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항해 1 - 성기완
- 출항에 앞서 허공을 보다
길을 잃은지 오래?
거울놀음에서 빠져나오고 싶니?
아직 버린 것이
하나도 없구나 넌
망가져 덜거덕거리는 몸을
빗자루로 쓸어담는 이름
널 실로 꿰어 네 몸을
자루로 만든 그 이름 말이야
한 번 불러보렴
부를 수 없어
멀리 있으니
그렇다면 됐어
가자 이제 응
찾으려 하진 말고
* 사랑의 항해 2 - 성기완
- 배를 타려다가 푸른 이끼낀 돌산 앞에서 멈추다
길을 돌아 흐린 하늘 밑에서
푸른 너를 보았을 때
울컥 울음이 솟았어
잠들지 않는 축축함
그리워한다는 것은 참
무거워
돌산처럼 견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포크 레인이 산의 밑을 까내어
돌을 퍼내고 있었어
그래도 넌 푸른 모자를 쓰고
돌아오는 길에는 붉디 붉은
노을을 보았어
참을 수 없이 목이 말라
나는 광야를 추억했지
뼈다귀들이 뒹구는 약속의 땅으로
떠나야 해
* 사랑의 항해 3 - 성기완
- 出航
눈 위에 찍힌 발자국 위로 계속 눈이 내린다
우리의 심장은 그들이 어떻게 손을 잡고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안다
뛰는 검은 가슴을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하얀 젖가슴에 포갠다
푸른 종이는 수줍어했지만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눈
계속 더 내려 발자국을 지워라
어서 어서 어서
우리는 마저 남은 길을 남김없이 갈 수 있을까
* 사랑의 항해 4 - 성기완
- 배가 두둥실 파도에 몸을 싣다
깊이 묻어놓은 밥처럼 따뜻한
가슴의 뚜껑을 열었어
구더기와 날카로운 거울조각
각설탕과 공포가 들어 있었는데
다시 덮진 않았어
끝까지 차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싶었어
텅 비어 있어
어느새
……
사람들은 공터에서
마음의 병에 걸리지
거긴 아무도 없으니까
최면술을 걸거나 걸리긴
싫어
네모나고 하얀 이부자리를
펴고 싶어
* 방파제 - 성기완
- 속초에서
마을은 검고 낮다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양말처럼 줄에 널려 바람을 따라 흔들린다 불어오는 비린내 항구의 오래된 꿈은 물고기 썩는 내로 가득하다 둥글게 파인 만으로 들어온 바닷물은 기름에 절어 시커멓게 울렁거리고 오징어 배가 케이블에 묶여 흔들흔들 아침을 휴식하고 있다 배를 깐 마을 안으로 안긴 검은 바닷물은 빠져나가지 않고 오랫동안 움찔움찔 작은 소용돌이로 서성거린다 한 끝만이 땅덩어리와 이어진 마을의 다른 끝에 모여 사는 이들은 오늘도 갯배를 타고 육지로 나온다 육지와 연결된 쇠줄을 쇠갈고리로 당기며 무쇠같이 검은 물을 뗏목으로 건넌다 오랫동안 그래왔듯 그들은 쇠줄을 당기는 것이다 그들의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는 동안 우리는 거슬러 갯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의 골목을 빠져나가면 긴 손가락처럼 바다로 뻗은 방파제가 나오고 그 눈빛은 우리를 타지인으로 빚어놓는다 방파제 끝으로 말없이 걸어나가다가 바람이 미친 듯이 얼굴을 때리자 우리는 몸을 감
싼다
* 푸른 큰 쓰레기통의 뜻을 지나며 묻는 새벽 - 성기완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아직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말하겠어 대신 나는 푸른 큰 쓰레기통을 지나며 내음을 맡지 그것들이 퍼르스름한 대기 속을 엎드려 있어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라 일컬어지는 형광 조끼 입은 아저씨들이 큰 젓가락으로 그 시체를 후비
고 있어 심호흡을 할까 나는 세기말의 부랑아 걷고 또 걸어도 대답 없는 저 푸른 큰 쓰레기통 왜 도대체 왜? 새벽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좆도 아니라고 말하겠어 그냥 큰 푸른 쓰레기통을 지나치는 시간이라 말하겠어
* 전갈 - 성기완
전갈은 별자리이므로 별의 무리다 별들은 밤하늘에 그어진 그 선들을 붙들고 있는 압정이다 그러나 누가 검은 융단에 선을 그어놓았는가 선은 없다 별들은 다시 흩어진 금모래알들이고 전갈은 거기 없다 맹독을 품은 전갈은 하늘에서 오지 않는다 전갈은 왔는가
