 수난을 알고 계셨지만 오히려 세상에서 남아 있어야 하는 제자들을 걱정하며, 하나님께 이들을 보전해 주시길 간구하고,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앞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제자들도 친밀히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간구는 계속됩니다.
제자들의 보전을 간구하심(11b~15절)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제자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영적으로 채워주시며 보전하셨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누구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라는 말을 하십니다. 이것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를 의미합니다. 유다 역시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지만 스스로 보호하심을 벗어나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 갔습니다. 예수님을 벗어나게 되면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을 유다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의 행동은 본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기쁨으로 충만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죽음, 헤어짐은 슬픔과 연결이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피 흘리심과 부활로 인해 우리가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세상에 남겨진 우리의 삶이 어떠할지 말씀하십니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가치관이 세상과 다르고,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가기를 요구하거나 강요하고, 서로 다른 가치관은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수님의 간구는 이어집니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당할 박해를 피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라면 제자들을 세상에서 하늘로 바로 옮기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만 악아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떠나신 후 세상에 남아 있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제자들의 거룩을 간구하심(16~19절)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제자들이 속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거짓과 정욕이 넘치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성도인 우리도 살아갈 때 어디에 속하여 살아가는지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몸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방인의 삶이고, 나그네와 같은 삶입니다.
그러나 성도 역시 세상에서 무너질 때가 많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거룩하게 됩니다. 우리가 삶에서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품고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이를 위해 기도하시며 마무리 됩니다.
(18-19)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세상으로, 가정으로, 직장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보냄을 받았으나 실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보냄을 받은 곳에서 맡은 사명들은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며 거룩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의 삶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오늘 하루도 말씀을 의지하고, 묵상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 하신 기도의 끝부분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기도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죽음의 길을 앞둔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궁극적인 자향점을 기도에서 밝히십니다.
하나 됨(20~23)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께서는 이제 20절부터 ‘제자들’이 아닌 제자들의 말로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20절의 ‘이 사람들’이란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말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훗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을 전제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말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곧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제자인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하나 됨이 사도행전에서 교회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믿는 자들의 ‘하나 됨’은 교회를 통해 나타납니다. 교회가 그 하나 됨의 목적은 아니지만, 하나 됨의 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21-22)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훗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주제이며 예수님의 사역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곧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자들을 최종적으로 이끄시는 목적지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또 다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하나 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 됨’은 추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맥락에서 ‘하나 됨’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 됨’의 모델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자신의 관계를 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서로가 서로 안에 있다고 할 때, 공간적으로 서로의 안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 안에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다시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상호내재를 의미합니다. 이 상호내재의 특징은, 독립적인 두 존재이지만 또한 하나인 존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들의 하나 됨은, 성도 개개인이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또한 통일된 하나의 공동체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 됨은 개별성과 통일성이 완전한 형태로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닌, 회복되어야 할 인간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이런 관계의 ‘하나 됨’의 상태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하는 것’이 실현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와 너는 구분되지만 한 몸이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3A)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
그리고 23절에서 ‘하나 됨’의 두 번째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의 두 번째 의미는 ‘온전함’입니다. 23절에서는 ‘온전함’과 ‘하나 됨’이 병행적으로 쓰기에, 온전함을 곧 하나 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오’로 최고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최고의 단계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 때 목적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즉 온전하여질 때 인간은 그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남남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온전해질 때, 우리는 서로 남이 아닌 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적 존재가 됩니다. 이처럼 공동체가 되는 것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 후에 필수적으로 회복될 원래의 온전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하나 됨’의 두번째 의미는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하나 됨의 의미는, 26절의 뒷부분에 있습니다. 26절 뒷부분은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그들 안에 있는 것’과 ‘내가 그들 안에 있는’ 것이 병행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앞서 보았듯이 ‘하나가 됨’을 의미하므로, 두 표현은 모두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것’은 ‘그들의 하나 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믿는 자들 곧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한 그 사랑이 믿는 자들을 하나 되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 됨’의 근원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하나 됨’은 실천적인 ‘하나 됨’ 이기 전에 존재적인 ‘하나 됨’입니다.
이것은 세속의 사회와 단체가 추구하는 공동체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속의 공동체는 인간의 사랑과 이해관계와 제도가 그 원인이지만, 교회의 하나 됨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그 원인입니다.
하나가 되게 하는 이유(23)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토록 고별사와 같은 기도에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까?
