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그네투스에 보내는 서신(Epistle to Diognetus)
며칠 있으면 기다림의 끝 순간이 다가와 주님 오신 날이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지난 2천 년의 교회 역사와 함께 오늘의 교회와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시면 과연 만족해하실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폴 존슨(Paul Johnson)이 쓴 「기독교의 역사」(A History of Christianity)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의 유대교회와 갈등, 영지주의, 정통과 이단 논쟁. 신약성경의 정경화, 로마교회의 탄생, 박해, 성직자들의 부패와 세속화로 초기기독교 생성 과정의 혼돈과 혼란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를 비롯하여 교회 역사에는 평안한 시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중 1~2세기에 발생한 기독교 박해는 반기독교적인 감정에 의한 폭도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에도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덕망 있는 사람들로, 로마 제국 공동체를 방해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기독교에 비판적인 대상을 위해 ‘기독교 변증론 서신’이 나왔습니다. 저자는 미상의 그리스인으로 그 시기는 AD130년경에서 2세기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신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Mathestes’라 칭했으나, 이는 그리스어로 ‘학생이나 제자’를 의미하여 아마 스스로 ‘사도의 제자’로 표시한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수신자는 디오그네투스 (Diognetus)로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의 가정교사 이름과 같다고 하나, 진위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름은 그리스어로 ’God-born‘, ’know by Zeus’라고 합니다. 따라서 아마 고위층의 이교도이거나 황제 자신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서신은 12장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 내용은 ‘서신작성 경위, 우상의 공허, 유대인의 미신, 유대인의 관습, 크리스천의 기품, 크리스천과 세상과의 관계, 그리스도의 현현(顯現), 그리스도 초림(初臨) 전의 인간들의 비참한 절망, 왜 주님은 늦게 오셨나? 믿음에 따르는 축복, 아는 것과 믿는 것의 가치, 진정한 영적 생활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으로 되어있습니다.
몇 년 전 제5장과 6장인, ‘크리스천의 기품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영문본을 번역, 소개해보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점이 있는지 성찰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게으름을 부리다가, 올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번역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마치게 되어 홀가분합니다. 영어원문은 “Roman Road Media”의 Alexander & James Donaldson의 영문 번역본을 사용했음을 알려드리며, 혹, 공감을 가지시면 그분께 영광이 될 것이고, 서투른 문장이나 어색한 표현은 오로지 번역자의 몫임을 알려드립니다.
이 서신 내용 중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나그네처럼 살고 있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타인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며, 마치 외국인들 인양 모든 것을 참아 낸다. 그들에게 모든 외국의 땅이 조국이고, 조국의 땅이 외국의 땅이다.”라는 내용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친근감이 갔습니다. 2천 년 전에도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표현은 우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그러합니다.
제1장 서신작성 경위 (Occasion of the epistle)
참으로 훌륭하신 디오그네투스여, 귀하가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관습에 관해 배우기를 열망하는 것, 그 방법에 관해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교의 어떤 형태를 따르는지, 그리하여, 그들 모두 세상 자체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그리스인들이 신으로 알고 있는 대상을 중히 여기지 아니할 뿐 아니라, 유대인의 미신을 지키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성향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새로운 경건의 관습이 오래전이 아니라 지금에서야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탐구하기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귀하의 열망에 대해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아래의 것을 간청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말하게 하시고, 듣게 하시며, 나에게 말하게 허락하시고, 무엇보다, 귀하가 믿음을 함양하게 된 것을 듣게 된 사실과 내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전혀 후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귀하는 들을 것입니다.
