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언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투명하게 맑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바깥의 겨울을 음미해 본다. 겨울에는 농사일이 없다. 낮시간이 짧기는 하지만 빈둥거리는 시간이 많다. 춥기 때문에 옷을 두툼하게 입고 움직인다. 용문장에 모처럼 나갔는데 가게 천막도 듬성듬성이고 장보는 이들도 별로 없다. 여름날 북새통을 이루던 거리는 한가하고 찬바람만 들락거린다. 지금처럼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아내가 즐겨 하는 말이 떠오른다. "가만 있으면 안돼요. 무언가 유익한 일을 해야 해요. 주변을 살펴 겨울 나기가 잘 준비되어 있는지, 아니면 글이라도 써야 해요. 먹고 사는데 유용한 일을 찾아서 해야 해요."
물 속에 비치는 다리는 젊은 날의 그 통통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살이 빠진 나약한 홀쪽한 모습으로 흔들거리고 있다. 시간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렇게 나이들고 늙고, 병약하여 모든 이들이 가는 곳으로 결국 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허무하게 가기보다는 살아서 이름 정도는 누군가에게 각인시키고 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향유했던 나 자신의 말, 나의 흔적, 사고방식을 나 아닌 타인에게 유물로 남기고 간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일이 될 것이다.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가 말을 못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무나 동물처럼 흔적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재작년인가 화전리 산에 오르다가 새 몇 마리가 누군가에게 물려 날개를 펼친 채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고귀한 생명을 잔인하게 물어 뜯어 죽인 것이다. 그 새는 초야에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것이다. 문상객이라고는 나 하나였다. 흙으로 덮어 주었다. 유서가 없다. 유언도 없다. 말을 할 수도 기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르게 인간은 말을 할 수가 있다. 벙어리일지라도 최소한의 의사표시를 할 수 있도록 제도가 완비되어 있다. 태초부터 언어가 있었다. 요한복음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바벨탑을 허물기 전까지는 구음이 하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은 언제 생겼을까? 전술한 것처럼 이미 하나님도 태초부터 말을 가지고 있었다. 미루어 보건대 하나님조차도 말을 만들었거나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도 이미 있던 말을 사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사탄인 뱀도 이브를 유혹할 때 말로 했다. 말 곧 언어는 그 유래를, 근원을 알 수 없는 먼 곳으로부터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땅에 살게 하였더니 그 인간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그들이 짓던 바벨탑을 허물고 그 전까지 의사소통을 하던 언어를 혼란케 하셔서 인류가 분파적으로 흩어지게 하셨다. 몰몬경에 보면 바벨탑의 혼란 와중에도 언어가 그대로 보존되어 생활에 불편을 겪지 않은 종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의 세계를 보면 언어의 수도 엄청나게 많다. 그 언어들은 창시자를 알 수가 없다. 유독 한글만은 언어의 창시자와 그 탄생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신의 영역에 있는 것이므로 한글은 신의 도움이 아니면 창제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거의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아내는 시창작 강의를 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 있다. 우리의 언어는 특히 시라는 언어는 뇌 속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부연하여 우리는 아는 언어만큼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어를 100개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사고도 100개의 범위를 넘어설 수가 없다. 만 개의 단어를 아는 사람은 만 개의 범위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결국 나의 파이를 키우는 일이다.
경전에서도 "무지하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구절도 있다. 여기서의 "무지"라는 말은 달리 해석할 수도 있으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의적으로 다룰 수 있는 어휘의 양이 곧 그 사람의 수준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그러한 경험을 하곤 한다. 특히 교리에 대해 생각할 때면 확연하다. 어느 단계가 지나면 더 이상 사고가 진행되지 않는다. 사고의 천정에 다다른 느낌이다. 나 혼자만의 사고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만난다. 상상력의 결여, 아니면 논리의 부족 등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많다. 신의 도움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라. 내가 모르는 단어를 접했을 때, 나는 아직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전도 찾아보고 인터넷도 살펴보고, 최근에는 쳇봇도 있어서 내가 알고자 하면 쉽게 알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꾸준히 어휘를 늘려 간다면 나의 대화 수준도 향상되고 대화 상대도 나와 대등하지 않으면 별로 사귀고 싶지 않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대등한 대화 상대자와의 사귐이 더욱 편하다는 것이다. 대화가 계속 이어지지 않게 되면 자연히 멀어지게 되고 때로 반목하게 되며 심지어 다툼을 유발하게 된다.
우리는 어휘의 틀에 갇힌 사회적 동물이다. 어려서부터의 독서가 아주 중요한 이유이다. 학벌이 좋다라는 말은 달리 표현한다면 알고 있는 어휘의 양이 많다라는 일반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된다. 많이 못 배워도 독서나 사유가 많은 사람은 학벌을 뛰어넘는다. 그런 유의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보고 만날 수 있다. 어휘를 많이 아는 것과 말을 잘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말을 잘한다고 해서 어휘를 많이 알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말을 능수능란하게 잘한다면 대개의 경우 어휘도 그에 비례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마저도 태생적 능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어휘를 많이 안다는 것은 나의 예지를 높이는 일이며, 나아가서 인격도 높이는 방법일 수 있다. 더 많이 깨닫고, 더 많이 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지 못해도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있다. 이 역시 어휘가 개인을 결정한다는 범주에 드는 사람이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