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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역사방 스크랩 초원의 지배자 [제 7 부]
에셀나무 추천 0 조회 102 14.03.04 10: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7장  [단군조선 제국帝國]의 충실한 전도사傳道師로서 다른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誇示한 지배자들


먼저 역사 이래 지속적으로 동방東方에서 밀려와 왕조王朝를 개창開倉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충실한 전위前衛 그룹들 즉 서방西方이나 한족漢族들이 유난히 투르크-몽골 계열로 못을 박으려고 노력하는 세력집단들]이 있다.  


바로 이들이 고대 문명 발전시기의 운명運命을 좌우하는 구심점求心點으로서 작용함으로서 이를 두고 <요르다네스Jordanes>는 [대륙아시아는 모든 민족국가의 자궁uagina gentium이며 아시아의 게르마니아germania이다]이라고 묘사描寫할 정도였음을 반드시 명심銘心해야 한다.



1) 다만 흑해黑海 너머에서 서진西進했다는 것만 알려질 뿐 어디에서 온 종족種族인지 분명치 않다는 [히타이트Hittite]는 서방西方의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당시 학자들의 인식을 살펴보면 기존의 유럽을 포함한 지중해地中海와 소아시아 지역 세력 집단 움직임의 행동반경行動半徑에서 벗어난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세력이라는 느낌이 매우 강하다.  


   이런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명확한 입증立證으로서 이들은 분명하게도 동방東方 루트와 연결되었던 러시아 서남부를 통해 북쪽에서 진입進入한 족적足跡이 뚜렷하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 결과로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2) 전성기全盛期에 서아시아를 비롯해 소아시아 지역까지 지배한 [수메르Sumer]도 기록에 <북쪽에서 온 검은 머리의 세력-사실은 동쪽에서 확산擴散된 진출로進出路를 경유經由하여 북부에서 내려 온 듯하다]이라고 표현되었다.   이들 문명은 <앗시리아Assyria-바빌로니아Babylonia>로 연결된다.


3) BC 1200년 무렵의 [푸리기아Phrygya(부리지아Brygya 즉 우리말 부리*불 계열)-트라키아Thracia 종족種族]들이 세운 소小 왕국王國들은 한 때 <탈그렌Tallgren>에 의해서 <인도-유럽 계통>으로서 헝가리Hungary나 루마니아Romania를 기원起源으로 보았지만 <동방민족東方民族의 언어형식言語形式>을 주로 사용한 매우 깊은 민족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현재 거의 정설定說로 굳어졌다.



□□□□□□□□□□ [여기서 잠깐] □□□□□□□□□□


이들은 흑해黑海 북부인 남부러시아의 [프리기아Phrygia 인人에 뿌리를 가진 키메르Cimmerian 문명으로서 최대 BC 1400년-최소한 BC 1000년까지] ? 간자Gandzha-카라바흐Karabakh의 [트란스코카서스transcaucasus 문화으로 BC 1400년 또는 BC 1250년에서 BC 8C] ? [그루지아Georgia 테렉Terek 초원인 렐바르Lelvar 문명] ? [투르키스탄Turkistan 문명-카자흐스탄Kazakhstan의 안드로노보Andronovo 문화]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동방東方에서 대초원大草原을 가르는 루트를 통해 서부로 진출 ? 우랄Ural 지역에서 지형적인 조건으로 일시 막히자 방향을 틀어 러시아 남부로 남진南進 ?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로 확산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후기後期의 [흉노匈奴에서 몽골]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간직하여 지속적으로 반복된 결코 달라지지 않았던 진입進入 방식이었다.


이를 더욱 입증立證해주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사실로서 상商의 안양安陽에서 출토된 투겁 있는 전투용 도끼*납작한 단검短劍과 창날 등이 니즈니Nizhni 노르고로드Novgorod(현재의 고르키Gorki)부근인 세이마Seima*노보그리고리예프스크Novogrigorievsk의 유형과 같다는 점이 모범적인 사례事例이다(부그 강江 유역의 청동제작장소靑銅製作場所인 니콜라예프Nicolayev  BC 1000년경).



※ 그동안 서양 학자들은(탈그렌 등) 청동기靑銅器의 <유럽 기원설起源說>을 은근히 유도하기 위해 BC 1500년 무렵 서부 시베리아의 문화를 기반으로 동방東方에 전파되었으며 그 기원起源은 거의 같은 시기인 다뉴브Danube 지역의 온예티즈Aunjetitz 문명과 연결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동방東方 지역에서 BC 3000년을 넘어가는 유물遺物들이 속속 발견됨으로서 이 견해見解는 이미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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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단군조선 제국帝國]의 유산遺産을 이어간 초원草原의 지배자들 - 단군조선의 정통 후예後裔들



이들의 행동반경을 관통貫通하는 [공통점]이 있다.   ① 모두가 <북방 유라시아 초원벨트>의 중핵지대中核地帶에서 성장하고 진화進化한 세력들이다. ② 이들의 뿌리는 한결같이 고대 [단군조선 제국]의 영역領域 안에 기원起源을 두고 있는 가운데 갈라져 나온 집단들이다. ③ 전통적으로 이동 방향과 왕조王朝 개창開倉은 대부분 서방西方 진입과 남부로의 확산이라는 전형典型을 이루고 있다. ④ 하나같이 주변 지역을 압박하면서 스스로는 [문명의 지배자]로서 운명(천명天命)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행동했다.


이들이 시종일관 유라시아 지역이나 동북 만주滿洲를 거쳐 내려와 한반도韓半島까지 우세優勢를 점하면서 변함없는 새로운 왕조王朝의 창시자創始者로 군림君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가장 근본적인 바탕으로서 이들 지역에 진입할 당시 전장戰場이나 전투 방식이 대부분 평원平原과 구릉丘陵 그리고 초원草原을 무대로 보병步兵에 맞서는 기병騎兵에 의한 섬멸전殲滅戰의 형태로 펼쳐져 왔다는 기본적인 속성屬性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통상적인 전투戰鬪의 양상樣相이 어떻게 벌어지며 진행되어 가는가? 는 아래의 비슷한 대결구도對決構圖를 지닌 다른 지역에서의 사례분석事例分析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立證할 수 있다.