제2장 우상의 공허 (The Vanity of idols)
귀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편견을 버린 후에 오십시오. 그리고, 귀하에게 익숙하던 것은, 마치 귀하를 속일 수 있는 것으로 여기시어, 버리십시오. 귀하가 처음부터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졌다면, 귀하 자신의 고백에 따라 새로운 교리의 체계를 들을 자가 될 것입니다. 귀하의 눈만이 아니라 이성으로 와서, 귀하가 신들로 여겨 인정했던, 그들의 실체와 형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우상 중의 하나는 우리가 밟고 다니는 돌멩이와 비슷하지 않은가요? 두 번째 신은 우리의 일상에 사용하기 위해 건조한 선박보다 우월하지 않은 놋쇠가 아닌지요? 세 번째 것은 이미 썩어버린 나무 동강이 아닌가요? 네 번째 우상은 인간이 도둑맞지 않으려고 지켜보는 은이 아닌지요? 다섯 번째 경우는 녹이 쓸어버린 쇠가 아닌지요? 여섯 번째 신은 가장 하찮은 목적으로 만들어져 아무 가치가 없는 토기가 아닌가요?
모두가 썩어질 물질이 아닌지요? 그중 하나는 조각가가 만들었고, 두 번째 것은 놋갓장이가, 세 번째 것은 은 세공사가, 네 번째 것은 토기장이가 만들지 않았나요? 그들 모두가 세공사의 기술로 신들의 모습을 만들기 전에는 각기 그 형질에 따라 변해버릴 그러한 속성이 아니었을까요? 귀하가 섬기는 신들조차, 선박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듯,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그 신들은 모두 청각과 시각장애인이 아닌지요? 또한, 생명이 없는 존재, 감정이 결핍된 것이 아닌지요? 그리고 움직일 수도 없고, 낡아버리기 쉽고, 모두 썩어버릴 대상이 아닌가요?
귀하가 신이라 부르고, 섬기며, 예배함으로써, 귀하 또한 그들과 같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신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귀하는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상들을 지켜 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돌과 토기로 만들어진 우상들을 귀하가 예배할 때는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과 금으로 만들어진 신에게 밤이 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도둑 당하지 않도록 파수꾼을 세우는 것도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상들이 감정을 가졌다면, 귀하가 그들에게 예물을 드림으로써 그들을 명예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와는 달리, 그들에게 감정이 결핍되었다면, 귀하는 제물의 피와 연기로 그들을 예배하면서, 귀하는 그러한 결핍 사실에 대해 그들에게 유죄선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귀하 휘하의 누구에게도 그러한 경멸을 당하지 않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감정과 이성을 갖춘 어떤 사람도, 강요를 당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경멸을 당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라면, 지각이 없기에, 즐겨 이를 감당할 것입니다. 물론 귀하는 귀하의 신이 그러한 감각을 가졌다는 것을 귀하의 행위로서 보여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신들을 섬기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저는 다른 일들을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것은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저는 더 말씀을 드리는 것이 헛된 일로 여겨집니다.
제3장 유대인의 미신들 (Superstitions of the Jews)
그다음으로, 제가 짐작하기로는 귀하께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이 드리는 신성한 예배의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무척 듣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만일 상기에서 설명한 종류의 예배를 만일 삼가게 되면,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주(主)로서 유일한 신으로 섬김을 받는 것 자체가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상기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듯이, 감정결핍과 듣지도 못하는 우상들에게 제물을 드린다면, 이는 미친 자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와 달리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양, 이러한 것을 제물로 드리게 된다면, 이는 신성한 예배라기보다는 잘못된 행위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지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쓰실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피와 연기의 제물과 번제를 드림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을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영광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무엇이나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게는 경배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지각도 없고, 그러한 영광도 즐길 수 없는 우상에게 끊임없이 영광을 드리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제4장 유대인들이 지키는 다른 관습들 (The other observances of the Jews)
