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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경통독 아카데미
모세 오경
조창수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성경
성경은 무엇인가? 목차만 훑어보아도 성경은 하나의 ‘문고’, 매우 다양한 책들의 총서임을 알 수 있다. 이 책들의 ‘입문’을 참조해 보면 이와 같은 첫인상은 더욱 확실해진다. 약 십 세기에 걸쳐 작성되었기에 그 출처가 서로 다르며, 어떤 책들은 히브리말로(몇몇 구절들은 아람말로), 또 어떤 책들은 그리스말로 저술되었다. 이 책들은 또한 이야기, 법전, 훈계, 기도, 시, 서간, 소식 등과 같은 다양한 유형을 보여준다. 이 총서의 이름으로 불리던 ‘책들’은 단수로 ‘책’, 곧 ‘성경’이 되었다. 이처럼 성경은 단 한 권으로 되어 있는 가장 탁월한 책으로 여겨진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1. 성경은 누구에게서 나왔는가?
성경 저자들과 편집자들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타나심과 부르심을 증언하며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하게 되는 반응들을(예를 들어 질문, 탄원, 찬미, 감사 등)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교 성경의 첫 부분인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모르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이 역사는, 이집트 탈출로부터 유배 이후 유다교 탄생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하나의 독특한 백성으로 만들어 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스라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신 한 분 하느님, 곧 야훼(주님)를 고백한다. 상당수의 성경 본문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밝힐 때에 법률 개념인 ‘계약’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이 계약과, 계약에서 흘러나오는 율법에 자신의 모든 삶을 내맡기도록 부름을 받는다. 성경 가운데 히브리말로 된 모든 부분들은 이와 같은 계약 신학을 하나의 특징으로 내세운다.
기원후 70년과 135년에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부터 급속하게 흩어져 나갔던 유다 백성은 유다 공동체 안에서 그 맥을 이어가는데, 이 공동체의 파란 많은, 때로는 비극적인 역사는 대부분 유배의 땅에서 펼쳐진다. 이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은 다양한 경향들은 모두 성경, 특히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온 것으로 받들어지던 율법을 기초로 한다. 유다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을 근거로 전승들의 범위 내에서 그들의 관습을 일구어 나간다. 이 전승들은 옛 이스라엘의 삶 속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기원후 2세기 국가가 멸망하고 난 다음 편집되기 시작하여 결국 라삐 문학에 자리하게 된 것들이다.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이르러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탄생하며 이 공동체는 유다교로부터 서서히 갈라져 나간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백성의 역사와 예언자들의 예고는 나자렛 사람 예수의 오심으로 그 완성을 본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으로 다스릴 백성을 이루시고자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신다.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계약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단계였으나, 예레 31,31-34의 신탁에 따라 새 계약으로 대체되어야 했던 계약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전승들을 옛 계약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 특히 2코린 3,14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스라엘로부터 물려받은 성경 전체를 구약 성경이라 일컬었으며,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메시지에 대하여 말하는 책들은 신약 성경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신약 성경을 기초했던 제자들과 그 후계자들은 예수라는 인물 안에서, 이스라엘의 희망을 성취시키고 그 백성 한가운데에서 드러난 보편적 기다림에 응답하시는 분을 보았다. 이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거룩한 책들이 즐겨 사용한 언어는 물론 오랜 세기 동안 축적되어 온 종교적 체험과 역사의 가치를 받아들였으며, 이들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교는 구약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보았다. 이렇게 해서 유다인들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성경이 되었으며, 이들은 기원후 3세기경에 가서 이 성경을 신약 성경으로 보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성경은 이제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새로운 책이 되었다. 이처럼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지만 같은 시각으로 읽는 것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성경은,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든 신앙인들에게 성경을 읽는 공동체로 들어와 과거를 통해서 그리고 현재 안에서 성경이 갖는 의미와 의의를 찾도록 끊임없이 초대하는 작품이다.
2. 성경 읽기
성경은 자기네 백성 한가운데에 나타나시어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을 증언하고자 하는 저자들 또는 편집자들의 작품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익명으로 남아 있으며, 특히 구약 성경의 경우 그러하다. 그들 작품의 상당 부분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루어졌다. 작품 대부분은 최종 형태를 갖추기 전 여러 차례 수정되었으며, 가필과 주석, 나아가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 개작과 같은 방식으로 원독자들의 반응을 남기고 있다. 비교적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해석하고 현실화하여 새로운 작품들이 탄생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사무엘기와 열왕기를 역대기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문화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책이다. 이 백성은 다른 백성들도 그러했듯이 자기들만의 고유한 방식대로 인간의 실존과 조건, 주변 세계를 이해하였다. 이 백성은 체계적인 철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와 관습과 제도를 통해서, 개인과 백성 전체의 자발적인 반응을 통해서, 그리고 독창적인 언어로 세상에 대한 개념을 표현해 나갔다.
한편 이스라엘의 문명은 전체적으로 볼 때 고대 근동 다른 백성의 문화와 적지 않은 공통점을 보여 준다. 수많은 성경 본문들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널리 퍼져 있던 사고와 전통이 들어 있다. 그 예로 천지 창조 또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물론 지혜와 율법에 관한 본문들을 들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단순한 답습으로 볼 수는 없다. 고대 근동의 전통과 문헌들을, 이스라엘과 유다교의 고유한 역사적 종교적 체험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의 풍요로움을 모두 간파하려면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일찍 문명화한 다른 민족들의 영향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는 성경 안에 온전히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이 현대의 인간들에게 왜 그리 어려운 일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성경과 현대의 인간 사이에는 넘어서기 힘든 간격, 곧 시간적인 격차, 문화적인 차이, 특히 하나의 본문이 전하는 본래의 메시지와 독자의 이해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간격을 줄이려고 독자들은 주석, 다시 말해서 본문 해설을 본다. 3-4세기경부터 서양에서는 인문 과학과 고고학에서 사용하던 방법들을 응용하는 역사적인 주석 방법이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 방법은 낱말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함은 물론 본문을 본래의 자리에 배치시키고 그 형성 과정을 살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밝혀내는 가운데 성경 본문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이끄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성경의 입문 부분들과 본문의 각주들은 이와 같은 폭넓은 작업의 결과와 가설들을 간추린 것이다.
3.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독자들은 성경이 단순히 고대 문학의 보고(寶庫) 내지 한 백성의 윤리적 종교적 개념들을 역사적으로 정리해 주는 문헌들의 서고(書庫)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경 본문들이 입증하고 있듯이 인간의 삶을 위한 기본적인 책으로 제시된다.
“이 말씀은 빈말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신명 32,47ㄱ).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성경을 읽을 때는 언제나 성경 본문의 이러한 기능, 끊임없는 질문 제기,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고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지 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은 물론 성경 말씀을 적절히 실천에 옮길 수도 있고 문학에 대한 관심이나 고대 역사에 대한 호기심에서 성경을 읽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을 증언하며 결단을 촉구하는 성경 저자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면 독자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성경의 신앙 고백들은, 이 고백들이 특수하고도 오랜 역사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더라고, 모든 역사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들과 편집자들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건네지는 말씀의 전달자로 머물고자 할 뿐이다. 세기를 통하여 모든 언어와 모든 문화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메시지를 꾸준히 묵상하고 현실화해 온 성경에서 신앙의 양식을 찾았고 또 찾고 있다. 이 공동체는 전례와 성무일도를 거행하는 가운데 신약 성경의 복음서와 서간들과 함께 구약 성경의 본문들을 당당히 읽고 노래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하나이며, 성경의 이 두 부분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면서도 온 인류에게 당신 구원을 베푸시는 같은 하느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증언에 기초한 신앙은 거기에서 생명과 힘을 찾는다. (신앙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이 신앙이 오늘날 여전히 건재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행동 방식이 되고, 인류 역사의 누룩으로서 특별한 실존 방식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성경은 독자들을 언제나 산 신앙으로 이끌며, 이 산 신앙은 독자들을 언제나 신앙의 원천인 성경으로 이끌어 간다.
구약 성경
입문
구약 성경은 유다인들이 흔히 타낙(TANAK)이라 부르는 문서집이다. 타낙은 히브리말 성경의 세 부분을 가리키는 명칭, 곧 ‘율법’(Torah)과 ‘예언서’(Nebiim)와 ‘문서’(Ketubim)의 첫 글자 사이에 모음 A를 붙인 이름이다. 때로는 ‘독본’(Miqra). 곧 ‘유다교 회당에서 읽는 책’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책들이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체결된 ‘새로운 계약’(또는 ‘신약’)의 규정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믿고서, 그 이전의 거룩한 책들에 ‘옛 계약’ 곧 ‘구약’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히브리말 성경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동서양의 교회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는 그리스말 성경은 네 부분, 곧 (‘율법’과 동일한) ‘모세 오경’, (‘예언서’의 첫 부분과 ‘문서’에 속하는 몇몇 책들을 규합하는) ‘역사서’, (‘문서’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성문서’, (‘예언서’의 둘째 부분과 다니엘서로 구성되는) ‘예언서’로 나뉘어 있다. 그리스말 성경은 이 밖에 히브리말 성경에 없는 몇 권의 책들을 구약 성경의 일부로 받아들이나, 개신교는 ‘사등분’의 구조는 견지하면서도 히브리말 성경에 실려 있는 성경만을 구약 성경으로 인정한다. 이 ‘입문’에서는 구약 성경이 탄생한 지리적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소개하고, 구약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책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되었고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었는지를 요약한 다음, 이 책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Ⅰ. 성경의 나라
1. 비옥한 초승달 지대
성경은 ‘가나안 땅’이라고 하고 지리학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티나(곧 ‘필리스티아인들의 땅’)라 일컫는 이스라엘의 땅은 지리적으로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 넓은 지대의 한 작은 지역을 가리킨다. 실제로 활 모양을 한 이 지대의 중심부에는, 옛날에는 거의 지나갈 수 없었던 지역, 곧 아라비아 반도 북쪽에 있는 시리아 사막의 고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초승달 지대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오론테스, 리타니, 요르단과 같은 중요한 강들이 물을 대고 있다. 한편 이 지대에는 그 연장선처럼 보이는 중요한 나일강 계곡을 덧붙여야 한다. 비록 지리학자들이 이 계곡을 엄밀한 의미에서 초승달 지대에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 초승달 지대의 경계 안쪽은 사막과 이어지는 반사막 지역으로 이루어진 반면, 바깥쪽에는 이란 고원, 아르메니아, 타우루스 산맥과 같은 산악 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 초승달 지대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는 가장 비좁은 지역인데, 지중해와 사막 사이에 낀 폭이 채 백 킬로미터가 안 되는 통로로서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계곡을 이어 준다.