1) AD 1532년 11월 16일의 전투에서 스페인 기병대장騎兵隊長 <프란시스코Francisco 피사로Pizarro>가 이끈 168명의 기병대騎兵隊들이 잉카Inca 왕王 아타우알파Atahuallpa의 8만 대군大軍을 쳐부순 근본적인 원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총銃과 <말>을 앞세운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돌격突擊*천으로 된 갑옷을 압도壓倒하였던 철제鐵製 사슬 갑주甲?와 투구로 무장한 병사들의 위력과 공포는 물론 파수꾼이 배후背後의 주력군主力軍에게 알리려 할 때나 후퇴하는 무리들을 간단히 앞지를 수 있는 기동성機動性은 거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2) 아타우알파Atahuallpa의 뒤를 이은 <망코Manqu 카파크Qhapaq>의 가장 뛰어난 장군將軍이었던 <키소 유판키>는 AD 1536년 리마Lima의 스페인 진영陣營이 있는 도시를 포위하였으나 기병騎兵 2개 부대가 평지平地에 진陣을 치고 있던 잉카Inca의 군대에게 돌격突擊을 감행敢行하여 첫 공격에서 <키소>와 휘하麾下 장수將帥들을 모조리 죽이고 궤멸潰滅시킨다.


3) 이어 <망코Manqu 황제皇帝>가 이윽고 <쿠스코Cuzco>의 스페인 군대를 포위했을 때에도 26명의 기병騎兵이 돌진突進하여 <망코>의 친위병親衛兵 가운데 최정예부대最精銳部隊를 초토화焦土化시켰다.


   아무튼 이들은 그동안 관행적慣行的으로 이루어졌던 탁 트인 벌판에서의 보병전술步兵戰術과는 전혀 다른 <말>들이 돌진突進할 때의 엄청난 충격파衝擊波와 진퇴進退와 방향전환에 의한 신속한 공격이 자유로운 새로운 전투방식과 접接하는 가운데 철저한 무력감과 절망적인 패배감을 맛보았다.  



위와 같은 사례事例는 그 전개 양상이 고대古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비슷한 상황의 반복으로서 작용하였던 새로운 무기 체계(총銃과 맞먹는 활의 성능*금속기술의 월등함*비교할 수 없는 갑주甲?와 투구의 위력)와 발달된 전투능력(기마騎馬를 이용한 전술 등)을 보유한 선진先進 이주移住 집단과 원주原住 세력과의 전쟁에 대한 승패勝敗를 결정했던 요인들이었다.



1. 흉노제국匈奴帝國의 등장


[맹약盟約을 이용한 교활한 배반][도덕道德을 가장한 사악邪惡한 책략策略][공존共存을 명분名分으로 세우지만 우리와 그들로 철저하게 가르는 전통적인 인식認識]을 미처 깨닫지 못한 <신기루>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동안의 [미몽迷夢에서 깨어 나 북방의 성난 호랑이]가 된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동호東胡 제국은 자체분열自體分裂되고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인류학적人類學的인 견지見地에서 [북방유목종족北方遊牧種族]을 통합한 세력이라는 데에는 공감共感을 하고 있는 편이다.   왕국유王國維의 유명한 연구저서硏究著書에서 <상商과 주周시대의 귀방鬼方과 곤이昆夷와 험윤??과 선우鮮虞*춘추시대春秋時代의 융戎과 적狄*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호胡>라는 단정을 1930년대 양계초梁啓超와 일부 학자들이 지지支持하는 가운데


중국中國은 [사기史記]와 그 이후의 역사서歷史書에서 확립된 전통에 따라 <대개 흉노匈奴가 초기 문헌文獻에 등장하는 융戎*적狄*험윤?? 등 수많은 북방 종족種族들의 후손後孫들이다>라는 관점觀點을 연구가설硏究假說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시에 그들이 이후에 등장하는 [투르크-몽골계]의 선조先祖라는 인식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몽문통蒙文通*임간林幹의 흉노사료휘편匈奴史料彙編).


참고로 [몽골학자]들은 오랫동안 <몽골족의 원류原流가 흉노匈奴>라고 주장했으며 역사 기원起源을 밝힐 때 흉노匈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입장이다.   과거 <몽골인민공화국>의 공식公式 역사서술에서도 <흉노족匈奴族의 사회발전*관습*문화가 퉁구스계의 몽골족 원형原型과 매우 유사하다>고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갑자기 [흉노제국匈奴帝國]이 전면前面으로 나서게 되었을까?   물론 [첫 번째 원인原因]이야말로 동호東胡제국의 패퇴敗退이다.  그렇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게 흉노匈奴가 한족漢族과의 대결국면에서 중요한 존재로 부각浮刻되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로서 다른 중요한 한 가지는 그 무렵 흉노匈奴에게 포용包容된 집단들의 대부분이 북중국北中國에서 오래 전부터 화하제후국華夏諸侯國의 교활한 술책術策과 사악邪惡하고 비도덕적非道德的인 행동에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던 세력들이었다는 점이다(귀방鬼方*곤이昆夷*험윤??*선우鮮虞*융戎과 적狄*중산국中山國*대국代國*누번樓煩 등).


[두 번째] 추가할 근본적인 이유는 그즈음 [화하제국華夏帝國]의 태도에 있었다.   즉 진秦은 통일統一하자마자 [초원제국草原帝國]의 경내境內에 장성長城을 축조築造하려고 시도했으며 몽염蒙恬을 시켜 흉노匈奴의 젖줄이었던 황하만곡부黃河卍曲部와 오르도스Ordos 지역을 집중 공격하였다.