유대인들이 음식물에 관해 주도면밀함을 보이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미신, 그리고 할례에 대한 자부심과 금식과 월삭에 대한 환상은 순전히 우스운 것이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으로, 귀하께서 나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중, 적절한 것은 사용하시고, 다른 것들은 소용이 없어, 여분의 것으로 거절하는 이러한 일들의 일부를 수용하는 것이 어찌 합법적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갈라디아서 4:10)은 마치, 그들 자신의 성향에 따라 별과 달을 기다리며 구분하며, 하나님의 약속과 축제나 애도가 있는 계절의 변화를 누가 신성한 예배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겠습니까? 이는 오히려 우둔한 자임을 선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저는 귀하가, 기독교인들이 헛된 것과 함께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공통적인 잘못을 멀리하고 주제넘게 참견하는 정신과 유대인들의 맹목적인 자만을 적절히 삼가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귀하가 유대인들의 야릇한 하나님 경배의 신비를 배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5장 크리스천의 기품 (The manners of Christian)
다른 사람들과 크리스천의 구별됨은 나라나 언어 혹은 그들이 지키는 관습에 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도시에 거주하지 않고, 특수한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특이함에서 표출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이 따르는 행동 방향은 사색의 결과로 나오지 않으며, 탐구적인 인간의 신중함에 의해서도 아니며, 단순히 인간의 원칙의 옹호자임을 표방하는 그러한 것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그들 각자의 정해진 운명에 따라, 의복과 음식 그리고 기타 일반적 행동에 관련된 본토의 관습을 따르는 야만인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훌륭하며 명백히 현저한 생활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나그네처럼 살고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타인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며, 마치 외국인들 인양 모든 것을 참아 냅니다. 그들에게 모든 외국의 땅이 조국이고, 조국의 땅이 외국의 땅입니다.
그들은 여느 사람과 같이 결혼하고 출산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식탁을 나누지만, 공동으로 침대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나, 육체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고후 10:3) 그들은 이 땅 위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빌 3:20) 그들은 법률에 순종하면서도 자신들의 생활 속에 그 법률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모든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자요 저주받아 죽임을 당한 자 같으나, 다시 살아난 자들입니다. (고후 6:9) 그들은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富饒)한 자요, (고후 6:10)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치욕을 당한 자 같으나 바로 그 치욕이 그들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악마라고 일컬으나 합당함을 받았으며, 비방을 받았으나 축복을 받았고, 모욕을 받았으나 명예로 모욕을 보상받았으며, 그들은 선행을 하나 아직은 악을 행하는 자 같이 벌을 받았습니다.
벌을 받을 때 그들은 생명이 되살아나듯 기뻐했으며, 그들은 유대인에게 이방인이란 이유로 공격받았고, 그리스인에게 박해를 받았으나, 그들을 미워한 자들은 그 증오의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6장 크리스천과 세상과의 관계 (The relation of Christians to the World)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것과 같이 크리스천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의 각 지체에 퍼져있는 것처럼, 크리스천은 세상 각 도시에 흩어져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에 있으나 육체가 아니듯이, 크리스천이 세상에 거주하나 세상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이 보이는 육체에 보호받듯이, 크리스천은 진정 세상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 알려졌으나 그들의 하나님 경외심은 보이지 않는 채로 남아있습니다.
