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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일식』과 몰개아적(沒個我的) 차별화
- 이순옥 시인의 감성적 대응과 해체의 시학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고문)
1. 사유 뒤의 감성적 식별력
모름지기 한 편의 시는 시적 상상력에 의한 생명의 재해석으로 상상과 추상에 의한 인식의 세계에서 창출되기에 리듬과 형태를 갖춰야 한다. 까닭에 내면의식을 배제하고 사회적 허명(虛名)에 편승하는 기교주의에 빠져 주제가 빈곤한 오늘의 현대시가 응당 해결할 문제의식인 삶의 비극성을 따뜻한 감성으로 다독이고 치유하기에 거리감 없는 시인과의 필연적 만남은 한층 더 시사적(示唆的)이다. 또 한편 그 자신의 내면 심리는 자연을 거부하거나 자연과 대립하는 시적 상상력이 새로운 추이와 변형으로 자연에 순응하고 모방하는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유지하기에 호흡을 가다듬고 일차적으로 헤아릴 바다.
그 같은 맥락에서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 곧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고 자신의 자연과 조건들을 전유하라.”라는 리듬학자 앙리 르페브르(Lefebvre henri)의 지적은, 생성된 공간의 개념으로 통용되는 일례다. 또 한편 세월은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로 채워가는 것이기’에 매혹적 형사(形似)와 깊은 사유의 이중거리에 관한 도전은 그 의미가 지대하다. 차제에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이 “살아있는 자만이 함께 춤추고 기뻐할 수 있다.”라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금(now), 살아있는 여기(here)’에 맞물린 상관성을 가늠하면 당당한 자존감의 실체로서 ‘감사의 시학’을 새삼 가늠할 일이다.
또 한편 오랜 날,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특정한 사람과의 만남은 운명적임을 역설한 측면에서 그와의 관계 층위 또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비교적 그 자신이 자긍심을 지니고 그간에 묶어낸 시집『월영가』,『하월가』,『상월가』에 수록된 대다수 시편의 시적 의미망(網)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평자가 진술한 행위 일체는 창조적 영혼은 못내 위대하고 아름답기에 ‘생명의 통신과 상상력의 조화로움’은 시적 의미와 비중이 주어지는 정신작업으로 더없이 유의미하다.
모처럼 평자가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개기일식』과 몰개아적(沒個我的) 차별화 - 이순옥 시인의 감성적 대응과 해체의 시학」을 전제한 의중은,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문제로 갈등으로 치닫는 삶의 시간대에서 ‘불멸의 예술혼’을 줄기차게 ‘모성의 표징인 달(月)을 주제’로 꽃 피워낸 월영(月影) 이순옥 시인이 저토록 ‘설레는 정감’으로 중량감 있게 다룬『상월가』에 잇닿아 의욕적으로 간행한 제4시집『개기일식』(채운제, 2024)의 편집은 치밀한 구도처리로 결(結) 곱게 직조된 맥락이다.
특히 천문현상에서 개기일식(皆旣日蝕)의 개념은 ‘태양-지구-달 계에서 지구가 달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기에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임’도 그렇지만, 그 자신이 즉물적 대상을 시적 질료로 선정하여 보편적인 시 의미를 응축시킨 시적 행위로 삶의 일상에서 소중한 현재성을 ‘반 각의 짧은 시간’으로 절감한 의식의 전환은 충동적이다. 까닭에 튀르키예의 혁명 시인 나짐 히크메트 란(Nâzım Hikmet Ran)이 <신과의 인터뷰>에서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에 관한 일깨움에서 ‘주어진 하루가 내 인생의 최초의 날이고 최후의 날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갈 것이기에,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경계는 지극한 일깨움이다.
까닭에 “손끝에도 음률이 흐르는/생의 끝자락/끝내 지울 수 없는 서운함/많은 날의 기다림을 문신처럼 새겨넣네(개기일식)”의 보기처럼 그 자신의 동일화 현상에서 보편성은 새삼 확증될 것이나 또 그렇게 ‘잠들지 않은 채 꿈꾸듯 가을이 떨어졌어’라는 안쓰러움에 “아무도 못 찾을 제일 깊숙한 곳에/넣어두었던 타임캡슐 안/수천, 수만 번 쌓았을 행복(자화상)”의 일면은 “그냥 그 시시하고 두루뭉술한 단어와/어울리는 날/희망이 밀려오는데/밟고 싶지 않은 절망 함께 떠밀려 왔다(떠밀다, 떠밀리다)”의 끝에 또 그렇게 ‘책임을 져야 하는 하루가 지나는’ 그 허망함은 못내 비장하다.
