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가 인도로 가게 된 까닭 - 안유환
잇달아 나타나는 터널이 생각을 토막 내고 있다. 마치 전깃불이 불규칙하게 껌벅이고 있을 때처럼. 오전 7시55분, 부산역을 출발한 인천공항 행 KTX 열차는 조금 전 20.3km 국내 최장 금정터널을 지났다. 아, 옛날이여! 검은 연기를 뿜으며 기적을 울리고 천천히 산굽이를 돌아 유유히 흐르는 강을 끼고 달리거나 나지막한 산자락에 사이좋게 모여 앉은 집들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실려 가던 낭만의 기차여행은 추억으로 돌아앉았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울산역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모내기를 한 파릇파릇한 들판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아직도 모내기를 하지 않은 직사각형 논배미가 해진 옷을 기운 흔적처럼 가난하게 살아왔던 옛날을 되돌려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잔뜩 흐린 날씨가 이슬비를 뿌리더니 신경주역에 들어갈 때는 플랫폼이 얼룩처럼 젖어있었다. 잠시 후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바깥 창틀 위쪽에 고여 있던 빗물이 차창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창밖은 뿌옇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홀로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창으로 흘러내리던 빗물이 터널 안에서는 개미처럼 작은 입자로 변하여 자꾸 뒤로 밀려가고 있었다. 빠르다는 것은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다. 잇달아 나타나는 터널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분 10초 동안의 터널을 지나자 15초 후 다시 터널, 계속 터널이 껌벅이고, 20초 터널을 지나면 다시 터널, 또 터널! 잦은 터널이 생각을 앗아가며 삶을 난도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신학교 동기회로부터 인도여행계획을 통보받는 것은 석 달 전인 3월 초순이었다. 졸업20주년을 맞아 인도에서 선교하고 있는 W동기의 선교지를 방문하고 나머지 시간은 인도를 관광하는 순서로 짜여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흔한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이따금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평균수준으로 보면 아직도 해외 구경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부산 교외에 위치한 우리교회는 여건이 열악하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 같은 지역의 목회자들이나 신학교 동기들과 해외여행을 할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동행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유는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졸업 후 5~6년 동안엔 동기모임이 자주 있었다. 서울지역의 큰 교회 수양관을 이용하거나 지방의 유명기도원에서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정보를 나누고 목회적 고충에 대한 해결점을 찾기도 했다. 목회자는 고독한 사람이다. 누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하거나 쉽사리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80명 동기들의 모임은 이런저런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았다. 초창기 동기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참여자들이 많아 40~50명에 달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 할수록 참석자들의 수는 차츰 줄어들어 10여명씩 모이게 되었고 많아도 20명을 넘지 않았다. 목회의 연륜을 더해가면서 두드러진 것은 차츰 여유를 갖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열정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모임은 1부 경건회를 마치고 2부에는 세미나주제 발표와 토론으로 이어지지만 동기들의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함량미달이었다. 참석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밤10시가 넘어 세미나가 끝난 뒤의 행사였다. 대구에서 큰 목회를 하고 있는 C동기의 교회 수양관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였다. 준비해온 짐에서 눈길을 끈 것은 맥주 한 상자였다. C동기는 그의 가방에서 나폴레옹 코냑 한 병을 꺼냈다. 성찬식을 할 때 포도즙을 마시는 것 외에 와인을 입에 댄 적이 없었지만 나도 분위기를 위해서 권하는 맥주잔을 거절할 수 없었다. 몇몇 동기들은 홀쭉한 유리잔에 갈색 코냑을 조금씩 받아 마시며 즐거워했다. 술기가 오르면 당회원들에 대한 울분을 쏟아 내기도 하고, 소위 잘 나가는 선배 목회자들의 허물을 씹는 것이 안주가 되었다. 젓가락을 두들기며 대중가요를 부르는 일은 없었지만 술자리는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몇몇이 조용히 다른 방으로 흩어져 가면 남은 사람들은 화투판을 벌였다. 처음에는 천 원짜리들이 오가다 나중에는 판돈이 만 원권으로 바뀌었다. 나는 신기하기도 하여 옆에서 구경을 하다 자정이 넘으면서 조용한 방을 찾아갔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에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할까 궁금했다. 오전10시가 넘기까지 모두 늦잠을 잤지만 아무도 별탈은 없었다. “고급양주를 마시면 뒤끝이 깨끗하지!” 한 친구가 말했다. 때때로 모임에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고 가야 목회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어쩌다 한차례 씩 그런 모임을 갖는 줄 알았다. 특별히 가까운 몇몇 사람들은 자기들 끼리 그런 자리를 자주 만들고 있었다. 그런 ‘재미있는 모임’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나는 동기모임에 발을 끊었다. 그런 정서로 돌아와 목회현장에 임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목회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논리도, 설득도, 규범도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교회는 법으로 통제할 아무런 장치가 없었다. 엄한 교회법이 있지만 사사건건 치리를 할 수도 없었다. 찬송은 잘 불러도 천사 같은 성도는 없었다. 목회란 기도하며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었다. 참고 또 참아야 했다. 