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전적 의미
- 팔리어는 위빠사나는 한 단어가 아니라, 접두사 위와 본다는 의미는 빠스라는 어근을 가진 명사형
- 접두사 위는 대체로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분명히, 면밀히, 제대로
- 빠사나 역시 본다는 뜻이지만 안다의 의미를 포함한다.
=> 따라서 위빠사나는 나누어 봄, 뛰어난 봄, 면밀한 앎, 분명한 앎, 특별한 관찰로 해석할수 있다.
결국 위빠사나를 통찰(insight), 내적통찰, 관찰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2. 실천적 의미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남방 상좌부의 수행 전통에서는 위빠사나를 법의 3가지 특징인 삼법인에 비유한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하여 예리한 관찰력으로 무상, 고, 무아라는 고유의 특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란? 수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변화와, 변화에 따른 불만족, 그리고 그 안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
는 사실을 통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현상의 특성을 삼법인으로 본다. 무상, 고, 무아.....=> 있는 그대로 본다.
무상함이란 ?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즉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단 1) 개념은 변하지 않는다. 왜 1+1=2, 붓다가 삼법인을 설할때의 무상은 개념이 아닌 실제를 말하는 것이다.
=> 만약 개념이나 이미지를 대상으로 삼는다면 집중력은 키울 수 있는지 모르지만 무상하다는 실제는 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많은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초보자를 위해 마음의 현상보다 몸의 감각을 추천하기도 한다.
3. 경전적 의미
비구들이여, 사마타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마음이 계발 됩니다. 마음이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탐욕이 제거됩니다.
비구들이여,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지혜가 계발됩니다. 지혜가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무지가 제거됩니다.
비구들이여, 탐욕에 의해 오염된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무지에 의해 오염된 지혜는 계발되지 않습니다.
비구들이요.. 탐욕에서 벗어남으로 마음의 해탈을 얻고 무지에서 벗어남으로 지혜의 해탈을 얻습니다.
4. 수행방법론적 의미
미안마와 인도의 위빠사나 수행 지도자들은 팔정도의 정념인 사념처를 위빠사나 수행법이라고 설명한다.
사념처를 설명하는 몸, 느낌, 마음, 법의 네가지 대상에 주의를 확립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때 몸에 집중하는 것을 신념처라고 부르는데...
-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무상에 대한 이해의 시작은 무아에서 완성된다. 무상의 이해는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한다.
위빠사나는 무상을 통해 무아를 체득하는 방법이다.
위빠사나는 수행자는 먼저 계를 지키고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불선을 막아 끊고, 선함을 계발 유지하는 노력과 더불어...
주시(사티 sati)와 집중(사마티 samadhi)을 활용한다. 수행자는 이 과정에서 분명한 앎(알아차림, 심파잔나 sampajanna)
을 지니고 사성제(몸, 느낌, 마음, 법) 에 대한 바른 견해와 감각적 욕망과 나쁜 사유가 없는 바른 사유라는 지혜를 더욱 계발하게 된다. 이처럼 위빠사나는 삼학(무상, 고 무아)을 통해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법이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아 삼법인을 통찰하고 지혜를 통해 무지로부터 벗어 날수 있다면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수 있다. 삼학과 팔정도와 분리하여 진행할수 없다.
통찰 혹은 꿰둟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본다는 뜻일까? 바로 내가 경험하는 온갖 사물과 사건들의 실체를 본다는 것이다. 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나에게 괴로우을 주게 마련이지만 (일체개 고), 세상 만물이 모두 변하는 것이어서 고정된 실체란 없다.(제행 무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의식의 주체 역시 텅빈것이고 특정한 실체가 없다는 것(제법무아)을 꿰뚫어 보는 것이 위빠사나다.
사마타는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 감가의 주시에서 의도의 주시로 관찰 영역 확장
수행자는 행선을 통해 부멋보다 먼저 발목아래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놓치지 않고 주시해야한다. 이것이 숙달되면 명칭과 동작이 일치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이것도 숙달되면 면밀한 주시뿐만 아니라 행위를 하기 이전에 의도가 일어나는 것을 주시해야한다.