초승달 지대는 일찍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여러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나일 강의 계곡과 삼각주, 그리고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에 집중되었다. 이 두 지역 사이에는 왕래 또한 빈번했는데, 그 기본도로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르다가 팔미라와 다마스쿠스를 거쳐 시리아를 지나고, 므기또와 야포를 거쳐 팔레스티나를 통과한 다음, 가자와 라피아를 거쳐 이집트에 다다랐다. 이와는 달리 사막 가장자리에 있는 다마스쿠스에서 요르단 동쪽 길을 잡으면 아라비아와 에일라트에 이르고, 여기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이집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운송을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노선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직접 페니키아의 항구(비블로스, 시돈, 티로)로 가서 바다를 건너 이집트로 향하는 길이었다. 상인들과 군인들이 이러한 대로를 통하여 왕래하였으며, 여러 사상들 또한 전파되어 나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닫혀 있던 세계가 아니었다. 직접 아라비아와 교류하고, 이집트와 누비아를 통하여 아프리카와, 이란을 거쳐 인도와 교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에 속하는 키프로스, 크레타, 그리스의 섬들, 이오니아, 더 나중에는 그리스 본토와 이탈리아와도 관계를 맺어 나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지중해 연안 사이에는 언제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하여 지중해 연안과 고대 근동의 국가들 사이에는 문화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이 형성되었다.
2. 팔레스티나의 구조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팔레스티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통로 구실을 하였지만, 그리 대단한 지역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사실 팔레스티나의 중심부는 교류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지만 기타 지역은 주민들이 고립 생활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통행이 가로막혀 있었다. 팔레스티나는 북에서 남으로 간략하게 네 지대로 분류할 수 있다.
가) 해안 지대 : 항구 건설이 용이하지 않은 비좁은 지중해 연안을 말하며, 언덕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낮기만 한 “평원 지대”(신명 1,7; 여호 9,1; 10,40; 11,2 등)가 동쪽 경계를 이루고 여러 개의 작은 벌판들로 단절되어 있는 지대이다.
나) 중부 산악 지대 : 남쪽 유다에서 1,000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은 지대이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이즈르엘 평야를 향하여 낮아지다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하여 이스라엘 북부의 최고봉에 이르며 끝내 레바논 산맥으로 이어진다. 이 지대를 가로지르는 침하 현상에 따라 세 지역, 곧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로 나뉜다. 이 침하 현상이 두드러진 곳이 이즈르엘 평야인데, 그 동쪽은 카르멜 산 기슭에 이른다.
다) 대 침하 지대 : 요르단 계곡과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가 차지하고 있는 지대이며, 아라바 계곡을 타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아카바 만에 이른다. 아프리카의 거대한 호수들까지 이어지는 이 침하 지대는 육지에서 가장 깊은 구렁을 이루고 있다. 사해의 경우 지중해 수면에서 392미터 아래에 있다.
라) 요르단 동쪽 고원지대 : 서쪽은 요르단 계곡 위로 돌출해 있는 지대이며, 남쪽 지대는 요르단 강과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르논이나 야뽁과 같은 지류들로 갈라져 있다. 비교적 덜 가파른 북쪽은 중부 산악 지대보다 더 높은 산맥을 이루며, 더 올라가면 헤르몬 산과 안티레바논 산이 있다.
3. 팔레스티나의 생활 조건
팔레스티나의 기후는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일조량이 풍부한 대신 비는 겨우 며칠만 간간히 내릴 뿐이다. 오월부터 시월까지는 건기이며, 강수량은 매우 불규칙하다. 어떤 해는 예년보다 두 배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평균 강수량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빠르게 감소하며, 이에 따라 팔레스티나의 기후는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 해안에서 중부 산악 지대로 이어지는 지역 : 강수량은 평균에 이르며, 지중해성 농작물인 밀, 보리, 포도, 올리브, 과일, 채소 등이 재배된다.
- 유다 산악 지대의 동쪽과 네겝 지역 : 반사막 지역으로 계절에 따른 농작물 재배와 목양이 가능한 곳이다.
- 사막과 초원지역 : 계절에 따라 목장이 되는 지역이다.
마지막 두 지역에 수량이 풍부한 오아시스들이 있지만, 면적이 그리 넓은 것은 아니다. 비교적 메마른 지역에 비해 물이 많은 지역은 하나의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여길 수 있었지만, 팔레스티나의 삶은 늘 불안하고, 그 땅은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성경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주민 수는 백만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 같다. 양대 도시인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주민은 겨우 삼만 명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그 밖에 다른 도시들은 작은 성읍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인구는 샘물 주위에 모인 촌락에 살았다.
Ⅱ. 이스라엘과 이민족들
1.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단계
가) 이스라엘의 기원 : 기원사는 대부분 다른 민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규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기원전 1200년경 이스라엘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기 이전, 형성의 시대가 앞섰을 것이나 역사가들의 접근을 벗어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셈족 가운데 반유목민으로서, 기원전 2000년대 내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반사막 지역 주변에서 양 떼를 치며 떠돌이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반유목민들은 점차 몇몇 집단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며, 때로는 이미 정착해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반유목민 집단 가운데 후에 아모리인들과 아람인들의 시조가 된 두 집단이 잘 알려져 있다. 아모리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정착했으며, 아람인들은 기원전 13세기경 시리아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헌들은 또 다른 여러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과 이집트에 끊임없이 잠입해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스라엘 지파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스라엘의 시대를 자리하게 할 수 있겠는가? 전승이 이들 성조들의 것으로 전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역사적 가치를 판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실 성경 저자들은 성조들을 역사적 인물로 묘사하기보다는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적인 선조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고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이스라엘 백성의 탄생 : 추측컨대 기원전 13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복잡한 과정이다(기원전 1225년경). 이집트 파라오 메르네프타의 기념비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티나의 소수 주민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집단과, 이집트에 정착해 살다가 모세의 인도로 탈출한 셈족 집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모세는 셈족 집단을 가나안을 향하여 이끌어 갔다. 성경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주님께서 구원하신 이 집단에게 주님께 올려야 할 경신례를 가르치며, 이 집단을 하나의 백성으로 조직하기 시작한다. 성경은 이들 기본적인 사건들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으며, 이 사건들을 이스라엘의 출생증명서로,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으로 소개한다.
모세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느보 산에서 죽자 여호수아가 이 집단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간다. 여러 지파로 구성된 한 백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지파 연맹은, 그 시작은 잘 알 수 없어도, 기원전 12세기와 11세기 동안 이루어지나, 해양 민족 특히 기원전 12세기 초 팔레스티나 해안에 상륙한 필리스티아인들의 출현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는다. 필리스티아인들이 영토를 넓힐 목적으로 이스라엘 지파들이 살고 있던 고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들 지파들은 이웃 민족들의 제도를 본받아 임금을 우두머리로 내세워 지파 연맹을 강화하며 저항하기로 작정한다.
다) 왕정 제도 : 사울의 왕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끝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투 중에 사울 임금이 죽자(1사무 31), 유다 지파의 다윗이 점차 모든 지파의 인정을 받아, 먼저 유다의 임금으로(2사무 2), 이어서 온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즉위한다(2사무 5). 수도로 예루살렘을 선택한 다음 다윗은 인접한 왕국들, 특히 요르단 동쪽에 있는 나라들을 향하여 세력을 펼쳐 나간다. 그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와서 왕국은 체제를 더욱 정비한다. 솔로몬 치세에 관한 기록, 때로는 지나치게 서정적인 기록(1열왕 3-10)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 건축만큼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1열왕 6-8). 이스라엘은 이 성전에서 당신 백성 한가운데 머무르시는 주님의 항구한 현존에 대한 표징을 본다. 그러나 솔로몬 치세 종말은 적대 세력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웠다. 솔로몬의 후계자인 르하브암은 이스라엘 왕국이 표면상으로만 통일을 이루고 있었음에도 적대 세력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북쪽 지파들은 르하브암 임금이 조세 감면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히자 기원전 933년 반기를 들어 독립된 왕국, 곧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운다. 유다와 벤야민 지파만이 르하브암을 섬기며 (남)유다 왕국을 형성한다. 이후 2세기 동안 두 왕국은 때로는 대립하면서 공존 관계를 유지한다. 더 풍요롭고 더 많은 주민이 살던 지역들로 형성된 북 왕국은 특히 사마리아 도성을 창건한 오므리 임금과(기원전 886-875년), 그의 뒤를 이은 아합과(기원전 875-853년) 예로보암 2세(기원전 787-747년) 치세에 번영의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만성적인 왕조의 불안으로 쇠약해진 북 왕국은 아시리아의 세력 확대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다가 결국 기원전 737년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에게 굴복하고, 이후 전개된 몇몇 저항 운동 역시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함락과 함께 그 끝을 본다. 주민들 가운데 일부가 유배지로 압송되고 왕국의 영토는 아시리아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된다.
북 왕국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경제적으로도 빈약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왕국들과 이웃해 있던 남 왕국은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이집트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이 왕국은 그래도 아사와 여호사팟, 특히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함락 이후 북 왕국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였던 히즈키야와, 유다가 독립에 대한 마지막 의지를 불태웠던 요시야와 같은 임금들의 시대에 와서는 이민족들 사이에서 제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왕국 역시 북 왕국이 멸망한 후 한 세기가 조금 지나 무너져 버린다. 바빌론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도성을 파괴하고 주민 가운데 일부를 유배지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기원전 587년). 바빌론으로 흩어졌거나 이집트로 피신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옛 주민들은 그 나라의 백성들과 동화되어 살아갔으나, 몇몇 소규모 집단들은 성전이 멀리 떨어져 있고 더 이상 제사를 바칠 수 없게 되었어도 종교 생활을 유지하며 자신들의 응집력을 견지해 나갈 줄 알았다. 유배 생활은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이와 같은 징벌의 이유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근래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성경의 여러 본문들이 이를 반향하고 있다.