어떤 목회자는 사탄처럼 자주 목회를 방해하는 사람을 은밀히 불러다 물리적인 수단으로 징계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미봉책이었다. 얼마 후 그는 그 교회를 사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나는 한동안 고민했다. 20주년 선교여행에 참여할까, 말까? 아이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도 빠듯한 삶에 부부가 해외여행에 참여한다는 것이 마음에 허락되지 않았다. 큰 교회를 목회하는 동기들이 상당한 금액을 찬조한다지만 18년이나 한 교회에서 목회해 온 사람이 다른 동기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동기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 오래전 수양관에서 가졌던 지난날의 모임과 비슷한 분위기가 될 것 같아 우려되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동기들의 의식을 비교해보면 그들은 참으로 자유분방하게 보였다. 잘 보면 통이 큰 목회자로 볼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하면 교회의 세속화를 앞장서서 이끌고 있는 것 같아 씁쓰레했다. 그러나 신학교 때 나와 가장 가까웠던 W동기를 생각하면 나 혼자 빠질 수도 없었다. 그는 졸업을 하자마자 안수를 받고 인도선교를 위해 떠났다.
W는 누구보다도 겸손하며 경건한 생활을 하려고 애썼고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친구였다. 내가 목회자가 없는 농어촌 지역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땅 끝으로 가기를 원했다. 당시 인도는 열악한 선교지역으로 일부 선교사들이 기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인도로 떠났고 나는 시골교회로 내려왔다. 내가 오늘까지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한 것처럼 W는 인도에서만 선교사역을 해왔다. 그의 한결같은 선교열정이 고마워 10년 전부터는 우리교회도 약간의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다. 한 달에 한차례 씩 이메일로 선교보고서를 보내와서 그의 소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졸업 후 한 번도 만나보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꼭 그가 일하는 선교현장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우정이 인도여행에 참여하게 했다. 또 한 가지 목적은 이번기회에 인도에 있는 성 도마교회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선교지 방문 결정을 해놓고 ‘매력의 땅’ 인도의 사전지식을 얻기 위해 여행안내책자 한권을 구입했다. “동행하기로 했던 친구가 여행을 못 가게 되는 바람에 혼자서 한 달 일정으로 인도를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귀국을 포기하고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관광 비자 만료일에 인도에서 출국했습니다.······인도는 제가 최고로 꼽는 여행지입니다. 하나의 국가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만큼 유럽대륙 크기의 면적에는 남쪽의 사막부터 북쪽의 빙하까지 모든 문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서 나는 더욱 인도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마교회에 대한 안내는 책자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옆자리의 젊은 여자 분은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계속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설픈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나는 오히려 편했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산골짜기에 갇혀있던 들판이 팔을 벌리고 달려 나오고 양철지붕과 벽돌조 건물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비는 그쳤으나 산과 들은 안개 속에 싸여있다. 이제 막 정차한 동대구역 전광판 시계는 8시47분을 가리키고 있다. 승객들이 우르르 차안으로 몰려들어왔다. 2분쯤 지나자 열차는 서울 쪽으로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대왕 메트로시티, 푸른솔, 청구 등 아파트 이름들이 얼른얼른 지나가고 그 사이로 크고 작은 교회의 십자가가 솟아 있었다. ‘어디서나 교회의 십자가보이면 감사하라’고 말하던 실천신학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고속전철의 잦은 터널처럼 십자가가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집을 짓고 십자가를 세우기만하면 교회당 크기만큼 교인들이 채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때는 개척교회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척교회들을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요즘 수도권에는 사흘에 두 개씩 교회건물이 경매에 붙여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경매시장에 나오는 교회들은 저마다의 딱한 사정도 있을 것이지만 아직도 믿음으로 교회를 세우기만하면 채워진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모험을 한 것이 커다란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2년 전 이단에 팔린 경기도 판교의 한교회가 그렇다. 종교시설 중 역대 최고가인 526억 원으로 경매에 붙여졌던 그 교회는 신도시에 대형교회를 지으면 교세가 증가한다는 도식이 좌초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교회가 금융권에서 대출받은 금액이 5조원을 넘고 있고, 연체율도 대기업의 2.7배로 높아 그만큼 부실대출의 위험성도 크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지방의 대도시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100년이 가까운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교회도 그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는 성장의 동력이 생기는 듯했으나 5년이 지나면서부터 교회는 답보상태에 접어들었고 교인들은 한 가정씩 도시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한 생명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목회자에게 교회의 정체상태는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였다. 이때 생각난 것이 C목사였다. 그는 이름 있는 부흥사였다. 기존 교회나 신축 교회들이 그를 초청해 심령부흥회를 개최하는 경우가 많았다. 큰 기도원 여름집회에 그의 이름이 내 걸리면 각 지역에서 몰려온 성도들로 넘쳐났다.