* 어느 땅, 어느 땅에 - 성기완
광활한 화장실, 낙타가 정오의 사막을 견디며 느리게 풀을 땐다 머리가 맑아진다 노란 표지판을 밟고 건 너는 검은 구두 두 눈을 똑똑히 뜨고 그 끝 위에서 흐르는 섬광을 확인했지만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그도 언젠가는 붉은 쇳덩어리처럼 솟구쳐오르겠지
쫓고 쫓기는 형이상학자와 형이상학 하지만 조심하라 총을 가지지 않은 눈동자는 없다 땅에 떨어진 은빛 돌멩이를 발로 툭 차며 두려움을 잊는다 그건 수건 돌리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거리는 좁혀지지 않을 것이고 모형 송아지는 빌딩 옥상에서 음매 하며 추락한다
상갓집에서 조우한 가물가물한 얼굴들 나는 그들을 팔아넘긴 적이 있다 인사를 나누고 시간 약속을 하고 쓸데없는 명함들이 사는 방이 어딘가에 있다 그는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단호하게 지운다 지금은 거기 없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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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장미 - 성기완
아름다움이 뭔지 모르는
너의 무지함이 참 아름다워
머리칼이 흩어져 있을 때
더욱 그래
그냥 아주 쉬운 말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너의 꽃이파리들
나도 의식하지 않고 그냥
바라봐 주겠어
너의 가시도 그럴 땐
창이나 칼이 아니라
예쁜 운동기구 같애
저기 찔려서 흐르는 내 피는
술처럼 달콤해 너도 이걸
받아 마셔주겠니
* 추억의 모양을 부순다 - 성기완
추억의 모양을 부순다
둥근 칼날
베일에 싸인 미소년
가슴이 저리다고 말하면서
계속 기침을 하던 아이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다리 위로 푸른 눈을 뜬 자전거
녹색 대문과 파란 지붕
욕탕 뜨거운 욕조에서 가랑이를 벌린
젖어가는 천연색 인쇄술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중간에 경기가
끝나버린 준준결승전
마당에는 어슴푸레 깔려가는 어둠과
장악당하는 장독대와
경계병처럼 졸고 있는 항아리들
어떻게 깊은 우물 속으로 빠지지 않고 살았을까
소재누나의 목욕
물 퍼붓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
하얀 몸
향기 나는 지우개
쌀벌레처럼 똥똥한 문방구 아저씨와
그 아저씨의 예상외의 잔혹함
빨간 빤쓰를 입고 따귀를 착착 얻어맞는
그 아저씨의 어린 딸
언덕빼기 위로 업어 나르다
비슷한 두 몸이 밑으로 뒹구르는데
목이 꺾이지 않았을까 깜짝 놀랐지만
지금은 하늘의 재단에 바쳐진 바오로
바오로 바오로
빨간 벽돌을 하늘 위로 던졌는데
다시 날아온 그것이 정수리에 꽂혀
그 틈으로
퐁퐁 새어나오던 붉은 피
바오로 바오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꺾고 또 꺾던 들국화
하얗게 잠든 새 담배의 촉촉한
향기와 가녀린 호기심에도 발기하는
예쁜 자지 달린 사춘기
추억의 모양을 부순다
* 벌레 - 성기완
양파의 달콤하고 매운 표면에 자잘하게 붙어 있는
너흴 보았어
어제의 브라운색 둥근 테이블과
불편한 나무 의자와
애써 행복을 감춘 어색한 손바닥의 소유자
패배를 자인하면서도 예절을 갖추는
나를 생각했어
나는 콜라를 마시며 말했지
존 레논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건
중학교 때 조회를 서다가였다고
변성기가 지난 뒷줄에 서 있는 친구가
나직이 말해주었고 나는 차려 자세로 그 소식을
들었다고
너흰 가볍게 웃었지
그때 운동장의 흙은 약간 젖어 있었고
날씨는 쌀쌀했었지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 있어
우리는 불빛 아래 있었지
투명한 병 속에는 달콤하고 씁쓸한 자정 남짓의
욕정이 출렁였어
웃음의 파도 너머로 희끗희끗 보이는
추한 목덜미와
긴 머리칼의 계곡을 흘러나오는 검은 밤의
분칠한 물소리 위에 고야의 여인처럼 비스듬히 누워 있는
허옇고 솔직하고 더럽고 풍만한 몸들
나말고 여자말고 한 아이가 더 있었지
