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ay
타이페이 국립 고궁 박물원
1965년 10월 개관한 타이완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인 국립 고궁 박물원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중국 5000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대부분의 전시품은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네 왕조의 황실 유물로, 본래는 중국 베이징의 고궁 박물원 등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1948~1949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전해 온 것들이다.
박물관은 20만 6천m2의 넓은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본관은 중국 궁전 양식의 4층 건물로 녹색 기와와 황색 벽면이 인상적이다. 그 밖에도 여러 동의 부속 건물이 있으며, 본관 뒤로 보이는 산의 중턱에는 지하 수장고를 지어 귀중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값을 따질 수 없는 오천 년 역사의 중국 보물과 미술품 655,000점이 넘어 시기별로 교체하며 전시한다, 그래서 한꺼번에 전시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아 인기 있는 것들은 상설 전시관에 전시하고 옥, 도자기, 회화, 청동의 보물들은 일정 기간을 두고 테마를 바꾸어 가며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일 년 내내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 반까지 쉬는 날이 없이 개방하며, 매일 여러 나라 언어로 가이드 투어를 실시한다.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입구에서 카메라를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전시 공간은 3층으로 나뉘는데, 인기 전시품은 위쪽에 있으니 3층부터 관람하며 내려오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단체 관광객이 적은 점심시간이나 주말 야간 개방시간에 방문해 여유롭게 관람하자. 전시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면 여권을 맡기고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를 신청하여 이용하자. 박물관 내 사진 촬영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가능하다.
고궁 박물원 투어를 결정했다면 과감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한 번에 다 보겠다는 욕심을 부리다가는 낭패 보기 쉽다. 유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전시관마다 차근차근 다 돌아보려고 한다면 반도 안 돼 포기하게 된다. 고궁 박물원을 방문하기 전 홈페이지에서 미리 전시품들을 살펴보고 꼭 보고 싶은 목록을 미리 작성하고 위치를 확인한 후 관람하는 것이 좋다. 또는 고궁 박물원 도착 후에 우선 박물관 지도를 잘 살펴보면서 가장 보고 싶은 유물부터 찾는 것이 현명한 관람 요령이다. 그래도 짧은 일정이 아쉽다면 기념품 가게에서 한국어로 자세히 소개된 고궁 박물원 책을 구입하는 것도 좋다. 또한 오래 서 있어야 하므로 불편한 신발은 곤란하다는 점도 기억하자.
가격
일반 : NT$250
국제 학생증을 소지한 학생 및 유스트래블 카드 소지자 : NT$150
취학 전 아동, 장애우 및 동행하는 보호자 1인 무료
무료 관람일 : 1일 1일 신정과 정월 대보름, 5월 18일 세계 박물관의 날, 9월 27일 세계 관광의 날, 10월 10일 타이완 국경일 등 5일.
지선원
1984년에 시공된 중국식 전통정원으로 규모 약 18,800제곱미터의 꽤 큰 정원이다. 연못, 다리, 정자 등 중국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당일 국립고궁박물관 입장권 지참 시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전시관을 구경한 후 나오면서 둘러보면 좋다. 잠시 여유를 즐기고픈 사람에게 추천한다.
리핀부
국립고궁박물관이 출판한 서적, 문화유물 복제품, 전시품 사진 등을 이용한 각종 기념품을 판매한다. 전시 건물 지하 1층과 2층에 기념품점이 있는데 지하 1층에 있는 이곳이 규모도 크고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도서문 현관 1층에도 작지만 기념품점이 있다.
센쥐푸
깔끔한 분위기로 전시 관람 전후나 관람이 길어질 때 도중에 잠시 요기하기 좋은 카페, 쇼케이스에 진열된 메뉴나 매뉴판에 적힌 것을 보고 계산대에서 주문 및 결재하면 자리로 가져다준다. 커피·차·샐러드·샌드위치 등을 판매하고 가격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주요 전시 작품>
취옥백채
취옥백채(중국어: 翠玉白菜, 병음: Cuìyù Báicài, 백화자: Chhùi-ge̍k Pe̍h-chhài) 또는 벌레가 있는 취옥백채는 경옥을 이용하여 여치와 메뚜기가 숨겨진 배추를 표현한 조각이다. 여치가 숨겨진 배추를 옥을 깎아 만든 조각품이다. 명나라의 옥 장인의 딸이 청나라 황제의 간택을 받아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결혼 선물로 보냈다는 작품이다. 푸른 배춧잎의 위쪽에는 여치가 있는데 이는 많은 자손을 낳아 대대손손 혈통을 이어달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본토를 줘도 바꾸지 않는다는 보물로 1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육형석
육형석(肉形石)은 벽옥으로 동파육을 묘사한 작품이다. 취옥백채 및 모공정(毛公鼎)과 함께 국립고궁박물원의 3대 보물이다. 중국요리인 ‘동파육’과 매우 흡사하게 생긴 돌로 타이완의 대표적인 보물 중 하나이다. 어린아이의 주먹 크기만 한 돌이다. 돼지고기 껍데기를 연산시키는 윗부분과 단면까지 동파육과 너무 닮아 있어 신기하다.
