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사랑 회원님 여러분!
시조 700년, 겨레시 700년 대장정 다녀 오시느라고 피곤하시죠?
그러나, 충만해진 시심으로 자꾸만 좋은 시조가 저절로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고 계시지나 않는지요? 억지로 참지 마시고 좋은 작품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요즘 저의 시조집을 찾으시는 분이 몇 분 계셨지만, 500부 한정판으로 발행해서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어 드리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25년의 작품을 한 권에 묶어 내다 보니 많은 작품이 같이 실리지 못했고, 초기 작품과 후기 작품이 뒤섞여 저를 이해하시는데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고져 하오니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책머리에
늘 외롭고 허전함 같은 것이...
문단 말석을 차지한지 벌써 스무 네 해가 지나고 있다. 이름 석자만 올려둔 채, 문단에 기여한바 없이 세월만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보냈다. 오늘 새삼 되돌아보니 외롭고 허전함만 느껴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등단 당시 뜨겁던 열정도 이내 식어버리고 제때 작품집 하나 묶어 내지 못하고 시집 없는 시인이 되어 이제까지 왔다. 흩어진 작품들을 추슬러보니 시대 상황이나, 사회적 정서가 급격하게 바뀌어버린 현 시점에서 보니 마음에 드는 작품도 몇 편 되지도 않고 하여, 도저히 시집을 낼 수가 없어 미적거리고 있는데 시집 없는 시인에 대한 주위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저를 아껴주시는 주변 분들의 따뜻한 마음도 뿌리치지 못하여 오늘 이렇게 묶어내는데 대하여 흉이나 잡히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시조를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시(詩)이면서도 자유시에 비하여 여러 가지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까 먼저 시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조라는 독특한 것, 이를 태면, 운율, 음보, 자수(字數), 압축미, 간결미 등에 중점을 두다보면 시(詩)이면서 시조여야 하는 것을 가끔 잊고 고시조 풍이 나온다거나 음풍영월의 글이 되는 것을 늘 경계해왔다.
시는 시적 "이미지"를 "언어"를 빌어 "비유"해내는 것이라고 볼 때 그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왔다. 오히려 이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못 마땅하게 느낄 수도 있겠으나 늘리 해량 하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訥河 丁海元
제1장 봄 오후
봄 오후
어느 휴일 아침
어느 漁夫의 집
겨울 산
놀이터에서
九月의 아침
果樹園에서
함박눈을 바라보며
水晶洞 義肢店 앞
용두산 공원
二月
海岸線
2월의 해변에서
초승달
해변에서
木蓮을 두고
명태
봄 오후
밀폐된 창을 밀면 봄비 그친 뜨락에서
나무들 가지마다 遮日을 치고 있고
징 소리 하늘을 열어 시작되는 햇빛잔치.
북소리 꽹과리며 열 두발 긴긴 상모
한바탕 놀고 난 후 나팔소리 멀어질 쯤
아이들 봄을 따라서 골목 끝을 돌아간다.
혼자서 남은 오후 幼憶만이 귀에 쟁쟁
가만히 눈감으니 산과 들이 다가오고
그 옛날 삽살개 몰고 뒷동산을 달리는 나.
어느 휴일 아침
유리창에 아침 햇살 귤빛으로 머물 즈음
生의 찬란함 같은 것이 느낌으로 밀려오고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언어들이 반짝인다.
수반 위의 꽃 한송이 靜物로 앉아 있고
방안 가득 향기는 피어 흘러 넘치는 窓邊에서
하이얀 건반을 두드리는 딸 아이 조막한 손.
나는 한 알 능금을 깎으며 삶의 의미를 분해하고
생과 사, 슬픔과 기쁨 그런 낱말을 줍다가는
果香의 깊은 심연으로 몸을 던지는 이 아침.
어느 漁夫의 집
歲月에 큰 입 벌려
장대 끝에 목을 맨 채
샛바람을 등에 받아
아픔을 흔들다가
두 눈을
끔벅거리며
絶叫하는 저 아구
.
오색의 헝겊 조각
삽짝 위에 걸어 놓고
기우는 석양볕에
젖은 生을 말리다가
漁夫는
늙은 漁夫는
노을 빛을 접더라.
주: 아구-鮟鱇, 아꾸 또는 물꿩 이라고도 함.
겨울 산
女神의 속살 같은
흰 눈 덮인 稜線에서
부리 까만 새 한 마리
퍼덕이며 나는 오후
자줏빛 망울진 冬柏
봄을 쪼는 겨울새.
저 멀리 골짜기에
하얀 메아리는 울리고
봄을 잉태한 山
포근하게 띄운 미소
南村서 꽃 소식 오면
저 무거운 몸을 풀까.
