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기차 / 유병근
저쪽 들판이 가까이 온다는 느낌이었는데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몇 차례나 그랬다. 그것은 오고 가는 무연(無緣)이라며 달리는 열차 좌석에 등을 기댄다.
들판 너머에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느 지방이든 눈에 띄는 비슷비슷한 풍경이다. 마을도 들판을 따라 가까이 오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들판을 놓칠 수 없다고 마을은 들판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을 것이다. 마을이 생기면서 산을 깎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거친 풀밭을 농사하기에 알맞게 손발이 부르트도록 가꾸었다. 마을과 들판의 인연은 열차와 열차 선로 관계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산이 들판 발치를 툭 건드리듯이 나타난다. 밋밋한 평면 위에 치솟은 거무스레한 산 덩어리는 들판과 한 또래가 되어 고분고분 다가와 우두커니 서 있는가 싶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치솟다가 낮아지는 산의 물결에 얹힌 들판과 마을은 뗏목을 탄 느낌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가고 있었으리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다는 초등학교 졸업의 노래가 생각난다. 노래를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소매 끝으로 콧물을 훔치던 시절이 왈칵 밀려온다. 모처럼 하는 혼자만의 여행길에서 그런 시절이나마 대충대충 떠오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추억이 어디 따로 있다던가.
모내기가 끝난 들판은 반듯한 바둑판처럼 정갈하다. 옹기종기 섬이 들앉은 다도해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입술에 떨어진다. 입버릇처럼 바둑판이며 바다라는 말을 우물대면서 바둑을 두는 장면, 만선의 깃발을 나부끼며 들어오는 어선을 바다가 아닌 들판에서 본다.
편안함을 즐기는 어떤 승객은 느긋하게 눈을 감은 채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기차여행을 자주 하여 시간을 활용하는 요령을 나름대로 터득한 모양이다. 그렇게 하는 것도 일종의 여행상식이겠다. 정숙한 분위기에 더불어 어울려야 한다. 흔히 공동사회, 공익질서 어쩌고 하지 않던가. 그걸 망가트릴 경우 승객 틈에서 눈의 가시가 되기 쉽다.
저만치 도시 하나가 새롭게 얼굴을 내민다. 기차역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속도를 줄이지 않는 기차는 거기 관심이 없다. 본 척 만 척 그냥 달린다. 몇 개의 도시를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왔다.
‘저 도시는 그냥 지나쳐도 상관이 없어.’
기차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작은 도시를 차별하는 기차를 탄 나도 덩달아 으스대는 기분이 들어 꾸물대지 않는 경쾌한 속도감을 즐기려 느긋하게 등을 기댄다. 속도감을 즐기며 가당찮게도 나 또한 어울리지도 않게 콧대가 높아진다.
사람을 대할 적에도 으스댄 일은 더러 있었지 싶다. 그걸 전혀 뉘우치지 못하고 힘깨나 쓰는 사람의 권력을 믿고 상대에게 함부로 눈을 내리깔고 치뜨는 무례를 저지르며 못나게도 고개에 뻣뻣한 힘을 주었다. 기대던 권력이 사라지면 또 다른 권력을 찾아 줄을 대느라 허둥대는 가살 피우기는 한심한 꼴불견이었겠지만.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뜯어먹는 재미로 더 많은 약자를 거느리고자 한다. 그 반면 약한 자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뜯어먹을 상대가 없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불균형이 곰팡이처럼 자란다. 권력만이 세습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약육강식구조는 대를 물려주고 받는 공식으로 짜여 한번 부익부는 몇 대를 이어 거뜬하게 호강한다. 호강 뒤편의 빈익빈은 아무리 발버둥 처도 가난의 구덕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상을 찌푸린다.
여행은 여행 맛을 아는 사람이라야 자주 가방을 둘러메고 기차를 탄다. 낯선 풍물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쓰다듬어 추억의 꽂이에 끼우려 한다. 그런 점 여행은 새로움을 구하려는 신선한 충격이다. 흘러내리던 산자락이 바닷가에 우뚝 서서 바다를 물끄러미 본다든지, 더 높은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치켜세우는 산의 위력을 멀리서 바라보는 맛이 새롭다. 산과 바다의 깊은 침묵 속에 들앉아 침묵과 한 몸이 되어보는 환상에 젖기도 한다.
여행은 집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가 여행이다. 일상생활 따로 여행 따로 이렇게 고정시킨다면 인생은 틀에 박힌 답답한 기계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삶 자체가 나날의 여행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달리기만 하는 속도중심인 기차 속에서는 삶을 생각하는 여유마저 속도에 떠밀리는 느낌이 든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기다리는 기차와 함께 하는 여행은 차근차근 사방을 둘러보면서 생각의 깊이를 좀 더 맛깔스럽게 버무릴 수 있다. 어디에 몇 시쯤 도착해야 된다는 빠듯한 계획을 미리 짜면 시간에 마음이 걸려 여행보다는 실무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작은 역에 닿았을 때 후줄근한 보따리를 머리에 힘겹게 인 늙은 시골아낙네를 볼 수 있는 덜커덩거리는 기차를 때로는 타고 싶다. 객석은 이런저런 투박한 사투리로 갑자기 소란스러워 진다. 사투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차가 정차한 지역이 어디라는 것쯤은 굳이 지명을 읽지 않아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때 묻은 낡은 보따리를 구석에 겨우 내려놓기 무섭게 기차는 푸푸 몸을 꿈틀대기 시작한다.
사람이 사는 맛은 뭐니 해도 시골 간이역에 있다며 갑자기 나는 시골편이 된다. 장날 이야기에 묻은 순대국밥, 철철 넘치는 막걸리사발이란 말도 텁텁하게 들을 수 있다. 손칼국수며 통밀수제비가 그리운 날은 간이역에서 무작정 내리고 싶었다.
잠자코 있던 시장기가 느닷없이 꼬르르 기척을 한다. 때 묻은 ‘손칼국시’ 간판이 너덜거리는 가계 문에 들어서는 내 안의 나는 어느새 칼국수를 후루루 입에 넣고 있다
첫댓글 유병근 선생님 코너가 이 카페에 있던 때가 어느새 기차가 달리듯 뒤로 가버렸네요.
선생님다운 문장들, 시는 좀 난해했지만 이 글은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역시 묘사들이 신선합니다. 기차에 승차한 게 아니라 그대로 기차가 되신 것 같은 시선도 새롭습니다.
잘 읽었어요, 현영샘.
계간수필 봄호에 실렸어요. 검색하니 수필이 나와서 옮겨왔어요.
이번에 집중 조명으로 유병근 선생님을 다루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