모름지기 그 자신은 분망한 삶의 일상에서 ‘생각의 그물은 멈추지 않고’ 저토록 검게 바스러질지라도 “작은 우주가/타오르는 불꽃으로 수없이 담금질하여/마침내 형체를 갖춘/불의 차가움을 품은/봄 연못 위에 그려진 푸른 달빛아(상사화. 1)”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맑고 투명한 눈 속에 붉은 바다가 담겨있음’에 시적 정감은 확증된다. 따라서 ‘결국, 호기심이 승리하는’ 현실 상황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답을 듣지 못한 질문/머리에서 희석되겠지만 가시를 숨겨놓은 채/위태롭게 평지를 걷는 이 기분(불꽃과 나방)”도 몽롱함 뒤의 현기증은 ‘가슴속에 스며들어 마법처럼 따뜻하고 몽글몽글함’의 체험 뒤 시적 서정의 감미로움이다.
2. 구도자의 일상과 감동의 느낌표
어디까지나 진지한 탐색과 각고의 노력 끝에 형태의 추구에 도달하여 독자적인 조화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열중인 그 자신의 특이한 예술적 삶에 있어 ‘공간과 시각, 그리고 시적 중량감’에 관해 합리적 해법에 접근한 검색은 뜻깊다. 또 한편 생생한 일탈의 시 정신을 축(軸)으로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의 대비(對比)로서 자연에의 회귀를 형상화한 이순옥 시인의 역주 뒤 탈진된 영혼에 생명감을 소중하게 일깨워준 시격(詩格)은 끝내 담백하다. 그 같은 관점에서 의욕적이고 폭넓은 문단 활동을 끈질기게 펼쳐낸 제3 시집『상월가』(모던포엠, 2018)의 평설에서 ‘독자 곁으로 성큼 다가선 존재감 빛나는 시인의 행보가 지극히 감사한 일임’을 기술한 바다.
차제에 시각차를 달리한 “겨울밤을 닮은 눈을 하고선/아직 오지 않은 봄의 말을 한다/넌.(인연 플래그)”의 보기에서 ‘눈 속 잠시 피어나 향기만을 뿌리고 속절없이 진 매화꽃을 생각한다’라며 짐짓 그만의 어설픈 넋두리를 담담히 흘려내고 있다. 차제에 노련한 화가가 화필을 능란하게 활용하듯 그 자신이 한순간 다양한 수사적 기법으로 ‘왠지 말하기 어려운 설렘과 그리움’을 지상에 갈 앉는 나직한 음조로 “그립지만 가까이 있는/소박하고도 아련한 향기(모란에게 손짓)”에서 또 그렇게 시 짓기에 몰두하며 행간의 여백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 날(刃) 푸른 붓끝에서 ‘소록소록 사무치다 끝내 심장에서 불의 기둥’으로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 ‘이미 오래전 내 운명이 움직였던 대로’는 다소 본능적으로 의구심이 주어질 것이나 “바람에 휩쓸린 상처 입은 가슴/먼지 되어 바르작거리다(상냥한 거짓말)”의 정황에서 ‘영혼을 표현하는 춤 저리도 황홀한 허무’에 맞물린 일상의 삶은 모순성을 지닌다. 이같이 순수성이 무너져 내린 현상에서도 최소한 시대적 소임을 수행할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가슴 저미는 고통에서도 ‘지조 있는 삶을 살아가리라.'라는 확신을 지녀야 하는 까닭에 그 자신의 내면의식에 깊이 잠식된 일체의 ‘한국적인 자연과 서정’은 시 정신에 내재된 고향에 대한 모성회귀(母性回歸)로 아도니아(Legrand Antoine)적이거나 ‘여기가 어딘가, 조국 러시아에 돌아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라던 죠셉 샬라핀(Chaljapin)의 실향성(失鄕性)과 동일화된 그리움의 징표다.