놀이터에서
落日만 철봉 끝에 외롭게 걸어놓고
왁자한 재잘거림 여운으로 남겨둔 채
한 자락 썰물이 되어 아이들은 떠나갔다.
그 누가 두고 갔나 노을 젖은 꽃신 한 짝
그 신발 주워들고 빈 그네를 밀어보면
저물 녘 어스름 속에 흔들리는 유억의 燈.
아, 못 돌아 갈 세월이란 강물이여
밤마다 꿈을 꾸며 내가 띄운 종이배는
하늘 끝 영원을 질러 반달 되어 가누나.
九月의 아침
여명의 나팔소리 풀잎들이 일어나고
바람은 낮은 포복으로 능선을 넘어 가면
하느님 거룩한 말씀 抛物線으로 내린 아침.
햇살은 건반 위에 銀魚처럼 퍼덕이고
이제 모두 떠나가면 비어 있을 의자 하나
억새풀 서걱거리는 音調 空際線을 향한 凝視.
果樹園에서
梨花에 月白 하다더니
오늘은 海流가 흘러
天上 저 秘境에서
돛배 한 척 타시고
그 時調
다시 읊으시며
李兆年 先生 오신다.
달빛 층계 아래
무릎 꿇고 엎드렸다
侍生 또한 한 首 지어
읊조리고 싶어도
능금 꽃
저렇게 나울져
梨花에 月白만 욉니다.
함박눈을 바라보며
아파트 저 창 밖에 나비 나비 하얀 나비들
더러는 유리창에 부딪쳐 퍼덕이다가
일제히 날개를 접고 추락하는 저 나비 떼.
지난날을 회상하다 홀연히 눈을 뜨면
그 나비들 다시금 살아 하늘위로 훨훨 날고
때아닌 복사꽃으로 산산이 지는 낙화.
지금이 꿈이던가 깨어 있는 생시던가
벽에 걸린 설경에 겨울새는 날고 있고
그림 속 여백 밖에는 홍 매화가 폈겠지.
水晶洞 義肢店 앞
저 멀리 海源을 적셔 묻어 오는 유월 雨期
아득한 안개 속에 도시는 묻혔는데
암울한 생을 걸치고 혼자 걷는 義肢店 앞.
습기 찬 진열장에 늘려있는 팔다리들
오늘을 절규하며 목이 매어 소리쳐도
인생의 슬픈 戰場에는 궂은 비만 내린다.
저 비 그치고 나면 참호 위에 별이 뜰까
부상한 육신을 끌고 내일 향해 포복하다가
意志의 목발을 짚고 兵士처럼 서리라.
-1979년 6월-
용두산 공원
바다를 바라보며
都心에 떴는 공원
매연이 가득해도
꽃시계는 돌아가고
한 나절 비둘기 울음이
빈 의자에 내린다.
숨 가쁘게 올라 왔던
일 백 구 십 높은 계단
나뭇가지 흔들려도
忠魂塔 말이 없고
바람은 검은 銅像의
그을음만 닦고 있다.
二月
아직도 겨울 그림자가
펄럭이는 저 이층집
부서진 악기를 들고
여인은 노래 부르고
내 가슴 후미진 골목에
회오리 치는 바람아.
봄빛은 절룩이며
돌계단을 내려오고
폐쇄했던 그 통로에
녹슨 철문도 열리어
회색의 하늘 끝으로
퍼져 가는 亂氣流.
海岸線
해안선은 발 포개고
알몸으로 누운 여인
시시로 부는 바람에
눈을 감고 꿈꾸는데
순결을 유린하면서
흰 이빨로 웃는 바다
파도가 철썩여 간
은밀한 어느 동굴
원초의 파열 위에
햇살 가득 쏟아지면
야릇한 아픔 가누며
흐느끼는 해안선.
2월의 海邊에서
아직은 봄이 이른
허망한 바닷가에
아이들은 오색 깃발
긴 장대를 흔들고
부러진 노를 얹은 채
밀려 있는 빈 遊船.
모래성은 허물어져
흰 물결에 씻겨 가고
冷氣처럼 닿는 追憶
맨발로 밟아 가면
불현듯 일어 선 바람
女人처럼 안긴다.
초승달
-80년대를 보내며-
어둡던 지난 세월 그믐밤은 지나가고
잠 못 든 영혼들이 골짝마다 일어나서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영을 너머 달아날 즘.
통한의 그 한 시대 울음을 거두 우고
파리한 얼굴 가에 찬웃음을 머금은 채
날이 선 푸른 匕首를 입에 물고 있는 妖婦.