타이페이 충렬사
1969년에 완공된 충렬사는 그랜드 호텔(The Grand Hotel, 圓山大飯店) 옆에 위치해 있으며, 푸른 산을 등지고 지룽허(基隆河) 강을 향하여 세워졌다. 주 건축 양식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을 모방하였는데,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열사들이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두려움 없는 정신을 상징한다. 1만여 평의 푸른 잔디밭과 산을 배경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어 건축물의 장엄함이 더욱 돋보인다.
충렬사 안에는 중화민국 건국 전의 혁명 열사를 비롯하여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중에 희생된 33만 장병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그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각각 한 차례씩 열리는 제사에는 국가 원수와 정부 관료들이 모두 참여하며, 타이완을 방문 중인 외국의 정상이나 주요 인사들도 참여하여 헌화한다. 이때는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으므로 방문 시 참고해야 한다.
충렬사에서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는 위병 교대식이다. 정문 앞을 지키는 위병들은 항상 마네킹처럼 꼿꼿한 자세로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1시간에 한 번 열리는 교대식에서는 본당에서 정문까지의 약 100m 거리를 행진하면서 힘차고 절도 있는 동작과 총검술을 선보인다. 충렬사의 위병 교대식은 아주 인기 있는 볼거리로, 많은 관광객들이 교대식 시간을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개관 시간 : 09:00~17:00
교대식은 매시 정각에 시작하며, 마지막 교대식은 16:40에 시작하여 17:00에 마침.
3월 28~29일 봄 제사, 9월 2일 가을 제사 때는 개방하지 않으며, 9월 3일은 정오 이후에 개방.
황제릉의 요배는 4월 4일, 국부릉은 5월 2일(매 4년에 1번) 혹은 기타 임시 활동이 있을 때 공고 후 휴관함.
위치
MRT 젠탄(劍潭) 역에서 267, 646번 버스로 환승하여 충렬사에서 하차.
MRT 위안산(圓山) 역에서 208, 247, 267, 287번 버스로 환승하여 충렬사에서 하차.
용산사
용산사는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한전불교 사원으로 딴쉐이, 루강, 타이난, 펑샨 등의 지역에도 용산사가 있다. 1738년 청나라 시절 푸젠성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타이베이에는 소규모 사원부터 거대한 사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원이 흩어져 있다. 용산사는 타이베이 사원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하며 가장 전형적인 타이완 사원이다. 불교, 도교, 유교의 중요한 신을 함께 모시는 종합 사찰로 참배객의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늘 참배객들로 붐비고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까지 발걸음이 잦다. 밤에는 조명이 켜져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안전에 주의가 필요하다. 네모난 뜰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가 3번 반복되는 3진 사합원의 궁전식 건물로, 타이완 전통 사원 건축의 극치를 보여 준다. 벽면에는 생생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석조 역시 매우 정밀하며, 기둥과 처마의 경계 부분은 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되어 있다. 지붕의 사방에는 용, 봉황, 기린 등 상서로운 상징물이 조각되어 있으며 채색 기와로 마감되어 있다. 맨 처음 지어진 것은 1738년인데, 자연재해와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된 것을 1957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국가 2급 고적으로 지정되었다.