거대한 [정주국가연합체定住國家聯合體]가 변경邊境에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려는 정황들이 흉노匈奴를 포함한 북방부족北方部族 세력의 공통적인 잠재적 위협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움직임은 보다 결속력結束力이 크고 강력한 [초부족적超部族的인 군사귀족제국軍事貴族帝國]으로의 강화를 부추기는 필연적인 결과를 낳았다(Barfield  The Perilous Frontier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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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기록들을 보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 하나는 이 시기(BC 215년 무렵)에 북방세력을 [호胡 또는 융적戎狄]이라는 범칭凡稱으로 부른 걸로 보아서 분명하게도 흉노匈奴가 동호東胡의 지배권 안에 속하여 그 이름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하였음을 알려준다.   다른 하나는 정주定住 집단의 통일제국統一帝國이 이윽고 북방제국北方帝國의 실체實體들과 직접적으로 대면對面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때(진秦의 통일 이전부터) 동호東胡는 매우 강력하였으며 월지月氏 또한 번성하였다.   <사기史記 권110 흉노열전匈奴列傳 몽염蒙恬 기록부분 주석註釋>


나중에 진秦이 6국國을 멸망시킨 후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가서 [호胡]를 격파하고 하남河南의 땅을 모두 거두어들이도록 하였다...<사기史記 권110 흉노열전匈奴列傳>


이에 진시황秦始皇은 몽염蒙恬 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이끌고 북으로 [호胡]를 공격하여 황하이남黃河以南의 땅을 침공하여 포위하도록 하였다...<사기史記 권6>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蒙恬에게 30만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戎狄]을 몰아내게 하여 황하이남黃河以南 지역을 확보하였다...<사기史記 권88 몽염열전蒙恬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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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제국匈奴帝國은 BC 215년 몽염蒙恬의 공세攻勢로 대대로 영유領有하고 있던 자신들의 초지草地를 일시적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규모 이주移住 집단들이 더욱 감정적으로 응집凝集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된 군사적 역량力量의 집중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독자적인 군사력을 강화시킨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묵특冒頓모돈이 있었다(묵특이 최고 지도자로 부상浮上한 시점時點은 BC 209년이다).


그가 동호東胡의 권위權威에 도전한 시기도 전반적으로 [북방 초원草原 세력]이 북중국北中國에서 [한족漢族 정주집단定住集團]에게 밀리고 있다는 위기감이 발현發顯하여 최대로 증폭增幅한 무렵과 맞물린다는 사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런 시기에 지도자指導者의 개인적인 능력이 가장 두드러지게 꽃피운다(이집트를 탈출할 때의 모세Moses에 대한 믿음 등).   더구나 그 지도자가 매우 능력이 있고 현저하게 위엄을 갖추었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던지 간에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출현시키는 촉매제觸媒劑로 작용한다.



궁극적으로 유능하고 현명한 <군사수장軍事首長>으로서 정치적*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현現 지도자指導者의 대응능력이나 접근방식들에 대한 불만이 급기야 동호東胡의 습격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에 따른 유목세력遊牧勢力들의 인식변화에 발맞추어 집권화集權化 과정이 뒤를 이었고 마침내 또 하나의 제국帝國으로서 영토적*군사적 팽창膨脹의 기초基礎가 마련되었다.


<군사엘리트>들의 정치적 권력이 고양高揚되는 가운데 새로운 [제국帝國의 탄생]이라는 현상現像을 만들어주는 원인原因으로서 ①전통적인 통치에 대한 불만과 무시 ② 개인적인 야망 및 군사적인 능력 ③ 두드러진 개인적 카리스마의 구비具備라는 <필요충분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이런 반발反撥이 성공적일 경우 새로운 지배자支配者는 시대에 뒤떨어진 제국帝國의 위계질서位階秩序를 파괴함으로서 신선한 정치질서를 주도主導해 나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독특한 변화요소들이 [유라시아 초원국가草原國家]의 건국建國 과정에 작용함으로서 그 시원始原이 종종 수수께끼 같은 장막帳幕에 덮여 있거나 신비한 전설傳說에 싸여있는 원인을 제공한다.


[위기돌파危機突破의 핵심과정]은 곧 <사회적인 군사화軍事化>이다.   그런데 흉노제국匈奴帝國의 등장과정이 특히 극적劇的이며 역동적力動的인 이유는 <안드레스키>가 정의正義한 군사조직에 기초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원인인 입대율入隊率 [1]*복종심 [2]*응집력 [3]이란 요인要因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Stanislav Andreski  Military Organization and Society  1968  150p-151p).  


[1] 대규모 이주移住에 따라 빈틈없이 조직된 군사軍士들의 호위護衛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가능한 모든 성인成人 남자들은 군사화軍事化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다.


[2] 묵특(모돈冒頓)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정교한 군사적 지도력指導力을 겸비한 권위權威 그리고 유능하고 절대적인 충성심과 잘 훈련된 친위부대親衛部隊의 역할 강화


[3] 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갔던 울분鬱憤과 증오憎惡가 만들어 낸 분노忿怒와 복수심復讐心이 얽힌 공통적인 감정의 일체화一體化



□□□□□□□□□□ [뒤집어 보기] □□□□□□□□□□


모돈冒頓은 <묵특>이라고 하지만 다른 기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이름에서도 [단군조선제국]의 기본 언어계열言語系列로 엮어진 흉노匈奴와 몽골 그리고 동호제국東胡帝國의 상호相互 공통성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1) 별칭別稱인 [묵돌墨突*묵독墨毒]에서 주목할 부분은 [독과 돌]이다.   이는 우리말로도 <돌>이라는 뜻으로서 [단단하고 강한 사내 즉 용사勇士]를 의미하는 [바우쇠*돌쇠]의 변화형에 다름이 아니다.   아울러 [독]은 지금도 방언方言으로 사용하고 있는 <돌멩이라는 뜻인 독막>에 화석化石처럼 보인다.


2) 그 때문에 전형적인 <용감한 사내>를 말하는 용례用例로 [-돌이*-도리-소벌도리蘇伐都利]가 어미語尾로 붙은 고어古語나 현대어現代語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3) 다음은 <바야투르Bayatur>라고 하는 <용감한 사내 즉 용사勇士>라는 뜻을 가진 투르크 어語의 음역音譯이라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 말은 몽골어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같은 뜻인 [바하두르Bahadur-바아두르Ba'adur-바야두르Bayadur]와 매우 친밀성親密性을 보여준다.


4) 그렇다면 [단군조선제국]에서는 어떻게 썼을까?   지금도 우리 고어古語에 남아있는 [바우돌이]이다(바우쇠*돌쇠*쇠돌이라고도 부른다).   <바아-바야-바우*두르-도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시 말해 모두 <바위처럼 단단하고 강한 사내>로서 [용사勇士]를 의미한다.