C목사는 해외에서도 한차례 씩 집회를 갖고 있었다. 동기들 중 여러 사람이 이민교회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 갈 때마다 일리노이주의 윌로크릭 커뮤니티, 캘리포니아의 새들백 처치, 텍사스의 레이크우드 처치 등 대형교회들을 돌아보며 일찍부터 교회성장의 꿈을 키웠다. 7년 전 수성 못이 내려다보이는 5천여 평의 언덕배기 부지에 교회당을 신축했다. 입당예배 때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동기들이 거의 다 모였었다. 그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체육관 같은 다목적 교육관이었다. 체육관을 겸한 센터는 때로 교회 밖 단체들의 운동경기에도 개방하여 불신자 전도에 기여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C목사는 한 달 전기료만도 1천만 원이 넘게 든다고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C목사님―, 평안하시지요? 양산에 박 목사입니다.”
나는 교회성장을 고민하던 끝에 해가 바뀌면서 새해 인사 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구, 박 목사님이 웬일이세요?”
C목사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도 평안하시고, 늘 수고가 많지요.”
“예, 은혜 중에 잘 지냅니다. 한 번씩 만나야 하는데 너무 격조했습니다.”
“목사님 뵌 지가 까마득합니다. 내가 뭐 다른 부탁이 있겠어요. 올 가을쯤 우리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좀 인도해주시면 좋겠는데―.”
나는 망설이다 집회 얘기를 꺼냈다.
“예, 좋지요. 그런 일 아니라도 박 목사님을 자주 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보자―, 금년에는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내년 봄쯤 한번 시간을 만들어봅시다.”
그는 쾌히 허락을 했다.
“그럼, 3월 중순으로 일정을 잡겠습니다.”
유명 부흥사들은 적어도 2년 전에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나는 참으로 잘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해가 바뀌고 C목사에게 새해인사도 나누고 3월 중순 집회일정을 확인할 겸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반갑게 전화를 받고 나의 안부를 물었으나 사정이 생겨서 3월 집회는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강사목사가 사정이 생겼다는데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시 우리교회 창립기념 주일인 9월 둘째 주일저녁부터 4일간으로 집회일자를 수정했다. 우리교회는 그때를 기다리며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6월 초순에 C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집회일정을 확인하고 성경본문과 제목을 미리 보내달라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호탕한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8월이 되어도 C목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자꾸 전화를 거는 것이 너무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C목사가 연락을 줄때까지 기다리다 중순을 넘겼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는 격으로 다시 교회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C목사님, 해외에 나가셨는데 이달 말께 돌아오십니다.”
교회 사무원으로부터 아리송한 대답을 들었다. 나는 궁금하여 가까운 동기들에게 C목사의 근황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C목사가 그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집회를 예약해놓은 나로서는 참으로 난처했다. 그 소식은 동기들 간의 교제가 거의 없었던 나만 모르는 일이며, C목사의 얘기는 지난해부터 암암리에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임 이유는 스캔들이라고만 알려지고 있었다. 신학교 시절 졸업을 앞둔 우리는 목회현장에서 ‘여자와 돈과 명예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의 집회를 기다리며 온 교회와 함께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C목사는 초창기 동기들 모임 때 교회성장 사례발표도 종종했지만 한 밤중 와인파티와 화투놀이를 주도하기도 했었다. 그 후 그는 타 교단으로 이적했고 지금은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있다.