우리는 불빛 아래 때를 기다리며
있었고 나는 마침내 일어서서 더운 밤 속으로 나왔어
더운 밤 속을
거닐었어 병마개가 빠진듯 희미한 바람이 불었고
나는 그걸 마셨어
투명한 날개를 펴보며 어색해할 동안
아이의 얼굴에는
언덕을 넘을 때 푸른 풀들이 떨구는
상승의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어
아이는 위에서 힘없이 그 아래를 올려다보고
테이블의 정령이 바로 너희들의 그런 권태를
하나로 묶기 위해 불빛을 받으며
때를 기다리는 거야
그때 벌레는 양파의 껍질에서 날아
허공을 택하지
gonna trip
somewhere unknown
아직 맛보지 않은 달콤한 끈기가
일식의 검은 구멍 너머 하얀빛의
해일로 흐를 것을 떠올리며
그 생각을 질겅거리며
* 사랑 노래 - 성기완
너는 뜨거운 수렁
지옥은 무서운 손들이다
갈고리 같은 손들뿐이다 가을날의
흔들며 부르다 수북이 쌓이는
이파리들의 수렁
모든 문 앞을 돌아 나는
너의 표정 안으로 빠져버렸다
아, 그러나 너는 뜨거운
수렁 과거도 미래도 없이
너에게로 빨려들어가며 난
널 벗기려 애쓴다
너의 고향을 물었다
희망을 물었다
그러나 끝내 벗지 않는 너
조명빨이 살갗에 코팅된
널 벗길 수 없었다
너라는 고깃덩이여
어차피 너에게나 나에게나
치욕이란 너무 뜨거운 것
그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진절머리나는 살냄새가 밴
붉은 공기의 정육점
어느 부위로 드릴까요
표정 없는 너의 탈
고기는 냉장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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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것도 아닌 것 - 성기완
무용지물(無用之物).
쓸데가 없는 물건이란 뜻. 예를 들어 개똥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개똥은 쓸데가 없을뿐더러 더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똥을 싫어한다. 어쩌면 미워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개똥 같은 것은 정말 미워해도 좋을 대상이다. 누가 개똥을 미워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개똥을 미워한다. 지난 번에는 언덕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다가 힘이 부쳐서 자전거를 내려 걸어가다가 그만 개똥을 밟고 말았다. 뭉클한 개똥을 밟자마자, 아차, 밟았구나, 싶었다. 발을 쳐다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누렇고도 싱싱한 개똥이 발바닥에 붙어 있는지. 마치 개처럼, 가로수 주변에 있는 아주 조금의 흙에다가 발을 막 문지른 다음 가로수 뿌리를 네모낳게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얕은 턱 모서리에 발바닥을 싹싹 문질러 개똥을 닦았다. 개똥의 켜는 그 모서리로 옮겨갔고 내 신발에서는 개똥이 거의 지워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은 봄날이었는데, 재수가 없었다. 아마도 개도 봄날이라 길거리로 나와 주인과 산책을 하다가 가로수 옆의 그 아주 조금의 흙에다가 기분 좋게 한딱까리 한 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는 참 흙이 없다. 개들도 산책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거 흙 참 없군. 내 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지만 내 똥 눌 한 줌의 흙도 내가 똥누려니 없어. 아, 저기 있네. 가로수. 그 주변. 도심에서 가로수만이 흙과 직접 몸을 대고 있어. 그 뿌리를 따라 내려가면 도시의 검은 아스팔트 표면 밑에 잠들어 있을 붉은 흙더미 속의 와일드한 자연이 있어. 숨쉬고, 분비물들이 뒤범벅되어 있고, 그 속에 벌레들이 길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뿌리들은 흙을 따라 내려가는 수분을 억세게 붙들어 흙을 질척하게 유지할 거야. 이거 흥미로운 걸. 한 번 파보자.”
