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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공부방 스크랩 따뜻한 허무주의자의 노래
잎새 추천 0 조회 51 12.02.17 04: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따뜻한 허무주의자의 노래

 

황정산 문학평론가, 시인

 

 

젊은이들의 희망을 빼앗아 사회를 타락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일할 의욕을 떨어뜨려 세상을 암울하게 만든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허무주의에 덧씌워진 부정적 인식이다. 하지만 세상을 타락시키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허무주의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한 믿음과 모든 욕망을 모두가 맘껏 채울 수 있는 멋진 신세계가 온다고 선전하는 성장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세상을 어둡게 하고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더 많은 행복이 있다는 믿음이 그 행복을 주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허무주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의 허무함을 말하며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욕망의 폭력적 힘과 그것의 헛된 희망을 부정하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이렇게 생각할 때 나호열의 시는 바로 이 허무주의의 한 가운데 서 있다.

 

 

 

한 사내 산을 허물고 있었다

광맥을 찾는다는 것은 광부狂夫의 일이라 했다

하염없이, 부질없이, 그러나 끊임없이

광맥을 찾으면 떨어진 단추 하나 꿰맬

강철 바늘을 만들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

 

- 「장사의 꿈」 전문

 

 

 

시인이 왜 시를 쓰는지를 설명하는 시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하염없이, 부질없이” 하는 짓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산을 허물어야 할 정도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광맥을 찾는 광부의 일과 닮아 있기도 하지만 또한 헛된 것에 자신을 모두 바쳐야 하는 미친 사람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작업이 광맥을 찾아 돈을 버는 일이 된다면 그는 일개 광부이지만 그 작업이 “단추 하나 꿰맬 / 강철 바늘을 만”드는 것이라면 그는 시인이고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시의 제목이 광부의 꿈이 아니라 “장사의 꿈”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힘이 타자들의 욕망으로 부풀려진 돈과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내적 욕구를 채우는 살이 있는 힘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앞서 말한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시도 눈여겨 볼만하다.

 

잘 삭아가고 있는 바다의 마음과

곁 사람의 그림자로 입 안에 녹아드는 젓갈의 맛

 

부사副詞 로 족하다 !

 

- 「쉰 하고 여덟」 전문

 

짧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58세라는 시인 자신의 나이를 젓갈의 맛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와 “삭아가고” 있다는 말로 잘 표현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삭혀서 받아들여 포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이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부사”이다. 부사는 용언을 수식하는 말이다. 용언은 주어의 상태나 동작을 표현하는 말이다. 58세가 되면 주어도 목적어도 용언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주체의 정체성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도 그리고 그것을 위해 힘쓰는 행위들도 이제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은 깨달은 것이다. 단지 필요한 것은 자신이 하는 행위들을 수식하는 부사만이다. 부사는 누가, 왜, 무엇을 하고는 관계가 없다. 목적도 결과도 이유도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어떻게 내가 살고 있느냐만 중요한 것이다. 아니 그것도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단지 그 ‘어떻게’만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이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삶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믿으며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또 그렇게 배우며 살아 왔다. 그런데 시인은 58세가 되어서 그러한 삶의 의미 없음을 깨닫고 있다. 지독한 허무주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은 그 허무 속에서 ‘부사’ 하나만을 붙잡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그 부사가 진정한 자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시인도 시도 모두 이 부사일 것이다. 욕망의 주체일 수도 없고 세상의 목적일 수도 없으나 그 어떤 수단도 아니기에 그것은 단지 부사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시는 허무주의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시는 이러한 허무주의를 문명비판도 연결시키고 있다.

 

늘 배고픈 저 아가리

복음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관음은 귀로 들을 수 없어

허공을 밟고 오시는 어떤 사람

오늘도 수신불량이다.

 

- 「sky life」 전문

 

 

 

위성방송을 보기 위해 접시 안테나를 다는 것은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그것은 무한정 확대되는 우리들의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그것을 “늘 배고픈 아가리”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복음도 관음도 모두 “수신불량”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모두 이와 같이 헛된 욕망과 그것이 만들어낸 문명의 토대 위에 위태롭게 접시 안테나처럼 걸려 있다는 것이 이 시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호열 시인의 허무주의 시니컬하거나 파괴적이거나 세상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찬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의 허무주의는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이 허무하다는 인식이 거꾸로 세상을 따뜻하게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점을 다음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병

일 년 열 두 달 눈 내리는 나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되돌아오는 길이 지워져버려

그 분의 얼굴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이곳이 지옥이었다가 극락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그 분은 경극의 주인공이십니다

입 벌리세요

호랑이는 굶어서 죽지 잡혀 먹히지는 않겠는지요

틀니를 뽑아 물에 헹굴 때 그 분은 순하디 순한 얼굴로

웃고 계십니다 아니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나의 교회와 나의 법당

어머니를 벗어날 때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리석은 양

길 잃은 양이 되어 눈물 납니다

 

- 「틀니」 부분

 

시인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틀니를 뽑아 물에 헹구면서 생각하고 있다. 시인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얼굴에서 세상을 본다. 치매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병”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되돌아오는 길이 지워져버”린 병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가진 욕망이 극대화된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와 그 주체의 의식은 사라지고 그 주체가 가진 욕망만이 살아서 활동하는 병이 바로 치매인 셈이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로부터 틀니를 뽑는다. 틀니는 모든 욕망의 근원이며 또한 수단이기도 하며 그것의 거짓된 희망이기도 하다. 그 틀니를 뽑자 어머니는 비로소 천당에 들거나 성불하는 모습이 된다.

 

우리는 행복하게 하는 것은 욕망에 있지 않고 그것의 벗어남에 있다는 것을 시인은 틀니라는 소재를 통해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헛된 지향 속에서 악무환에 빠져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에 대한 분노의 안개가 걷히리라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어머니 얼굴에서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또한 스스로의 삶이 어리석고 길 잃은 욕망의 무의미한 삶을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다음의 시처럼 삶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 이어진다.

 

애써 보이지도 않는 먼 길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돌부리는 발밑에 있고

발밑에는 굳은 땅 밀고 올라오는 새싹이 있다

돌부리에 차이면 발이 아프고

무심코 내 발이 싹의 머리를 누를 때

지구는 온몸으로 기우뚱거린다

발밑을 조심하라

발밑을 내려다 볼 때

너는 땅에 경의의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니

 

- 「발밑」 전문

 

우리는 앞을 보거나 위를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도달해야 하고 올라가야 할 목표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남보다 빨리 가는 자를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을 사는 동안 내 발밑에서 무수한 것들이 짓밟히고 있다. 그리고 그 짓밟음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결국은 위태롭게 하고 말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다. 때문에 시인은 삶의 목표와 지향을 잠시 접고 발아래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허무주의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허무주의를 통해 시인은 좀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보고 좀 더 많은 존재들을 살리고자 한다. 따뜻함은 채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움에서 오는 것임을 시인은 정말 따뜻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황정산 | 1994『창작과비평』평론 발표. 2002『현대시문학』시 발표. 저서『주변에서 글쓰기』.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 이 글은 계간 <<미네르바>> 2012년 봄호 신작특집 평론으로 게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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