라) 유다 공동체 : 유다 왕국이 몰락한 지 오십 년이 채 되지 않아 상황은 다시금 바뀌어 페르시아인들의 침입으로 바빌론 제국이 붕괴된다. 페르시아 제국은 일찌감치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며, 이 성전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이 다시 모여든다. 아직 미소하지만 이 공동체는 수많은 난제들을 극복해 가면서 서서히 성장해 나가게 된다. 우선 그 땅에 남아 있던 잔류민들의 적대감에 직면해야 했으나, 이 공동체는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느헤미야와 에즈라의 업적으로 분명한 조직을 갖춘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나 종교와 관련하여 깊이 있는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며, 바로 이즈음 구약 성경의 대부분이 결정적인 형태를 갖는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종결시키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의 승리를 보장한다. 마케도니아 제국에 병합된 이스라엘은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 사이에 전개될 충돌을 감수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 세기 반 동안 유다 공동체는 그리스 세계와 평화롭게 지내나 기원전 167년에 이르러 분쟁이 발생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의 특별한 지위를 박탈하고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의 종교 의식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다. 이에 마카베오 형제들은 무력으로 저항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승리로 이끈다. 대사제로 인정받은 시몬 마카베오가 유다의 독립을 쟁취하고(기원전 142년),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시몬의 자손들, 곧 임금으로 불리던 하스몬가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유지하지만, 기원전 63년 로마인들이 이 상황을 끝낸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다를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한편 이 시기 동안 유다 공동체는 스켐 성소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전통과 대립되는 지파들의 전통을 물려받은 사마리아인들과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침입과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제국의 침입으로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기타 지역으로 흩어져 살았다.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기원전 538년 이후 유다로 귀환하지 않았고, 수많은 백성들이 그리스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근동 전역과 지중해 연안, 특히 이집트를 향한 이주가 수월하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다보다 더 많은 유다인들이 살았으며, 이들의 활발한 선교 활동으로 유다교에 많은 개종자들, 곧 ‘새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외국에 거주하던 이 모든 유다인들은 디아스포라(분산)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들은 그 절반이 유다인들이 아니었던 팔레스티나의 인구보다 많았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예루살렘과 성전에 큰 애착을 보였던 이들 유다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했으며, 동시에 자신들이 함께 살고 있던 다른 민족들의 삶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유다교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도록 이끌었으며,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큰 시련은 로마인들을 거슬러 일으킨 유다 항쟁을 말하며, 이 전쟁은 성전 파괴로 끝났고, 바르 코크바의 최후 저항(135년) 이후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거주 자체가 금지되었다.
2.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들
오랜 세월 동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여러 지방과 문화와 종교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던 장소였으며,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이 사람들과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가) 인접 민족 : 이스라엘의 주변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거의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는 주민들로 구성된 작은 왕국들이 여럿 있었다. 남동부에는 에돔인들이 세이르 산악지대와 아라바 계곡과 페트라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북부로는 (곧 사해 동쪽으로는) 모압 왕국과 암몬(지금의 암만) 왕국이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에는 아람인들의 왕국들이(다마스쿠스, 하맛) 자리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왕국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그 백성들과 혈연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족보 제시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암몬과 모압은 아브라함의 종손이고, 에돔(에사우)은 야곱의 형제이며, 아람 사람 라반은 야곱의 외삼촌이며 장인이었다. 북서부에는 지금의 레바논 해안을 따라 항구 도시가 일렬로 들어섰다. (나중에 비블로스라 불린) 그발, 지중해 연안에 교역소나 식민지를 건설하고서 바다를 종횡으로 항해하던 선원들과 상인들이 살았던 시돈과 티로 등이다. 이 지방은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페니키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혼혈족이 살았던 이 지방은 예전에는 가나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 정치 구도와 달리,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일한 언어이면서도 여러 방언으로 구성된 가나안 말을 사용했으며, 이 언어의 원형은 이집트의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바빌론 서판들에 나타난 몇몇 설형 문자 어휘에서 엿볼 수 있다. 가나안의 문명과 종교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문헌은 없으나, 기원전 14세기에 우가리트 말로 기록된 북 시리아의 라스 사므라에서 발견된 문헌들이 밝혀 주는 내용들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끝으로 남서부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던 거의 같은 시기에 해안 지방에 도착한 필리스티아인들이 살았다. 이들의 종교와 관습을 비옥한 초승달 지대 백성들의 것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오히려 크레타와 그리스의 것들과 유사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나안의 상당한 신들을 받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나) 강대국 : 인접한 소왕국들 못지않게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을 번갈아 가며 지배했던 강대국들과도 운명적인 관계를 피할 수 없었다. 팔레스티나는, 그리 흔치는 않았지만, 강대국들이 약세에 접어들었을 때 비로소 세력을 과시할 수 있었으며, 다윗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틈타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는 이 강대국들의 억압 아래에 있었다.
우선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이미 대단히 앞선 문명을 자랑하던 대국이었다. 나일 강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던 이집트는 (누비아를 통해) 아프리카를 향해, 나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향해 열려 있었다. 파라오들은 늘 팔레스티나를 지배하고자 기회를 엿보았으며, 그 결과 오랜 세기 동안 팔레스티나는 이집트의 속령 또는 보호령에 속해 있었다. 거의 모든 유다의 임금들이 이집트와 동맹 또는 종속 관계에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성경에 (특히 지혜 문학 작품에) 중요한 흔적을 남길 만큼 이집트의 문화적 영향이 지대했음을 잘 설명해 준다.
다음 메소포타미아는 언제나 복잡한 세계에 속했다. 여러 종족들이 뒤섞여 공존하고 있었으며, 제국들이 전쟁을 통하여 교대로 군림했다. 팔레스티나를 지배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첫 번째 제국은 기원전 9세기경 서쪽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나갔던 아시리아 제국이다. 이 제국은 기원전 735년에 북 이스라엘 왕국을 굴복시키고 마침내 기원전 722년에 이 왕국을 제거했으며, 남 유다 왕국은 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아시리아의 지배는 성경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기원전 606년에 끝내 전쟁에서 패한 아시리아는 그 세력을 칼데아인들(동부 아람인들)이 통치하던 바빌론 제국을 넘겼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거의 모든 옛 아시리아 제국에 자기의 패권을 행사했으며 결국 기원전 587년에는 유다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는 이 제국을 파멸시키고서 이 제국의 속령들을 더욱 광활한 제국에 편입시켰으며, 그렇게 두 세기 이상을 버텼다. 페르시아 정부는 정복된 민족들의 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펼쳤으므로, 유다 공동체는 재편되고 번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세력들과 대치하기에 앞서서 팔레스티나는 이미 그 지방의 문명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적어도 기원전 3000년부터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수메르인들(우르, 라가스), 아카드인들(아카드), 아모리인들(바빌론, 마리), 후리인들(누지), 아시리아인들(니네베), 칼데아인들, 페르시아인들과 기타 민족들이 잇따라 지배했던 메소포타미아는 한결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은 여기에 이란의 인도-유럽적인 색채를 더해 주었다.
끝으로 ‘그리스 세계’가 있다. 기원전 이천 년대부터 가나안은 에게 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이 영향은 페르시아 지배 시대부터 더욱 커져 갔으며, 기원전 4세기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다. 수년 사이에 마케도니아 사람 알렉산드로스는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기원전 323년 그가 죽자 그의 장수들이 이 제국을 분할하였다. 팔레스티나는 우선 이집트를 지배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국가에 (알렉산드리아) 속해 있다가 후에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포괄했던 셀레우코스의 국가에 (안티오코스) 예속되었다. 헬레니즘이라는 동일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음에도 이 두 국가는 끊임없는 갈등 관계에 있었으며, 이 때문에 팔레스티나는 주인을 여러 번 바꾸었다. 한편 그리스인들이 이 땅을 점령해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문화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오히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문화에 동화된 상당수의 주민들이 팔레스티나에 정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유다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독자성을 견지해 왔기에 그리스의 영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극히 피상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투쟁이 없이 독자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마카베오기 상·하권). 헬레니즘의 영향은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에게는 더욱 중대한 문제였다. 비록 이들이 모든 일에서 이스라엘의 문화와 종교를 중시하고 이를 준거로 삼았음에도 말이다.
Ⅲ. 구약의 경전
구약 성경은 히브리 민족이 저술한 문학의 총체가 아니다. 이는 권위를 인정받은 책들을 대상으로 선별한 결과이며, 이런 이유로 ‘경전’이라 불린다(그리스 말로 ‘경전’은 ‘규범’을 의미한다).
1. 유다교 경전
유다교에서 토라(또는 ‘율법’)는, 에즈라가 이를 확정하고 기원전 398년경 공포한 이래 공적인 결정의 척도가 되었다. 페르시아 당국은 이때부터 다섯 권으로 된 ‘모세의 책들’을 이 제국의 모든 유다인들을 다스리는 헌장으로 인정하였으며, 제국의 유다인들 또한 이 책들에 신앙과 실천 생활에 관한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규범적 가치를 부여했다. 이 책들은 이렇게 규범적인 책들, 곧 삶을 조정하는 책들이 되었다. 토라에 이어 두 번째 모음집, 곧 ‘예언서’가 집대성되었으며, 이 예언서는 또한 전기 예언서와(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후기 예언서로(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열두 소예언서) 나뉘었다. 이 예언서는 토라에 버금가는 규범적 권위를 지니지는 못했지만 율법을 실천적으로 주해하는 기초 역할을 했고 율법의 효력을 넓혀 나갔다. 끝으로 구약 성경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경신례와 회당 집회 때 사용되었는데, 전례를 위한 기도문이었던 ‘시편’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모음집에 속한 책들은 권위 면에서나 경전의 수용 면에서나 그 사정이 각기 달랐다. 특히 각 권의 권위는 그 용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유다교의 경우 거룩한 책들의 목록은 한동안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알렉산드로스(기원전 323년에 사망)의 원정 이후 거룩한 책들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유다인 공동체가 기원전 4세기 말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으며, 이때에는 유다 역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왕조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했던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이 이미 부여한 적이 있던 종교적 특권을 유다인들에게 허용하였다. 이러한 특권으로 유다인들은 국가의 보호 아래 고유한 율법으로 관리되는 ‘민족’을 이루면서 자신들의 경신례와 문화적 특수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유다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점차 그리스 말을 수용하게 되자, ‘율법’ 역시 곧 그리스 말로 번역되었다.
‘아리스테아의 편지’라 불리는 유다 문서에 따르면 이 번역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2-246년) 시대에 왕명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의 대사제가 선정한 팔레스티나의 일흔두 유다인 학자들이 이 일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 ‘칠십인역’이라는 이름이 나왔는데 처음에는 ‘율법’ 번역만을 대상으로 하다가 후에는 구약 성경 옛 그리스 말 번역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아리스테아의 편지’가 비록 역사적인 가치는 없다 하더라도 여기에 나오는 연대만큼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이 편지에서는, 그리스 말을 사용하는 유다인들이 이 율법 번역을 히브리 말 율법과 동일한 규범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한 사실이 드러난다. 율법에 이어 유다교의 신앙과 삶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작품들이 번역되었는데, 예언서와 시편이 먼저 번역되었고 기타 문서들이 작품의 영향력과 권위에 따라 그 뒤를 이었다(집회서의 머리글 참조).