과연 똥개는 흙을 잘 판다. 앞발을 사용하여 잽싸게 흙더미를 헤친다. 똥을 눈 뒤 오줌도 지렸을 것이다. 나무에 오줌 자국이 묻어 있다. 그래서 그 거리는 그 똥개의 이정표들을 가득 담고 있는 거리가 된다. 그들 나름의 신호체계 속에서 똥개들은 사람이 똥을 밟고 아니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똥을 눈다. 조심해야할 것은 사람이다. 개의 책임은 아니다. 개이 특징이자 가장 큰 즐거움은 책임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은 책임이 있다. 헌법에 그렇게 적혀져 있다. 왜 그런지 개나 고양이는 흙에다가 응가를 하길 즐긴다. 작년, 3호선버터플라이의 3집을 녹음하기 위해 김포의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 그 집 고양이 ‘미짱’도 응가 전용으로 쓰는 모래틀이 있었다. 미짱은 깔끔하다. 미짱은 그 모래틀에 응가하길 즐긴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그 모래 응가틀에 똥이 하도 꽉꽉 차서 넘쳤다. 미짱은 며칠 동안 그 응가틀을 버리고 아무데나 똥을 누려 했다. 계단에 고양이 똥이 출현했고 사람들은 조금 놀랬다. 그제서야 응가틀의 모래를 갈아주었다. 미짱은 다시 모래 위에 똥을 눈다. 계단에 똥이 출현한 것이 고양이의 책임은 아니다. 고양이의 특징이자 가장 큰 즐거움 역시 책임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은 책임이 있다. 헌법 어딘가에 그렇게 적혀져 있다.
그래서 사람은 개똥과 조금 다른가 보다. 사람은 무릇 무언가에 쓸만한 것이다. 태어나면서 호적에 등록을 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받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헌법에 적혀 있는 ‘국민의 4대 의무’니 하는 것을 싫든 좋든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에 아마 노동의 의무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노동이 의무다. 노동을 해야만 한다. 노동이란 쓸만한 뭔가를 하는 것이고 쓸만한 뭔가를 하는 것에 의해 먹고살 것들을 장만하는 일이다. 사람은 소를 부려먹기도 하고 말을 부려먹기도 한다. 소나 말은 꼭 밭을 갈거나 열나게 뛰어야할 책임은 없다. 그런데도 소나 말은 사람이 시켜서 그렇게 한다. 소나 말의 표정은 너무 사려 깊고 아름다우며 이해심이 넓은 것 같아서 마치 그 일들이 자신들이 하늘에서 점지될 때부터 숙명적으로 타고난 일인 듯 하지만 사실 그 일들은 사람 때문에 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들은 풀을 뜯어 먹다가 무시무시한 사자 같은 것들이 다가 오면 적당히 무리지어 피해 다니기만 하면 될 생들이었다.