무엇보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죽음을 껴안고 사는 존재이기에 지극선(至極善)의 심성으로, 서정성을 엄격히 통제하고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풀어 보인 ‘합리성, 그 모순에 대한 사유’로 적절하게 빚어낸 생명적인 결과는 당당한 존재감으로 변주되는 낌새다. 또 한편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프랑스 진화로의 선구자 뷔퐁(Comte de Buffon)의 역설에 결부를 지어 “액정마저 금이 간 휴대폰/번호가 맞지 않았을 그래서 구겨버렸을/꼭 쥔 한 장의 복권(뒷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그렇거니와 시적 질료가 다소 이질적인 ‘너를 보는 순간 나의 여름 앓이는 시작된다.’라는 전제에서 “열기를 바람을 삼킨,/그 허망한 향만 짙게 스몄다(자귀나무)”라는 일상의 세계와 즉물적 대상은 일정한 패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향한 허물 벗기다.
모름지기 삶의 일상에서 주어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앨런 왓츠(Allen Watts)의 “우리가 있는 장소가 우리의 사람됨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라는 주장은 획일화된 사고가 우리를 고정관념의 틀에 갇히게 하기에 발상의 전환은 끊임없이 반복할 점이다. 비록 살아 숨 쉬는 불특정한 시간대에서도 ‘동양 3국의 최초 여류시인’으로 27세 꽃다운 나이에 비운의 삶을 마감한 초희(楚姬)의 생가에서 그 자신이 ‘비를 뚫고 안개강 건너 당신 앞에 서서’ 나직이 읊조린 눈물 묻은 시편에서 “어제와 다른 시각/나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 갈/내 인생의 새로운 터닝포인트가/시작된 날이었어요(2020 난설헌과의 만남)”라는 그 감회는 따뜻한 감성의 울림인 측은지심이다.
또 한편 분망한 삶의 처소에서 시적 질료로 선택한 ‘자신의 귀에 대한 의심으로 피어난 한 송이 백목련’ 앞에서 “머나먼 우주에서 길을 잃는다 해도/그 감정은 다시 내게 돌아오는 법을 알지 못했다(북향화로 남아)”라는 뼈아픈 자아의 성찰은 때로 눈물겹지만, 다음의 시편에서 시적 공감을 감응하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건/인간이 가진 당연한 본능(해빙. 17ㅡ겨울의 종언, 봄의 도화선)”은 ‘한참 동안을 앉아 있었다 그 꽃잎을 손안에 가만히 붙잡은 채’에서 감당해야 할 숙명 뒤의 통곡이다.
특히 가뜩이나 하얀 안개에 휩싸여 어둠에 가려진 세상일도 ‘우리가 써 내려갈 내일은 얼마나 깊고 아득할까?’라는 그 반문 앞에서 “소멸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그 기간이 지난 관계는 폐기된다 할지라도(아주 사적인 영역)”에서 자존감을 지켜내되 물음표(?)로 사는 삶이 역사를 변화·발전시키기에 각박한 사회에서 감정의 느낌표로 사는 삶의 잠언을 겸허히 수락할 바다. 비록 까닭 없이 시간에 쫓기는 삶의 현장에서 ‘마주 끼고 앉은 밥상엔 따뜻한 온기 한줄기 없어도’ 지나치는 인사로 “파삭파삭 부서질 듯 표고버섯 튀김에도/갈 길 잃은 젓가락 허공을 휘젓는다(밥 한 끼 먹자)”라는 씁쓸한 메아리는 공허한 도시의 풍경화다. 그렇다. “사람은 기억에서 태어나고/평생 그 기억 속에 갇혀 살아가는/존재임을 증명해 가는 존재이니.(시절 인연)”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아니하는’ 그 역설(逆說)은 허망하다.
그처럼 매사에 역동적이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로 자기 헌신적인 면모와 여성스러움, 그리고 수분의 철학을 지닌 존재감은 한층 또렷하기에 ‘심장을 두른 살갗처럼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음’은 그 자신의 투명한 감정과 본능으로 “세월의 풍화되어 사라질지/잠시 의문 가져 보는 걸로 하다(입덕부정기)”의 보기나 “안온한 일상 속에 불안이 자리 잡는다/필요 이상의 고요가/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왈칵 차올랐다(희망고문)”에서 ‘절망 툭, 떨어졌다’라는 허망함에 맞물린 아련한 정한(情恨)이다.