기원전 1세기와, 예루살렘 멸망에(기원후 70년) 이은 유다인들의 재건 사이에 여러 유다교 정착지에서 공적으로 인정되고 사용되던 경전의 범위가 어떠했는지를 단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로마인들에 맞서 싸웠던 유다인들의 최후 저항 요새였던 마싸다에서(기원후 73년 함락) 집회서 두루마리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유다교 회당에서 이 집회서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모든 종교적 분파 역시 동일한 경전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사두가이들은 율법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으며, 다른 어떤 책에도 이와 같은 권위를 공인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쿰란의 에세네 공동체가 그 권위를 인정했던 다니엘서를 경전에서 제외시켰다. 한편 쿰란 공동체는 토빗기와 집회서는 물론 바룩서도 사용했으며, 에녹서나 희년서와 같은 몇몇 외경들과, 공동체 생활을 규제했던 공적인 문서(공동체 규칙서, 성전〔聖戰〕규칙서, 찬미가 모음집, 새 예루살렘서 등)에도 동일한 권위를 부여했다. 더욱 폭넓은 경전 목록을 수용했던 이러한 공동체와는 달리, 기원후 초세기에 성경 본문을 확정하고 그리스 말 역본을 개정하려고 시도했던 노력들이 입증하고 있듯이, 성경을 더 좁은 의미로 정의했던 공동체도 있었다.
기원후 80년과 100년 사이에 가서야 비로소 바리사이 유다인 학자들이 얌니아에 모여 경전 목록 작성에 아직 문제로 남아 있던 불확실한 점들을 정리했다. 이들은 우선 문제시되던 몇몇 책들의 권위를 확인했으며(코헬렛, 아가, 에스테르기), 그들이 보기에 최후의 예언서들인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와 말라키서 이후의 책들은 경전 목록에서 제쳐 놓았다. 이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의 유다교는 (가톨릭 교회가 기원후 16세기 식스토 5세 교황 이후 경전에 관한 전문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한) ‘제2경전’에 속하는 책들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전체와, 그리스 말 역본에만 나오는 에스테르기와 다니엘서 일부) 물론 주요 외경들까지 경전으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여기에 어떤 확신이 작용했을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얌니아에서 확정된 경전에 대하여 그리스 말 공동체와 팔레스티나 학자들 사이에 어떤 갈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나, 성경 각권에 부여된 권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아무튼 얌니아의 결정 이후에도 경전 목록 이외의 몇몇 책들이 필요에 따라 경전처럼 계속해서 인용되었으며, 이는 라삐의 지도를 받던 유다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집회서가 자주 인용되었다. 결국 제2경전의 책들은 경전으로서의 규범적 권위는 인정받지 못했어도 신앙 교육에 유익한 책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2. 그리스도교 경전
그리스도교와 유다교가 완전히 결별하기까지, 유다교 회당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거룩한 책들을 물려받았다. 그리스도교는 그 뿌리를 내렸던 나라들, 곧 팔레스티나,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등의 유다교 공동체에서 중시되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던 대로 이 경전의 범위가 기원후 1세기 말경까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시대에 유다교 경전 목록은 아직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신약 성경에서 인용되거나 암시되는 구약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어떤 책들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제2경전 가운데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옛 그리스 말 역본의 다니엘서가 분명히 인용되고 있으며, 지혜서 역시 알려져 있었고 집회서 또한 그러했던 것 같다. 몇몇 외경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물려받은 유다교의 유산을 이루었다(유다 서간 9절과 14-15절 참조). 얌니아 이후 유다교 경전이 확정되자 유다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그리스도교는 물론, 유다교와 논쟁을 벌이기로 작정한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 논쟁을 벌일 때 양자 모두 인정하는 제1경전만을 사용하도록 독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유다교 경전에서 제외된 상당수의 책들을, 이미 작업이 끝난 그리스 말 역본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사용하였다. 3세기 초반, 오리게네스는 이 폭넓은 경전 사용을 잘 증언해 준다.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한데, 여기서 그는 성경의 본문을 적극적으로 대조해 나가는 가운데 경전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얌니아에서 확정된 ‘유다교 성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던 자들을 거슬러, 구약 성경의 그리스 말 역본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교 성경’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경전은 경전성에 대하여 ‘논란이 전혀 없던’ 작품들에 ‘부분적으로 논란이 있던’ 작품들을 포함시키면서 점진적으로 확정되어 나갔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 언어권의 동방 교회는 경전을 확정할 규범 마련을 위해 어떠한 법적인 결정도 내려 본 적이 없었으므로, 성경 사용에 다양한 입장을 보여 왔다. 오늘날에도 그리스 말 성경이 제2경전을 담고 있음에도 이 경전의 권위에 대해 동방 교회 신학자들의 견해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서방 교회와 북 아프리카 교회는,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교회 회의와 인노첸시오1세 교황의 편지가 입증하고 있듯이 4세기 초부터 제2경전을 포함한 공통 목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대에 라틴 서방 세계에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새로운 역자인 예로니모 성인은 제2경전 가운데 몇 권을 번역하고(토빗기와 유딧기), 히브리 말 성경을 대본으로 번역한 역본의 부록에 에스테르기와 다니엘서의 그리스 말 첨가 부분을 덧붙여 놓은 것으로 만족했다. 그 밖에 다른 책들은 번역하지 않았다. 아마도 예로니모가 성경 번역을 위해 팔레스티나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그곳 유다교와 자연스럽게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가 제2경전 번역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던 것 같다. 16세기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유다교가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책들을 경전에서 제외시켜 부록에 수록해 놓고서는, 신심을 키우는 데는 유익하나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없는 책들로 취급하려 하자, 서방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1545-1563년) 통하여 이 책들을 교회의 경전으로 다시 천명하였으며 그 결과가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공의회 이후 교회의 공인 성경으로 불가타, 곧 ‘대중 라틴 말 성경’이 출간되었으며, 이 성경은 그리스 말 성경의 범례에 따라 제2경전을 오경 이외의 구약 성경 세 부분(역사서, 시서, 예언서)에 분산시켜 놓았다.
Ⅳ. 구약 성경 본문과 전수 과정
1. 구약 성경의 언어
구약 성경은 대부분 히브리말로 저술되었다. 이 언어는 셈족의 언어 가운데 하나로서 아랍 말과 아카드 말과 가깝다. 이 성경 각주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 언어의 몇 가지 특징을 알아 두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구약 성경의 또 다른 언어인 아람 말도 그렇다. 히브리말은 다른 셈족 언어와 마찬가지로 자음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왕정시대의 비문들이 입증하고 있듯이) 처음에는 페니키아 문자의 도움을 받아 기록되었고, 6세기부터는 아람 말 알파벳(네모 꼴 글자)과 함께 사용된 언어이다.
- (동사와 명사들과 같은) 대부분의 낱말들은 (일반적으로 세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어근에서 유래한다. (어형에 따라 변하는) 모음과 상당수의 접두사나 접미사는 명사의 성(性)과 수(數), 동사의 활용 등과 같은 문법적인 기능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축복’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어근(로마자로 BRK)는 여러 형태를 지니는데, barek은 ‘축복하다.’, berak은 ‘그가 축복했다’, bereku는 ‘그들이 축복했다.’, yebarek은 ‘그가 축복할 것이다.’, baruk은 ‘축복된 자’(남성). beruka는 ‘축복된 자’(여성), beraka는 ‘축복’을 의미한다. 문맥에 따라 낱말의 뜻이 결정되기에 본문을 읽어 나가면서 각 낱말에 어떤 모음들이 나타나야 하는지를 살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히브리말은 살아 있는 언어로 머무는 동안 (모음이 없는) 축약 문자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언어가 사용되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자 모음들을 표기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 히브리말에서 동사들은 특히 동작의 양상을 나타낸다. 동작이 펼쳐지는 시점을 가리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문맥을 통하여 결정되기에 동사의 형태는 그 동작이 완료되었는지 아니면 아직 완료되지 않았는지를 묘사할 뿐이다. 완료형은 흔히 과거로 번역되나 행위를 총체적으로, 곧 완성된 하나의 현실로 볼 때 미래를 의미할 수도 있다. 미완료형은 일반적으로 미래로 번역되나 행위가 지속 또는 반복되는 경우 현재와 과거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행위가 과거에 속하는지 아니면 미래에 속하는지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은 여전히 문맥뿐이다. 그럼에도 어려운 점은 문맥의 의미 자체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며, 이런 이유로 성경의 다양한 역본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말은 적지 않은 관용어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성전을 말할 때 ‘그분 거룩함의 성전’이라 하고, 길을 떠나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는 일어나 갔다.’고 하며, 하느님 앞에 나서는 일을 가리켜 ‘하느님의 얼굴 앞에 나섰다.’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의 첫 그리스 말 역본들은 그리스 어법에 어울리지 않게 이러한 유형의 표현들과 히브리말 특유의 또 다른 어법들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이 역본들은 ‘성경 그리스 말’이라는 특수 언어를 하나 만들어 냈다. 이 언어는 구약 성경에 사용되었으며 신약 성경의 언어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구조는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지중해 연안 모든 지방에서 사용되었던 그리스 말의 구조와 거의 같다. 그러나 많은 낱말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생긴 관용어는 히브리말과 아람 말에 고유한 어법을 기꺼이 활용하기도 한다.
2. 성경 본문 전수
1) 히브리 말(또는, 아람 말)로 전수된 책들
가) 마소라 본문
기원후 1세기 말 유다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이 거룩한 책들로 인정한 39권의 본문들은 원어인 히브리말과 아람 말(다니엘서 일부와 에즈라기의 몇몇 구절)로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히브리말 문자가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때로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경우를 낳았다. 그리하여 기원후 7세기경 유다교 학자들은 자음으로 된 본문에 각종 점과 줄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음을 기록하고, 문장의 전통적 발성법과 구성 요소를 가리키는 확실한 방법 하나를 찾아냈으며, 이렇게 해서 성경을 읽고 주해하는 전승 하나가 글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 전승은 기원후 천 년대에 유다교 안에서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이며, 이에 대한 증거를 (히브리 말 성경을 아람 말로 번역한 작품인) 타르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사용하던 그리스 말 역본, 곧 칠십인역과 차별화를 원했던 유다교 라삐들은 기원후 두 세기 동안 (테오도시온, 아퀼라, 심마쿠스와 같은) 몇몇 그리스 말 역본들을 탄생시키는데, 이 역본들은 주해 전승의 역사를 더욱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기원후 10세기경 유다교가 공식적으로 확정한 히브리 말 성경 본문을 가리켜 ‘마소라 본문’이라 하는데, 이 시대는 가장 유명한 마소라 학자들(본문의 ‘지킴이들’, 곧 본문 전승을 확정하고 전수하는 자들을 말한다.)이 벤 아세르 집안이 살던 티베리아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때였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마소라 수사본은 기원후 820-850년경 필사된 것으로 모세 오경만을 보여 준다. 마소라 본문 전체를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수사본은 기원후 10세기 초반에 필사된 것으로 ‘Codex Alep'(코덱스 알레프)라 불리나 오늘날 불행히도 훼손되어 전해지고 있다. 현대 히브리 말 성경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공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사본 B19A(L)가 1008년경 옮겨 쓴 마소라 본문을 복제한 것들이나, 대부분의 유다교 공동체들은 다른 여러 수사본들을 기초로 새롭게 구성한 히브리 말 본문을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 원(原) 마소라 본문과 비(非) 마소라 본문들
마소라 학자들의 작업 기초가 되었던 ‘자음 본문’(원 마소라 본문)은 기원후 1세기 말경 유다교에서 이미 다른 본문들보다 우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47년부터 사해 주변의 키르벳 쿰란 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동굴에서 기원후 1세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의 완벽한 성경 각 권을 담고 있는 몇몇 두루마리들과 수많은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성경책들이 원 마소라 본문과 다른 본문 형태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사실 우리는 쿰란과 유다 광야의 수사본 발견 이전에 이미 구약 성경의 본문과 다른 상당수의 비 마소라 본문들을 알고 있었다. 모세 오경과 관련해서는 사마리아인 공동체가 간직해온 본문이나, 가장 오래된 그리스 말 번역인 칠십인역의 원문 역할을 했을 본문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두 본문은 유다 광야의 수사본들에 비해 후기에 작성된 수사본에 담겨 있기는 하나 그래도 기원전 3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다. 마소라 본문을 앞서는 이 본문들은 때로 마소라 본문과 다른 본문을 전해 주기도 하며, 마소라 본문보다 명료하고 이해가 쉬운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기에 주석가들은 마소라 본문이 변질되었다고 판단하는 경우 이를 수정하기 위하여 이 본문들을 자주 참조한다.