주소 台北市 萬華區 廣州街 211號
위치 롱산쓰역 지하상가 지나 4번 출구 바로 건너편
오픈 06:00~22:00
요금 무료
홈페이지 www.lungshan.org.tw
화서가(화시제) 야시장
용산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시장으로 야시장 입구에 중국양식의 패루가 장식되어 있고, 지붕이 있어 비가와도 여행이 가능한 곳이다. 여러 가지 옷부터 약초까지 다양한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각종 음료와 먹거리부터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정체불명의 꼬치들도 만나볼 수 있다. 용산사와 함께 여행하기 좋지만 너무 늦은 시간의 여행은 삼가도록 하자. 화시제 야시장은 타이베이에서 손꼽히는 관광 야시장이다. 다른 야시장과는 달리 보양식을 많이 파는 것으로 유명하며, 약재, 예술품, 잡화, 먹거리 등을 주로 취급하고 있다. 용산사(龍山寺, 룽산쓰) 바로 왼쪽에 위치해 있어 용산사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자연스레 화시제 야시장을 들르기 때문에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단체 관광객의 필수 투어 코스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화시제 야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뱀탕이나 뱀술 등 뱀으로 만든 온갖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뱀뿐 아니라 몸에 좋다는 각종 동물 보양식들이 즐비한데, 간혹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도 있어서 비위가 좋지 못한 분들은 경악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타이완에서 화시제 야시장만 보고 간 여행객들은 타이베이의 야시장이 모두 이런 모습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곳 화시제 야시장만의 특징이니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최근 들어 화시제 야시장에는 지압 방식의 발 마사지가 유행하고 있고 서예와 그림, 부채 등 전통 예술품을 파는 노점상도 늘고 있어, 이제는 보양식 일변도를 벗어나 일반인들도 누구나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저렴한 마사지 업소도 많다.
주소 台北市 萬華區 華西街
위치 멍쟈 용산사를 등지고 오른쪽으로 직진해 사거리 건너 멍쟈 야시장을 지나가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
오픈 06:00~24:00
타이베이(台北)
국가 타이완
시간 한국보다 1시간 느림
면적 271.8㎢
통화 신 타이완 달러 1TWD=38.55원
중국 남동쪽에서 타이완 해협을 가로질러 195㎞ 떨어져 있는 타이완 섬의 거의 북쪽 끝에 있다. 18세기초에 건립되어 19세기초에는 대외무역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타이완의 수도 타이베이(台北)는 타이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그린 시티이다.
타이베이의 시간을 돌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찍이 기원전 4000~2500년의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는 동아시아 해상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어 17세기 스페인과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이 차례로 점령하며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제1항구인 멍자(艋舺), 즉 오늘날의 완화(萬華)를 통해 중국 동남부 해안 지역의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타이베이 성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 후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반세기 동안 받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후인 1945년 중국에 반환되었다. 2차 대전 이후에 국민당 정부에 반환되어 1949년 중화민국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이런 복잡한 역사적 배경 덕분에 타이베이의 문화는 다원적인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
타이베이에는 중국 역사의 보고인 국립 고궁 박물원과 현대의 건축 기술을 자랑하는 타이베이 101 빌딩이 공존하고 있으며,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사원들과 야시장의 음식이 여행자의 눈과 입을 사로잡는다. 복잡한 도심을 푸르게 수놓는 공원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온천은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이다. 타이베이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존하면서도 세련된 현대 문화를 향유하고 있어, 여행자들의 발이 닿는 곳 어디든 독특한 문화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매력적인 국제 도시이다.
타이베이와 그 주변 지역은 지금은 주요한 공업지대이다. 타이완의 중요한 섬유공장이 대부분 이곳에 몰려 있으며, 그밖에 전자제품, 전기기계 및 설비, 와이어·케이블, 통조림 제품, 냉동장치, 선박건조(요트와 그밖의 레저용 선박을 포함), 모터 사이클, 고무제품, 다양한 수공예품 등의 제조공장이 있다. 철도와 버스편으로 타이완 섬의 모든 지역과 연결된다. 타이베이 시 교외의 중정[中正] 국제공항에는 국제항공 노선이 수없이 많다.
타이베이에는 많은 교육기관이 있다. 그중에서 국립타이완대학교(1928 설립)·국립타이완사범대학(1946 설립)·국립정즈대학교[國立政治大學校 : 1927 설립]를 꼽을 수 있다.
타이베이 근처에서 가장 인기있는 위락지구는 도심에서 16㎞ 떨어진 양밍 산[陽明山]이다. 양밍 산과 그 기슭에 있는 베이터우[北投] 마을은 온천으로 이름난 곳이다. 비탄[翡潭] 호수에서는 보트와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이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수욕장도 있으며, 단수이[淡水]에는 훌륭한 골프장이 있다.