간간이 부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다가
원한의 눈초리에 살기마저 번뜩이면
산천은 숨을 죽이고 죽은 듯이 누워있다.
海邊에서
-이미지 연습-
붉은 해 푸른 수평선에 노랗게 타는 노을
아직 뜨건 모래밭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연인들 쏟아 놓은 密語 물살 지는 言語들.
그것이 금고기로 퍼덕이며 몰려오고
반짝이는 비늘 물고 갈매기가 비상하면
심연의 깊이를 재며 자맥질하는 둥근 해.
바람은 제비꽃 향기 별빛으로 흩뿌리면
초이레 초승달이 쪽배처럼 떠오르고
크다란 거울 하나로 홀연히 뜨는 바다.
파도에 실려오는 하늘나라 음악소리
그 絃의 음계를 딛고 무희가 춤을 추면
여신의 하이얀 손으로 펼쳐 놓은 비로드.
銀波는 빙판처럼 달빛 받아 반짝이고
손대고 귀 모으면 들리는 노래 소리
나 이 밤 영원을 건너 노를 저어 갈란다.
木蓮을 두고
忍苦의 그 시린 三冬의 默想을 깨고
헛기침 두어 번하고 목련꽃이 눈을 떴다
성애 낀 창을 닦으며 가져본 의문 하나.
그것은
목련의 내면 깊이 자리잡은
발설하지 않은 사연들에 대한
긴긴 겨울동안의
침묵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
그것은 거짓이었으리라
틀림없이 고함을 지르며
발광을 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겨우내 침묵한 나무에게
나는 왠지 침을 뱉고 싶어진다.
지난 겨울은 환란(患亂)이었다. 환란(換亂)이었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
미쳐(狂) 나가지 않고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묵상만을 했다는 것은
그것은 필시 천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긴긴 겨울동안
통곡을 했는지도 모른다
눈물 비치지 않고
속으로 속으로만 울어
어쩌면 몹쓸 속병이 난지도 모른다.
오늘은 여윈 가지 끝에 비가 내린다.
멀리서 드는 하늘 묻어나는 봄비하며
할머니 忌日이라 목련꽃은 폈나부다
웬일로 서러워지며 보고 싶은 할머니.
명태
- 덕장에서-
山頂을 넘은 朔風 동해로 投身하면
일제히 割腹을 하고 하늘 향한 저 아우성
大關嶺 고개 만댕이 쏟아지는 함박눈.
북태평양 高氣壓이
저만치 물러간 후
한랭전선 가장자리에서
황태가 되기 위하여
그들만의 신을 섬기며
모두들 殉敎者가 된다.
층층이 엮은 덕장에 목을 맨 채
한목소리로 經을 외면
카랑카랑한 소리들은
골짜기를 돌아 바람이 되어 내려간다.
청진항 앞 바다로 해서
원산만을 거쳐왔는가
오는 길 어디 쯤에
내 어릴 적
낙동강 어느 실개천에서
고무신짝에 실어 띄워버린
幼年적 꿈은
어느 깊이에 잠들었던가
바다에도 금을 그었던가
휴전선이 가로 막혀있어
그 맑디맑은 동해물이 아닌
베에링海 어디를 遊泳하다가
오오츠크해 어느 바다에서
걸쭉한 목소리의 아저씨들
北洋의 遠洋船을 타고
부산항을 거쳐왔단다.
한 옛날 노가리적 꿈은
두만강 물도 한 줄기 섞인
파아란 寒流를 타고
멋지게 헤엄을 쳐서
동해 바다로 回遊해 오는 것이
하나의 꿈 이였는데
산산이 부셔진 어릴 적 꿈
이 시린 三冬을 어이 견딜꼬.
그래도
때깔 좋은 황태가 되기 위하여
모두들 기도를 하는 눈빛은 초롱하고
하늘을 향한 저 응시.
끝없이 늘어선 덕장 위로
하이얗게 눈보라가 흩날린다
명태처럼 목을 맨 채 걸려있는 나의 형국
나 또한 합장하고 기도를 하다보면
동해물 심연을 뚫고 붉은 해는 돋겠지.
제2장 겨울아침에
겨울 아침에
나비야 靑山 가자
아침 南港에서
삼짇날에
蘭
木蓮春
밤비
봄
아침
아침(2)
아침(3)
아침(4)
봄비
비 오는 밤의 街頭
달밤
달밤(2)
겨울 달밤에
그믐밤
겨울 아침에
간밤엔 귀앓이하며 뜬눈으로 지새다
아침에 일어나니 까치 한 마리 깍깍 운다
황령산 외진 기슭에는 햇살들이 술렁인다.
금 비늘 은 비늘로 반짝이는 그 빛살을
회색의 비둘기가 한 입 물고 날아가면
동짓달 살얼음판을 건너오는 세월아.