다) 본문 변질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수의 변질된 본문들이 원 마소라 본문을 원 히브 말 본문으로 갈라놓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 예를 들어 필경사가 실수로, 한 낱말에서 그 아래 줄에 있는 비슷한 다른 낱말로 건너뜀으로써 그 사이의 본문 전체를 누락할 때가 있다.
- 또한 글자가 불완전하게 쓰였을 경우 그다음 필경사가 이를 잘못 읽고 옮겨 쓰는 때가 있다.
- 또 어떤 필경사가 원문의 여백에 기록되어 있던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낱말들을 그가 옮겨 쓴 본문에, 때로 자리를 잘못 골라 삽입하는 때가 있다. 이 난 외 여백에는 일반적으로 잊힌 용어, 다른 사본, 설명, 주석 등이 적혀 있었다.
- 나아가 몇몇 신심 깊은 필경사들은 교의적으로 위험한 해석으로 의심되는 어떤 표현을 ‘신학적으로 수정하여’, 본래의 본문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렇게 변질된 본문들 가운데 상당수는 차이가 분명한 경우 비 마소라 본문의 도움으로 밝혀지고 수정될 수 있다.
라) 본문 비평
어떤 본문의 형태를 선택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가능한 한 원본에 가까운 히브리말 본문을 얻을 수 있겠는가? 몇몇 비평가들은 문학적 이유든 신학적 이유든 마소라 본문이 마음에 내키지 않을 때마다 이를 ‘수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비평가들은 원칙적으로 마소라 본문으로 만족했으며, 이 본문을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경우에만 이러저러한 오래된 번역본에서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이본(異本)을 찾으려 노력했다. 전자의 방법은 물론 매우 주관적인 방법에 속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본 전체를 주의 깊게 연구하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증언들, 곧 마소라 본문, 쿰란의 다양한 수사본들, 사마리아 오경, 칠십인역(그리고 뒤따른 세 가지 개정본)과 테오도시온 같은 그리스 말 역본들, 타르굼 같은 아람 말 역본들, 시리아 말 역본들, 고대 라틴 말 역본들과 예로니모의 대중 라틴 말 성경, 콥트 말 역본들, 아르메니아 말 역본들 같은 증언들에 대한 ‘계통수’(系統樹)를 작성하는 일이다. 이로써 이 모든 증언들의 바탕이 되는 원문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원문은 기원전 3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다소 긴 시대 차이 때문에 원형과 구별된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원문에서 원형에 이르려면 잘 정립된 본문 비평 원칙을 신중하게 적용하면서 몇몇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다.
쿰란 수사본 대부분은 현재 출간되어 있으나 본문 비평 작업은 수사본 분석에 관한 한 시간이 아직도 더 필요하다. 임의적이며 편파적인 수정에서 오는 위험을 방지하고자 우리 말 성경 번역은(프랑스의 ‘공동 번역 성경’ 책임자들처럼) 가능한 한 마소라 본문을 따르면서 다른 중요한 사본들, 또는 마소라 본문이 제기하는 문제점들을 각주에 명시하기로 한다.
2) 그리스 말로 전수된 책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설립 초기부터 그리스 언어권 유다교로부터 몇 권의 책들을 물려받았으며, 가톨릭교회는 이 책들을 전통적으로 ‘제2경전’이라 불렀다.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이 이 책들을 그들의 거룩한 책 공식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이후 유다교는 기원후 1세기동안 이 책들의 본문 전승 보장을 중지했다는 점에서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통일된 본문 전승을 보여 주지 못하며, 대부분 그 번역 대본으로 사용했을 셈족 말로 된 원문을 잃어버린 상태다. 성경 각 권 ‘입문’에서 본문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Ⅴ. 구약 성경의 의미
구약 성경의 의미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 서로 다른 종교 공동체에 속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또는 불가지론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드러날 수 있다. 구약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단 하나의 유다교적 방법 또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두 종교 안에 고고학적 발굴과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중시하는 더욱 ‘열린’ 독자들이 있는 것처럼 라삐들 또는 교부들의 전통적 해석을 기초로 삼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설명은, 유다교에서는 히브리말 성경,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몇 가지 틀을 제시하려는 것일 뿐이다.
1. 유다교
히브리말 성경을 구성하는 세 부분은(율법, 예언서, 성문서) 유다교 안에서 동등한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이 세 부분 사이의 관계는 율법 곧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유다교 입장에서 율법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영감을 받아 저술된 작품이기는 하나, 이 세 부분이 동일한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예언서와 성문서는 율법과 관련하여 읽고 이해할 때에만 가치를 지닌다. 이 점에서 히브리말 성경의 두 부분, 여호수아기로 시작되는 예언서와 시편으로 열리는 성문서가 각각 모세의 율법에 대한 명백한 언급으로 시작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율법서의 말씀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밤낮으로 되뇌어, 거기에 쓰인 것을 모두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네 길이 번창하고 네가 성공할 것이다”(여호 1,8).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율법)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율법)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모세 오경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라삐들은 ‘성문 율법’ 곧 모세 오경과 대비하여 ‘구전 율법’이라 불렸던 하나의 주해용 전승을 엮어냈다. 라삐 전승에 따르면, 구전 율법도 모세가 알려 준 율법이므로 성문 율법만큼 중요하다. 이 ‘구전 율법’ 또는 (문서의 중개 없이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직접 전해지는) ‘선조들의 전통’은 체계화의 과정을 거친 다음 우선 미쉬나에, 이어서 탈무드와 다양한 주해 모음집에 글로 쓰여 담기게 된다. 구전 율법은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발전되어 나갔다. 하나는 종교적으로 숙고해 볼 내용을 제공할 목적으로 서술체 본문들을 설교식으로 자유롭게 주해하는 방법이었으며(학가다),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정의할 목적으로 법률집들을 주해하는 방법이었다(할라카). 처음에는 유다교 회당에서 읽힌 모세 오경과 예언서 일부가 주해의 대상이었으나, 후에는 다른 성경 본문에까지 확대되었다.
‘성문 율법’과 ‘구전 율법’은 이처럼 유다교의 종교 전통을 이룬다. 이 전통은 조직적인 교의가 아니라 토론식 전통이다. 탈무드는 사실 성경 본문 해설에 관한 라삐들의 격론을 담고 있으며, 상반되는 견해 사이의 논쟁이 해결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본문의 의미가 토론을 통해서도 밝혀지며, 부동의 고정된 의미란 있을 수 없다. 독자들 또한 스승들의 토론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성경 본문은 헬레니즘 시대 필론의 우의적 해석이나 중세기의 대학자 마이모니데스(히브리 말로, 모세 벤 마이몬)의 성경 율법에 대한 합리주의적 해설과 같은 수많은 주석 방법을 불러일으켰다. (11세기) 라쉬의 주석은 유다교를 세상에 알리게 했으며, 모세 오경에 대한 그의 해설은 최초로 인쇄된 히브리말 책이 되었다. 지금도 유다교에서 라쉬는 비할 데 없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세기부터 자유주의 유다인 사회는 성경 본문의 역사 비평 연구에 매진했으며, 종종 라삐들의 견해를 역사 비평에 기초한 주석의 결과와 비교하며 대화를 모색하였다. 유다교의 여러 흐름 속에서 율법은 유다인 정체성의 신적 토대로 남아 있다. 율법은 유다인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한 백성, 바로 이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건네시는 호소를 삶과 행동으로 증언하도록 초대받은 한 백성의 구성원이라는 독자성을 견지하도록 이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에서 구약 성경은 ‘신약’,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로운 계약과 비교하여 ‘구약’, 곧 옛 계약에 관한 성경이다. 그러나 마치 옛 계약과 이를 증언하는 구약 성경이 그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이 두 계약 사이의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기원후 2세기에 마르키온이라는 사람이 드러냈다. 그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고 배척했던 사람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드러났다. 이는 신약 성경 자체에도 치명적일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구약 성경은 예수님과 초대 교회의 유일한 성경이었다. 예수님은 당신 복음의 기초로서 구약 성경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셨다.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본문의 본래 의미를 초월하는 완전한 경지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 희망의 근거였던 약속의 실제 내용을 인간이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구원의 신비를 가리켰다. 이처럼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던 구약 성경을 친히 완성하신 분으로 보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교회는 유다교의 거룩한 책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 필요한 출발점을 찾았다. 교회는 부활 사건에 비추어 예수님에 관한 사건과 행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고자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서로 대비되는 사건들, 성공과 실패, 죄인들과 성인들의 역사와 더불어 예비의 역사를 상기시켜 준 옛 본문들을 모두 다시 읽어 나갔다. 예수님의 메시지, 그분의 중개 사명, 모든 민족들의 구원, 이 모든 것들이 이미 첫 번째 성경 안에 기초되고 예고되고 예시되지 않았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신약 성경의 적지 않은 책들은, 구약 성경에 담긴 긍정적 가르침을 잃지 않고서 메시아 곧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예고를 찾아내고자 구약 성경의 본문들을 새롭게 해석해 나갔다. 또한 신약 성경은 그 자체가 자족하는 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약 성경은 그 완성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구약 성경의 ‘연속’일 때에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교가 구약 성경에 대하여 일정한 자립성을 견지해 왔다는 사실도 지적해야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메시지를 변경시키려고 성경 본문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의 뿌리이기도 한 바로 그 뿌리 위에 접목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복음서의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유다인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자 그리스도교의 첫 신학 체계가 이루어졌다. 아담과 모세, 다윗과 고통 받는 종, 임마누엘과 구름을 타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에 관한 표상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언어를 엮어내도록 이끌었다. 분명 신약 성경의 언어는 부정할 수 없는 다양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언어는 성경의 저자들과 독자들이 살고 있는 문화 세계의 자원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밀도 있는 낱말과 문장으로 짜여 있다. 이렇게 히브리말 성경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바탕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의 서막 정도로 읽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서 환원적인 독서 방법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여러 주제들, 예를 들어 인간의 기원 문제, 사회생활, 나아가 이해하기 힘들고 아득하기만 한 문제로 보이는 하느님 체험 등과 같은 주제들은 신약 성경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독자를 첫 번째 성경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성경의 이 첫 번째 부분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모호할 뿐만 아니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구약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시는 문제, 학살 문제, 또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관습 문제 등이 있다. 물론 이런 문제에 관한 본문들을 배척하거나 애써 정당화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본문들은 우리가 성경 본문과 역사적 문화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 본문들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오늘을 위한 의미를 찾아내려면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성경 각 권의 입문과 각주가 이 점에서 독자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교회는 성경 본문에서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고자 힘쓰고 있다. 그러기에 성경 전체가, 잦은 역사적 비극으로 갈라진 교회들의 공동 보화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듣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교회 일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표지가 아닐까?
