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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문학과 예술의 경향
1. 조선 후기 문학의 성격
가. 서민문화의 발달 배경
조선 후기 상공업, 농업생산력의 발달은 서민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나. 특징
양반 중심의 문화가 세속화되고 서민 중심의 문화로 대체되어 가는 경향이 강했고 양반 중심의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격을 가졌다.
2. 판소리와 탈놀이
가. 판소리
⑴ 의의
판소리는 상민이나 광대(廣大, clown)를 통해 보급된 종합예술로서 소릿꾼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시시적 이야기를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 발림)을 섞어가며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⑵ 유래
판소리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30년(1754)에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숙종(재위 1674∼1720)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조선 전기 문헌에 보이는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가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⑶ 장단 구성
판소리는 느린 진양조, 중모리, 보통 빠른 중중모리, 휘모리 등 극적 내용에 따라 느리고 빠른 장단으로 구성된다.
⑷ 추임새
고수의 반주는 소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면서 “얼씨구”, “좋다”, “으이”, “그렇지” 등의 감탄사를 내는데, 이를 추임새라고 한다.
⑸ 발전과 명창
판소리는 순조(재위 1800∼1834) 무렵부터 판소리 8명창이라 하여 권삼득(權三得. 전북 익산), 송흥록(宋興祿, 전북 남원 운봉), 염계달(廉季達, 경기 여주), 모흥갑(牟興甲, 경기 평택 진위), 신만엽(申萬葉, 전북 익산 여산), 고수관(高壽寬, 충남 서산 해미), 박유전(朴裕全, 전북 순창), 김제철(金濟哲, 충북 괴산)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장단과 곡조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였고, 동편제(전라도 동북지역), 서편제(전라도 서남지역), 중고제(경기도・충청도) 등 지역에 따라 나뉜다.
⑹ 정리
판소리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옹고집타령・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왈자타령)장끼타령・가짜신선타령( 또는 숙영낭자전) 등 12마당이었으나 신재효(申在孝)에 의해서 6마다으로 정리되었고 현재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흥보가 5마당만이 전한다.
나. 탈춤(가면극)과 산대놀이
⑴ 탈춤
지배층의 위선(僞善)을 풍자(諷刺)하고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는 등 사회적 모순을 풍자했다. 탈춤은 춤, 노래와 사설이 섞여 진행되며 향리 집단의 주도하에 읍(邑)의 제의(祭儀)를 배경으로 발전하였고 대개 비작업적인 연예인들에 의해서 전승되었으나 남사당(南寺黨)이라는 직업적 유랑 연예인에 의해 전승되기도 하였다. 남사당은 탈춤 외에 농악, 꼭두각시놀음, 줄타기, 땅재주, 접시돌리기 등의 놀음을 하기도 하였다.
⑵ 산대놀이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을 줄인 말로 탈을 쓴 광대가 산대에서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담을 하는 가면극으로 산대도감놀이・산디도감・산대놀이・산디놀이・산두나례도감・산두・나례도감이리고도 한다. 산대놀이는 조선조 전기에 산대나례(山臺儺禮)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1930년에 채록한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극본에는 산대도감극이라고 표제를 달았다. 오늘날 산대극이라고 하면 경기지방에 전해오는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松坡山臺)를 가리키는 것이나 그 놀이의 내용으로 보아 산대도감계통극으로 묶을 수 있는 가면극으로 그 대사가 채록된 것을 들어보면 앞에서 든 경기지방의 두개의 놀이와 황해도의 봉산(鳳山)・강령(康翎)・은율(殷栗)탈춤이 있고, 영남지방의 통영・고성・가산(駕山)・진주의 오광대(五廣大)와 수영과 동래의 야류(野遊) 등이 있다. 서울 변두리의 애오개(阿峴)와 녹번 등지의 본산대(本山臺)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져서 알 길이 없으며, 본산대를 본받아 만들었다고 하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3. 한글 소설과 사설시조
가. 문학의 새로운 경향
한글소설과 사설시조가 등장하는 등 문학의 장르가 다양해졌다. 기존 양반 외에 중인, 서얼, 상인 등이 창작의 주체로서 등장했고 19세기는 서민문학의 전성기로서 평민들 사이에 풍자가 넘치는 잡가가 유행했다.