육체가 영혼을 미워하고 영혼을 거슬러 싸우지만(벧전 2:11) 영혼이 해를 받지 않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세상이 크리스천을 미워하지만, 그들이 쾌락을 회피하므로 조금도 해를 받지 않습니다. 영혼이 자신을 미워하는 육체와 그 지체를 사랑하듯, 크리스천도 이같이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합니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있으나 바로 그 육체를 보호하듯, 크리스천이 감옥 같은 세상에 가두어져 있으나 세상의 보호자가 됩니다. 불멸의 영혼이 죽을 수밖에 없는 성막(聖幕)에 거주하듯, 크리스천이 하늘의 썩지 않을 처소를 소망하듯, 그들은 썩어질 육체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영혼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잘못 공급받으면 더 잘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은 매일매일 벌을 받게 되더라도 그 숫자가 늘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에게 이같이 뛰어난 신분을 주셨기에 이를 버리는 것은 곧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제7장 그리스도의 나타나심(顯現) (The manifestation of Christ)
이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인류에게 보내신 그리스도는 단순히 세속적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매우 조심스레 지켜야 할 단순한 인간 생각의 체계도 아니며,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단순한 인간에 대한 신비의 섭리도 아니라, 전능자이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보이지 않는 참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인간 가운데 자리하신 분으로, 진리이시고 성스럽고 불가해한 말씀이시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굳게 좌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하듯 인간에게 종이나, 천사나, 지배자나,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 중의 어떤 자나, 천상의 것을 지배할 수 있도록 위임받은 자중의 어떤 자도 아니라, 바로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제작자로서-하늘을 지으셨고-바다의 경계를 정하셨으며-모든 별이 그분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그분으로부터 태양이 하루의 운항을 받아서 지키며-달이 그분의 명령에 따라 밤을 밝히고 별들도 달의 운행을 좇아 따르며, 만물이 그분에 의해 배치되고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게 되며, -하늘과 그 안의 모든 것, 땅과 그 안의 모든 것,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 -불, 공기와 지옥-높은 곳의 모든 것, 깊은 곳의 모든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셨습니다. 그 사자는 흔히 생각하듯, 가혹한 행위를 행사하거나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요? 전혀 그러한 의도가 아니라, 인자와 순종의 사자였습니다. 왕이 그 아들을 보내듯, 아들 또한, 왕으로, 그렇게 왕이 아들을 보낸 것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 것이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고, 구세주로서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으니, 우리를 강요가 아니라 설득하시기 위해 보내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는 폭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는데, 이는 앙갚음으로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에 아들을 보내신 것이며, 우리를 심판하려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를 심판하려 아들을 보낼 것이지만, 누가 그의 나타나심에 견딜 수 있을 것인가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겁주기 위해, 그들을 맹수 앞에 던져지는 것을 귀하는 보지 못하셨는지요?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을 부인하게 하지 못한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형벌을 받았으나, 더 많은 평강(平康)을 누렸는지를 귀하는 보지 못하였는지요? 이는 인간이 한 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권능이며, 하나님의 나타나심(顯現)의 증거입니다.
제8장 그리스도 초림(初臨) 전의 인간들의 비참한 절망 (The miserable state of men before the coming of the Word)
그리스도의 초림 이전, 인간 중 누가 과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두 이해하고 있었는지요? 귀하는 믿을 만하다는 철학자들의 헛되고 어리석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지요? 그들 중 한 철학자는 불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머지않아 하나님께로 오게 된다는 것을 외치면서 말입니다. 다른 철학자는 물이 하나님이며, 또 다른 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다른 요소를 하나님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이론 중 어느 하나가 인정될 만큼 가치가 있다면, 하나님의 피조물 중 나머지 모두 역시 하나님이라고 선언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은 단순히 속이는 자의 놀랄 만큼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알리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그들의 위치를 정해주시고, 하나님 스스로 단순히 인간의 친구 되심만이 아니라, 인간을 대하심에 있어서 참으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러하신 분으로서, 지금도 그러하시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며, 인자하시고 선하시며, 노를 품지 않으시며, 진실하시고, 오직 절대적으로 선하신 한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에 위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계획을 만드시어, 이를 아드님이신 예수님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려 깊은 계획을 숨기시고, 우리에게는 무관심한 척하셨으며, 우리를 전혀 돌보시지 않은 척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태초부터 준비하셨던 그 계획을 알려 주신 후에, 우리에게 축복을 한꺼번에 내려주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역을 보며 그 안에서 열심을 내었습니다. 우리 중 누가 과연 이러한 일을 예상이나 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두 분간의 내재하는 관계에 따라, 이 모든 일을 아셨습니다.