물론 사자나 소나 개나 고양이도 일을 하긴 한다. 먹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일이라고 한다면 그들도 열심히 움직인다. 그들도 열심히 사냥해서 먹고 열심히 풀뜯을 곳을 골라 다닌다. 그것은 아마도 가사노동 비슷한 것일 것 같다. 가사노동은 그래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너무나 필요한 것이어서 때로 불필요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심지어 나는 실제로 ‘씹기가 귀찮아서’ 먹던 것을 뱉는 사람도 봤다. 정말 너무 씹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은 여자다. 그녀는 죽을 좋아하고 대신 시를 싫어한다.
詩.
시 같은 건 너무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가 개똥일까. 왜그런지 시 같은 건 무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에게도 없지는 않다.
어느 시대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합의가 있다. 지금 시대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마도 시 같은 걸지도 모른다. 시는 돈도 되지 않고 뜻도 통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니다. 대신 반대의 생각도 통한다. 돈도 되고 뜻도 통하고 사람들이 감동 받는 시는 시가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무용지물. 종교적 개념에도 ‘무상성’이라는 것이 있다. 프랑스 어로는 gratuite의 번역어인 이 무상성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예수가 신인데 뭐하러 이 개똥같은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느냐는 의문과 관련이 있다. 답은 딱 하나다. 아무 바라는 것 없이 했다는 것. 물론 이 대목에서 오해하면 안 된다. 내 말은 시가 그렇게 예수의 무상한 행동과 비슷한 고귀한 차원의 무언가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을 구원하지만 시는 구원하기를 바라지조차 않는다. 게다가 예수님은 주일마다 신도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십일조의 수혜자이기도 하지만 시는 돈도 되지 않는다. 어느 교회의 목사 아들은 분명히 맨 처음 헌금이었을 돈을 가지고 저질 스포츠 신문을 운영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것들을 운영할 수 없다. 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맞다. 이해하시라. 이렇게 뒤집는 것은 무슨 억하심정 때문이다.
이 글은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글이다.
스톱.
* 여자의 비밀 : 퍼질러 있음/품는 힘 - 성기완
여자의 비밀은 안쪽에 있다. 반대로 남자의 비밀은 바깥에 있다. 바깥에 있으니 비밀이 없는 셈. 그러나 비밀은 있게 마련. 어떻게 그걸 감출까? 남자는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끝없이 움직인다. 운동, 속도, 나댕김, 그것들 속에서 비밀의 잔상은 왜곡되고 흩어진다. 그렇게 비밀을 뿌리고 다니니 온 세상에 비밀과 음모가 가득하다. 그 운동의 기본 성격은 살의이다. 운동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부딪침, 충동과 대결과 죽임과 배반들, 그것들이 남자의 비밀을 구성한다. 그런 운동성이 바로 근대를 몰고 온 힘이었다. 남극에 간 아문젠의 운동성, 정충들의 끊임없는 요동과도 같은 힘. 근대 서구가 전 세계의 지도를 자기들 중심으로 재편할 때의 힘이다. 아프리카의 산을 파고 인도의 떡고물같이 고운 흙을 헤집어 광물과 고운 씨앗을 캐낸 힘이다.
여자의 비밀은 그 힘들이 길길이 뛰며 남긴 상처의 기억들로 구성된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목포항」 부분
여자는 근본적으로 아픔인 그 비밀을 품고서 퍼질러앉아 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멍하니 그 비밀의 근원을 반추하면서 남아 있다. 김선우씨의 시는 그렇게 퍼질러앉아 있는 존재로서의 여성적 조건에서 출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첫눈 내린 어제 저녁 세탁소집 여자가 우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주 운다 차양 밑에 빼곡하게 걸린 옷들 밑에서거나 옆집 애완센터 토끼장 앞에서거나
- 「그녀의 염전」 부분
김선우씨에게 여성들은 시간성을 갖기보다는 보편적인 동시성 속에 있다. 바리공주는 명성황후가 되고 다시 황진이가 되고 난설헌이 되며 어머니가 된다(「물 속의 여자들」). 할머니는, 나는, 어머니는, 동네 아줌마는, 모든 여성은 집이다.