나. 한글 소설의 등장
사회비판소설 |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 |
권선징악 소설 | 장화홍련전, 창선감의록, 콩쥐팥쥐전, 심청전, 흥부전 |
남녀간의 애정 소설 | 옥루몽, 숙향전, 춘향전 |
군담소설 | 임진록, 임경업전 |
다. 사설시조(辭說時調)의 등장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사설시조가 유행해서 몰락 양반이나 서리, 기생들이 주로 지었다. 영조 4년 1728년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 영조 39년 1763년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의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라. 한문학의 변화
실학의 유행으로 꾸밈없는 문체를 사용해서 양반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9편)], 연암집(燕巖集)의 연간각선본(煙湘閣選本)(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이다. 단편소설로는 동패락송(東稗洛誦), 청구야담(靑邱野談)이 있다.
마. 시사(詩社)의 조식
서얼, 중인, 서리를 중심으로 동호인들이 모여 문학 창작 활동을 하였고 시를 모아 시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숙종 38년 1712년 서리 출신 홍세태(洪世泰)의 해동유주(海東遺珠), 영조 13년 1737년 역관 출신 고시언의(高時彦)의 소대풍요(昭代風謠), 정조 21년 1797년 역관 출신 천수경(千壽慶)의 풍요속선(風謠續選), 철종 8년 1857년 서리 출신 유재건(劉在建)의 풍요삼선(風謠三選)이 편찬되었다. 풍요(風謠)란 양반사대부의 문학인 아(雅)에 대조되는 하급신분층의 시라는 의미이며 시사로는 천수경(千壽慶) 등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玉溪詩社)가 있었다.
바. 위항문학(委巷文學)
규사(葵史) | 철종 10년 1859년. 서얼의 역사 |
연조귀감(掾曹龜鑑) | 헌종 12년 이진흥(李震興).향리의 역사 |
호산외기(壺山外記) | 헌종 10년 1844년 조희룡(趙熙龍). 중인 출신 |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 철종 13년 1862년 유재건(劉在建). 서리 출신 |
희조일사(熙朝軼事) | 고종 3년 1866년 이경민(李慶民). 가난한 중인 출신 |
사. 야담 잡기류
차천로(車天輅) | 17세기 초 오산집(五山集) |
류몽인(柳夢寅) | 광해군 13년 1621년 어우야담(於于野談) |
미상(未詳) | 17세기 중엽 조선개국초부터 인조때까지 조선시대 야사(野史)·일화(逸話)·소화(笑話)·만록(漫錄)·수필(隨筆) 등을 모아 놓은 방대한 야사전집인 대동야승(大東野乘) |
이방(李昉) | 태평광기언해(太平廣記諺解) : 북송 2대 태종(조광의(趙匡義)→광의(光義)→경(炅) 趙炅, 송태조 동생976년 ~ 997년) 太平興國 3년 978년에 이방(李昉) 등이 칙령에 따라 편찬한 중국 설화집 |
4. 조선 후기의 회화 및 서예
가. 진경산수화 발달
숙종~정조(1675~1800)까지 중국 화풍을 모사하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자연을 그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발달했다.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 계상정거(溪上靜居圖), 함흥본궁송도(咸興本宮松圖), 연광정도(練光亭圖), 일출송학도(日出松鶴圖), 초당춘수도(草堂春睡圖), 풍우기려도(風雨騎驢圖),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 화표주도(華表柱圖)김홍도의 총석정도(叢石亭圖), 금강산명경대(金剛山明鏡臺), 월하취생(月下吹笙)가 유명하다.
나, 풍속화 유행
일상생활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했으며 유교적인 양반사회에 대한 반항을 그려냈다.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3대 풍속화가가 유명하다.