제9장 왜 주님은 늦게 오셨나? (Why the Son was sent so late)
오래전부터 참아오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서 견디게 하셨고, 쾌락과 음욕의 욕망에서 멀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참아 내셨고, 그때 우리의 사악함을 허용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공의를 의식하는 마음을 형성하도록 간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는 부덕(不德)했던 생각의 때를 알아채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우리에게 특별한 호의를 허락하시어, 우리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들어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명백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악함이 극에 달하여, 그 죄의 값인 형벌과 죽음이 우리에게 임박해졌음이 분명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이전에 분명히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인자와 권능으로, 인간을 향한 넘치는 돌봄으로, 미워하지 않으시고, 버리시지도 않으시며, 우리에 대한 죄악도 기억하지 않으시고, 크고 오랜 고통으로 우리를 참아 내시어, 하나님 스스로 우리 죄악의 짐을 담당하시어, 하나님의 독생자를 우리의 대속물(代贖物)로 주심으로, 죄 없으신 분에게 죄인으로, 사악할 수 없는 분에게 사악함을, 공의로우신 분에게 공의롭지 않으시게, 타락할 수 없는 분에게 타락함을 전가하시고, 죽음이 없으신 분에게 죽음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보다 더한 어떤 것이 우리의 죄를 덮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악하고 죄 많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일이 다른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오, 얼마나 소중한 교환이시며, 오, 불가해한 운용인지요! 오,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은혜인지요! 많은 사악함이 오직 한 사람의 공의로운 분에 의해 숨겨짐으로, 공의로운 분이 많은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셨는지요? 이전에 우리에게 확신시켜주신 바와 같이, 우리의 성정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도 없었으나, 이전에는 구원할 수 없는 것을, 지금은 구원시킬 수 있는 구세주께서 밝히 보여주시는 사실로써 하나님은 그의 인자함에 의탁하도록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양육자로, 아버지로, 교사로, 상담사로, 치유자로, 지혜로, 빛으로, 명예로, 영광으로, 권능과 생명으로 인도하시어, 우리에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제10장 믿음에 따르는 축복 (The blessings that will flow from faith)
귀하께서 이 믿음을 가지시기 원하시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셨기에,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세상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게 하시며, 이성(理性)과 오성(悟性)을 가지셨으며, 하나님만을 우러러보는 특권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으며, 그들에게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그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국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귀하께서 이런 지식을 얻게 되면, 어떤 기쁨으로 충만하시게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먼저 귀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시겠습니까? 만일 귀하가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그분의 인자(仁慈)를 따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방자가 되는 것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꺼이 모방자가 되기를 원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방함이 이웃을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약한 자에게 우위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며, 부자가 됨으로써 연약한 자에게 폭력을 보이는 것도, 모방으로 행복을 찾는 것도 아니며, 어느 사람도 이러한 것으로 하나님의 모방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달리, 이웃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감당하는 자, 어느 면에서나 우위에 있으면서도, 결핍한 자를 이롭게 하는 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았던지, 필요한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는 자가 이런 혜택을 받은 자로부터 숭배받는 자이며, 하나님의 모방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제 귀하는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사실, 귀하가 하나님의 신비를 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에 형벌의 고통을 받는 자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귀하가 천국에서 참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 귀하는 세상의 속임과 잘못됨을 저주할 것이며, 이곳에서 파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경멸할 것이며, 영원한 불길에 던져지도록 예비 된 자들에게 마지막에 행해질 고통인 진정한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 귀하는, 공의를 위해 잠시뿐인 불길을 인내하며, 그 불의 속성을 알게 될 때, 그 불길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자들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제11장 아는 것과 믿는 것의 가치 (These things are worthy to be known and believed)