오경
입 문
1. 다섯 권의 책
성경의 첫 다섯 권은 하나의 모음집을 이루는데, 그리스도교는 이를 전통적으로 ‘오경’(五經: Pentateuchos)이라 부른다. 이 용어는 그리스 말이기는 하지만, 다섯 개로 된 첫 성경 두루마리들을 넣어 두는 ‘다섯 상자’를 가리키는 히브리 말 표현에서 따온 것이다. 유다교의 전승에서 이 다섯 권의 책은 토라를 구성한다. 토라는 흔히 ‘율법’(律法)으로 번역되지만, 오로지 법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는 ‘가르침’이다. 사실 토라(오경)는 이야기 부분과 법전들이 뒤섞여 있는 하나의 모음집을 이룬다. 각각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이한 기원을 갖고 있는 상이한 법문집들이, 세상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문턱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행업을 상기시키는 커다란 사화집들로 둘러싸여 있다. 어원에 따르면, 성경의 첫 다섯 권의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율법보다는 가르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오경의 다섯 권의 책 이름 역시 그리스 말 번역에서 유래한다. 이 이름들은 각 권의 내용을 애써 요약한다. 창세기는 세상과 히브리 백성의 기원을 서술하고, 탈출기는 이집트 탈출을 보도하며, 레위기는 레위 지파 소속으로 알려진 사제들의 법규들을 담고 있고, 네 번째 책인 민수기는 사막 체류 동안 단행된 이중 인구 조사를 전하며, 끝으로 (그리스 말로 ‘두 번째 율법’을 뜻하는) 신명기는 앞서의 법률 본문들을 반복하는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유다교는 각 권 첫 문장의 낱말들 가운데 하나나 둘을 선택하여 책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직역하면 창세기는 ‘한처음에’, 탈출기는 ‘이름은 이러하다’, 레위기는 ‘(그분께서) 부르셨다’, 민수기는 ‘광야에’, 신명기는 ‘이것은 - 말이다’라는 이름을 갖는다.
오경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열린 다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요셉의 역사로 이어진다. 탈출기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겪는 억압과, 모세의 중개를 통한 해방을 이야기한다. 모세는 여기서 율법과 규정들을 전해 주기 위하여 백성을 하느님의 산으로 인도하는 인물로 소개되며, 이 율법과 규정들이 탈출기 일부와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수기의 첫 열 개의 장들을 채우고 있다. 탈출기의 나머지 장들은, 광야에서 죽어야 하는 이집트 탈출 세대에 대한 단죄로 귀착되는 이스라엘의 광야 체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경의 마지막 권인 신명기는 계약과 하느님의 법을 회상시키는 모세의 유언을 내용으로 한다. 신명기와 함께 오경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생을 마감하는 모세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이렇게 다섯 권으로 나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경은 통합된 하나의 모음집으로 제시된다.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야곱 집안이 이집트로 내려간다는 보도는 탈출기가 전하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체류 이야기를 준비하며, 탈출기는 또한 창세 46장의 족보를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레위기는 탈출 20장에서 시작하여 민수기에서 그 완성을 보게 될 시나이 율법 계시를 이어 주고 있으며, 민수 11-25장의 광야 체류 이야기들은 율법 선포로(탈출 19-민수 10) 중단된 탈출 16-18장의 이야기 흐름을 되풀이한다. 신명기는 민수기 마지막 장에서 백성이 도착한 모압 평야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오경은 중세에 와서야 지금의 장(章)으로 나누어졌는데, 규칙적인 이러한 구분은 오경을 읽고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다교 전례는 오경을 읽을 때 다양한 범위 설정과 함께 단락 구분을 달리하는 독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구분 역시 유다교 회당의 경신례를 위해 성경 본문을 독서 단락으로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문을 논리적으로 구분한다면 그 분량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요셉 이야기는 동일한 하나의 단락을 이루는데 그 내용은 (창세 37장에서 50장까지 이르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반면에 한 개의 장도 채우지 못하는 십계명 본문(탈출 20,1-17과 신명 5,1-21) 역시 독립된 온전한 하나의 단락을 형성한다. 의미상 단락이나 단위의 다양성은, 오경에서 오늘날의 법전이나 신학적 논제와 관련된 엄격한 구조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러 준다. 끝으로 오경이 비록 연대순을 원칙으로 정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역사 안내서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2. 율법과 역사
오경은 이야기만큼이나 많은 법률 본문들을 담고 있다. 법률 본문들이 오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탈출기의 두 번째 부분과(탈출 19-40) 레위기 전체와 민수기의 시작 부분이 기본적으로 법률 규정과 예식 규정들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경의 많은 이야기들은 율법을 돋보이게 하거나 주해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금송아지 일화는(탈출 32-34) 탈출 20,23에 담긴 계명(“너희는 내 곁에 아무것도 만들어 두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자신들을 위하여 은으로 신들을 만들어서도, 금으로 신들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을 어긴 이야기로 이해된다. 계명을 어긴 이야기를 한 뒤에 이 근본 계명은 탈출 34,17에서 다시 확인된다. 또 다른 이야기들은 제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코라와 다탄과 아비람의 반역은(민수 16-17) 사제 임무를 수행하도록 뽑은 아론 집안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또한 어떤 율법은 이야기 속에 통합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다른 법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할례에 관한 규정이(창세 17,9-14) 그렇다. 이와는 달리 또 다른 율법들은 서사체 전승들을 돌이켜 보게 하면서 설명을 끌어내기도 하는데, 신명 24,8-9의 나병에 대한 규정이 민수 12장에 보도된 미르얌에게 내린 하느님의 벌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다교 전승은 토라의 법적인 면에 민감한 반면, 그리스도교 전승은 신약 성경에서 절정을 이루는 ‘구원사’의 시작을 살피려는 의도에서 이야기체 요소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분명 문학적인 분석으로 상이한 ‘유형들’을 식별해 내고, 고대 근동 문헌들의 도움으로 이 유형들의 특징을 규정지을 수 있게 되었다(기원 설화, 형법, 족보 등). 그렇지만 언제나 오경 전체의 관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경에 그토록 상이한 여러 유형의 본문들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경에는 단순히 율법과 이야기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의 ‘가르침’이 있을 뿐이다. 역사는 율법을 잘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율법은 역사의 의미를 잘 이해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3. 오경의 통일성
오경의 통일성은 여러 분야의 다양성 속에서 드러난다. 법전의 다양성, 문학 유형의 다양성, 지리적 공간의 다양성은 물론 신학적 견해의 다양성도 간과할 수 없다. 예컨대 요셉 이야기는 이집트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보이는 반면, 이집트 탈출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겪은 종살이를 강조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오경 전체의 일관성이 문제로 제기된다. 이 일관성은 우선, 토라의 각 권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과 그의 하느님 야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선사(先史)를, 탈출기는 이스라엘의 선택과 계약을, 레위기는 경신례 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응답을, 민수기는 백성과 그 하느님 사이의 어려운 관계를, 그리고 신명기는 계약의 재확인을 전한다. 오경의 통일성을 보강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하느님의 약속들이다. 이 약속들이 창세기에서는 성조들에게 건네지며, 이어서 오경의 다른 모든 책에서 다시 등장한다. 결국 오경은 죽음을 눈앞에 둔 모세에게 땅의 약속을 되풀이하면서 끝난다(신명 34). 이렇게 오경은 완료된 역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책이다.
오경의 통일성은 또한 모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창세기를 예외로 한 오경의 나머지 부분들은 이 위대한 인물이 지배하고 있다. 실상 모세는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인물로, 정치적 해방자이면서 동시에 예언자, 판관, 입법자로 등장한다. 그는 어느 관점에서 보나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의 탁월한 중개자이다. 시나이 산 기슭에 모인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직접 전해 주신 십계명만 빼고 나면, 모든 율법들은 하느님의 계시 차원에서 모세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이처럼 모세의 가르침이 유다교에 그 통일성과 일관성을 부여한다.
4. 오경의 구성
모세를 통한 율법 선포를 근거로 유다교 전승은 모세를 오경 전체의 저자로 보았으며, 그리스도교 전승도 이를 따랐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오경의 본문들을 인용하실 경우 모세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러나 유다교 라삐들은 모세가 참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까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는지 자문해 왔다. 이와 같은 의구심이 있었지만, 계몽주의시대 이전까지 모세를 오경의 저자로 보는 데는 별 이의 제기가 없었다. 오경의 대다수 본문들이 모세의 죽음 이후 글로 옮겨졌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은 18세기에 접어들어 철학자 스피노자와 주석가 리샤르 시몽을 통해 확인되었다. 스피노자는 또한 오경이 문학적 논리에서도 단절을 보인다는 사실과 사용된 문체가 다양하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저자를 단 한 사람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가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상당한 법조문들이 서로 다른 문맥 안에서 반복된다. 예컨대 십계명은 두 번(탈출 20; 신명 5), 축제 절기는 다섯 번 나온다(탈출 23; 34; 레위 23; 민수 28-29; 신명 16).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여서, 예컨대 창조(창세 1,1-2,3; 2,4-23), 사라와 하가르 사이의 갈등(창세 16; 21), 아브라함과 계약 체결(창세 15; 17), 그리고 모세의 소명에(탈출 3-4와 6,2 이하) 관한 이야기가 각각 이중으로 전해진다. 또한 성조들이 자기 아내를 누이로 내세우는 이야기가 세 번 발견된다(창세 12; 20; 26). 그러나 단순한 반복은 아니다. 각각의 병행 본문들이 독자적인 표지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들 안에서는 여러 차례 긴장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컨대 창세 7,15에 따르면 노아는 방주에 짐승을 종류에 따라 한 쌍씩 들여보내지만, 창세 7,2에서는 일곱 쌍씩이라고 한다. 또한 창세 7,17은 홍수 기간이 사십 일 동안이었다고 명시하지만 7,24에서는 백오십 일 동안이라고 말한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 앞에서 파라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몇몇 본문에 따르면(탈출 7,3과 각주) 하느님께서 몸소 이집트 임금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시지만, 다른 본문들은 파라오가 완전한 자유 의지로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탈출 8,11). 갈대 바다의 기적 역시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탈출 14,21ㄴ에 따르면 바다가 거센 샛바람으로 말미암아 뒤로 밀려나지만, 14, 21ㄷ-22에서는 바닷물이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진다.