목회란 남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명 부흥사의 도움으로 교회 정체상태를 벗어나보려던 나의 계획은 그 뒷수습을 하는데 만도 많은 어려움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해 창립기념 부흥집회는 취소되고 말았다. 그렇게 일이 커진 것은 내가 다른 동기들과의 교제를 끊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나는 정보화시대에 정보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신학교시절 배웠던 책과 노트를 뒤적이며 목회를 계속했던 것이다. 골방을 찾아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래도 답답하면 한차례 씩 기도원으로 올라갔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만 나는 10년 전 한 교인이 선물해준 폴더 휴대폰을 그대로 갖고 있다. 전화통화도 잘되고, 문자를 보낼 수 있고, 알람도 되고, 화면은 작지만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도무지 스마트폰을 구입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갖고 밤낮으로 카톡을 주고받거나 게임에 빠지는 것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 했을 뿐이다.
인천공항 집결지인 J카운터를 찾아갔을 때는 11시 50분이 지나고 있었다. 출발시간 3시간 전인 11시 10분까지 도착하도록 연락을 받았으나 부산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KTX는 11시 45분 도착이 가장 가까운 시간이었다. 일주일 전에 김해공항 항공편을 문의했으나 좌석은 이미 매진되고 없었다. 다른 동기들은 이미 다 도착해있었다. 대구, 광주, 청주, 그리고 멀리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동기들도 모두 부부가 함께 와 있었다. 혼자 온 사람은 지난 연말께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오래전 동기생 부부들이 함께 모일 때 나를 보았던 사모들이 ‘OOO목사 짝지’ 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 아내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나는 ‘목회적 판단’을 앞세워 이때까지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함께하지 못했다. 아내는 언젠가 사모 성가단에서 교포교회의 연주 초청을 받아 미국에 한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사모들이 함께 가는데 아내가 묻어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목회자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위해 교회를 비운다는 것은 아직도 마음에 허락되지 않았다. 다른 사모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나름대로 살뜰하다는 내가 아내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인디아를 타고 홍콩을 경유, 델리까지는 10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3박5일 일정의 여행은 이튿날 인도를 상징하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타지마할 관광, 아그라 성 방문, 둘째 날은 호소르의 W목사 선교지를 찾아 최근에 건축한 타밀의 은혜교회 입당식 참석, 셋째 날은 첸나이로 이동하여 내가 기대하는 성 도마교회를 방문하는 것으로 잡혀있었다. 델리에서 동쪽으로 203km인 아그라까지는 버스로 4시간정도 걸린다고 했다.
인도는 3월~5월을 제외하고 몬순이 비를 몰고 오는 6월부터는 연중 벼농사 밀농사가 계속된다고 한다. 들판엔 여기저기 감자를 수확하는 사람들과 양떼를 먹이는 목동들의 모습이 이따금 눈에 띄었다. 마을이 밀집하지 않은 곳에도 화려한 색상의 힌두교 사원이 차창 밖으로 멀리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다. 12억 인구 중에 종교는 이슬람13%, 기독교3%, 불교는 1%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는 거의가 힌두교도들이다. 계속 차가 달려도 산은 보이지 않았다. 땅이 넓기 때문인지 도시와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들판은 잡초가 우거진 곳이 많고 야자수가 드문드문 운치를 더하고 있을 뿐이었다. 호텔 주변에는 높은 가지에서 문어발처럼 뿌리가 흘러내린 반얀 나무를 볼 수 있었다. 아름드리 반얀 나무는 한 그루로 거대한 숲을 이루기도 한다고 한다.