오늘도 건널목에서 푸른 신호 기다려서니
표정 잃은 뭇사람들 나는 왠지 외로 와라
연산동 비탈진 고개 바람 부는 一工區.
주 : 一工區-연산동 시가지 조성시 공사구간의 하나
망미동 쪽에서 양정 방향 고개 너머 첫 정류소.
나비야 靑山 가자
어둠이 내릴 때면 꽃밭은 외롭더라
신발 한 짝 버려 두고 아이들도 떠났는데
나는 왜 저문 저녁에 落花만을 줍는 걸까.
꽃잎 되어 흩어졌던 어릴 적 꿈이던가
한 줌 주어 뿌려 보니 실바람에 나래 달고
幼憶의 등불 주변에 퍼덕이는 저 나비 떼.
"나비야 靑山가자 범 나비 너도 가자 "
九天 끝 별빛 모아 초롱 하나 밝혀 들고
언제나 기쁨만 있는 淨土 길로 가 보자.
아침 南港에서
남국서 거슬러 온 未明의 물살들이
어둠 묻은 絶影島의 하반신을 씻어 주어
黎明에 母船이 뜨고 잠을 깨는 용두산.
北斗 별빛 젖은 깃폭 마다 해 돋으면
먼 海源 바다의 향기 꽃가루로 날아오고
햇살이 난간에 앉아 물 비늘을 뜯고 있다.
밤을 새워 건진 꿈들 부두 위에 가득해도
어릴 적 띄워 버린 꽃 고무신 간데 없어
동남풍 푸른 바람에 내가 흔든 손수건.
삼짇날에
열 세평 아파트엔
제비마저 안 옵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
제비처럼 살다보니
흥부네 착한 마음씨
봄 햇살로 번집니다.
찢어진 가난한 맘
무명실로 꿰매어도
들어 난 굵은 실밥
고운 때가 묻어있어
그 남루 늘어둔 南天
무지개가 곱습니다.
오늘도 비탈길을
절룩이며 돌아왔소
아내여 이 아픈 다리
唐絲실로 매어주오
한 뼘의 베란다 가엔
박씨 하나 심읍시다.
蘭
애잔한 내 마음을
얹어 둔 窓이외다
누군가 門을 열까
가슴속을 죄어봐도
그리움
날이 선 잎에
푸른빛만 번집니다.
木蓮春
영산홍 잎새들이
눈 비비며 앉은 봄날
모든 罪 벗어버린
알몸의 가지마다
無邊의
苦惱를 털고
피워 올린 大慈悲.
가슴속이 저리도록
미소를 쏟아 놓아
卍窓이 흥건하게
菩提心이 번져 나서
두 손에
봄 햇살 모은
南無阿彌 觀世音.
밤비
불현듯 身熱에 떨며
잠 설친 저 바람이
먹구름 몰고 와서
가슴속을 후비다가
어둠에
빗소리 엮어
꿈길 너머 발(簾)을 친다.
홀연히 날 부르는
들리는 소리 있어
紙雨傘 받쳐들고
뜰 아래 나가서니
늘어 둔
襤樓 그 위로
물 흐르는 初冬의 江.
가만히 눈감으면
우거진 日月일레
손끝에 스며 오는
시려운 冷氣 털고
暗影의
늪을 건너서
淨土 길을 가리라.
봄
남풍이 건듯 불면
삼삼히 떠는 얼굴
빈 의자 하나 두고
終日을 기다리다
고요가
滿場한 뜰에
쌓여 가는 봄 햇살.
한 겹 한 겹 걷어 내면
속살 같은 그리움이
물살로 밀리다가
가슴속에 머물다가
愛憎의
한 금을 건너
향기처럼 피는 情誼.
우러러 하늘 보며
細細한 바람 모아
못 닿은 因緣 앞에
촘촘히 발을 치고
피 짙은
切願을 넘어
꿈길에서 만나리.
-시문학 初薦作-
아침
-옛 고향을 생각하며-
어둠의 올을 풀어
늘어 둔 東天 머리
黎明을 삼 가르며
내려오던 그 빛살이
흩어진 머리칼 헹구며
발 적시던 시냇물.
옥동이에 새 아침을
찰랑히 담아 이고
쪽박 달도 물에 띄워
새악시 돌아 올 적
텃밭에 볼 붉은 情을
쏟아 놓던 강낭콩.
아침(2)
아침은 비늘을 세워 반짝이는 작은 바다
靑靑한 바람을 타고 고운 물살 거슬러와
조그만 나의 뜰에서 퍼덕이는 금고기 떼.