집 속에
집만한 것이 들어 있네
- 「무꽃」 부분
그 존재는 일차적으로 집이다. 그 집은 밥그릇으로(“이 집 한채는/쥐들의 밥그릇” 「우리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꽃으로,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구닥다리 자개장으로(「가을 구름 물속을 간다」), 심지어 똥으로(「양변기 위에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 집은 결국 무덤이고 죽음이다. 그래서 그 속에는 궁극의 슬픔이 담겨 있다.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묘사하는 대목은 아름답다.
물방울은 동그란 무덤이야 우린 누구나 무덤의 집이라구 따스한,
내 가슴에 떡잎처럼 매달려 우는 어린 애인,
-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 부분
그 집, 그 무덤은 동시에 자궁이기도 하다. 자궁에까지 되돌아가는 과정은 퇴행적이지만, 동시에 자궁은 생성의 힘이다. 거기서 역설의, 반전의 계기가 마련된다. 앞 시를 계속 따라가보자. “내 가슴에 떡잎처럼 매달려 우는 어린 애인,/덜 여문 내 꽃자리로 사르륵 통증이 지나갔고 나는 무덤을 열어 젖꼭지를 물려주었지만” 자궁은 모든 것들을 엮어 존재로 변화시키는 마술상자이기도 하다. 그 긍정성은 “아이를 갖고 싶어/새로이 숨쉬는 법을 배워가는/바다풀 같은 어린 생명을 위해/숨을 나누어 갖는/둥근 배를 갖고 싶어”(「입춘」)하는 자궁의 자발성에서부터 비롯한다. 그 자발성은 품는 힘이다. 품는 힘은 살섞음이다. 그건 섹스고 먹는 일이고 그저 혼자 뜨거워지는 일이다(“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려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얼레지」). 그 안에서 모든 슬픔이 녹고 즐거움이 고통스러운 비밀의 끝자락에서 피어오른다. 애인들. 그 비밀과 고통과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들. 애인들은 때로 남자고 때로는 여자다(“그녀의 입술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알 수 있었다, 흔적/휘파람처럼 상처가 벌어지며/그녀가 나의 세계로 걸어들어왔다”「술잔, 바람의 말」 ).
그 구별이 없다. 품는 힘은 그 구별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자궁의 꽃봉오리 안에는 구별 없는 원시의 기쁨이 있다. 이제부터는 상승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비밀을 구성하게 된 계기의 일부인, 살의의 움직임이 도대체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김선우씨의 시에서 속시원한 대답을 구할 수가 없다. 상처의 쟁쟁함과 퍼질러앉음의 슬픔에 대해서는 무기 어린 언어들이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반면, 그 상처의 근원에 대한 시적 파헤침이 구체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남자는 무엇인가? 사실 별로 남자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다. 남자는 애인이거나, 애인이었거나,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버지이거나, 그렇지도 않으면 그냥 동네 아저씨이다. 그들은 여성과 운명을 나누어 가진 슬픈 존재들로 자주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성이 어떤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때로는 그 힘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하는 남자들이 있다; “죽여줄게.” 그걸 긍정하면 남성적 움직임의 살의를 긍정하는 것이 될 텐데, 그 위험을 ‘퍼질러 있음/품는 힘’이 어떻게 극복할지가 궁금하다. 물론 시인의 방식은 명확하다. 그 살의의 움직임을 품고 죽임을 당하는 동안 그 살의 역시 죽는다. 시인이 그걸 끌어안고 죽인다.
오늘밤 나는 그를 죽일 겁니다 그는 내게 남은 마지막 진피를 원할 테지요 달콤한, 자장가를 부르며 사타구니 살갗을 벗겨내겠지요
- 「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부분
품는 힘이 살의를 살해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과정이다. ‘움직임/살의’와 대척점에 있는, ‘퍼질러 있음/품는 힘’의 ‘정적인 다이나미즘’이 대안인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나무들, 텔레파시, 망각, 바람의 소통, 그런 것들과 이 품는 힘은 하나이다. 그래서 여성적인 것이 중요한데, 그래서 더더욱, 비밀스러운 안쪽의 상처가 구성된 경위를 샅샅이 따지는 것도 중요하다. ‘움직힘/살의’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밝히는 것 말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뱃속에 넣고 퍼질러 있어야 진짜 품는 힘이긴 하지만.