그날 우리는 오전7시20분 델리에서 호텔을 출발하여 타지마할과 유네스코 문화재인 아그라성을 방문하고 다시 델리공항으로 돌아와 오후8시 30분 비행기로 W목사가 있는 벵갈루루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왕복 8차선인 넓은 도로를 전용버스가 3시간쯤 달려 아그라 시내에 진입했을 때 길은 차츰 차량이 밀리더니 한차례 씩 정체현상을 빚었다. 목적지 타지마할까지 1시간정도 남긴 지점에서 부터는 차선도 없는 길이 주차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도로변 집들은 흡사 피난민 촌 같았다. 불탄 흔적으로 검게 그을린 초라한 2층 집은 병원간판만 그대로 걸려 있는 것도 보였다. 승합차에는 20여명이, 1톤 트럭에도 15명 정도, 사람들이 마치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세발차인 오토릭샤에도 10명이 넘게 타고 이동을 하고 있었다. 거리 분위기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한 읍내 장터 같았다. 차들은 1m, 2m를 움직이고서는 10분, 20분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보기 드문 교통 체증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한참 후에 현지 가이드가 교통경찰관에게 물어보았다. 타지마할까지 바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아무나 강 다리 보수공사로 인해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그라 시를 벗어나기까지 2시간 30분을 길 위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우회도로의 2차선 좁은 다리를 건너 잠시 후 석축으로 이루어진 아그라 성벽을 오른쪽으로 끼고 10분쯤 달려 마침내 타지마할 입구에 도착했다. 손목시계는 1시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입구까지 가서 다시 10분쯤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서 타지마할을 둘러보기까지 1시간 정도 걸렸다. 섭씨40도가 넘는 6월의 더운 날씨. 건조한 기후 탓인지 체감 더위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여유를 갖고 타지마할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관광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선교지 방문일정에 바쁜 우리는 타지마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아무나 강의 뱃놀이도, 고요한 달밤에 뜰을 거닐어보는 낭만도 맛보지 못하고 서둘러 아그라를 떠났다. 6시간이 넘게 걸려 타지마할까지 달려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동기목사의 선교지인 벵갈루루로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타지마할 관광은 그야말로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아그라 성을 비롯해 타지마할을 중심으로 둘러있는 명소들을 둘러보려던 계획은 모두 취소되고 델리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중심가 교차로에는 세 마리의 소가 어슬렁거리고 따로 한 마리는 도로변 쓰레기 더미에서 무엇을 찾아먹고 있었다. 아그라 시를 벗어나는 길은 비교적 차량소통이 잘 되었다. 인도의 대표적인 관광지 타지마할의 기억은 그것이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Shah Jahan) 왕비의 무덤이라는 기억 밖에 없다.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왕비는 38세에 열한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 숨을 거두며 “세상이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하도록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유언을 따라 22년이 걸려 지은 타지마할이 존재한다. 버스로 이동하는 지루한 길! 주변을 둘러볼 흥미도, 새로운 목적지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졌다. 인도 언어는 오래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600개로 집계되었다. 10년 후 다시 조사했을 때는 빠진 언어들이 등재되면서 무려 3200개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지명도 옛날의 바드라스는 첸나이로, 봄베이는 오늘의 뭄바이로 바뀌었다. 이제는 현지 가이드가 늘어놓는 이야기도 잡담처럼 귓전을 스쳐갈 뿐이었다.
따분한 차중에서 우리는 대부분 잠을 자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신학교시절 체육대회 때 청백 응원단장을 했던 두 사람이 모두 함께 하고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청군 응원 단장이었던 K가 앞으로 나와 통로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여행이나 동기 모임 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전속 개그맨’이었다. 그가 마이크를 잡자 동기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환호했다. 그는 서론도 없이 곧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용돈 좀 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무얼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빤스하나 살려고요. 빤스로 무얼 하려고? 고무줄을 빼겠습니다. 그래서―?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겠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팔겠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겠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먹고 놀기만 하는 아들의 생각이 기특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빤스를 사야겠습니다. 그래서―? 고무줄을 빼겠습니다. —
차안에서는 박수와 함께 폭소가 터져 나왔다. K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청년실업 때문에 취직을 못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답답해서 아들아, 대학은 왜 갔는데, 라고 물었습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지요. 취직을 하면―? 아버지의 물음이 이어졌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이쁜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러지 않아도 어서 빨리 손주를 안아보고 싶었는데 하도 그 말이 기특해서 그래서―? 하고 다음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빤스를 선물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아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고무줄을 빼겠습니다. 그래서―? 새총을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새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겠습니다. 그래서―? 빤스를 사겠습니다.······ —
다시 박수와 폭소가 터져 나왔고 어떤 이는 발을 굴렀다. 나도 덩달아 박수를 치며 오랜만에 마음껏 웃어본다. 자나 깨나 목회만을 생각하던 내게 이번 여행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일상과는 다른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무줄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아버지는 아내를 일찍 떠나보내고 유일한 혈육인 외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100원만 달라고 졸랐습니다. 무엇에 쓰려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고무줄을 사고,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고, 팔아서 고무줄을 사고, 다시 그 고무줄로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어느 듯 10년의 세월이 흘러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퇴원 기념으로 3천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그 돈으로 뭐하려고―? 차를 사려구요. 차는 왜? 여자를 꼬시려구요. 아버지는 이제야 아들이 제정신이 돌아왔구먼 생각하며 여자를 꼬셔서 뭐하는데? 물었습니다. 여관에 데려가야지요. 그다음에 뭘 하지? 옷을 벗겨야지요. 그리구 나서? 물론 팬티를 벗겨야지요. 팬티를 벗기고는? 고무줄을 빼서 새총을 만들겠습니다. —
몇 사람은 “언제 들어도 우스운 이야기야!” 라고 말하며 소리쳤고, 사모들은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두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응원단장인 K가 물을 마시며 잠시 쉬는 동안 옆에 있던 B가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들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B는 신학교시절 백군 응원 단장이었다.
