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의 짧고도 멋진 생애
(외씨버선길 제2편)
루수/김상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멋지게 살다 가기를 원한다. 조지훈 시인은 우리나라 오지 중의 오지인 경상북도 영양의 조그마한 주실마을에서 유복하게 태어났다. 조지훈 시인의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이다. 시인은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하셨고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큰 빛을 발했다. 시인으로 또는 수필가로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 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내가 흐르고 나지막한 산이 마을을 뺑 둘러 쌓았다. 시인의 생가를 들르기 전 둘레길의 이름을 탄생시킨 외씨버선길은 "승무"란 시의 구절에서 딴 것이다. 큰 돌에 새겨 놓은 승무란 시(詩)를 적어 본다.
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絲)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絲)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 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絲)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나빌레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비처럼 날아가고 싶다’라는 의미가 있다.)
1630년 이전에는 주씨(朱氏)가 살았으나 1629년 한양인(漢陽人) 조전(趙佺) 선생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한 뒤 매한(梅寒)이라 하였고, 1700년 무렵 매계(梅溪) 혹은 매곡(梅谷)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주곡(注谷)으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용골ㆍ논골ㆍ성지골ㆍ새미골ㆍ감부골ㆍ앞산골 등의 골짜기가 서로 맞닿아 있어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 또는 주곡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유형문화재인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이 마을에 있다. 이 고장은 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고향이다. 이곳의 조씨(趙氏)를 흔히 주실 조씨라 부른다.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마을 전체 분위기와 짜임이 다른 마을과는 달라 학자와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주실마을, 마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온 흥림산(興霖山)을 안산으로 해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으며 흥림산 아래 자연부락 감복동(甘伏洞)이 있고 남편에 영양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입구에 이 마을 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가 지훈(芝薰) 조동탁 선생의 시비가 있으며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해 골짜기를 서로 마주하며 이뤄진 마을로 영양의 주산이고, 영산인 일월산의 정기를 가장 많이 받는 마을이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 선생 시비'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1982년에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숲속에도 "지훈 시비"가 건립되었다
조지훈 시인의 생가를 들어오는 길목엔 주실 마을이란 돌기둥이 우뚝 서 있다. 주실 마을은 민족의 기개와 지조를 갖춘 "선비의 마을이다.
문학소년 조지훈은 아홉살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화를 창작해 보기도 하고, 당시 소년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피터 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의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서양 문학을 섭렵(涉獵)하다. (섭렵(涉獵)이란: 물을 건너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거나 다양한 경험을 쌓음을 이르는 말) 지훈은 열일곱 살 때 상경하여 동양의 선배 오일도 사백의 "시원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경 후 내가 처음 탐독한 시인은 보드레르와 와일드였다. 사실주의 이후 주조 잃은 문예사조를 알아본다고 보드레르와 도스토옙스키, 플로베르를 읽고 나서 보들레르의 상징주의가 정통이라고 믿은 것도, 와일드의 탐미주의에 혹하여 "살로메"를 번역하여 본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나는 이내 그 당시의 모든 문학청년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1차 대전 전후의 소위 아방가르드 문학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서구 심미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훈은 상경하여 극예술연구회, 중앙무대, 낭만 좌와 조선어학회에 드나들면서 많은 선배 무인, 예술인, 학자들을 만났다. 등단하기 전 습작들이 "백지" 동인지에 실렸는데 1집에 실린" 계산표"와 "귀곡지"에 대하여 당시 소설로 문명을 떨치던 유진호 선생이 "혜민(慧敏)한 지성(知性)을 산다"고 평을 써 줘서 은근히 기뻐했다고 한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와세다 대학교 통신강의록으로 공부해 혜화 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지훈에게 "백지"의 동인들과 벌인 토론은 지식과 정보의 교화면에 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 지훈은 체질화된 동양적 사상에다 서구적 지의식과 탐미주의 세계관을 접목했다.
일대기로 본 문학세계 청록파시기
광복과 함께 사회운동을 재개했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활동을 했다.
조지훈 시인은 광복이 되자 잠시 영양군으로 가서 초등학교 교재를 엮어서 등사판을 밀고 주실마을 청년들과 함께 신사를 불태웠다. 이후 1945년 10월,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어학회의 "중등 국어 교본" 편찬위원으로 위촉받고, 같은 해 11월에는 진단학회의 "국사 교본" 편찬 원이 되었다. 조선문화건설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중앙문화협의회의 일을 도우며, 반탁운동(反託運動)을 비롯하여 모든 민중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다.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창작도 활발히 해나갔고 교육자로서의 삶도 시작하였다. 경기여고 교사, 서울 여의대 교수를 거쳐 평생의 직장인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청록파의 활동으로는 광복 직후 조선 문학가 동맹을 중심으로 한 좌파들이 문단을 주도해 가자, 청록파는 이에 맞서 우익계의 전국문필가 협회에 참가했고, 특히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청년문학가협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하였다. 일제 암흑기에 저명한 문인이라면 대부분 일제의 강요나 사상전향으로 "친일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을 때 청록파 시인들은 붓을 꺾고 낙향했었다. 그들은 신예들이어서 일제의 강요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도 있었지만, 그 바탕에는 시의 순수성과 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의식이 내재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광복 후에 청록파는 어떠한 정신적인 부담감도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조지훈 시인은 소월을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 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준 큰 시인이다. "청록 집" "풀잎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 "낙화" "고사"와 같은 시는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詩)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겼고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매우 넓고 깊었다. 광복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 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 교본 편찬 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 교과서와 국사 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 연구" "한국문화사서 설" "한국민족 운동사" "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영원한 명저가 되었다.
첫댓글 제가 즐겨 외웠던 시'승무'만났기에
여기에 올려봅니다.
잊었네요.
[얇은 사(絲)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대목만 외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