김홍도(金弘道) | ▪ 산수화, 인문화, 불화, 풍속화에 모두 능했으나 특히 풍속화로 유명했다. ▪ 명암, 원근감 활용 등 서양화법을 도입했다. ▪ 도화서 소속 화원으로서 서민사회의 생활모습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 단원 풍속화첩 : 밭가는(논갈이) 광경, 추수하는모습, 대장간의 풍경, 무악, 씨름 |
신윤복(申潤福) | ▪ 주로 양반과 부녀자의 풍류생활을 그렸다 ▪ 남녀 사이의 애정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 미인도(여인도), 풍속화첩,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단오풍정(端午風情). 월야밀회(月夜密會) |
김득신(金得臣) | ▪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 반상도(班常圖, 노상현알), 성하직구(盛夏織屨), 달보고 짖는 개 |
그밖에 18세기에 심사정(沈師正), 변상벽(卞相璧), 윤덕희(尹德熙), 김두량(金斗樑), 최북(崔北) 등
개성있는 화가들이었으며 이인상과 강세황은 뛰어난 문인화가였다.
다. 서양 화풍
강세황(姜世晃)이 시・서・화의 삼절로 유명하며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여 사물을 그려냈다. 영통동구도
라. 19세기 화풍
보고화풍이 유행하여 사군자, 산수화, 인물화 등이 다시 등장했다.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장승업의 군마도(軍馬圖) 등이 유명했다.
마. 민화 유행
민화(民畵)는 한 민족의 삶・신앙・멋을 담고 있는 서민적인 그림이다. 생활공간 장식을 위해 해, 달, 나무, 꽃, 동물 등을 그려서 서민들의 소망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미술을 인식하면서 작품창작을 위주로 하는 정통화의 권위의식이 생겨나기 수천 년 전 그림은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본연의 소박한 신앙의 조형적 표현으로 만들어졌고, 만인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멋의 대상으로 대접을 받았으며, 그것은 곧 삶・얼・멋 3위일체의 결정체였다. 이러한 복합성을 지닌 그림들을 동・서양에서 모두 넓은 뜻으로 민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문화사에서 이러한 그림들은 속화(俗畵)라고 불리면서 정통화단의 천대를 받았으나 1965년경부터 민화에 대한 재인식이 싹트고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시작되어 민화의 문화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결과 한국민화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양이 방대하고, 질에 있어서도 기왕의 일반적 민화 수준을 넘어서 기상천외의 독창적인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화라는 용어는 학문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야생어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민화는 민속화・민족화・민중화・민체화・민간상징화의 성격을 종합한 폭넓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책거리(冊巨里), 19세기, 종이에 채색, 8폭 병풍, 각 52.2×31.0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쌍치도(雙雉圖) 까치호랑이(鵲虎圖)
미술을 인식하면서 작품창작을 위주로 하는 정통화의 권위의식이 생겨나기 수천 년 전 그림은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본연의 소박한 신앙의 조형적 표현으로 만들어졌고, 만인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멋의 대상으로 대접을 받았으며, 그것은 곧 삶・얼・멋 3위일체의 결정체대동법. 이러한 복합성을 지닌 그림들을 동・서양에서 모두 넓은 뜻으로 민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국문화사에서 이러한 그림들은 속화(俗畵)라고 불리면서 정통화단의 천대를 받았으나 1965년경부터 민화에 대한 재인식이 싹트고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연구가 시작되어 민화의 문화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결과 한국민화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양이 방대하고, 질에 있어서도 기왕의 일반적 민화 수준을 넘어서 기상천외의 독창적인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화라는 용어는 학문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야생어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민화는 민속화・민족화・민중화・민체화・민간상징화의 성격을 종합한 폭넓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바. 서예
이광사(李匡師)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안하고 김정희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창적인 글자체를 창안했다.
5. 공예기술
가. 자기공예
흰 바탕에 푸른 유약을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가 발전하고 안료로 사용되는 회회청(回回靑)이 정조때부터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민간에 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나. 옹기
음식 저장용 그릇으로서 서민들이 주로 사용했다.
다. 목공예
의자, 장롱, 책상 등 생활 및 문방구로서 크게 발전했다.
라. 화각공예
쐬뿔(牛角)을 쪼개어 무늬를 표현했다.
6. 음악
가. 양반음악
종래 가곡, 시조를 애창했다.
나. 음악 향유층의 확대
서민들은 민요를 즐겨 불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직업적인 광대, 기생의 판소리, 산조와 잡가 등이 발전했다.
7. 건축
가. 17세기
불교사원 중심으로 대규모 다층건물이 유행하였다.