— 제목은 대머리 대학생의 고민입니다. 그는 탈모현상이 심해서 늘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머리카락을 심기로 했습니다. 대학4년간 한 번도 고향집에 내려가지도 않고 열심히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머리카락을 심었습니다. 거울에 머리를 비춰보니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몰라보게 변한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한마디 했습니다. 아들아, 너 입대영장 나왔다. —
웃음의 볼륨이 조금 약한 것 같았다. ‘대머리 대학생의 고민’이라는 제목을 먼저 내세우는 것부터가 재미를 깎아먹은 것이다. 누군가가 ‘K에게 마이크를 넘기라’고 소리쳤다. K가 다시 일어서서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다섯 살짜리 손자 영구와 같이 사는 영구 할배가 읍내 5일장에 가는 날이었습니다. 영감, 건전지 하나 사오시오. 벽시계에 넣을 건전지 말이냐? 얼마만한 거? 고추만한 작은 거요. 누구 꺼 만한 거? 내꺼 말이가? 영구꺼 말이가? 영감걸루 사와요.(하이고 영구 꺼만도 못하면서.) 대문 밖을 나서던 할배가 다시 들어와서 할멈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섰을 때만한 거? 아니면 죽었을 때만한 거? 아무거나 사와요. 섰을 때나 죽었을 때나 똑 같으면서.(하이고 요새는 서지도 않으면서) 할배는 장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놀기도 하고 술도 한 잔 걸치고 왔는데 정작 건전지 사는 것은 잊어먹었습니다. 할매한테 어떻게 잔소리를 덜 듣나 궁리하던 할배는 옳지, 하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영감, 건전지 사왔나? 몬 사왔다. 와? 건전지 파는 가게 아가씨가 내꺼 만한 거 달랬더니 할배 께 얼마만한 지 봐야 준다 카더라 아이가. 그래서 안 보여주고 그냥 왔다.······ 나 잘 했제?
다음번 장날에도 할배는 건지 사오는 것을 또 잊었습니다. 애그 이번엔 죽었네―. 할멈 잔소리 우예 듣노! 할배는 걱정하며 집으로 들어섰습니다. 영감, 건전지 사왔나? 몬 사왔다. 와? 내가 건전지를 사려고 창피한 것을 무릅쓰고 아가씨한테 내꺼를 보여줬더니만 실컷 들여다보고 나서 꼬부라진 건전지는 없다 카더라. ㅎㅎㅎ. —
이것도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이밖에도 몇 가지 유모어를 듣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벵갈루루 공항에 내려, 숙소인 호텔에 들어갔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몸은 피곤하지만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언젠가 늘 수고하는 권사회원들과 함께 내장산 단풍구경을 하고 돌아올 때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났다. 운전기사가 대중가요 테이프를 크게 틀자 버스 안은 일시에 들썩들썩 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방언을 하는 H권사도, 구역장을 맞고 있는 L권사도, 회장과 임원들도 모두 통로에서 함께 신나게 뛰며 춤을 추고 있었다. 교인들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으나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것이 보통사람들의 삶이었다.
