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4/15
일그러진 발을 만지는 신부
지난해(2010년) 12월 <울지마 톤즈>가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며 관객을 끌어모았다. 지방에서는 상영하는 극장이 없다며 항의가 빗발쳤다. 그때 누구에게보다도 <울지마 톤즈>를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소록도의 한센인이었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다섯 번째 소록도 방문이었다.
소록도에 영화 상영 시설이 없어 영사기를 비롯한 장비를 빌려 화물차에 싣고 떠났다. 영화 홍보는 주민자치회에 부탁했다. 그날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동장군의 기세 때문에 마을에는 걸어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주민자치회장이 큰 걱정을 했다. 날씨가 추우면 주민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뿔사! 왜 하필이면 오늘 날씨가 이런 거지.’ 속이 타들어갔다. 인원이 차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상영 10분 전,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적이 일어났다.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100개의 좌석이 모자라 통로에 간이 의자까지 놓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검은 대륙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에 모두가 눈을 떼지 못했다. 한센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다.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의사와 자원봉사자까지 모두가 울었다. 영화가 끝나자 한센인들은 고맙다고 했다. 60대 아저씨는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 희생하신 신부님의 모습을 보니까 너무나 감격스럽고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참석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꼭 보여드리고 싶다는 병원 측의 요청에 영화 DVD를 기증했다. 이날 몸이 아파 결국 영화를 보러 오지 못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박만복 할아버지는 손가락이 없고 발가락마저 썩어 들어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보청기를 끼지만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해주자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며 훌륭한 분을 알게 돼 기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20여 년 전 경기도 의왕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던 사장님이었다. 어느 날 마치 동상에 걸린 것처럼 손에 감각이 없어졌다. 병원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그 병이었다. 할아버지는 재산을 정리하고 1억 원에 가까운 큰 돈을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300만 원씩 장학금으로 나눠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10년 전 소록도로 왔다.
왜 돈을 치료비로 쓰지 않고 장학금으로 나누어주었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 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하던 할아버지가 입고 있던 바지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달라고 했다. 겹겹이 싼 비닐을 열자 5만 원 지폐 뭉치가 나왔다. 모두 210만 원이었다. 할아버지는 10만 원을 뺀 200만 원을 장학금과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생활보호대상자 지원금과 장애인 수당을 모은 돈이었다. 할아버지는 가지고 있을 때보다 줄 때가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나는 한센인의 아픔을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값비싼 인생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태석 신부는 생전에 이런 한센인의 마음을 보며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며 겸손해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고 오직 도움으로만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중 하나는 조그마한 것에도 감사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들을 보면서, 육체적으론 완전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고 그것들이 나의 것인 양 당연히 여길 뿐 전혀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딘 마음은 혹시 한센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태석 신부)
무뎌진 나의 마음, 다른 이를 돌보지 못했던 뭉툭한 손이 부끄러웠다.
- 구수환, 「울지마톤즈 학교」, 2024년, 106-109쪽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