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가는 박약회 청장년위원회 답사였다. 집행부는 회원들의 편의를 위해 28인승 버스를 준비했다. 영천은 대구 인근이지만 아직 답사를 가지 못한 곳이었다. 영천을 생각하면 은해사와 임고서원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으니 문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사 일주일 전에 집행부의 공지가 있었다. 28인승 버스에 아직 빈자리가 있으니 주변 사람의 동행을 환영한다는 내용이었다. 갈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로 의향을 물어보니 다들 선약이 있었는데, 다행히 호균씨가 가겠다고 한다. 호균씨는 법흥 아재의 맏아들이니 나에게는 각별한 사람이다.
반월당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조(趙) 부회장에게 차를 얻어 마셨다. 비가 조금 내렸지만, 가뭄 끝의 단비라 모두 내리는 비를 보며 좋아한다. 범어네거리에서 잠시 기다리니 호균씨가 왔다. 영천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란히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先賢들의 자취가 가득한 영천 조양각(朝陽閣)
영천 조양각
영천 시내를 달린 버스는 영천교를 건너 중앙사거리에서 우회전하였다. 바로 영천문화원이 보이고, 우뚝 솟은 조양각(朝陽閣)이 보인다. 비 오는 날이라 관람객은 없어서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두루 살필 수 있었다. 조양각에 올라 살펴보니,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수많은 시판(詩板)과 기문(記文)이 있었다. 누가 썼는지를 살펴보니, 포은 정몽주와 사가 서거정, 점필재 김종직, 농암 이현보, 율곡 이이 등의 인물들이 보인다. 기문 중에는 ‘명원루(明遠樓)’, ‘서세루(瑞世樓)’라 적힌 것도 많아서 조양각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
누각에서 금호강을 바라보는 경치는 좋았다. 탁 트인 풍광이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만한 곳이라 할까? 조양각은 고려 말에 창건된 당시에는 ‘명원루(明遠樓)’라 불렸다고 한다. ‘명원루(明遠樓)’의 어원(語源)은 당대(唐代)의 유학자인 한유(韓愈)의 詩에 나오는 ‘훤히 트인 곳에서 먼 곳을 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 오는 듯 하다[遠目增雙明]’이다. 정말 이곳 조양각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된다.
조양각은 서세루(瑞世樓)라 불렸는데, 서세(瑞世)는 봉황이 출현하는 상서로운 세상을 말한다. 조양(朝陽)은 봉황이 사는 동쪽 언덕이니, 모두 봉황이 관련이 있다. 봉황은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태평성세에 나타난다고 알려진 영물(靈物)이다. 따라서 ‘조양(朝陽)’은, 우리 임금이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영천(永川)이 우리나라의 동쪽에 위치한 점을 고려하여 지은 것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朝陽閣’을 검색하니, 많은 자료가 보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표적 누각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시를 남겼다. 또 이곳은 일본을 왕래하던 통신사(通信使) 행로(行路)에 위치하였기에, 통신사 일행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고, 관찰사를 비롯한 지방관들은 이곳에서 통신사 일행의 먼 여정(旅程)을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고구마 종자를 갖고 온 영호(永湖) 조엄(趙曮)의 사행기(使行記)인 해사일기(海槎日記), 1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창산(蒼山) 김기수(金綺秀)의 사행기(使行記)인 일동기유(日東記游)에도 조양각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조양각은 아름다운 풍광(風光)과 선현(先賢)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조양각 앞의 금호강 주변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마침 이슬비도 내리니, 우산을 같이 쓰고 누군가와 걷고 싶어진다. 이렇듯 조양각은 영천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곳인데, 지금의 관리방식이 좋은지는 의문이다. 몇 년 전에 답사를 갔던 밀양의 영남루가 생각된다. 7월의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영남루(嶺南樓) 위에는 많은 시민들이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면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조양각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먼지가 쌓여있었다. 이곳도 개방되어 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연정고택(蓮亭古宅)
영천(永川)은 골짜기마다 유서 깊은 고가(古家)와 정자(亭子), 서원(書院) 등이 많아서 문한(文翰)의 고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도 사람이 떠나갔거나 노인들만 계신 곳이기에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많은 곳의 문이 잠겨 있어서 까치발을 하고 담장 밖에서 잠시 보다가 돌아서곤 하였다. 그러나 임고서원(臨皐書院)은 맘 편히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서원 앞에 있는 수백 년의 은행나무와 계현재(啟賢齋) 담장 옆에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던 앵두나무가 기억에 남는다.
임고서원을 둘러본 우리 일행은 연정고택(蓮亭古宅)으로 향했다. 28인승 대형 버스는 어렵게 좁은 길을 지나간다. 연정고택은 규모가 상당했다. 감히 안으로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마당에서 살펴보니, 맞배지붕의 건물이 서로 붙어 字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랑채를 옆에서 보니 반오량가(半五樑架) 건물이었다. 특이하게도 후면은 오량가(五樑架)이고, 전면은 삼량가(三樑架)였다. 그리고 외부에서 보이는 벽체가 판재(板材)로 마감되어 있었다.