참고參考로 [묵]은 분명하게 [모]와 통하고 있다(묵특-모돈).   이런 이름씨(모씨)는 우리 기록에 무수히 산재散在한다. [1]  그리고 몽골의 이름씨나 족명族名으로는 [몽蒙]이다.   그러므로 그의 아비인 두만頭曼이라는 이름이 난데없이 돌궐突厥의 토문(土門-Bumin)으로 또는 우리 영역領域인 <두만강豆滿江>에서 등장하는 일이나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이름에 [단군조선제국] 고유 어형語形이 많이 나타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2]


[1] 인명人名으로 모수리慕漱離 단군檀君*고구려 왕명王名으로 모본왕牟本王*김부식金富軾이 인용引用한 자료 책부원구冊府元龜와 남사南史에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의 이름 모태(募泰-양서梁書엔 모진募秦*통전通典엔 모진慕秦)

     

     울진鬱珍 봉평鳳坪 신라비新羅碑의 기록에서 법흥왕法興王을 지칭한 모즉지牟卽智 매금寐錦과 갈문왕葛文王 모심지牟心智 그리고 모진牟珍 사리공斯利公과 모리지牟利智를 비롯한 6부部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백제百濟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인 모대牟大 그리고 문주왕文周王(?)인 모도牟都


     마한馬韓 54국國 가운데 하나인 모수국牟水國*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나오는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왕王 모류지牟留知*선비계鮮卑系 모용씨慕容氏의 나라에 모용황慕容煌의 부하 모여니慕輿尼와 모여근慕輿根 그리고 모여개慕輿蓋 등


     지명地名으로서 모라(牟羅-마을)*모량부리(毛良夫里-전북全北 고창高敞)*신라新羅의 모지현牟支縣과 모지현牟山亭*발해渤海 안원부安遠部에 속한 모주慕州 물명物名으로서 쇠를 두드리는 도구인 <모루>*관명官命으로 박제상朴堤上이 받았던 관직官職인 <모말치毛末○>


[2] 오유烏維*구리호句麗湖*단제후旦?侯*호한야呼韓邪*질지?支*복주루復株累*호도이시도고약제呼都而尸道皐若? 일명一名 여輿*오주류烏珠留*오루烏累*오달제烏達?*남흉노南匈奴의 비比가 칭稱한 혜락시축제醯落尸逐?-2대 막-3대 한-4대 적-10대 정독시축후제亭獨尸逐侯?(사자師子)-11대 만씨시축후제万氏尸逐侯?(단檀)-12대 발-19대 어부라於扶羅*북흉노北匈奴의 포노蒲奴*우류優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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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묵특>의 아비였던 두만선우頭曼單于와의 갈등국면葛藤局面에서 보여주듯이 <흉노연합체匈奴聯合體>를 이 때 처음 형성시킨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다만 연합을 재조직하는 가운데 제국帝國의 기초를 다졌으며 정치적*군사적 역량을 더욱 집중시켰을 뿐이다.   따라서 [흉노제국匈奴帝國]은 서양 학자나 한족漢族들이 포장包裝한 것처럼 진秦의 통일에 직접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결단코 아니다.


이어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행동은 <군사적 모험의 증가>이다.   정주국가定住國家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대부분 국가의 권위權威와 위엄을 높이려는 시도(제齊 환공桓公의 산융山戎 정벌征伐*조양자趙襄子의 북벌北伐*진시황秦始皇의 호胡 원정遠征 등)였다.   여기에 흉노匈奴는 갑자기 타격打擊을 받은 기억에 대한 복수復讐와 보복報復의 성격을 추가追加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흉노제국匈奴帝國]이라는 정치단위가 형성된 뒤 뒤따르는 군사원정軍士遠征은 새로운 활력活力이 형성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 자체가 정립定立되는 과정의 일부였다고 보아야 한다.   자신의 리더십을 따르는 <군사귀족계급軍事貴族階級>들에게 보상報償할 방법을 확보하고 지배씨족支配氏族의 위계질서位階秩序를 단단히 할 수단으로서 군사행동은 필요불가결한 측면側面이기도 하였다.


군사적 모험을 거듭하는 동안 공동의 적敵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거기에 과거의 기억에 대한 분노가 겹치면 위기 상황을 정치적으로 해소解消하려고 결합된 다양한 집단세력들은 차츰 우발적偶發的이고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집합체가 아닌 자연스럽게 결속結束된 결정체結晶體로 융합融合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국가적 권력과 특권特權이 초부족적超部族的인 제국帝國 차원次元으로 이전移轉되면서 카리스마적인 씨족氏族이 이러한 특권特權을 <파워 엘리트>로 구조화된 위계질서位階秩序를 통해 행사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흉노제국匈奴帝國의 탄생과 성장]에 관한 진실이며 이후에 거듭해서 유사하게 등장하는 [초원제국草原帝國]들의 역사적 과정을 하나로 이어주는 항상적恒常的인 연결고리였다.



□□□□□□□□□□ [뒤집어 보기] □□□□□□□□□□



마구馬具가 특징인 [내몽골에서 오르도스Ordos]에 이르는 금속문화金屬文化는 <그리핀Griffin>과 같은 동물들이 약동적躍動的으로 조각彫刻되어 있는데 당시 금속가공金屬加工에 관한 한 고도高度의 기술력이 세련된 예술성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호화호특呼和浩特>에서 발굴된 철제유물(鐵製遺物-특히 활촉과 창槍)들은 제련製鍊 기술도 월등하게 정교精巧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흉노匈奴가 <일축왕日逐王> 밑에 <동복도위?僕都尉>를 두고 과거의 유산遺産을 물려받았음이 확실한 서역西域의 물산物産과 철鐵을 장악하였던 점*흉노匈奴 이전에도 북중국北中國에서 활동한 동방東方 세력들이 대부분 규격화規格化*정형화定型化*표준화標準化되고 월등한 금속무기金屬武器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과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착강국?羌國과 난도국難兜國 그리고 구자국龜玆國] 등에서 많은 병기兵器가 생산되었다고 하는 기록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이미 오래 전부터 [북방제국北方帝國]의 통제 아래 청동靑銅과 철산지鐵産地에 대한 지배력이 확고하게 형성되고 있었음 [1]을 증명해준다.