나. 18세기
부농과 상인의 지원을 받은 장식성 강한 서원들이 건립되었고 전통적인 성곽 축조기술에 서양 건축 기술을 접목시킨 수원 화성이 축조되었다.
다. 19세기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때 소실한 경복궁을 재건(1865~1867) 했다.
민화(民畫)
1. 의의
민화(民畵)는 과거에 실용(생활공간의 장식이나 민속적인 관습에 따름)을 목적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민간인에 의하여 그려졌던 대중적인 실용화를 말한다. 민화장(民畫匠)은 민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 민화는 민족문화의 여러 모습을 폭넓게 묘사했으며, 그 중에도 생활철학과 생활감정을 그림 속에서 구체화시키면서 민중의 생활 속에 정착하고 존속해 왔다. 이 속에는 기원과 위안으로, 또는 보는 즐거움을 담고 있다. 따라서 민화는 민족의 창의성과 시대상을 엿볼 수 있고, 생활감정과 미의식을 느낄 수 있는 민족의 문화유산이다.
민화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년∼1961년)로서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민화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뒤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하자."고 주장하였다. 야나기가 민화란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개념은 있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여염집의 병풍ㆍ족자(簇子) 또는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속화(俗畫)'라고 칭하였다. 민화는 산수, 화조 등의 정통 회화를 모방한 것으로 소박하고 파격적이며 익살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2. 기원
민화의 기원은 선사시대 암각화(岩刻畵)에서 물고기·거북·사슴·호랑이 등에서 민화의 원초적인 화맥(畫脈)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四神圖)·신선도, 백제 산수문전(山水文塼)의 산수도 등은 민화적 소재이며 특히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처용의 화상을 문설주에 붙이면 역신(疫神)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벽사(辟邪)를 위한 그림을 대문에 붙였던 풍습은 조선 말기까지도 별성마마(別星媽媽) 그림 등을 붙이던 풍습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보이는 세화(歲畫)와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에 대한 기록을 볼 때 민화는 우리 민족과 함께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3. 특징
민화와 정통회화가 같은 종류로 중복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감상적 회화성에 화관을 둔 정통회화와 실용적 상징성에 화관을 둔 민화와는 차이가 있다. 민화는 생활 주변 및 현실의 모든 물상들을 제한 없이 그 소재로 하고 있으며, 현실뿐만 아니라 상상의 내용, 전설과 설화 등 무한한 소재들이 그려져 왔다. 또 도교나 불교, 유교 등 종교적·학문적 민화와, 무속과 같은 민간신앙을 내용으로 하는 민화 등이 있다. 정통회화에서 볼 수 있는 종류는 민화에서도 대부분 존재하며 또 민화만이 가지고 있는 대상도 상당히 많아 어느 부류의 그림보다 광범위하고 풍부하다. 민화를 내용상으로 보면 무속ㆍ도교·불교·유교계통과 장식용 민화로 대분된다.
4. 분류
가. 도교계통 민화
무속과 도교계통의 그림은 장생도 종류로 십장생도·송학도·군학도·해학반도도·군록도·천리반송도·오봉일월도 등이 있다. 방위신으로는 청룡·백호·주작·현무·황제 등이 있고 12지신상의 민화는 벽사진경을 위한 민속에 얽힌 작품이다. 호랑이 그림으로는 작호도·호피도 등과 산신도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밖에 닭·개·사자 그림 등 벽사진경의 뜻을 지니고 있다. 용왕도는 봉황·기린과 함께 상서로움을 기원하는 그림이며, 칠성·별성·오방신장 등 무속과 관계있는 그림이 많다.
⑴ 장생도(長生圖):민화의 대표적인 것으로 불로장생의 축수(祝壽)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예부터 장수의 상징으로 알려진 십장생, 즉 해·구름·물·바위·소나무·대나무·영지·거북·사슴·학 등을 그린 십장생도와 송학도(松鶴圖)·군학도(群鶴圖)·군록도(群鹿圖) 등이 많다. 특히 십장생도는 회갑잔치 때 수연병(壽筵屛)으로 쓰이며 임금의 용상 뒤에 놓인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도 민화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⑵ 십이지신상:방위(方位)와 관련된 12지신 및 5방을 관장하는 5신을 그린 것으로, 역병을 몰아내고 길한 것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등 12지신과 청룡·백호·주작·현무·황제(黃帝)의 5신이 소재가 되는데 주작은 기린 또는 봉황으로, 현무는 거북으로 변형되었다.