지난 밤 영롱한 꿈 回遊하는 나의 바다
빛나는 지느러미로 여울 속을 헤어가다가
어릴 적 소망을 찾아 자맥질하는 이 하루.
아침(3)
푸른 비늘 반짝이며
쉼 없이 퍼덕이다가
아침은 도마에 누워
아가미를 헐떡이고
오늘도
날이 선 칼로
회를 치는 아내의 손.
언제나 바다처럼
신선한 나의 食卓
어린놈과 마주 앉은
끝없는 자맥질에
흰 구름
돛배로 뜨고
하늘 활짝 열린다.
아침(4)
나의 뜰에 말없이 흘러내리는 강이 하나 있다
아무도 닿지 않은 영원으로 구비 돌아
내 마음 어느 언저리를 적셔 주는 푸른 강.
밤 새워 울음 울던 寃鬼들도 달아났고
모든 것을 버리는 법 이제 사 조금 알아
한 그루 미루나무가 되어 맑은 바람을 흔들까.
歡喜의 言語들은 비늘 세워 일어나고
영원의 강물에다 하얀 발을 담궈보면
평화는 천지 가득히 햇살로 쏟아진다.
봄비
그 차가운 고독
피 같은 인정이매
그림같이 떠오르는
그 날의 추억이
비라도 나릴 양이면 못 견디게 사무쳐.
바람도 자는 뜨락
승화하는 생명 속에
한나절 드리우는
구슬픈 그의 노래
憂愁가 서린 정원에 哀調띤 가락아.
사랑도 이제 그만
퇴색한 빛깔 속에
행복도 하나 하나
짝지어 가 버리고
切切한 뉘우침 속에 하늘 바라 눈물 진다.
-1965. 4. 대전대학 문예콩쿠르-
비 오는 밤의 街頭
비 젖은 네온 아래 우산 파는 저 목소리
가슴속에 스미다가 어둠 속에 멀어진다
나 또한 소리지르며 이 밤길을 달릴까.
가로등 추진 행렬 별빛으로 돋아나도
손끝으로 파고드는 밤 기운이 차가워서
서러운 하늘 가리러 紙雨傘을 펼친다.
-1965. 5월-
달밤
수천의 배꽃들이 달빛 위로 날아간다
내 마음 비워두니 피리소리 들려오고
오늘은 진한 그리움이 海流처럼 흐른다.
한 자락 물길을 내니 온 산천이 출렁이고
나 또한 水草처럼 둥둥 떠서 갈 뿐이다.
아무도 못들은 佛音 들려오는 이 한밤에.
둥근 빛 무리 지고 파도소리 철썩인다
긴 해안 흰모래 밟고 새도록 염원하면
무량한 기쁨이 되어 반짝이는 은혜여.
달 밤(2)
달빛은 가득해도 웬일로 섭섭하다
아슴한 불빛들이 떨고 있는 山腹아래
都會는 한 척 배가되어 여울 위에 떠 있다.
결 고운 氷板처럼 거울 빛 맑은 이 밤
한 가닥 티끌 되어 실바람에 흩날릴 뿐
막막한 바다 가운데 노를 놓고 앉아 있다.
紫金色 보석들이 어깨 위에 쏟아진다
觀世音 둥근 빛을 두 손으로 받쳐 올려
星座가 앉았는 길로 배를 저어 가리라.
겨울 달밤에
섣달 밤 시린 삭풍이 어느 긴 回廊을 돌면
돌계단 層層을 밟고 내려오는 푸른 달빛
그 누가 昇天 못하고 이 한밤을 우는가.
말없이 꺼져 가는 도회의 찬 불빛들
열어둔 저 하늘에 별들의 明滅위로
그윽한 밤의 향기가 달무리로 퍼져간다.
잠 못 든 넋들이여 모두들 일어나라
은은한 旋律을 딛고 나는 이 밤 춤추는데
불면의 아픈 세월에 흐느끼는 曲調여.
그믐밤
찬란한 文明의 밤 등불들은 꺼져가고
不眠의 늪을 건너 妖聲의 방을 돌아
칠흑의 적막을 깨며 끌고 오는 사슬소리.
유령이 흰 고깔 쓰고 층층대를 내려오고
삭풍은 골목을 돌아 掩襲해 온 어느 子正
동짓달 시려 운 밤에 쇠창살을 흔든다.
검은 고양이 앙칼진 울음 양철지붕을 건너고
새벽은 언제 오려나 창은 아직 먹빛이다
그 누가 戰慄을 하며 소리 지르는 저 외마디.