[1] 1928년 <소스노프스키>에 의해 바이칼 호湖 남쪽의 [고르디시체] 유적遺跡에서 대량의 철제품鐵製品과 함께 제철유적지製鐵遺蹟址가 발굴되었으며 이 지역 일대는 고대古代로부터 훌륭한 철산지鐵産地로 알려져 왔다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이렇듯 금속 제련製鍊과 가공加工에 관한 뛰어난 기술 수준을 비롯하여 기하학적幾何學的 무늬나 극히 추상화抽象化된 동물 문양文樣 모티브는 수원綏遠 청동기靑銅器나 그 후 철기문화鐵器文化의 예술성이 극도極度의 발전 상태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데 이는 흉노제국匈奴帝國이 이미 최고의 기술수준을 가진 [전문수공업자집단專門手工業者集團]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예술적 발전과 세련된 고도화高度化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게 상식이니만큼 어느 한 시기에 별안간 튀어나온 제국帝國이 그걸 처음으로 창조創造하였다고 한다면 설득력을 잃는다.   따라서 분명하게도 이전의 [단군조선제국-동호제국東胡帝國]의 자양분滋養分 아래 자연스럽게 성장 발전한 기술력과 예술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고 거꾸로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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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흉노匈奴]가 동호東胡로 표현된 [단군조선제국]의 체제體制와 유습遺習들을 그대로 지켜나간 권력적 통치와 사회정치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음은 기록으로서도 확인된다(기록으로 보아도 입증立證되는데 해족奚族은 흉노匈奴의 갈래라는 게 통설通說이다 ? 그런데 신당서新唐書는 해海가 동호東胡의 갈래라 하였다 ? 결국 해海와 흉노匈奴는 동호東胡의 갈래이며 원래는 하나였다) .



흉노匈奴의 선우單于가 사망하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대신大臣과 후비后妃들이 순장殉葬되었다.   <사기史記 권110>



전성기 흉노匈奴의 영역은 북쪽으로 혼유渾庾*굴사(屈射-굴역)*정령(丁靈-丁令으로 예니세이 강江 유역)*격곤(?昆-예니세이 강江 상류上流인 키르키즈Kyrgyz)*신리(薪犁-바이칼 호湖 주변과 키르키즈스탄Kyrgyzstan) 등의 다섯 나라를 정복하고 남방으로는 위수渭水와 오르도스Ordos와 티벳Tibet 고원高原을 어우르면서 한漢의 대군代郡과 운중군雲中郡과 상곡군上谷郡까지를


동부로는 선비鮮卑를 지배하면서 동호東胡의 후예後裔들인 부여夫餘 ? 고구려高句麗와 맞닿고 서방西方으로는 상군上郡 서西편으로 저족?族과 강족羌族과 누란樓蘭*호게(呼揭-타지키스탄Tajikistan의 호젠트Khodzhent)와


티베트와 오손(烏孫-천산天山 산맥 북쪽지방)을 굴복시키고 월씨(月支-감숙甘肅 지역)를 쫓아내어 그 지역을 차지했다.   이로서 서쪽 변경邊境은 [시르다리아Sirdarya 강江-일리illi 강江-아랄Aral 해海(동東 투르키스탄인 지금의 신강新疆 위구르 자치구를 포함한다)를 넘어 아무다리아Amudarya 강江 즉 규수?水]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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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匈奴>가 [단군조선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다음의 기록과 언어형태학적言語形態學的 분석을 비교하여 고찰考察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동호東胡의 갈래로서 인정되는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의 나라 이름은 서로 전혀 다른 듯하지만 우리말로 풀면 모두 [하늘처럼 크고 높다는 의미인 솟다*솝다 ? 고高*부夫]이다.  


발음상發音上으로 여餘(黎)나 려麗가 모두 [리]이므로 [?리 즉 속리-솟리-솝리나 소부리]로 말하여진다.   이와 관련하여 부여夫餘를 [부리夫黎 다시 말해 소부리에서 온 부리]로 대부여大夫餘를 [솟부리에서 온 소부리]로 고구려高句麗의 기원起源을 [색리索離]라고 기록한 대목이 설득력을 비로소 확보한다.


이 말은 곧바로 흉노匈奴의 근원根源을 설명한 [환단고기桓檀古記] 내용의 <색정索情]과 연결되는데 옛 우리 조상祖上들이 <이름씨>를 마을이나 나라 명칭名稱으로 했다는 사실과도 정확하게 부합附合된다.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옛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사傳寫하였음이 더욱 분명해지는 부분이다.


아울러 서방 학계學界에서도 고대古代에 동방東方에서 온 강력한 기마전사집단騎馬戰士集團을 [삭Sag 또는 사카Saka-나중의 소그드Sogd가 여기에서 전화轉化하였다]이라고 기록하거나 발해渤海 솔빈부率賓府의 중심지를 [속주涑州]라고 한 기록과 지명地名으로서 증명되듯이


부여扶餘의 옛 이름이 [소부리]였으며 익산(益山-이리裡里)을 현지現地 사람들은 [솜리]로 말한다는 사실도 결국 [솝리-소부리-한자표기漢字表記된 속리速離*俗離]가 모두 넘나들고 있었음을 밝혀주어 매우 주목을 요한다.   아마 몽골이 우리나라를 [솔롱그스]라고 부르는 이유도 <속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열양列陽의 욕살褥薩인 [색정索情]이 모반謀叛을 꾀하므로 약수弱水로 유배流配시켰다가 후에 뉘우치는 빛이 보였으므로 죄를 용서해주고 그 지방을 다스리게 했다.  그가 뒤에 흉노족匈奴族의 조상祖上이 되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가륵嘉勒 단군檀君 조條>



그렇다면 흉노匈奴의 존재는 언제부터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할까?   한족漢族의 기록이 매우 의도적이며 부실不實하니 우리 고전古典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북막北漠>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북막北漠이 쳐들어 와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 등).   아마도 이 무렵부터 서부 지역에 있는 [단군조선제국]의 한 부部로서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다시 특별하게 주목할 부분이 있다.   한족漢族들도 인정하는 흉노匈奴의 북중국北中國과 서방진입西方進入을 위한 아주 중요한 거점據點 지역을 [오르도스Ordos-올두스]라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옮겼을 터인데 완전하게 [단군조선제국]의 어군語群을 그대로 공유共有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事例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우르-울]이라는 단어가 있다.   [울타리를 치다*한 울타리에서 산다]라는 용례用例에서 보여주듯이 무리나 집단을 경계지어주는 범위나 영역領域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러한 형태를 갖춘 집단거주지集團居住地를 [마을*고을]이라고 확장시킨다.   <마을>은 [마-물가 + 을-울 즉 촌락村落] 이며 <고을>은 [고-골 즉 골짜기인 산골 + 을-울 즉 부락部落]이라는 순수한 [단군조선 계열 어군語群]이다.   한번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몽골어로 집단 모전천막毛廛天幕을 이룬 형태를 [우루스-울루스Urus]라고 하는데 [우루-울]의 형태소形態素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2) 몽골부족들에게 영지領地를 나누어줄 때 그 관할 구역을 [오르두Ordu*오르도]라고 한다(본영本營이나 궁전宮殿이 있는 곳*도읍지都邑地를 뜻하기도 한다).  [오르-우르-울]의 기본적인 어근語根이 녹아있음을 일견一見한다.   또한 어미語尾 [두]는 분명히 <땅이라는 뜻인 우리말 터*다라에서 변화한 다*도*두의 어형語形>일 것이다.