수행자는 의도가 일어난 다음 동작하는 것을 분명히 알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느낌을 면면히 주시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왼발이면, 왼발임을 알고, 발을 들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발을 들면 듦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나아감을 알고, 놓으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놓음을 , 체중의 중심이 옮겨질때의 느낌등 모든 움직임에서 오는 느낌, 그리고 움직이려는 의도까지 무엇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것이다.
어떤 수행자는 망상에 대해 무의식은 표출로 중요한 의미를 담아 해석하려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정신분석과 다르다. 과거의 중요한 무엇인가가 내재했다가 현재의 고요함을 의지하여 튀어나왔다는 생각은 내려놓아도 좋다. 어떠한 현상이라든가 현재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할 필요는 없다. 방황하는 마음이 있음을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리고 현재의 숙제인 동작으로 돌아오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수행자에게 무조건 가려움을 참으라는 것이 아니다. 가려움이 있을 때 그 감각을 주시하고, 해결하려고하는 의도를 주시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주시하고, 다시 본래의 행선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과정의 연속이다. 행선 중에 가려움이 나타났다고 해서 가려움이 행선의 방해 요소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려움은 때가 되어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수행자의 임무는 주시하여 아는 것이다.
의도도 주시의 대상
행선을 지속하기 위해 뒤로 돌아서려 할 때에는 돌아서려함...돌아서려함 하면서 돌아서려는 의도를 주시하고, 돌아감, 돌아감, 돌악마 하면서 몸과발의 움직임을 면면히 주시하면 된다. 보이지 않는 의도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의도가 보이지 않으면 동작을 통한 느낌과 명칭에만 집중해도 된다.
행성이나 주선이 끝나고 앉아서 하는 수행을 하고 싶으면 "않고 싶다"라는 의도를 주시하고, 앉을 때 역시 무겁게 내려앉은 몸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한다. 움직임이 그치고 몸이 고요해지면 다시 배의 오르내림을 일어남, 사라짐으로 주시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기능
1. 이름 붙이기(attention)
2. 주의(sati)
3. 알아차림(sampajanna)
1. 이름 붙이기 : 대상을 주시할때.....
2. 주시 : 주시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기능이다. 주시는 말 그대로 대상에 마음에 모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즉, 수행자의 몸과 마음에서 현재 일어나는 현상을 편견, 관념, 판단없이 조급하거나 느슨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3. 주시는 빠알리어 "사띠"의 번역어이다. 먼저 사따란 "기억하다"를 어원으로하는 용어이다. 하나는 기억의 의미이고 하나는 주시라는 의미이다.
이 두가지 해석에 차의가 있다면 기억은 이미 경험한 사실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말하고, 주시는 현재의 대상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물론 주시와 기억을 유사한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주시를 통해 대상을 알고 있는 상태는 찰나에 지나간 과거의 현상을 인지하는 것이기에 기억의 넓은 의미 안에 포함될수 있다.
하지만 주시는 현재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의미로 한정하고자한다.
=> 이와 같은 사띠는 염, 억념, 의지, 지념, 수의 등으로 한역되었고, 불교학자들에 의해 마음챙김, 마음집중, 마음지킴, 알아차림, 수동적 주의집중 등으로 번역되었다.
특히 마인드풀니스라는 영역은 최근 미국안에서 명상의 열풍을 일으키는데 크기 기여했다.
인지행동치료의 제 3동향으로 명상의 새 이름으로 위바싸나 수행의 핵심기능인 주시를 활요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다만 현재의 실제만을 바라볼수 있는주시가,, 과거나 미래의 개념까지 다루는 마인드풀니스로의 확장은 주의를 요한다.
주시는 마치 시냇가에 앉아 물속에서 노는 고기를 놓치지 않고 들여다 보듯이, 객관적으로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모든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변화를 연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주시는 대상을 조작하지 않고 잊지 않으며 포착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수행자가 주시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대상을 놓칠수 없으며, 만약 수행자가 대상을 놓쳤다면 그 순간 수행자에게 주시 없는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주시가 잇는 동안에는 불선한 것이 들어올수 없다. 이렇게 주시를 지속하면 그 현상에 대한 분명한 앎(알아차림, 삼파잔다)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