제3장 겨울 洛東江
안개 속 강변에서
겨울 洛東江
밤에 흐르는 강
흘러가는 강물에게
강가에서 생각한 강물의 말
이사 며칠 후
강가에서
이사를 하고
하단에서
비 오는 강가에서
洛東江
월요일 오후
바다
겨울 바다
바다와 나비
탈 이야기
복날 이야기
장닭 잡던 이야기
허리 다친 이야기
안개 속 강변에서
강물이 세월을 돌아 밤을 질러 흘러가고
未明의 어둔 새벽 피어나는 안개 속에
미루는 머리를 풀어 슬피 울고 있습니다.
자욱한 푸른 안개 꽃뱀처럼 번져 가는
아직은 인적 없는 적막한 한 언저리
강물만 혼자 누워서 울음 울듯 흐릅니다.
나 또한 갈 곳 없어 서성이는 이 한순간
희뿌연 세상천지 보이는 것 하나 없어
넋 놓고 강둑에 앉아 나도 끝내 웁니다.
겨울 洛東江
일제히 몰려오는 동짓달 칼날 바람
이 겨울의 絶頂 허허한 광야에 서면
희뿌연 모래먼지 속에 몸 숨기는 미루나무.
날(刃) 세운 바람맞아 세월도 얼어붙어
歷史처럼 흐르다가 말을 잃은 엄동의 江
켜켜한 저 빙판을 건너 봄은 언제 온다던가.
차라리 봄이 없다면 기다리지나 않겠건만
이마에 손을 얹고 먼 남녘을 우러르니
하늘도 울먹이다가 쏟아 놓는 함박눈.
밤에 흐르는 江
언제나 흘러가며 못 머무는 마음인가
누구의 한숨이랑 고뇌를 거두어서
구만리 은하도 담아 이 한밤에 가느냐.
메마른 내 육신엔 푸른 달빛 젖어 들고
미루나무 가지 끝에 성긴 바람 앉아있어
찬 별빛 어깨에 나려 이 밤 더욱 춥구나.
아, 세월도 이렇게 물결처럼 덧없을까
면면한 저 강에게 인생을 물어 본들
人間事 수 없는 아픔 잊고 살라 하겠지.
흘러가는 강물에게
오늘도 너는 왜 울먹이며 가는 거냐
가난은 했었지만 情誼는 잊지 마라
자꾸만 되돌아보는 너의 정도 내가 안다.
이제는 정이라는 것도 옛말이라 말이더냐
아니면 무엇이 널 슬프게 했단말가
세월이 자꾸 변하는데 난들 어이 하란 말가.
미루가 노을이고 줄을 이은 이 저녁에
나는 왜 생각 없이 먼 하늘만 바라보나
인생이 다 그런 거라면 그런 줄로 알겠다.
강가에서 생각한 강물의 말
강물은 말이 없이 흘러만가는 거란다
애당초 처음부터 정녕 말 없었을까
태고 적 아득한 시절에는 무슨 말을 하였으리.
그렇다면 그런 줄을 알면은 되는 거란다
강물이 말을 했다며는 별말이사 했겠나마는
그래도 궁금하기 만한 그 옛날의 강물의 말.
밥그릇이 높은 날은 생일인줄 알았었고
동창이 밝아오면 날 새는 줄만 알던 조상
나 또한 말을 잊은 채 강물처럼 살리라.
이사 며칠 후
언제나 멈출 수 없는 고달픈 강을 따라
이번엔 을숙도 근처 철새처럼 앉아 봤다
한 옛날 학이 깃들었던 승학산 중턱쯤에.
그러나 학이 아닌 나는 한 마리 뱁새였다
오늘도 숨이 차는 비탈길을 올라서니
내 작은 어깨 죽지에 고뇌로 지는 노을.
욕망의 그림자는 한쪽으로 접어들고
열 세평 성긴 둥지 한쪽 창을 열고 보니
초사흘 하얀 반달이 가슴 한켠에 돋더라.
강가에서
빈 까치 집 이고 선
미루나무 가지 위에
흔들어줄 바람 없어
붉은 낙조 걸렸어도
내 인생
저물어가듯
소리 없이 지는 하루.
이사를 하고
도회의 어느 邊境 화명동 아파트 촌
낙동강 푸른 강물 유유히 흘러가고
나 또한 강물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왔다.
세월에 물 구비로 너울져 너울지다가
강변의 가장자리 또 한 구비를 돌아서니
이 환한 밝은 대낮에 뻐꾹새는 웁니다.
아, 누구도 못 건너간 이 욕망의 강가에서
조그만 까치집을 궁궐처럼 생각하며
歡喜의 이 둘레에다 靑風 하나 펼치리,
하단에서
화명동 엄궁을 지나 하단에서 살고 있다.