3) 흉노匈奴의 핵심거점核心據點 지역 또한 확실하게 [오르도스-올두스]라고 부르고 있다.


4) 중앙아시아의 핵심 쟁탈지역이었던 거점지대據點地帶를 [율두즈Yulduz]라고 불렀는데 여전하게 [오르도스Ordos-우루두스]의 이사형異寫形이다.


5) 유목제국遊牧帝國 세력의 주요 진출지進出地였던 <터어키Turkey>에서도 군대를 [오르두]라고 한다.



두 번째로 [다루-달 즉『땅이나 터』를 의미하는 언어계열]의 일치성一致性이다.   [다루-달]을 어근語根으로 하는 용례用例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인명人名과 지명地名에 기원起源을 두고 있다.


백제百濟의 [다루왕多婁王]이나 우리 地名 가운데 [다다라多多羅*다라多羅*달이達已] 또는 북방언어北方言語에서 <특권층特權層*지배층支配層>을 뜻하는 [다르칸Darkhan]으로 굳어지는데 우리말 <다스리다*지배하다는 의미인 다루다>도 여기에서 나왔다.   <다르칸 벌>이란 [달구벌-나중에 다루-달기-닭으로 변하여 계림鷄林이라는 한자식漢字式 표현도 등장한다]*<다루해> 집단인 [석탈해昔脫解 씨족氏族]* 몽골의 다루가치*<다루씨나 다루치>인 [월씨月支] 등도 다 마찬가지이다.  

참고參考로 석씨昔氏는 우리민족에서 즐겨 사용했던 [이름씨를 족명族名이나 지명地名으로 삼는다]는 전형적인 사례事例로서 [석씨石氏-도루씨 즉 다루씨]라고 보여 진다.   석탈해昔脫解가 북방계열이 분명한 야장冶匠 출신이며 [갈족?族-가라족]의 성씨姓氏가 한자漢字 표기로 석씨石氏인 점도 좋은 비교가 된다.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어 주는 사례事例가 있다.   흉노匈奴가 남북으로 갈라진 다음 AD 166년 선비鮮卑의 단석괴檀石槐에게 치명적인 타격打擊을 입고 마침내 서방西方으로 이동하였다.   이 때 <호연씨呼衍氏> 출신으로 북흉노北匈奴 우곡려왕右谷?王이었던 어제제於除?가 8부部 2만 여명을 이끌고 포류蒲類 해변海邊에서 머물며 북선우北單于라 칭稱한다(후한서後漢書 원안전袁安傳).


이 기록에서 주목할 부분은 포류해(蒲類海-천산天山 동부 북사면北斜面에 위치)이다.  흉노匈奴의 서역西域 경영 거점據點으로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으며 일축왕日逐王이 관리하였는데 바로 [바르쿨Barcol]이라고 불려졌다.    여기에서 [쿨col*칼cal]은 <이식쿨*바이칼>처럼 호수湖水나 내해內海를 의미한다.   때문에 이 지역의 이름은 [바르-발]로서 우리말인 [밝 즉 발 계열]임을 알려준다.


결국 [단군조선제국-흉노제국匈奴帝國-돌궐제국突厥帝國-몽골제국] 모두 기본적인 생활 습속習俗이나 관습적慣習的인 중요한 어휘語彙에 관한한 동일한 어군語群들을 공유共有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연確然하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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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30년-BC 200년> 시기 흉노匈奴의 발흥發興 및 성장과 거의 동시에 <미누신스크Minusinsk> 지역에서도 <철기문화鐵器文化>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흉노匈奴가 동호東胡의 서방西方을 맡아 오손烏孫과 월지月支를 제어制御하면서 <미누신스크>의 철야금소鐵冶金所와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부분이다.   이는 후에 흉노匈奴가 강력한 [군사제국]으로 일어서는데 막강한 도움을 주었다.


이 무렵에도 [동방제국東方帝國-단군조선제국]과 천천히 분리分離 과정을 걸었던 [서방초원제국西方草原帝國]들은 [단군조선]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흉노제국匈奴帝國]도 나라를 세 구역區域으로 나누었다.  


이후부터 [중심지역]은 전통적으로 오르콘Orkhon 강江 상류上流의 산지山地인 카라코룸(Karakorum-가라계 지명地名이다)*다음 계승자繼承者가 다스[동부]는 케룰렌Kherlen 강江 상류上流*[서방西方]을 견제牽制하는 우현왕右賢王 지역으로 항가이Hangay 산맥山脈에 위치한 울리아수타이Uliasutai(Albert Herrmann  Der Gobi im Zeitalter der Hunnenherrschaft  1935  131p)였다. 


모돈선우冒頓單于는 진한秦漢 교체기交替期를 틈타 BC 201년에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지역을 공격하여 이전에 잃은 땅을 모두 회복했다.   <BC 177년-BC 176년>에는 감숙甘肅의 월씨月支에게[1]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월씨月支는 결국 아들인 노상선우老上單于가 그 위협을 완전히 끝내고 왕王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듦으로서 감숙甘肅을 떠나 서쪽으로 이주移住하게 만들었다)


[1] 월씨月支(氏)도 [단군조선 제국]의 일원一圓이었음은 원래 살던 감숙甘肅 서부지역을 지리학자 프톨레미Ptolemy가 토가라(Thogara-가라계 어군語群으로서 혹은 타구리Thagouri라고도 하였다) 라고 기록했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달씨-달지-다루지]에서 비롯된 어원語原을 가지고 있는 지명地名임도 알게 해주는데(자신을 달씨Thagi라고 부르는 가라에서 딴 Tha-g 어근語根이다) 타지Tadzhi-키스탄kistan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는 섬서陝西와 산서山西 남부까지 활동반경으로 삼았던 서융西戎*강융羌戎*견융(犬戎*?戎)의 잔여 세력들을 포용包容하였다.