오경의 문학적 다양성은 문체와 어휘의 특수성 차원에서도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산이 어느 때는 시나이로, 또 어느 때는 호렙으로 지칭되며, 모세의 장인 역시 어느 때는 이트로로, 또 어느 때는 호밥이나 르우엘로 불린다. 신명기의 열정적이며 반복적인 독특한 문체는 레위기 첫 부분의 제의(祭儀) 규정이 보여 주는 전문적인 표현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어떤 이야기들은 (사건 당시 등장인물의 나이와 같은) 연대적인 질서에 큰 관심을 보이는 반면, 어떤 이야기들은 틀에 박힌 문체가 아니라 더욱 생동감 있는 문체로 쓰여 있다. 또 어떤 이야기들은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반면(창세 12,10-20의 이집트로 내려간 아브람), 어떤 이야기들은 회화적이면서도 반복적이다(창세 24장의 이사악과 레베카의 혼인).
독자들의 눈에 쉽게 띄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해 서로 다른 이름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본문은 고유 명사인 야훼(주님)를 사용하는가 하면 어떤 본문들은 보통 명사인 엘로힘(하느님)을 쓴다. 예를 들어 하가르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는 야훼를, 두 번째 이야기는 엘로힘을 언급한다. 또한 요셉에 관한 이야기에는 창세 39장의 몇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쓰이며 이스라엘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느님이 서로 다르게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오경의 구성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이 나온다. 프랑스에서 루이 15세의 주치의였던 장 아스트뤽은 1753년에, 오경은 두 가지 기록이(하나는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기록, 다른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쓰는 기록) 합쳐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별이 이른바 ‘문헌 가설’의 단초가 되었으며, 이 이론은 19세기말에 독일의 주석가 율리우스 벨하우젠을 통하여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 문헌 가설
이 이론은, 문체가 서로 다르고, 또 동일한 이야기나 율법이 서로 다른 여러 원전들이 합쳐진 결과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오경의 배후에는 본디 독립되어 있던 네 가지 문헌들이 있었을 것이다. 편집자들은 오경 구성을 목적으로 이 문헌들의 상당 부분들을 모았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문헌들이 성경의 첫 다섯 권을 넘어 신명기를 뒤따르는 여호수아기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성경의 첫 부분은 이렇게 ‘육경’을 이루는 여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여호수아기가 말하는 땅의 정복과 점유를, 창세기에서부터 이루어진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토라의 논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야기들과 법들을 규합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원칙이 오경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이 문헌들 가운데 세 가지가 오경 전체의 서사체 줄거리들을 채우고, 네 번째 문헌은 신명기의 초기 본문에 국한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문헌은 ‘야훼계’(로마자 ‘J'로 표기)라 불리는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지칭하기 위해 기원 설화로부터 시작해서 오로지 야훼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훼계 문헌은 인간의 창조부터(창세 2,4ㄴ-25) 모세의 죽음(신명 34), 나아가 땅의 정복에(여호 19)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문헌은 왕정 시대 초기, 좀 더 정확하게는 솔로몬 시대(기원전 94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창세 12,1-3에 전해지는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가 흔히 이 문헌의 핵심 본문으로 여겨진다. 야훼계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이 본문에서 이루어진 약속들이 다윗과 그의 후계자가 주도한 왕정 제도의 설정과 함께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상기시키려 노력한다. 학자들은, 야훼계 저자가 유다 지파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를 유다 출신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저자는 현대적 의미의 저자가 아니라, 왕정 제도가 설정되기 이전부터 이러저러한 성소에서 또는 여러 지파에서 이야기되던 수많은 전승들을 모아 엮은 전승 수집가로 여겨진다.
‘엘로힘계’ 문헌(첫 글자를 따 ‘E’로 표기)은 이 문헌이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엘로힘이라는 용어에서 그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 문헌은 ‘예호비스트’(JE)라 불리는 편집자를 통하여 야훼계 문헌과 일찌감치 결합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특히 창세 20-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의 경우 엘로힘계 문헌은 단편으로만 남게 되었다. 탈출기부터는 엘로힘계 문헌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많으며 야훼계 문헌으로부터 엘로힘계 문헌을 떼어 내는 작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문헌 가설에 따르면 엘로힘계 문헌들은 자주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이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 자세를 강조한다. 또한 엘로힘계 문헌은 북 왕국 예언자들과 가깝다는 사실에서 이 문헌을 (북) 이스라엘에서 나온 문헌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헌은 기원전 722년 북 왕국이 아시리아 제국에 패망한 직후 유다로 유입되고 결국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신명기계’라 불리는 문헌(D)은, 기원전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을,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로 격상시킨 중앙 집권 정책을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신명기의 최초 본문을 가리킨다. 이 문헌은 율법의 여러 규정들을 하느님 사랑이라는 중심 계명에 묶어 주고 계약과 선택을 주제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문헌들 가운데 최후의 문헌은 사제 세계의 관심사들로 채워져 있어, 사제라는 낱말의 첫 글자를 따 ‘P'로 줄여 쓴다. 이 문헌은 창세 1장의 천지 창조의 첫 번째 이야기로 시작해서 모세의 죽음 또는 약속의 땅 진입으로 마감된다. 이 문헌의 의도는 사제 제도와, 할례나(창세 17) 파스카 축제와(탈출 12) 같은 제의 제도의 정당화에 있다. 사제계 문헌은 바빌론 유배 시대나 그 이후 주님의 백성이 각종 제도를 갖추지 못하고 정치적 자립이 결여되어 있던 시기에 기초된 것이다. 오경이 마지막으로 형성될 때 이 문헌은 기초 문헌으로 쓰였으며, 다른 문헌들은 보충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설의 틀 안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서사체로 되어 있는 야훼계와 엘로힘계 문헌들을 일반적으로 ‘오래된’ 문헌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신명기계와 사제계 문헌들은 흔히 순수 율법주의적인 문헌으로 여겨 왔다. 문헌 가설을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오늘날에도 성경 연구를 위한 저서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이 가설은 1975년 이후 문제시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야훼계와 엘로힘계 문헌의 기록 연대가 문제로 제기된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이미 서사체 줄거리가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을 주장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사실 야훼계와 엘로힘계 문헌으로 여기는 상당수 본문들이 신명기의 문체와 신학과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을 보인다. 예컨대 탈출 19,5의 본문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는 신명기에서(신명 7,6과 28,9) 그 병행 문구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야훼계와 엘로힘계 문헌이 뒤섞여 있는) 탈출 3장의 모세의 소명 이야기는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의 소명 이야기와 공통점을 드러내고 있어 이 본문을 기원전 6세기 이전에 쓰였다고 보기가 힘들다. 이와 같은 견해들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야훼계 저자를 신명기계 저자와 가까운 인물로, 나아가 야훼계 저자를 신명기계의 한 구성원으로 다루고자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문헌 가설을 무조건 포기하기를 권장한다. 이들은 오경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서사체 전승들과 법률 전승들의 자립성을 역설한다. 이 전승들은 먼저 독립적인 방법으로, 오경 전승 전체와 아무런 관련 없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사실 몇몇 문학 단위들은, 앞뒤 연결 없이, 독립된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특히 기원 설화집에서(창세 2-8) 사제계 문헌이 아닌 오래된 형태의 이야기들이나, 이집트 탈출에 관한 역사의 경우가(탈출 1-15) 그렇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전들 역시 서사체 전승들과 무관하게 생겨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경의 규모가 큰 서로 다른 단위들 사이의 문학적 연관성은 후기의 편집 결과일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오경 연구에 관한 어떠한 새로운 가설도 절대적인 이론으로 강요될 수 없다. 그러기에 상당수의 저자들은 문헌 가설을 계속해서 인용하지만, 이 이론이 제기하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은 어느 정도의 신중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수긍해야 한다. 한편 오경 연구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점에서 부분적인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토라에는 사제계 문헌들이 있다는 점과, 유배 시대와 페르시아 제국 시대 초기(기원전 6-5세기)가 오경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오경 구성에 대한 분석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2) 바빌론 유배 이후 오경의 탄생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다 주민 일부의 바빌론 유배(기원전 597/587)는 백성의 정체성에 관한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모든 기둥들이 뿌리째 흔들렸기 때문이다. 임금은 유배 상태에 있었고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지던 땅은 외국의 지배 아래에 놓여졌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분은 어떤 방법으로 당신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지를 말할 수 있는 다른 길들을 모색해야 했다. 그리하여 (이야기와 법으로 이루어진) 기초 전승들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 대처해 나갔다. 이렇게 오경을 만들어 이스라엘은 들고 다니는 일종의 ‘휴대 조국’(携帶祖國)을 창조해 낸다. 이 조국은 백성들이 물리적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유배 또는 해외 생활 속에서도 그들의 신앙을 확립할 수 있도록 이끄는 요인이 된다.
페르시아 제국 시대는 토라의 편집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 페르시아 정권은 자기의 제국에 편입된 백성들에게 상당한 종교적 자치권을 부여했으며, 나아가 법적이며 종교적인 전승들을 법전으로 엮는 데 적대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성경 전승은 이러한 호의적인 상황을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사제이며 율법 학자였던 에즈라는 페르시아 임금의 사자로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백성에게 율법을 제시하는데, 이 율법은 페르시아 임금도 존중을 다짐한 법이다. 에즈 7장과 느헤 8장은 페르시아 시대에 이루어진 오경의 초본 출판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오경의 서로 다른 본문들은 제2 예루살렘 성전 시절 경신례의 체계화를 주제로 한 토론을 반영하기도 한다.