저는 저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올바른 이성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것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들의 제자가 된 이후, 이방인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전해진 진리의 가치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올바르게 배웠고, 말씀 자체이신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자들은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이미 보여주신 것을 더 자세하게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에게 선포된 말씀이 밝혀졌으므로, 불신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평범한 말로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신실하다고 중히 여김을 받고, 성부 하나님의 신비한 지식을 얻은 제자들과는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의 의도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증거가 되도록 보내셨고, 성자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으신 후, 사도들에 의해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었고, 이방인들이 이를 믿게 된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마치 새롭게 보이지만 오래전에 계신 분이시며, 성도들의 가슴에 새롭게 살아나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영원하신 존재이시지만, 오늘날 성자 하나님으로 불리시는 분이며, 이분을 통해 교회가 부요(富饒)해지고, 은혜가 널리 퍼지며, 성도의 수가 늘어나고, 분별력이 주어지고, 신비가 밝혀지며, 때가 옴을 알리시고, 믿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세워놓은 경계선을 무시하지 않은 자들에게 이러한 것을 추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윽고 율법의 두려움이 찬송이 되고, 선지자들의 은혜가 알려졌으며, 복음을 믿는 믿음이 일어났으며, 사도들의 전통이 보존되었고, 교회의 은혜에 기뻐하였습니다. 귀하가 비탄에 잠기지 않는다면, 이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의지와 그분이 기뻐하실 때, 말씀이신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귀하가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어떤 것이나 말하려 하기 위해, 그것이 고통이든 우리에게 밝혀진 사랑의 일에 관한 것이든 저희는 귀하와 함께 소통할 것입니다.
제12장 진정한 영적 생활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knowledge to true spiritual life)
귀하께서 이러한 일들에 관해 읽고 들으셨다면, 귀하는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자에게 부여하신 것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귀하와 같이 천국의 기쁨을 얻게 될 것이며, 귀하 자신에게 각종 과일을 맺게 하고 무성하게 하며, 다양한 과일로 장식된 나무를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지식의 나무(선악과)와 생명의 나무가 심기어졌으나, 지식의 나무가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이 파괴를 낳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 없이 씌어 진 것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왜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의 나무를 심어 셨을까요? 이 나무를 통해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며,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이러한 지식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탓이며, 이는 뱀의 사기술에 의해 발가벗겨지게 된 것입니다. 생명이 지식 없이도 존재할 수 없듯이, 지식도 생명 없이는 안전하게 지켜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 나무는 서로 가까이서 나란히 심기어졌던 것입니다. 어느 사도는 이러한 관계의 힘을 인지함과 동시에, 진실한 원칙 없이는 생명에 영향을 행사하는 지식을 책망하여, 지식은 자랑하지만 사랑은 신앙심을 함양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진정한 지식 없이 무엇이나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삶에서 증명되었듯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단지 사탄에 의해 속임 당했을 뿐, 삶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삶을 추구하는 자는 소망으로 나무를 심으며, 과일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마음에 지혜를 담으시고, 귀하의 삶이 내부로는 진정한 지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나무를 마음에 간직하고, 열매를 보여줌으로써 귀하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들을 항상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탄이 영향을 미칠 수도, 속임수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때 타락한 하와는 처녀로서 신뢰를 받게 되며, 구원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유월절이 지나가고, 합창단이 함께 모여, 올바른 질서가 유지되며, 말씀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을 가르치시기에 기뻐하시며, 성부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 영광은 영원할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성경에 대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합니다
이 서신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해석해 주셔서 몰랐던 내면의 신앙을 다시 돌아봅니다
안개속에서 헤매이던 막연한 길을 찾은것 같기도 합니다
아직도 어린아이 신앙이며 현존하는 목사님의 설교속에서 교회 문턱만 왔다 갔다하는 신앙인들처럼
깨달음을 깊이 알아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행이 진실한 목사님이
계셔서 배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요즘 다시 읽고있는 책이
"예수로 성경읽기"(김동일 목사님)인데, 성경을 역사의 창과 신학의 눈으로 새롭게 보려는 시도입니다.
기회있으시면,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드리며, 편안한 저녁 보내시기 바랍니다.
네 예수로 성경읽기 제목이 더 끌립니다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