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새로운 하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리아가 누구인지 알려면 예수님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명과 메시지의 핵심은 “복음”, 곧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기쁜 소식이란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돌아가시어 우리가 죽을 때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쁜 소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고, 기쁜 소식은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죄의 용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핵심 메시지가 맞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라고요.
그런데 신약성경을 더 연구해 보면,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단순히 그동안 자신이 지었던 죄들을 용서해 주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 그로 인해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들어오게 된 그 원죄의 용서와 관련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첫 번째 아담이 불순종해서 지은 죄를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께서 순종으로 되돌리셨습니다. 아담과 예수님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은 바오로 사도의 서간입니다.
로마서 5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8-19)
1코린 15장 말씀입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1코린 15,45.47)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본다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보는 관점도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아담이라면, 구원이란 단순히 죄인을 지옥 불에서 구해내는 것 이상이 됩니다. 구원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일어난 일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아담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으나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본래의 ‘의로움’을 회복하는 것이지요.(로마 5,17)
자, 그렇다면 이것이 마리아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아담이라면, 누가 새로운 하와일까요? 이번 장에서는 신약성경이 마리아를 어떻게 새로운 하와로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마리아의 유다교적 뿌리를 찾아볼 것입니다. 마리아를 이런 방식으로 보아야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마리아를 평범한 여성 이상으로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왜 마리아를 죄가 없다고 믿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선, 성경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첫 번째 하와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 에덴동산의 여자
첫째,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첫 번째 남자와 첫 번째 여자를 도덕적으로 선하며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곧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시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참 좋았다”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의롭다’ 또는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죄 없이 창조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죽지 않는 존재이며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고 하셨을 때, 거기에는 “생명나무” 열매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먹기만 한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창세 2,9.16; 3,22)
죄를 짓기 이전에는 여자가 하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단지 “여자”라고 불립니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 창세기를 계속 읽다 보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하와라고 이름을 짓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3,20)
둘째, 하와는 아담과 금지된 열매를 나눠 먹습니다. 하와는 죄를 지을 때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에 분명히 하와가 열매를 먹고는 “자기와 함께 있는” 아담에게도 주었다고 나옵니다. 말하자면, 아담과 하와는 ‘함께’ 타락한 것이지요. 이는 왜 원죄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 둘 다 고통을 겪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서 영원히 살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한 원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창조 때 지녔던 본래의 선함과 불멸성을 잃어버리고, 대신 거친 땅의 고통과 출산의 고통,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찾아오게 됩니다.
셋째, 신약성경으로 넘어가기 전에 유다교 성경에 포함되지 않는 저술에서 하와에 대한 언급을 살펴봅시다. 창세기에서는 단순히 “뱀”이라고 부르지만, 후기 유다교 전승에서는 하와를 유혹한 자를/ 명확하게 ‘사탄’으로 명시합니다. 예컨대, 지혜서에서는 ‘악마(디아볼로스)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합니다.(지혜 2,24) 게다가 고대 유다교 저술은,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의 결과로, 죄와 죽음이 모든 후손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세기에 두루 알려졌던 집회서 25장의 말씀입니다. “죄는 여자에게서 시작되고 여자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는다.”(집회 25,24) 필론이 쓴 「성경 고대사」 13장 내용입니다. “뱀에게 속아 넘어간 아내 말을 듣고 사람이 나의 길을 벗어났다. 그러자 죽음이 사람의 후손에게 물려져 전해지게 되었다.”(「성경 고대사」 13,8) 예수님 시대에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유다교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의 후손 각자가 지은 본죄가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죠. 이런 유다교 문헌은 훗날 ‘원죄’ 교리의 기초가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다교 해석에서 성경의 ‘뱀’과 ‘여자’에 관한 신탁(창세 3,15)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창세 3,15을 들어볼까요?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가장 두드러진 예는 1세기 유다인들에게 유명했던 에녹서입니다. 에녹서는 ‘메시아’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할 뿐 아니라(1에녹 48,2-10), 사람의 아들을 창세 3,15의 여자에 대한 예언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1에녹 62장의 내용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고통에 사로잡힐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의 후손은 처음부터 숨겨져 있었다.”(1에녹 62,5-7)
1세기 때 이미 메시아를 하와의 후손, 곧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의 ‘후손’(창세 3,15.20)과 동일시했습니다. 요약하자면, 구약성경과 유다교 전승에서 하와는 단지 평범한 여자가 아닙니다. 하와는 세상에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하와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타나 타락이 가져온 결과를 되돌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리아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봅시다. 특히 요한복음과 요한묵시록을 중심으로!
2. 새로운 하와이신 마리아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는 두 번 등장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2,1-12)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19,25-27)에서! 이 두 이야기를 아담과 하와에 대한 구약성경의 빛으로 읽어보면, 창세기에서 ‘후손’이 뱀을 정복하리라 했던 바로 그 “여자”(창세 3,15)가 마리아라는 단서를 찾게 됩니다. 카나의 혼인 장면을 살펴봅시다.