타이완(Taiwan)
위치 동북아시아
인구 23,694,089명(2018년 추계)
수도 타이베이
면적 36,193㎢
공식명칭 Taiwan
기후 아열대성 기후, 열대성 기후
민족 구성 한족(98%), 오스트로네시아어족(2%)
언어 중국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다당제&단원제
종교 불교(35%), 도고(33%), 기타
화폐 신 타이완 달러(NT$)
국화 매화
GDP USD 613,295,000,000
인구밀도 669명/㎢
전압 110V/60HZ
도메인 .tw
타이완 전체 지역의 약 2/3가 산지와 구릉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지형적으로 5개의 주요지역이 나온다. 험난하고 가파른 타이둥 산맥[臺東山脈], 길고 좁다란 타이둥 지구대, 중양 산맥[中央山脈], 위산 산맥[玉山脈], 아리 산맥[阿里山脈] 등 3개의 산맥으로 이루어진 중양 산계[中央山系], 구릉이 매우 많은 광대한 지대, 마지막으로 인구가 조밀한 서부 해안평야 및 분지가 그것이다. 분지로는 남쪽에 핑둥[屛東] 분지, 중서부쪽에 타이중[臺中] 분지, 북쪽에 타이베이 분지, 북동쪽에 이란[宜蘭] 분지가 있다.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위산 산은 해발 3,997m로, 섬의 중남부에 있다.
주요강으로는 북쪽에 있는 단수이 강[淡水河]과 서쪽의 줘수이 강[濁水溪]을 들 수 있다. 이 두 강 모두 관개와 수력발전에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타이완의 광물자원은 비교적 적은 편으로, 대리석·석회석 및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는 석탄,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있다.
한족이 주민의 98%를 구성하는데 그중 14%가 본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오스트로네시아어족(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계 원주민들이다.
국민총생산(GNP)은 1997년 2,983억 6,800만 달러로 합계되며, 국민 1인당 수입은 1만 3,819달러였다.
제조업이 GDP의 약 1/3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약 1/3을 고용하고 있다. 중공업은 타이완 남부의 가오슝에 집중되어 있다. 가오슝은 1965년 수출가공지대로 건설되었다.
타이완은 흔하지 않은 헌법 구조에 따라 내각제와 총통 체계를 병행하고 있다. 정부는 원래 1947년 중국 전체에 선포된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 1949∼50년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쫓겨 온 국민당은 중국 본토에서 행사하던 통치를 타이완 원주민들에게 적용시켰다. 그때 선포된 계엄령과 국가비상사태는 1987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미 7세기에 중국인들은 타이완과 말레이폴리네시아인의 후손인 원주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이 이 섬에 정착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해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하 포르모사(Ilha Formosa)라고 이름지었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1626년 이전에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들이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요새화된 상업지구를 세웠다. 1646년 네덜란드가 스페인 정착촌을 장악하고는 이 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그뒤 1616년 네덜란드인들은 멸망한 명나라(1368∼1644)의 관리들이 대규모로 이 섬에 들어옴에 따라 쫓겨났다. 이들 중국인의 대거 유입으로 인해 섬의 주민은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1683년 청나라(1644∼1911/12)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타이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고는 타이완을 푸젠 성에 병합시켰다. 1796년 만주족들이 섬의 동쪽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42년까지 주민은 약 25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중국으로 설탕과 쌀을 주로 수출했다. 1875년 타이베이가 타이완 북부의 수도가 되었으며, 1886년에는 타이완이 중국의 1개 성이 되었다.
1894년 타이베이는 성도가 되었다. 다음해에 타이완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할양되었다. 일본 치하에서 타이완은 일본에 쌀과 설탕을 공급하는 주요공급처였다. 1930년대에 일본의 타이완 정책은 값싼 수력전기 에너지에 바탕을 둔 공업 발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940년 섬의 인구는 587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타이완은 중국에 되돌려졌다. 1945년 당시에는 국민당이 이곳을 통치했다. 1949년 본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제스[蔣介石] 장군이 이끄는 국민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타이완으로 피해왔다.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으며, 타이완은 거의 30년간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타이완은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미국의 원조와 자유시장정책을 활용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직에 올라 민주정치개혁의 기초를 다졌다. 1988년 장징궈의 뒤를 이어 타이완 본토박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통직에 오른 리덩후이[李登輝]가 개혁을 도해 나갔다. 1980년대말 타이완은 비공식적으로 중국 본토와의 무역과 여행을 허용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양국 사이에 제한된 무역 중계망이 설치되었다. 이무렵 타이완은 양당 정치제제와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며, 중국 본토와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