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99A0EC405BF81EF10C)
두고 온 소반
- 이홍섭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
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
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
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
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
ㅡ <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 / 시집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세계사, 2005)
* 이홍섭 : 1965년 강릉 출생.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1990년 <현대시세계>로 시 등단,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등단. 시집『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검은 돌을 삼키다』와 산문집 『곱게 싼 인연』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94A3C5BF81DF709)
기막힌 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 시를 맺었다면 '창밖엔 산자락을 여미던 바람 소리가 깊다'라거나 혹은 그저 '나는 나를 두고 왔을 뿐이다'라고 마지막 행에다 먹칠을 했을 것이다. 창피하지만 나는 하수다. 그래서 또한 나는 이 시의 웅숭깊은 끝자락을 감히 헤아리지도 못하겠다. 다만 늦은 오후 식당 한편에 혼자 앉아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백반을 먹었을 사람들을 떠올려 볼 따름이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가을 햇살이 다사롭다. 두고 간다는 마음도 없이 귀뚜라미 소리가 맑다.
채상우 시인
![](https://t1.daumcdn.net/cfile/cafe/99686E395BF81E1832)
언젠가 넌지시, 이홍섭 시인이 내게 물었다. “형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뭔 줄 알아?” “뭔 소리?” “형이나 나나 되다 만 중놈인 이유가 뭔 줄 알아?” “?” “연민이야! 허허허.” 족집게다. 어머니를 두고 가지 못해서 아내와 함께했고, 아내를 두고 가지 못해서 딸아이와 함께했고, 딸아이를 두고 가지 못해서 여기 산다. 너무 대놓고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부여잡으면 그 지푸라기를 따라 온 천지가 덩굴째 따라온다. 온 천지가 그를 건진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그럴싸할지도 모르지만. 저 개다리소반. 그것이 그가 놓지 못하는 지푸라기다. 그것이 그에게는 천지다. 늙고 병든 자들의 손때가, 얼굴, 얼이 든 굴의 때가 묻은 개다리소반 앞에 반딧불처럼 앉아 있는 그가 만져진다. 차라리 그가 그 낡은 소반을 가지고 왔더라면, 이 시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그는 거기 두고 왔다. 그 두고 온 짐이 환약처럼 가슴에 들어앉아서 혈관을 타고 풀리며 그를 움직이고 있다.
장철문 시인ㆍ순천대 교수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8A7415BF81E3510)
짧은 발이 달린 작은 상. 소반은 아주 낮은 데 앉는다. 아무렇게나 만든 막치 소반일수록 성품이 고아하다. 세간 살림이 없이 텅 빈 방에 소반처럼 낮게 앉아 영혼의 새벽을 맞는 사람이 여기 있다. 그가 부럽다. 마음의 병에는 명의도 묘약도 없다. 마음속 어혈을 푸는 방법은 쓸데없는 생각을 쉬게 하는 일. 곡기를 끊는 일. 우리는 생각이 너무 많다. 발 딛고 설, 빈 곳이 없다.
문태준 시인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880365BF81ED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