토라가 유다 백성의 다양한 감수성들을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문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요 지식 계층에서 유래한 본문들을 삽입시키고 공존시킬 필요가 있었다. 매우 영향력이 있던 사제 계층 이외에 신명기의 신학적 견해와 가까웠던 평신도 계층이 있었다. 이러한 공존을 잘 설명하는 좋은 예는 십계명이 이중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탈출 20장에서 안식일 법은 천지 창조 때 하느님께서 이렛날 쉬셨다는 데서 그 근거를 찾으며, 이는 오경의 첫 번째 사제계 문헌 말미에서 언급된다(창세 2,1-3). 이와는 달리 신명 5장에서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종살이에서 그 동기를 찾으며, 이는 전형적인 신명기계 문헌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처럼 사제계 세계에도 신명기계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본문들도 있다. 이 이야기는 열려 있는 보편적 유다교를 지지하는 본문으로서 지혜 세계의 이상과 매우 가깝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여러 권의 책들이 합쳐져 한 권의 책, 곧 토라 또는 오경에 이르렀으며, 이 책은 미래에 성취될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오경은 이렇게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는 책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책 안에 하느님과 함께한 체험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3) 사제계 본문(P)
가장 쉽게 밝혀낼 수 있는 본문들은 사제 세계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사제계 본문들의 문체 가운데 가장 독특한 요소들은 표현의 간결성, 수적인 정확성에 대한 관심, 족보와 목록 제시, 그리고 경신례와 전례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선호 등이다. 성소와(탈출 25-31; 35-40) 제물과(레위 1-7)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구성된 사제단에(레위 8-10) 대한 사제계 문헌의 관심은, 유다교의 공간적 분산을 전제로 하면서도 페르시아 시대에 사제단과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유다 공동체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사제계 문헌은, 시나이에서의 경신례 계시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제시되는 제의와 축일들을 자주 언급한다. 안식일은 천지 창조 때에 언급되고(창세 2,1-3) 음식 규정에 관한 원리는 노아의 홍수 이후 주어지며(창세 9,3-4), 할례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맺으신 계약의 표징이 되고(창세 17), 파스카 축제 거행은 이집트 탈출 이야기 속에 자리하고 있다(탈출 12-13). 이처럼 이 제의들은 어떤 일정한 땅에 매여 있는 것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이 제의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다교의 설립 요소로 남아 있다.
사제계 본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온 인류의 하느님이시며 온 누리의 주인이심을 강조한다. 인간, 곧 남자와 여자는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자신들이 다스려야 하는 창조물을 선물로 부여받는다. 하느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온 인류와 계약을 맺으시고(창세 9),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며 그와도 계약을 체결하신다(창세 17).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에서 레위인들, 그들 가운데서도 아론과 그의 집안을 뽑아 모든 백성의 이름으로 경신례를 올리게 하신다.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르시는 성소에서 모세와 사제 아론의 중개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진다(탈출 40과 레위 9 참조). 사제계 본문들은 단숨에 쓰이지 않았다. 페르시아 시대의 사제계 저자들은 왕정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더 오래된 제의 규정들을 통합시키면서 문헌을 최후 편집했다. 사제계 문헌은 아마도 여러 세대에 걸쳐 기록되어 왔을 것이다. 예컨대, 민수 9장의 파스카 축제에 관한 규정들은 탈출 12-13장의 사제계 본문의 보충 부분에 해당하는데, 이를 탈출에 삽입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민수 9장이 기초되던 시기에 이미 후대의 저자들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었던 사제계 초본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사제계 초본의 끝이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이 끝을 신명 34장이나 여호 19장에서 찾았다. 이 문제에 관한 학술 토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사제계 최초 문헌의 규모가 더 작았을 것이라는 데에는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탈출 40장의 성막 건조나 레위 9장의 경신례 개시로 마감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토론에서는 언제나 사제계 본문들이 복합적이고 다양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4) 신명기계 본문(D)
전통적으로 신명기계 문헌은 신명기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 국한되어 있다고 여겼으나, 그 문체만큼은 신명기를 앞서는 책들, 특히 탈출기와 민수기 일부에서도 발견된다. 본디 이어져 있던 두 구절 탈출 2,23ㄱ과 4,19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모세의 소명 이야기가 그렇다. 탈출 3장에서 모세는 신명 18,15가 말하는 예언자들 가운데 최초의 예언자로 소개된다. 이 이야기에서 신명기와 신명기계 역사서(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속하는 어휘를 만날 수 있다. 예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정형화된 표현, “조상들의 하느님”이라는 표현,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의 목록 등이다. 이집트 재앙 이야기(탈출 7-11) 가운데 사제계 문헌에 속하지 않는 본문들 역시 신명기계 신학과 문체로(신명 28 참조) 채색되어 있으며, 시나이에서의 계약 체결 이야기나(탈출 19-24) 신명 9-10장에서 다시 발견되는 금송아지 일화(탈출 32-34)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본문들과 신명기, 나아가 신명기계 역사서 사이의 관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아무튼 탈출기와 민수기의 상당 본문들과 신명기계 저자들의 세계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성립된다.
신명기계 신학은, 주님(야훼)과 이스라엘의 계약 형식으로 짜여 있으며 그 중심에 법전이(신명 12-26) 자리하고 있는 신명기에서 출발점을 찾는다(신명기 ‘입문’ 참조). 이 법전은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내용으로 제시된다. 법전에 담겨 있는 법조문들은, 신명기가 “오늘”을 위해 현실화시켜야 한다고 그토록 강조하는(신명 1,10과 각주) 이집트 탈출 사건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그 안에서 동기를 찾는다(신명 4,31; 16,3 등). 한편, 성소의 유일성에 관한 언급은(신명 12) 이 법전을 기원전 622년 요시야 임금이 단행한 정치적 경신례 개혁과 연계시켜 준다(2열왕 22-23 참조). 비록 개혁의 토대가 되었던 “율법서”(2열왕 22,8.11)가 현재 신명기의 간결한 초본이었을 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유일성에 관한 신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경신례를 위한 유일한 장소를 강조하는 가운데 그 이름을 직접 거명해 본 적이 없는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를 경계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을 받들어 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신명 6,4-5). 이러한 배타적 섬김은 선민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느님의 선택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백성들과 그 종교 의식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야 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신명 7 참조).
신명기에서 율법의 보유자이며(신명 33,8-11) 모세 곁에 서 있는 설교자로(신명 27,9) 소개되는 레위인들에 대한 관심 표명은(신명 18) 흔히 신명기가 레위인들의 가르침의 결과일 수 있다는 근거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적지 않은 본문에서 레위인들은 경신례의 예루살렘 중앙 집중화 이후 실업자들로 등장하고 있어 이들을 신명기계 문헌의 저자들로 보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저자들은 오히려 왕실의 영향력 있는 가문들과 관리들 사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신명기가 예루살렘 궁정에 잘 알려져 있던 아시리아 문헌의 용어와 문체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이후 신명기는 이러한 재앙에 비추어 다시 읽히고 재해석되었으며, 이 재앙은 오경의 신명기계 본문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 본문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야말로 유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된다. 다시 말해서 유배는 하느님의 징벌로 인식된다. 신명기를 읽는 각각의 모든 세대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이(신명 5,3) 구원의 길을 열어 준다. 율법과 규정과 계명 준수가 바로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5) 법전
신명기 한가운데에서 법전 하나가 발견되며(신명 12-26), 이 법전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은 본디 요시야의 개혁과 관련이 있었다. 동시에 이 신명기계 법전은 탈출 21-23장에 기록되어 있는 “계약의 책”(탈출기 ‘입문’ 참조)을 현실화하기 위한 법전, 나아가 이 법전을 대체하기 위한 법전으로 인식되었다. 이 계약 법전은 아마도 왕정 시대(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오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법전이 될 것이다. 이 법전은 신명기계 법전과는 달리 경신례 장소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계약 법전이 오래된 것이지만 탈출기 19장과 24장 사이에 삽입된 것은, 신명 12-26장의 새로운 법전이 있었음에도 이 오래된 법전을 보존하고자 했던 후대 편집자들의 작업 결과로 보인다. 사제계 저자들 역시 제물 목록과(레위 1-7) 정결례와(레위 11-15) 같은 제의들과 규정들을 담고 있는 모음집들을 병합시켰다(레위 ‘입문’ 참조). 레위기 제2부는 ‘성결법’이라 불리는 법전을 담고 있다(레위 17-26). 이 법전은 상당한 윤리 질서를 내포하기도 하는 공동체의 성성(聖性)을 강조한다. 이 성결법의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늘날 이 법전은 사제계 관심사들과 신명기계관심사들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경의 최후 편집자들은 이 상이한 법전들이 공존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연이은 이 법전들을 보존하면서 편집자들은, 율법을 정지된 법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석되고 현실화할 수 있는 법으로 제시하고자 했으며, 이는 율법을 신장시켜 나간 라삐들의 토론과 갓 태어난 그리스도교의 문서들, 곧 신약 성경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6) 오래된 서사체 전승
사제계와 신명기계 편집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더 오래된 전승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전승들은 그 기원에서나 신학에서 매우 다양했으며, 여러 성소에서 독립적으로 전해 내려왔고 부분적으로는 구전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아브라함 설화집에서는 헤브론이 중요한 장소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이 설화집이 마므레-헤브론 성소에서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야곱 성조의 설화집은 이 설화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들이 가리키고 있듯이 북 왕국과 관련이 있다. 이 설화집은 분명히 가장 오래된 성조사이다. 이집트 탈출 전승은 야곱의 이야기와 함께 오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전승은 오경의 중추에 해당하는 요소로서 오경 전체가 이 전승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요약하는 성경 본문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은 늘 상기된다. 그러나 언제 이 전승이 글로 처음 옮겨졌는지 단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민수기에서 읽을 수 있는 이스라엘의 광야 체류 전승은 유배 시대 이전 호세아서와 예레미야서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이 두 예언서에서는 좀 더 긍정적으로 제시되는 반면 민수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직도 확실하지 않은 점들이 많기는 하나, 오경에 담긴 대다수의 기초 전승들은 왕정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특히 페르시아 시대에 와서 이 전승들은 새롭게 태어난 유다교에 신학적이며 제의적인 기초를 제공하기 위하여 정리되고 공유화되기 시작한다.
5. 오경의 의의
오경은 우리를 한 백성 또는 종교적인 한 공동체 앞에 서게 하며, 하느님께서 이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하셨는지, 이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체결하신 계약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오경의 백성은 거룩한 백성(특히 레위 17-26 참조), 곧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기에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된 백성이다. 어떤 제도도, 심지어 고대 근동의 종교 생활에서 그토록 중시되었던 왕정 제도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지고의 권위는 하느님의 말씀, 모세가 중개하고 이 율법서가 담고 있는 말씀에 속했다. 이 율법은 단순한 법적 규범이나 제의나 규정으로 축약될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 탄생되어 그 역사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토라는, 유다교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헤쳐 나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이끌어 준 역동적인 책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이 책들을 물려받았다. 분명 그리스도교는, 신약 성경이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의 다양한 증언에 따라 메시아이시며 주님으로 고백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오신 다음에 이 책들을 새롭게 읽어 나갈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마태 5,17). 이렇게 해서 오경은 유다인들을 위해서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나 현실적인 책으로 머문다. 이들은 모두 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에서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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