먼저는 21절 중반에서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하신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는 사람들이 하나의 존재로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로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교제를 높은 수준의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앙의 한 차원입니다. 또 다른 차원은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한 공동체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5-16절에서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라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한 몸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대에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21절 후반부에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며, 하나되게 하신 두 번째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증거는 교회의 ‘하나 됨’입니다. 2천 년간 교회의 흥망성쇠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 왔습니다. 교회의 수많은 시행착오의 흑역사가 있다 해도, 교회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전파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초월적인 원인으로 인해 이루어진 교회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작용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가 행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아닌, 하나된 교회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23B)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하나 됨 즉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사랑하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인간적인 원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교회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교회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박해를 당했지만, 오히려 세상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게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다시피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결과물이지, 우리가 스스로 사랑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해서 교회가 있고 유지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게하는 방법(24-26)
그렇다면, 어떻게 그 하나 됨이 이루어 지고 유지가 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그 방법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4~25)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22절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하나님께 받은 영광을 교회에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 영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고,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영광을 본문의 맥락에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영광’입니다. 14장 9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곧 이 영광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고 계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적 앎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번째로 믿는 자들이 하나되게 하신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24절에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지만,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신 후에 십자가 위로 가셨습니다. 또 부활의 무덤에 계셨고 지금은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 됨’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서 가를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믿는 자들이 하나되게 하신 방법은 '한 하나님의 아버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한 아버지입니다. 서로 만난 적이 없이 남처럼 지낸 사람이라도 부모가 같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한 가족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이루는 것은 같은 아버지를 뒀기 때문입니다. 싸울 수도 있고 갈등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한 분인 이상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고 기도하시는,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통해서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 그것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가장 가시적인 방법입니다.
우리의 신앙 수준이 성숙해가며, 수준의 구원을 이루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도 또한 공동체적인 교제 를 깊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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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이나 사물, 환경을 접하면서 관점을 가지고 대면하게 됩니다. 관점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현상을 대할 때, 대하는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한한 인간은 관점을 지닐 때 자신이 경험한 것 이상의 것을 가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경험한 것 만큼만의 관점만을 지니게 되기에 관점은 그 사람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미술가는 어떤 관점을 지녔느냐에 따라 그 미술작품의 경지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는 빛에 따라 사물을 보는 관점을 다름을 말하며 같은 사물을 아침과 저녁, 날씨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그렸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대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며 구도를 잡느냐에 따라 사진의 격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든 것에 관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정치, 교육, 음악, 종교 등에도 우리는 각자의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점에 따라 생각을 정리하고 선택을 하게 됩니다. 관점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 땅의 관점에서 보면 이곳 양화진만큼 허무하고 무기력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성지이며, 참 인생의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공간에서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늘의 관점으로 양화진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지녀야 할 영적인 관점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하신 고별기도이며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앞두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십자가 고난 후 부활 승천하실 자신을 위한 기도와 그 후에 홀로 남겨질 제자들,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위해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사건 이후로 장사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온 세계와 민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진액을 짜내시듯 제자들에게 남김없이 부어주고 가실 목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 관점이 존재합니다.
주님은 남겨질 제자들의 입장에서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라면 다가올 환난과 박해를 이겨내기 위해 권력과 힘, 능력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 복음 전파를 위해 죽은 이도 살리며, 병자를 고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제자들의 관점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자신과 하나님이 마치 하나이듯 제자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시며,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주님께서 정작 제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셔서 이런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얼마나 큰 영적인 싸움이 진행될 것인지 인지하시 못하심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하신 이유는 이 땅에서 살고 죽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서 어떤 일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직장에서 어느 위치만큼 올라가며, 세상이 인정할 어떤 성과를 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명의 삶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악에 빠지지 않고 진리로 그들의 삶을 구별하며 거룩하게 하는 것이 주님께는 훨씬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목표에 관심이 있거나 성과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과정과 의미가 더 중요하며, 사명을 대하는 생각과 한 영혼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어떤 일을 하던지 이 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악에 빠지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지, 진리를 벗어나지 않고 거룩하게 세상과 구별될 수 있는지 생각하며 영적인 관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하신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하신 기도로 알 수 있는 것은 후에 제자들이 불일치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제자들안에서 분열하게 될 것을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분열과 다툼은 인류역사와 늘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제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본문에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언제나 교만한 우리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이름에서 나오는 위엄입니다. 