연정고택 측면
입춘대길 건양다경
사랑채 건물 중간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었다. 이 대문에는 한지(韓紙)에 붓으로 써서 붙인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글귀가 쓰여있다. 흔히 보는 글귀이지만, ‘春’의 형태가 특이하여 의문을 가졌었다. 나중에 집안 어른에게 여쭤보니, ‘春’字의 초서체(草書體)를 보여주는데, 연정고택 대문의 쓰인 글자와 동일하였다.
연정고택의 앞마당은 넓었다. 이 정도 규모의 집이라면, 상당한 재력을 가졌을 것이니, 논밭도 많았을 것이다. 가을 타작을 위해서는 아마도 넓은 마당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마당 한 편에는 흙벽돌로 지은 창고가 있었는데, 요즈음 보기 드문 것이라 눈길이 갔다.
연정고택 앞에는 연정(蓮亭)이 있었다. 연정고택을 살피다 보니, 우리 일행은 연정 고택을 지나 주차된 버스로 가는 분들이 있었다. 마음이 급하여 연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급히 사진을 찍었다. 연정은 정자 앞에 연꽃이 있는 연못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연못이 보이는 동면(東面)에는 기둥 넷을 세우고 처마 밑에 지붕을 새로 덧달아 내었다. 아마도 정자 건물을 완공한 후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새로 덧붙인 듯하다. ‘蓮亭’이란 편액이 걸린 정자의 전면(前面)은 낮은 동산을 마주하고 있는데, 누마루를 두어 정자의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정(蓮亭)의 누마루는 외부 시선에서 자유로운 휴식과 사색의 공간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정(蓮亭)
영일정씨(迎日鄭氏) 문중묘역(門中墓域)
연정고택에서 영일정씨 문중묘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선생과 그 후손들을 모신 묘역이라고 한다. 호수(湖叟) 선생은 임란 때 활약한 의병장이다. 또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던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였다. 임란 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강의(剛義)’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역 입구에서 바라보니, 완만히 경사진 넓은 지역에 수백 기(基)의 묘(墓)가 조성되어 있다. 초여름 푸른 옷을 입은 묘역은 단비를 맞으며 싱그러움을 뿜어내는 모습은 보기 드문 장관(壯觀)이었다. 우리 일행은 비를 맞으며 호수 선생과 정씨 문중을 이야기하였다. 가을에는 200여 명이 넘는 자손들이 모여 같이 벌초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단합된 힘이 부러웠다.
묘역 옆 산기슭에는 강호정(江湖亭), 삼휴정(三休亭), 사의당(四宜堂), 오회당(五懷堂) 등 영일정씨 호수(湖叟) 문중의 고건축물이 옮겨져 있었다. 영천댐 건설로 원래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한자리에 모여있는 모습은 처량하였다. 사람이 거처하지도 않고, 왕래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으니 어쩌겠는가?
용계서원(龍溪書院)과 자천(慈川) 교회
비를 맞으며 담장 밖에서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선생을 배향한 용계서원(龍溪書院)을 보았다. 용계서원 옆에는 경은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받드는 부조묘(不祧廟)와 제단(祭壇)이 있었다. 부조묘와 제단이 같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여기에 의문을 갖고 대화를 나누었다. 부조묘에는 신주(神主)를 모시는데, 대개는 그 장소가 주손(胄孫)이 사는 종가의 사당이다. 제단은 조상의 묘가 실전되었을 경우, 산소가 가서 시사(時祀)를 지내지 못하기 때문에, 조상을 추모할 공간으로 세운다는 선배의 설명이 있었다.
영천에 있는 자천교회(慈川敎會)가 유명한 이유는 1900년대 초에 세워진 오래된 교회이기도 하지만 보기 드문 한옥 건물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지식백과를 검색해보니, 1895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였던 James. E. Adams 목사가 1898년 10월경에 세웠다. Adams 목사는 대구 계성학교를 세운 분이기도 한데, 1898년 4월 경에, 영천과 청송의 경계 지점인 노귀재에서 전도(傳道)를 받은 권현중이 이곳의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서당 겸 기도소로 사용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나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대문을 지나니 오른편에 신성학당(新星學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字 형태로 네 동(棟)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조심스레 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 잘 지은 한옥이었디. 의 평면도를 가진 건물이 나온다. 학당 출입문 오른쪽 기둥에는 세로로 ‘새별배움터’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신성학당
학당을 나와 조금 더 들어가니, 교회 종을 매단 것으로 짐작되는, 나무로 세워진 타워가 보였는데, 꼭대기에는 십자가(十字架)가 있다. 타워 오른편에는 초창기 자천교회 건물이 있었지만,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듣기로는 남녀 신도의 예배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고 하였다. 남녀 유별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던 1900년 경이니 당연한 공간 배치일 것이다. 교회 인근에는 자천성당이 있어서 같이 둘러보았다.
버스를 타고 대구로 올라오면서 가볍게 캔맥주를 하나 마셨다. 오리불고기 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막걸리도 마셨으니,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다. 점심을 먹은 후 있었던 류현우 부회장의 ‘呼稱과 指稱’에 대한 발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시세부동(時勢不同)’이라 하면서 무시할 수도 없고 그대로 따를 수도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얼큰한 어탕으로 저녁을 같이 먹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식당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