우리는 오전 10시쯤에는 호소르 타밀에 도착했다. 예고된 대로 이번 인도여행은 일반여행과는 달리 동기 목사의 선교지를 방문하고 격려하는 차원이었다. 선교20년에 W선교사는 완전히 인도사람처럼 되어 있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목닫이 인도복장을 하고 있었다. 선교란 그 나라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이 어떻게 선교를 해왔다는 것을 몸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신축된 교회당은 넓은 언덕 부지에 벽돌조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별실이 따로 붙어 있는 본당의 넓이는 강단까지 합하면 50평은 되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교회간판 제막식을 했다. 신을 벗고 들어가는 바닥이지만 준비된 슬리퍼가 모자라 양말을 신은 채로 들어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바닥은 흙먼지 투성이었다. 강대상에 한 대의 선풍기가 돌아가고 양쪽 벽면에는 두 대씩 모두 다섯 대의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더위를 내쫓지는 못했다. 여전히 40도를 웃도는 바깥기온보다 실내는 더 더운 것 같았다. 현지인 30여명과 함께 3중 통역을 하며 우리는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는 인도 전통무용 공연이 이어졌다.
오후3시가 넘어 입당예식이 끝난 뒤에 교회마당에 마련된 천막 그늘에서 늦은 점심식탁이 차려졌다. 한 사람 앞에 한 장씩 널따란 파초잎을 펴고 그 위에 닭고기를 넣은 볶음밥을 한 주걱 씩 퍼놓았다. 반찬은 설은 양파를 마요네즈에 버무린 것 한 가지 였고 바나나가 한 개 곁들여졌다. 그리고 생수 한 병이 올려졌으나 수저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오른 손만으로 집어먹는 인도의 정통식사였다. 시장했기 때문인지 맛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갑자기 소나기성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천막이 다 날아가 버렸다. 우리는 교회당 안으로 자리를 옮겨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튿날 우리는 새벽 5시30분에 벵갈루루 호텔식당의 도시락을 받아들고 버스로 최종 목적지인 도마교회가 있는 첸나이로 향했다. 도중에 공원 같은 곳에서 도시락을 먹고 7시간을 달려 하얀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벵골만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듣고도 자기가 직접 그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그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던 도마가 일주일 후에 주님을 직접 만나 회개하고 동방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던 곳이 첸나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외경 도마행전의 전승은 달리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인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마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도마는 인도로 가기를 거부했다. 예수는 도마의 모든 소유를 다 잃게 하고 목수 노비가 되어 인도로 팔려가게 했다는 것. 당시 인도 왕이 궁전을 짓기 위한 목수를 구하기 위해 건축술이 뛰어난 예루살렘에 신하를 보냈다. 그는 노비시장에서 은30을 주고 목수 도마를 사왔다고 한다.
바실리카형의 웅장한 백색건물의 내부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으로 둘러있고 목조 도마상이 세워진 본당 예배실 강단 앞쪽 바닥에는 가로 90cm, 세로 30cm 정도의 폐쇄 유리창이 있었다. 그 위쪽에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져있었다. ‘ENTRY TO ST, THOMAS TOMB BEHIND THE CHURCH’. 그 ‘성 도마 무덤입구’를 보면서 그의 무덤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인도의 서남부 말라바르 지역 교회가운데는 “사도 도마를 통해 복음을 받았다”는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도마는 참으로 고마운 제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도마가 없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열한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때 도마는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요한 20:25)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드레를 지난 후에 제자들이 함께 집안에 있을 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20:27) 도마의 의심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성경을 읽으며 의문을 갖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의문을 가져야 숨겨진 답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할 말은 하는 도마는 참으로 용기 있는 제자였다.
유럽대륙만한 거대한 인도 땅을 3일 동안에 둘러보는 것은 여행도, 순례도 아니었다. 다만 W선교사의 선교열정이 여전히 식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과 함께 우리들에게도 처음 마음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버스로, 비행기로 이동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길에서 보냈다. 마지막 도마교회를 찾아 그의 믿음과 용기와 헌신의 현장을 둘러본 것은 내게는 더없는 수확이었다. 첸나이를 떠나면서 나와 나란히 앉았던 W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겠어.”
우리는 그만큼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가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전체로 말하면 서울에서 출발해 전라남도로 왔다가 경상남도로 이동하여 다시금 서울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생각하면 비슷할 거야.”
W는 갖고 있던 지도를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바라나시를 가보지 않고는 인도여행을 말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 여행은 참 아쉬워. 내게는 첫 해외여행이기도 한데.”
나는 지도에서 손가락으로 바라나시를 찾아냈다. 바라나시는 아그라에서 멀지 않았다. 지도상으로는 벵갈루루에서 첸나이까지의 거리와 비슷했다. 이번여행 일정을 짠 사람들이 너무 무신경하다는 생각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번 일정도 너무 짧게 짜였고―.”