강이 좋아 강을 보며 한 십년을 살았었다
이제는 더 갈 수도 없는 낙동강 강물의 끝.
언제나 말이 없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내 생의 편린 하나 깃털처럼 떨궈놓고
불타는 노을 속으로 철새처럼 날고 싶다.
활짝 양팔 벌리고는 한동안 퍼덕여도
맥 빠진 어깨 죽지에 어둡살이 내리더니
홀연히 내 육신을 감아 삼켜버리는 이 어둠.
비 오는 강가에서
저 멀리 상류에서 두들기며 오는 빗발
먼 산들이
하나씩 안개 속에 숨어버리면
잇따라 미루나무들도 빗속으로 살아지고
바람은 어디서 왔는지 울면서 지나간다.
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저 시간에 실려 물결처럼 흘러만 와서
오늘도 뿌우연 빗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
비 오는 강가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수 없는 빗방울만 江心에 떨어지는데
강물이 중얼중얼 무슨 소리를 한다.
비는 그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아무도 빗속을 빠져 나오려는 사람은 없는데
나 또한 그 비속에 몸을 숨기려고만 한다.
우리는 이렇게 숨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한 세월 찬비 맞으니 이 하루가 춥구나.
洛東江
-白水 선생님 稀壽에 받쳐-
황악산 맑은 白水
청아한 그 물소리
골골을 구비 돌아
영남의 젖줄 되어
칠 백리 면면히 이어
이뤄 놓은 저 낙강.
오늘은 그 강 자락
내 가슴에 흘러 들어
을숙도 한 끝에서
나도야 강이 되고
江心에 철새 떼 띄워
손을 모은 訥河여
註:訥河-필자의 아호
월요일 오후
아련한 추억을 건너 불현듯 나타난 친구
수화기 저편에서 내 가슴 두드리는 목소리
삼 십년 세월 거슬러 역류하는 回憶의 강.
그 강물 한 자락 따라 눈을 감고 흘러가면
강 마을 한켠에서 매화꽃은 만발하고
언제나 건너갈 수 없는 저 말없는 강줄기,
혹시나 만날 때는 넥타이 매고 오라는
아직은 순수인 채 백지로 있는 그대
일상의 하루를 깨트리고 여운으로 남는 오후.
바다
爛熟한 몸짓으로 달려오는 어느 여인
하이얀 물거품을 수건 질하며 다가와선
내 여윈 목을 끌 안고 자지러지게 웃는다.
천지가 환하도록 풍겨주는 그 체취에
아득한 심연에서의 끝없는 그 자맥질
찬란한 환희의 순간 감겨오는 官能이여.
겨울바다
언제나 굳은 침묵 수 없는 망설임 끝에
무슨 말을 할듯하다 다시 한번 삼키고는
저만치 뒤돌아보며 종종 쳐서 달아나고.
다시금 달려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면
아직은 젖은 머리카락 비누 향을 풍기는데
포근한 털스웨터의 따뜻한 그대 품속.
바다와 나비
하얀 파도 부딪치는 방파제 위 푸른 창공
대낮에 별을 헤며 나비가 날아 올라
먼 남녘 수평선 건너 꿈을 쫓아가는 걸까.
나비야 노랑나비야 햇살은 눈이 신데
나랑 靑山이랑 두고 너만 훨훨 어디 가노
춘삼월 쪽빛 바다 건너 무슨 꽃이 피었길레.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 물결에 저린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초승달에 쉬어가라.
탈 이야기
어느 날 어린놈이 탈하나를 만들었다
신문지 겹겹을 발라 희한하게 색칠한 탈
그 못난 탈의 모양이 제 아비를 닮았겄다.
한 동안 들여다보며 完成을 기뻐하다가
제 얼굴에 덮어쓰고 얄궂은 작은 몸짓
어미는 좋아라하며 한 저녁을 웃었겄다.
한참을 그리 놀다 제 아비에 씌워주어
덩더꿍 춤추는 아비 형광등 어둔 불빛
아비는 속으로 울고 아들놈은 웃더라.
복날 이야기
오뉴월 뙤약볕에 짧아진 추녀 그늘
뒤 켠 처마 밑에 헐떡이던 수캐 한 마리
한나절 정적의 늪에 매미소리 쏟아졌고.
그 적막을 헤치면서 장정 서넛 몰려와서
순식간에 나꿔채듯 황견의 목을 졸라
팔뚝에 힘줄 세우며 몽둥이질을 했었었다.
정말로 처절하던 짐승의 비명소리
문설주에 기대서서 숨어 봤던 유년의 그 날
지금껏 세월을 건너 눈에 선히 비친다.
오늘 다시 복을 맞아 더위 먹은 나를 보네
나 또한 수캐처럼 혀를 빼고 헐떡이면
그 누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치고 있다.