각론하고 가뜩이나 지극히 자유로운 그 자신의 시 의식은 까닭 모를 ‘비탄의 울음’ 뒤에 “시간 따라 느리게 길을 걸었다/먹먹한 어둠도 시간을 따라 걷고 걸었다(덮기, 더하기)”에서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자신의 정취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점은 중량감이 실린 징후다. 따라서 창조적 영혼은 단절의 슬픔이나 혹여 내려놓기라는 치밀하게 직조된 시 의식의 심층에서 건져 올린 반짝이는 언어의 무늬로 해명된다.
차제에 ‘바로 이 순간, 목소리가 그 길을 따라오라는 듯 나를 끌기에’ 그 자신의 일관된 시적 의중은 잠재적이랄까? “툭, 건들면 와장창 깨질 것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해결되지 못할 물음으로/제어되지 않을 거예요(물들어가는)”에서 짐짓 시적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현장학습의 소중함이 새삼 가늠되기에 시 쓰기의 작업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행위’는 이처럼 특이하게 반복된다. 까닭에 ‘손때 가득 묻은 기억, 홀로 공포의 최대치가 명치를 찌른 그 날’도 예외일 수 없어 “진실된 눈동자는 유죄였다, 완전히/해결되지 않은 비밀은 주머니 속 철핀과도 같아(당신을 알고 싶어요ㅡ명성황후 생가에서)”에서 <2020 난설헌과의 만남>은 끝내 가슴 설렘의 뭉클함이다.
3. 묵언의 조응(照應)과 지탱하는 힘
일찍이 영국의 스펜더(Spender)가「시작의 과정(a making of poem)」에서 제시한 '기억력'은 특정한 감각적 인상으로 시인의 천부적 재능과 맞물린 상상력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언어학자 바트겐 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말은 곧 행동이다.’라는 지론은 스키마(schema)로 오래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지나간 사랑은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거 이미 쓸모없는데도 쓸데없이 반짝거리는 거’라는 자유자재의 언어 구사는 ‘잊은 것에 그리워 울다가’도 한순간의 몽환(夢幻)처럼 지극히 매혹적이다.
까닭에 다음의 시편에서 “그 말투, 그 억양, 그 음색/파르르 떨리는 눈빛에서/뚝뚝 떨어지던 진심(개망초)”의 일면은 멈춤을 예측할 수 없기에 ‘뚝뚝 떨어지던 진심’은 시적 상상력의 추이(推移)는 지켜볼 점이다. 또 한편 바람 앞에서도 시에 대한 열망으로 밤잠을 설치는 그 자신의 미적 공유의식은 ‘화합과 용서의 하나 되기’라는 시적 의미망의 확장으로 합일된 예술적 결속은 환희다. 따라서 ‘그 적막감에서 “누군가에겐 낮도 밤도 아닌/애매모호한 꿈의 경계(연두와 초록 사이)”를 주의 깊게 분별하면 ‘환상이라는 선물’에 대응할 분별력은 상이하게도 측은지심의 자극이다.
모처럼 그 자신의 시 창작의 큰 틀은 자연 친화적인 것과 고향과 연계된 물상, 그리고 진위와 명암이 밝히 드러나는 역사성에서 접목된 생명감에 잇닿은 연유로, 삶을 관조하면서 언어예술로 직조해낸 대다수 시편은 삶의 교시를 통해 창조해낸 정신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실체의 껍질을 벗기고 일순간 깊은 사상에 몰입하는 정신력은 직관적이기에 “괜찮으세요 안에는/참 많은 것들이 녹아있다(괜찮으세요)”에서 직물 대상은 거시적으로 영원한 시간과 맞물려 있기에 그 관조의 세계는 경이롭다.
결론적으로 그 자신의 시편에 수용된 시어의 사물성은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이다. 까닭에「선문학 권두칼럼」지면에서 특정한 시인의 편력(遍歷)은 다시금 검증될 것이나 따뜻한 감성의 시적 형상화에 전념하는 ‘천년 달(月)의 시인’에게 거는 평자의 절박한 기대치라면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이다. 모쪼록 삶의 역주 뒤 감춤의 비법을 터득하는 진정한 예감의 예언자로서 자긍심을 켜켜이 지켜줄 것은 당연지사이나 인간소외의 단절된 층위의 벽을 쌓고 다시 허무는 역사적 소임을 엄격하게 수행하는 ‘극소수의 창조자’로서의 그 견고한 정체성의 확립을 거듭 관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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