W는 내 말에 동의를 표하며 바라나시 얘기를 들려주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변은 힌두교의 정통 장례식장인 ‘버닝가트’가 있는 곳으로 현재는 두 곳만 운영되고 있다. 가트(Ghat)란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가트는 강변 4km 거리에 100여개나 되지만 다른 곳은 목욕과 빨래, 산책, 요가, 스포츠 등 다양한 야외활동에 이용된다. 힌두교도들에게 바라나시에서의 장례의식은 신으로부터 받는 축복이기 때문에 주검을 앞에 놓고 울부짖거나 곡을 하지 않는 전통에 따른다. 인도 사람들은 종파의 구별없이 죽을 때가 되면 바라나시로 찾아간다. 그들은 죽음을 이승과의 작별이 아닌, 더 나은 곳으로 떠나가는 환송의 문이라고 생각한다. 갠지스 강 주변에는 화장터와 돌계단이 줄지어 있고, 화장에 쓰이는 장작을 파는 장사꾼들이 있다. 시신은 대충 태워 강에 뿌려도 괜찮다는 믿음 때문에 반쯤 타다만 시신을 강에 던지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장작을 살 돈이 모자라 시체를 다 태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장은 소멸의 길이자 불멸의 삶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도인들은 삶과 죽음이 있는 성스러운 갠지스 강가에서 매일 밤과 새벽 사이에 시신을 불태우며 강에 유골을 뿌린다. 윤회사상을 믿는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에 몸을 씻으면 죄를 용서받고 죽어서 갠지스 강에 뿌려지면 비로소 윤회가 끝나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영혼의 안식처인 이곳 갠지스 강가에는 매일 아침이면 목욕을 하는 사람과 화장의식을 볼 수 있다.
나는 W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그라 시에서 우리가 탄 버스가 교통정체에 걸려 있을 때 버스차창 아래로 곱게 단장한 시신을 실은 승합차가 서있는 것을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들은 흡사 조용히 잠들어있는 사람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다음에 시간을 넉넉히 잡고 꼭 형수님 하고 같이 와. 인도는 참으로 볼만한 곳이 너무 많아!”
“그러지. 다음엔 아내와 함께 올게.”
나는 용돈으로 환전해갔던 3만 루피(한화 50만원) 봉투를 그의 안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적은 것이지만 쓸 곳에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인도의 인상보다도 차중에서 들었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만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아내에게 인도여행과 W선교사의 근황을 얘기하며 버스로 이동 중에 들었던 ‘고무줄’ 얘기를 꺼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예요. ‘고무줄 시리즈’는 이미 3~4년 전에 유행하던 이야기인데―.”
아내는 별로 웃지도 않았다. 썰렁했지만 내친김에 한 가지 얘기를 더 들려주었다.
— 어떤 노부부가 새집으로 이사를 했어. 영감은 새로운 마음으로 가훈이라도 하나 붙이고 의욕적으로 살고 싶었지. 영감이 벽에다 커다랗게 ‘하면 된다’라고 써 붙였대. 할멈이 읽어보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어서 그것을 확 뜯어버리고 다시 써 붙였지. ‘서면 한다’라고.ㅎㅎ—
아내는 이웃집 사람이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웃다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도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그런 얘기는 SNS에 구름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어요.”
“······”
나는 여태껏 외딴섬에서 살아온 사람 같았다. 내게는 충격적(?)으로 들렸던 얘기들을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대답대신 내 머릿속에는 이런 말씀들이 번갈아 맴돌았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않으려면 너희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리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나는 서재로 돌아와 벽에 걸린 주님의 초상화를 쳐다보았다. 주님은 죄인의 친구로 이 땅에 오셨는데 혹시 내 마음의 울타리가 교회의 담을 높이 쌓아올리지는 않았는가? 내가 쓰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며 10년이 훨씬 넘은 휴대폰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백과사전뿐만 아니라 성구사전 역할도 어느 정도 대신하고 있다던 이웃교회 동역자의 말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여러 차례 우리도 함께 해외여행을 가보자고 제안하던 아내의 청을 한 번도 들어주지 못한 것도 미안했다. 왜 이처럼 오래도록 동기들과의 소통을 외면해왔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도마가 우상의 땅 인도로 가게 된 까닭을 생각한다.
*고전5:10(임의 참조) **롬12:2(임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