월씨月支는 고비 사막을 가로질러 투르키스탄[1] 을 거쳐 박트리아Bactria로 쇄도殺到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다.   <스트라보Strabo>는 이 민족들을 <토하로이Tokharoi>라고 하였는데 그리스Greece 역사가歷史家들의 토하로이Tokharoi*산스크리트어로 토하라Tokhara로서 토가라Thogara의 이형異形이다.


[1] 동東 투르키스탄은 지금의 신강新疆 위구르 자치구自治區이며 서西 투르키스탄은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우즈베키스탄Uzbekistan*타지키스탄Tajikistan*키르키즈스탄Kyrgyzstan*카자흐스탄Kazakhstan]을 말한다. 



대부분의 학자學者들은 중국中國의 기록에 정확하게 BC 160년경 월씨月支가 마지막으로 대하大夏 즉 박트리아Bactria의 변경邊境인 페르가나(Fergana-대완大宛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의 주州)에 있는 시르다리아(Sirdarya-그리스어로 약사르테스Jaxartes)강江 상류上流에 도달했다 고 한 걸 근거로 하여 동일시同一視 하고 있다(한서漢書를 예例로 든 스트라보Strabo*Toru Haneda*Sigmund Feist*W. W. Tarn*H. W. Bailey의 Ttaugara).


이후 <BC 140년-BC 130년> 사이에 박트리아Bactria의 그리스 왕王 헬리오클레스Heliocles를 무너뜨린 민족으로서 [아시오이Asioi*파시아노이Pasianoi*토하로이Tokharoi*사카라울라이Sakaraulai]를 들고 있는데 모두 약사르테스Jaxartes 강江 [1]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는데 그리스 인人들이나 인근隣近 지역에서도 출자出自를 모르는 민족이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1] 약사르테스Jaxartes 강江은 시르다리아Sirdarya 강江으로 동남쪽에서 아무다리아Amudarya 강江(옥서스Oxsus 강江)은 서남쪽에서 아랄Aral 해海로 들어가는데 그 사이의 지역을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지역)라고 하였다.

  


사르팡티에르Charpentier는 [아시오이Asioi]를 폼페이우스Pompeius 트로구스Trogus가 말한 <아시아노이Asianoi>로 보아 중국中國의 사가史家들이 흉노匈奴에 의해 일리illi로 밀려난 오손烏孫으로 인정했다(그는 오손烏孫을 알란Alan으로 알려진 즉 스키타이Scythian를 압박하던 사르마트Sarmat 부족의 선조先祖로 보았다).


[사카라울라이Sakaraulai]는 다르게 사카라와카Sakarawaka로도 불리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사카라Sakara]라는 이름을 사용한듯하다.   그런데 이 명칭은 분명하게도 <토가라-사가라>처럼 가라계가 어원語原이다(삭Sak은 색索으로도 표현되는 솝리-솟으로 크고 높다는 우리말이 어원語原임을 이미 밝혔다).   스키타이Scythian의 갈래로 북쪽 지방인 페르가나Fergana*타쉬켄트Tashkent*카쉬가르Kashgar에 살고 있었다.


아무튼 [월씨月支]는 <사마천司馬遷>에 따르면 장건張騫이 BC 128년 방문했을 때 옥서스(Oxsus-규수?水)의 북방인 소그디아나(Sogdiana-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많은 동양의 학자들은 월씨月支가 박트리아(Bactria-대하大夏)로 들어간 뒤  그 땅을 5명의 흡후(翕侯-야부구Yabghu 즉 수령首領)로 나누었다고 기록한 [후한서後漢書]의 사실을 들어 옥서스Oxsus 강江을 넘어 그 지역까지 장악했음을 단언한다.


파르티아Parthia 제국帝國(지금의 이란Iran 지역)의 왕王 아르테바누스Artebanus 2세가 <BC 124년-BC 123년> 무렵 [토하리Tokhari]에 반격하다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로 볼진대 이 시기 이후에도 월씨(月支-月氏)가 박트리아(토하리스탄Tokharistan)에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폼페이우스 트로구스).


이후 계속 팽창하여 사카Saka 인人들이 지배하던 <이란 동부에서 아프카니스탄 남서부에 걸친 세이스탄Sistan-아프카니스탄Afghanistan 남부인 칸다하르Kandahar>에서 <카불Kabul-인도 북서부인 펀잡Punjab-인도 북부인 마투라Mathura>까지 점령하면서


AD 1C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쿠샨(Kushan-타지키스탄*카스피Caspie 해海*아프가니스탄*갠지스Ganges 강江 상류上流를 가로지르던 제국帝國으로 <귀상貴霜>이라고도 했다) 왕조王朝를 이루었다(R. Ghirshman  Fouiles ? Begram  1943-1944 70p-71p*Sten Konow  Beitrag zur Kenntniss der Indoskythen  220p*H. W. Bailey  Ttaugara  136  4p*Henning  Argi and the Tokharians  1938  545p).



이때부터 월씨月氏가 매우 강성强盛해졌다.   모든 왕국王國들이 그들을 귀상貴霜이라고 불렀지만 한漢은 예전 이름대로 월씨月氏라고 불렀다.   <후한서後漢書>



흉노匈奴는 감숙甘肅에서 월씨月支를 쫓아냄으로서 멀리 인도와 서아시아까지도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연쇄連鎖를 만들어내었다.   [헬레니즘Hellenism 세계]는 아프카니스탄Afghanistan을 잃어버렸고 흉노匈奴는 그곳에서 알렉산더Alexander의 자취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파르티아Partia의 이란Iran은 격렬하게 흔들렸으며 감숙甘肅에서 쫓겨 나온 세력들은 카불Kabul과 인도 북서부에 예기치 않았던 제국帝國을 건설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역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북방 초원草原의 한쪽 끝에서 일어난 작은 파도波濤는 수시로 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넓은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유라시아 초원벨트] 한쪽에서의 충격衝擊이 이 지역의 이후 문명에 얼마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지? 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事例이다.