* 시인 성기완 - 정재숙 기자
반바지를 입은 시인, 짧은 머리 기타리스트, 지하철보다 버스를 더 좋아하는 시간강사,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사전을 누비는 번역가,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않는 대중음악평론가……서너 가지가 더 남아있으나 숨이 차 이만 총총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 사람 이력은 길기도 하다. 그 많은 일을 언제 할까 싶지만 정작 성기완(34·사진)씨는 동네 마실돌이라도 나온듯 느긋했다. “이 보따리 저 보따리 싸들고 왔다갔다”한다고 한마디 툭 던지곤 웃는다. 웃는 얼굴 위로 그가 쓴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알고 있는 먼 길을 돌아가네.'
“배운 건 글이고, 좋아하는 건 음악입니다. 이 두마디에 제 인생이 다 들어있습니다. 하는 일이란 게 이 둘 사이에서 나온 것들이죠. 떠돌이처럼 헤매고 다녔지만 어느날 돌아보니 정확하게 글과 음악 사이에 서 있더군요.”
그는 시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시 한 줄도 가르치지 않았으나 시란 삶에 대한 `어떤 태도'임을 아들 몸에 남겨주었다. 그가 1980년대에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 시는 일기였다. 대학은 암울했고, 만장이 펄럭이는 교정은 공포스러웠기에 시를 쓰며 그 시절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안정을 얻었다.
“아무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안 가르쳐주던 시대였습니다. 못 가르쳐줬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줄에서 삐끗 걸어나와 아예 방황하는 쪽으로 길을 틀어버렸습니다. 세상은 쓰레기통이었고 멋지고 서정적인 언어를 골라잡기보다는 버려진 것들에 눈을 맞췄습니다.”
그가 속해있는 밴드 `삼호선 버터플라이'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밋밋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런 삶에 대한 `버림'이 있기 때문이다. 꽉 붙잡지 않고 옆에 나앉는 것, 시인은 자기가 그려내는 시와 음악을 `변두리 공사장 풍경'이라고 말했다.
“주류들 힘이 워낙 세니까 사람들이 그게 다고 좋은 걸로 믿지만 진실은 거기서 밀려난 변방, 그 아래 깔린 언더그라운드에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클럽에서 삼사십명 모아놓고 노래해도 `우리 식'으로 하면 최고죠. 어차피 인생이란 게 양으로 따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 방식으로 조그맣게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는 대학원에서 현대 프랑스시를 전공했지만 강의는 대중문화론이나 음악 얘기를 한다. 록이든 팝이든 뭘 다루든 학생들에게 늘 그 이면을 보도록 만든다. 백인 자본주의가 포장한 대중문화를 뒤집어보게 하는 비판적 힘을 아이들에게 심겠다는 사명감이 있기에 그는 보따리 장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제 또래 인문학 전공자들이 지금 어딘가 자신을 붙박이 못하고 떠돌고 있다면 인문학이 우리에게 남겨준 운명같은 유전자 때문일 겁니다. 아카데미는 무너졌고 그렇다고 새 장이 열린 건 아닙니다. 인문학이 죽어간다면 그건 시대가 병들었다는 증거죠. 인문학자들은 더 크게 신음하고 더 고통스럽게 앓고 더 간절하게 치유를 빌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넘기고 있습니다.”
`식물성. 새로운 세기는 식물성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나무들이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그는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에 썼다. `식물성'은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태도다. “이 세상이 너무 균열이 심각하군요”라고 시인은 흥얼거렸다.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박은 그 흥얼거림이 곧 시가 되고 노래가 돼 우리에게 날아올 것이다.
* 성기완
67년 서울 생.
94년 세계의 문학으로 활동 시작.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 <유리 이야기>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