2-1. 카나의 혼인 잔치와 창세기의 “여자”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2,1.4) 왜 요한복음은 “사흘째 되는 날”에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다고 강조할까요? 언뜻 보기에는 시간 순서를 가리키려고 한 것 같지만, 요한복음 전체를 두고 보면 창세기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1,1) 요한복음 1장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1,1) 창세기는 ‘일곱 날’에 걸친 창조 이야기로 시작되고, 요한복음도 ‘일곱 날’에 걸친 예수님의 공생활로 시작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서학자들 모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공생활의 첫 7일이 창세기의 첫 7일을 모델로 삼고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이 해석이 맞다면 왜 예수님의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께 무례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곧 마리아를 새로운 하와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하와의 관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야기에서 더욱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장면이 마침내 악마가 정복되는 순간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요한 12,31-33) 다른 하나는, 마침내 악마가 패배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5-26)
이렇게 퍼즐 조각을 하나로 모아보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곧 “여인이시여”라는 호칭이 암시하는 바 그녀의 운명은 창세 3,15의 ‘여자’가 되는 것이지요.
2-2. 요한묵시록 : “여인”, 뱀, 메시아
마리아가 창세기에 예표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태양을 입은 여인’의 표징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묵시 12,1) 여기에서 ‘태양을 입은 여인’은 누구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 여인을 메시아의 어머니와 동일시합니다.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으로! 다른 한편으로 이 여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 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렇게 보는 관점은 구약성경에서 드러나는데,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신부’(이사 62,1-6)로 표현되지요. 사실 요한묵시록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묵시 19,7-8; 21,1-9)
그렇다면 이 여인은 한 개인일까요? 아니면 집단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할까요? 가장 합당한 설명은 둘 다 맞다는 것입니다. ‘태양을 입은 여인’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상징입니다. 곧 요한복음과 요한묵시록에서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만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두 번째 하와이고, 창세 3,15의 여인으로서 교회의 어머니입니다.
3.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지금까지 우리는 하와와 마리아의 유사점을 찾아보았는데, 이제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어머니가 구원 역사에서 독특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죄로부터 보호되었다고 믿었는지 알아봅시다. 곧 새로운 하와로서 마리아의 정체성과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관한 가톨릭 교리의 연결점을 찾아봅시다.
3-1. 고대 교회 어디서나 ‘마리아는 새로운 하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마리아를 평범한 여인으로 보는 데 반해,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대 교회에는 하와와 마리아의 유사점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와가 인류의 타락에 고유한 역할을 했듯이 마리아도 인류의 구원에 고유한 역할을 했다고 믿었습니다. 동방과 서방 교부들의 진술은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하와를 통해 죽음이 왔으나, 마리아를 통해 생명이 왔다.”(하에로니무스)는 진술은 특정 장소나 특정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아프리카, 소아시아, 유럽에서 쓰인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곧 마리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초기부터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녀가 바로 두 번째 하와라는 것이지요.
3-2. 하와의 창조와 원죄 없이 잉태되심
마리아가 두 번째 하와라는 것을 이해하면, 마리아도 하와처럼 죄 없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형론의 관점에서 보면 구약의 ‘예형’은 신약에서 성취되는 인물보다 위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아담은 예수님의 예형이지만, 아담이 예수님보다 위대하지는 않습니다. 다윗 임금도 참된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예수님의 예형이지만, 밧 세바와 간음한 다윗 임금이 그리스도보다 위대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와가 마리아의 예형이라면 하와는 마리아보다 위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와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시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은 죄 없이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창세 1,27-31) 그러므로 두 번째 하와인 마리아 역시 죄 없이 창조되었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하와-마리아 예형론에 따르면 마리아는 어떤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가르침입니다. “죄라는 주제를 다룰 때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예외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넘치는 은총이 마리아에게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주님의 공로로, 의심의 여지 없이 죄 없으신 분을 잉태하시고 낳으셨다.”(「본성과 은총」 42)
어떻게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셨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히브 4,15) 그런데 마리아도 죄가 없으셨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마리아를 구약성경의 눈으로 보려 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죄의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하시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아담과 하와를 죄 없이 태어나도록 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 없이 창조되었고 하와 역시 죄 없이 창조되었다면, 예수님과 마리아 두 분 다 죄 없이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예수님이 새 아담이며 마리아가 새 하와라면, 두 분 다 죄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창세 3,15을 “새로운 아담”의 예고라고 본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아담의 불순종을 넘치게 보상한다. 한편 많은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은 이 ‘원복음’에서 예고된 ‘여인’을 “새로운 하와”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로 생각한다. 마리아는 최초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죄에 대한 승리의 은혜를 입은 분이다. 그분은 원죄에 물들지 않았고,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411항)
3-3. 마리아, 새로운 창조의 시작
결론적으로 새로운 하와인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이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예입니다. ①마리아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가져온 것을 되돌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 되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②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죄 없이 사셨다는 것과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할 때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하늘에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히브 12,23)이 있다고 표현한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까닭은, 하느님께 우리를 의인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의 능력으로 실제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로마 5,19) 새 하와인 마리아는 죄 없이 창조되어, 새 창조의 의로운 삶을 가리키는 ‘살아있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묵시록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오늘 다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로 인해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살아있는 표징이다. 곧 새로운 하와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창조 때 받은 의로움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이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도록 인도합니다.
- 브랜트 피트리, 「마리아의 신비를 풀다」, 34-63쪽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