흉노제국匈奴帝國이 초기부터 타림Tarim 북부 오아시스Oasis 지대 [1]까지 이르는 <비단길Silk road>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변경지역邊境地域을 확보하기 위해 BC 167년 한漢의 도읍都邑인 장안長安에서 멀지 않은 섬서陝西 공격을 시작으로 산서山西에 이르는 전 지역을 위협하였다는 사실은 한족漢族들이 역설力說한 [멍청한 군주君主로 대표되는 야만문명野蠻文明이 아닌 일찍부터 교역交易의 이점利點을 노렸던 현명한 제국帝國이었음]을 똑똑하게 보여준다.


[1] 북쪽의 투르판(Turpan-차사車師)*카라샤르(Karashar-언기焉耆)*쿠차(Kucha-구자龜玆)*악수(고묵古墨)*우치 투르판(온숙溫宿)*카쉬가르(Kashgar-소륵疏勒)가 있으며 남부에는 롭Lob 노르nor 호湖 부근의 누란樓蘭*호탄(우전于?)*야르칸드(Yarkand-사차莎車) 등이 있다.



이 같은 진실은 전세戰勢를 뒤집은 한무제漢武帝가 서북으로 북진北進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이 <비단 길>을 영구히 장악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보면 이해가 된다.   바로 BC 127년부터 BC 111년 사이에 목젖인 감숙甘肅 지역에 일련一連의 둔전屯田과 군현(郡縣-양주凉州의 무위武威*감주甘州의 장액張掖*감주肅州의 주천酒泉*돈황敦煌)을 설치하는 가운데


BC 60년에 마침내 서역도위西域都尉를 만들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원草原에서 얻을 수 없는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 비축備蓄의 보고寶庫를 잃어버린 흉노匈奴가 이후 급속하게 몰락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를 제공한 전환점轉換點이었다.


BC 68년 호연제壺衍? 선우單于가 죽은 뒤 승계권承繼權 다툼이 일어나 아우였던 허려권거虛閭權渠가 선우單于에 오른다 ? BC 60년 난립亂立한 5명의 선우單于를 누르고 두만頭曼의 13세 손孫인 악연구제握衍??가 태자太子였던 질지?支를 몰아내고 다음 선우單于 자리를 잇는다


? BC 58년 다시 악연구제握衍??를 쫓아낸 질지?支와 호한야呼韓邪(耶) 형제兄弟가 서로 다투다가 패배敗北한 호한야呼韓邪가 한漢의 도움으로 질지?支를 북방으로 쫓아내고 선우單于에 올랐다.


이윽고 BC 56년 외몽골을 중심으로 질지?支의 북흉노北匈奴와 내몽골에 근거지를 둔 호한야呼韓邪의 남흉노南匈奴로 분열되었는데 BC 43년 한漢 선제宣帝와 연합하여 질지?支를 다시 키르키즈(Kyrgyz-격혼?混 또는 격곤?昆) 초원草原으로 밀어낸다.


그러나 질지?支는 BC 41년부터 카지흐스탄Kazakhstan의 추Chu 강江과 탈라스Talas 강江 지역에 근거하여 투르키스탄Turkistan에서 자리를 잡아 강거羌渠*오손烏孫*호게呼揭*견곤堅昆*대월씨大月支*소그디아나Sogdiana 등을 복속시켜 중앙아시아는 물론 터어키Turkey 부근까지 영향을 미치는 패자覇者로 군림君臨하였다. 


BC 36년 한漢 원제元帝와 연합한 호한야呼韓邪의 공격을 받으면서 도읍都邑이 함락되고 한漢의 장군將軍 감연수甘延壽와 서역도호西域都護 진탕陳湯이 이끄는 7만 연합군聯合軍에 의해 <질지?支> 등 지배귀족 1318명이 참살斬殺됨으로서 결국 초원草原에서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잔여殘餘 세력들은 투르키스탄Turkistan과 카자흐스탄Kazakhstan을 거쳐 카스피 해海(Caspian Sea) 부근까지 이동하여 후일 이곳으로 내려온 집단들과 합쳐 [에프탈Ephthal 훈Huns]으로 다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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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노南匈奴는 한漢 왕조王朝가 붕괴되는 시점時點에 선비鮮卑의 압박으로 더욱 남방南方으로 진입하였다.   [황하黃河 만곡부卍曲部-오르도스Ordos 초원草原-알라샨Alashan 인접 지역]까지 들어가 삼국쟁패三國爭覇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   이어 호주천呼廚泉 선우單于(AD 195-AD 216)는 혼란에 빠진 북중국北中國 서부에 진출하여 산서성山西省 중심부인 평양平陽에 들어앉았다.


그는 먼 할머니가 한漢의 공주公主였다는 빌미로 왕성王姓인 유씨劉氏를 칭稱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AD 308년 유연劉淵은 5만 기병騎兵으로 몸을 일으켜 확고하게 기반을 잡고 있던 태원太原에서 북한(北漢-또는 전조前趙)황제皇帝의 지위地位에 올랐다.


북중국北中國의 <앗틸라Attila>였던 유총劉聰은 AD 311년 낙양洛陽을 점거占據하면서 진晋의 회제懷帝(BC 312)와 민제愍帝(BC 316)를 포로捕虜로 잡아끌고 가서 처형處刑시켰다.  


마침내 진晋은 낙양洛陽을 버리고 남경(南京-지금의 건강建康)으로 피난해 동진東晋 왕조王朝를 세운다(AD 317).   이후 전조前趙는 [산서山西 중남부-한수漢水 유역을 제외한 섬서陝西 북부-하북河北 남부-산동山東 북부-개봉開封을 제외한 하남河南 북부]까지 팽창하였다.


이 왕조王朝는 AD 329년 유총劉聰의 부관副官이었던 석륵石勒이 하북河北 남부 양국(襄國-현재의 순덕順德) 부근에 세운 후조後趙에 패배하여 흡수되었다.   후조後趙는 업(?-지금의 창덕彰德)에 도읍을 정했다.  


석호石虎때는 영역이 [한중漢中을 제외한 섬서陝西-대동大同을 제외한 산서山西-산동山東-호북湖北-호남湖南-회수淮水가 흐르는 강소江蘇 북부-안휘安徽]로 크게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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