내 이름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여지없이 싸우게 되지만,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만 존재하며 하나님과 깊은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누리는 친밀함을 제자들도 누리기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하신 두 번째 기도는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 기도를 통해 세상과 영적인 전투를 감당할 삶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셨습니다. 현재는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군대에 입대하면 가장 먼저 하는 정신교육이 ‘주적(主敵)’개념입니다. 누가 우리의 적인가를 알아야 그 싸움에 바르게 대처하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와의 영적인 싸움에서 제자들이 준비해야 할 무기가 있습니다. 13절의 ‘기쁨’이며, 14절의 ‘말씀’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 진영에 속한 자라는 징표이며,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표적입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하신 세 번째 기도는 진리로 거룩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거룩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하기아손’은 그 의미가 ‘성별하다, 봉헌하다’는 의미를 지니며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는 방법은 제자들 스스로의 결단이나 각오가 아닌 하나님께 드려져야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곧 제자들이 세상의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강한 자가 ‘갑’이며, 약한 자가 ‘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과는 다르십니다. 제자들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라고 하셨으며, 섬김을 받으려거든 먼저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져주시는 하나님이셨고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짝사랑하시는 늘 약자 쪽에 서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어 연약한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분이셨으며, 온 세상을 살리기 위한 밥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하나님 나라의 표적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표적입니다. 표적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러내고 나타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살아가기를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한 몸 숨기기도 바쁠 그 때에, 산을 오르셨습니다. 무릎 꿇고 소리 내어 외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견고히 하셨고(1-5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후(6-19절), 이제 언젠가 믿음의 길을 뒤따를 모두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청할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임신하는 동안 수근 대던 마을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긴 여행에 동행하지도, 출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좋은 숙소를 구해주지도 손 잡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아무 것 없이 태어났던 메시야의 몸에 천 한 조각도 주지 못했습니다. 사단에게 시험 당하시는 동안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세례 받는 자리에 함께 있지도, 사역의 삼 년 동안 동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분의 기도문에 내 이름을 살짝이라도 넣어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자신을 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칼을 차고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군병들을 기다리며 무릎 꿇으신 예수의 팔목을 붙잡고 제발 기도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잊지 않고 오늘 날을 사는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힘이 됩니다. 20절입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그분께서 기도하셨던 사람들 중에서는 십자가형을 지휘하게 될 백부장도(눅23:47), 종교 지도자 중 하나였으며 자신을 찾아오기도 했지만 아무 도움 주지 못할 니고데모도(요19:39), 나무에 달려 죽은 가짜 메시야라고 스승과 동료들에게 예수에 대한 저주를 퍼부을 청년 사울도(행9:4)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천 년 뒤의 낯선 땅에서 죄악과 연약함에 짓눌려 사는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육체의 시선이 닿는 곳 너머를 바라보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기록되었고 읽히던 동안 새로운 문제에 직면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셨던 공동체는 죄책감 위에 서 있었습니다. 열두 명의 도망자로 시작되었던 공동체가 이렇게 방대해지고 존경받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확산되는 교회에는 분명 신자들을 핍박하거나 정보를 넘겼거나 동조하였던 자들도 회개하고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떤 해답을 주어야겠습니까. 죄책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신앙을 포기할 수도, 죄책감을 외면하고 종교적 가면을 쓰는 외식을 할 수도,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자신들이 위대한 사람이 된 것 마냥 교만하며 살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배신은 예수님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상처가 되었던 것입니다. 공포 속에서 눈을 감고 칼을 휘두르다 자신의 몸을 가르고 만 서투른 군인처럼, 주의 백성들이 스스로를 상처내고 있었습니다.
인간 모두의 죄악과 연약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죄책감과 무력감의 문제를 고민하던 요한과 예수의 목격자들은 결국 한 장면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지막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17장이었습니다. 요한은 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나아가 이 모두를 받아들이시고 짊어지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의 현재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실 마지막 날의 모습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동일한 길을 함께 걸어가겠다고 결단하고 소망하는 모든 이는 기도의 자리로 나와 17장의 기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는 죄책과 무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죄책감이 아닌 용납을 동력 삼는 공동체를 시작과 끝으로 삼게 됩니다. 21절입니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주님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주님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지는 바로 얼마나 하나 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됨은 시선 너머를 볼 때 이루어집니다. 오늘 나와 잘 맞지 않는 저 사람의 현재의 모습을 보는 것 넘어, 하나님께서 이루실 마지막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성별이 달라도, 키나 몸무게가 차이 있어도,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고 인종이 다르다고 해도, 한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나라가 인정했으며, 그 나라의 법을 따르고, 그 나라의 보호 아래 거하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말씀을 통하여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꿇어 엎드려 한 뜻을 따라 한 길을 걸어가는 국민들이 확장되어감으로 빛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 이전에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22절과 23절입니다.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2절에서 ‘주었다’는 디도미란 단어는 완료 시제가 사용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부여받은 영광의 영원한 소유주이시며, 동시에 자신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이 영광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23절에서 ‘온전함을 이룬다’는 동사 텔레이오오는 수동형으로 사용되며, 주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완성된 하나님의 사랑이 거할 것이라 증거합니다(요일2:5, 4:12, 17, 18). 영광은 이루는 것이 아닌 받은 것이며, 영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영광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십자가의 터널을 지나 부활의 빛, 즉 세상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을 확인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영광이라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2장 9-10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9-10)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어두움 속에서 사랑의 빛 아래 거할 수 있겠습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 빛줄기를 바라보고 알아가며 따라갈 때 이루어집니다. 24절입니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는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라는 24절의 말씀을 삶의 목표 삼아야 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주님과 함께 무릎 꿇어야 합니다. 이러한 매일의 축적을 통해 창세전부터 역사 속에서 실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 같이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절과 26절은 이를 위한 예수님의 결의와 확신을 담으며 기도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5절과 26절에서는 사랑과 의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의가 사랑으로 이어지고, 사랑이 의로 매듭짓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거룩, 구별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사랑으로 말미암은 의가, 의로 인한 사랑의 구별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을 고백하는 지금, 세상 모두가 우리를 부정한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게 했던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참 사랑을,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의로움으로, 의로움이 우리를 더 큰 사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시편 23편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