⑶ 호랑이:동물을 그린 민화 가운데 가장 많은 것으로 산신과 함께 그려지기도 하며, 까치와 함께 그려진 까치호랑이[鵲虎圖], 호피도(虎皮圖) 등이 많다. 벽사진경의 대표적 민화이다.
⑷ 신선도·산신도:도교사상에서 비롯되어 민간신앙으로 뿌리깊게 정착한 것으로 장수·부귀·수복다남(壽福多男)을 기원하는 뜻이 깔려 있다. 동자·호랑이·봉황 등과 같이 그려진다.
⑸ 신위(神位):천제(天帝)·칠성(七星)·오방신장(五方神將) 등 무속과 관련된 여러 신과 태조·공민왕·최영(崔瑩)·임경업(林慶業) 등 한국의 왕 및 장군들이 그려진 민화가 많다. 중국의 관우(關羽)도 많이 그려졌다.
나. 불교계통 민화
불교계통의 민화로는 화승(畵僧)의 정통 그림을 제외한 암자, 산신각, 칠성각 등에 남아 있는 그림도 민화에 포함된다. 단순한 탱화(幀畵)나 교리 내용 또는 고승의 초상을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구도로 그린 것이 많다. 자아(自我)의 발견을 철학적으로 가르치는 심우도(尋牛圖)도 많다.
다. 유교계통 민화
유교계통의 민화로는 성리학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교훈적인 것 및 충효예의(忠孝禮義) 등을 내용으로 한다. 행실도(行實圖)·효자도(孝子圖) 등이 대표적이며 관직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잉어그림[魚躍龍門]도 많이 그려졌다. 또 교화를 위한 문자도(文字圖), 효제충신, 예의염치, 평생도 등도 유교계통 민화의 하나이다.
라. 장식용 민화
장식용 민화로는 산수화를 비롯해서 화훼·영모·초충·어해·사군자·풍속화·책거리도·문방사우도·기명절지도 같은 정물화 등 많은 종류의 민화가 있다.
⑴ 산수화:동양화의 대표적인 소재로서 민화에서도 산수를 그린 것이 많이 있다. 일반 회화보다는 채색을 많이 하며 필법에 관한 한 대단히 자유롭다. 대개 8폭의 병풍 형태인데 금강산도(金剛山圖)·관동팔경도·관서팔경도·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등이 많으며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도 그려졌다.
⑵ 동·식물:벽이나 벽장, 다락문 등에 붙여지는 것으로 민화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다. 주로 가문의 융성과 부부의 행복을 바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화조도(花鳥圖)가 대표적이다. 꽃과 새 이외에 물고기나 각종 야생동물들도 한쌍 또는 무리를 지어 그려졌으며 파초·모란·포도·사군자도 많이 그려졌다.
⑶ 풍속화:민화가 가진 성격과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재로서 수렵도(狩獵圖)·해전도(海戰圖)·사화(史畵)·선유도(船遊圖) 등이 많다. 어린이들이 노는 백자도(百子圖), 농사와 길쌈을 그린 경직도(耕織圖), 민간의 행사 풍경을 그린 것 등이 있으며, 문학을 소재로 한 춘향전도(春香傳圖)·구운몽도(九雲夢圖)·삼국지도(三國志圖) 등도 많이 그려졌다.
⑷ 정물화:일상의 용품, 그 가운데서도 서책을 소재로 한 책탁문방도(冊卓文房圖)·책거리[冊架圖]·문방사우도(文房四友圖) 등이 대표적이다. 한 화폭에 여러 가지의 물상들을 회화적인 구도·색깔·균형·비례·대비 등의 기법으로 처리한 것인데, 정통 화풍의 세화(細畵)로부터 소박하고 익살스런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그림들이 남아 있다. 색조의 조화가 뛰어나고, 정갈한 가운데 창조적인 요소가 엿보여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우수한 작품이 많다
민화장(民畵匠)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무형문화재
지정 번호 무형문화재 제18호
지정일 1996년 12월 31일
전승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전승자 김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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