장닭 잡던 이야기
한 십년 전 집안에서 닭을 한 번 키워 봤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두 다 수컷이었다
홰치며 목을 뽑을 땐 새벽빛도 일으켰다.
얼마큼 크고 나니 곡식만 축내더라
중닭 때 몇 마리 잡고 마지막 남은 한 놈
어떤 땐 시도 때도 없이 울음 울던 도회의 닭.
어느 날 무슨 일로 그 놈을 잡기로 했다
모가지를 비틀어서 칼을 대다 놓쳤었다
선지피 낭자이 뿌리며 온 집안을 더럽혔다.
한동안 추적 끝에 끝내는 잡았지만
깨어진 장독이며 엉망이 된 세간 살이
가쁜 숨 몰아 쉬면서 털을 뽑던 나의 손.
허리 다친 이야기
어느 날 허리를 다쳐 고목처럼 넘어졌다
천근 생의 무게 가늠하지 못한 채로
가파른 어느 비탈길서 헛발을 디뎠었다.
흥건히 쏟은 진땀 하늘은 캄캄했다
백주 대낮에도 별빛은 돋았었고
전신을 엄습해 오던 가눌 수 없던 그 현기증.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돌아왔던 나의 居處
뜨건 물찜질을 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살 수 밖에 없는 삶.
며칠 간 침 맞으며 침술원에 다녔었다
침을 꽂고 즐비하게 누워있던 그 서민들
나, 오늘 허리를 잡고 생의 길을 걷는다.
제4장 봄, 휴일
풀밭에서
산에서
丘陵에서
가을 저녁에
가을 허수아비
운문사를 다녀와서
虎居山 뻐꾸기
歸鄕記
歸鄕記(2)
歸鄕記(3)
옛 보리밭에서
수수밭에서
만추에
양동리에서
봄, 휴일
이제 봄이 오고 있다
풀밭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영롱한 아침 이슬도
그 누구 영혼 깃든 한 줄기 바람에 지면
산 마을 푸른 연기는 사람 삶을 알리고.
산새 한 쌍 울며 날아간 하늘 한 끝으로
구름은 흘러가다 어디쯤서 머물 건가
한 송이 이름 없는 풀꽃이 진종일을 서걱인다.
뙤약볕 시든 풀밭에도 노을은 쏟아지고
내 생의 편린 하나 떨궈 놓고 오는 저녁
나 정녕 嶺을 넘어가는 바람이고 싶어라.
산에서
일제히 일어난 바람 그 장엄한 합창소리
나무들 발끝으로 서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저 멀리 산만댕이 위로 소리 개가 날고 있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말소리에
산등성이 한켠에서 나는 막 낮잠을 깨면
한 옛날 누구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린다.
뫼신아! 울리는 소리 할아버지 音聲인가
야호오! 대답하면 여운으로 남는 허전함
세월을 뛰어 넘어서 이어지는 허기 같은 것.
丘陵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잠을 자는 굽은 구릉
하늘의 말씀들이 아련히 들리는데
이따금 몸을 뒤척여 돌아눕는 저 稜線.
태고 적 옛날부터 누워만 있었길레
산 너머 먼 남녘이 풀리는 봄인데도
아직도 팔 베개하고 일어 날 줄 모르는가.
하기사 지금 와서 눈을 뜨고 일어난대도
그 인심 떠났으니 어쩔 수는 없으련만
꽃 피고 새 우는 곳으로 손을 잡고 가보자.
가을 저녁에
때아닌 가을비도 한 줄금 지나간 후
모든 것 벗어버린 알몸의 만추에는
나 또한 南을 향하여 순수로 서고 싶다.
고목의 빈 둥치에 햇살이 눈물겹다
시려운 그 세월이 다시금 돌아와도
철 잃은 나비 한 마리 나는 지금 날고 싶다
가랑잎 날려 쌓던 저녁나절 저 바람이
남루한 내 옷자락 이따금씩 펄럭이다
裸木의 가지 흔들어 落日마저 떨구더라.
가을 허수아비
비바람 천둥번개 여름날 그 뙤약볕
세월의 아픔 크기만큼 가을은 풍성해도
빈 손 탁 털어 보이면 허허로운 먼 허공.
모든 것 걷어 버린 들녘은 적막한 늪
골 깊은 외로움에 웃어보는 헛웃음에
落照는 한줄기 강으로 襤樓적셔 흐르더라.
운문사를 다녀와서
오 학년 봄 소풍 때
소년 적 추억 더듬으며
세상사 시름을 털고
실바람 한 자락은 끌고
사 십년
추억 거슬러서
靑靑山門 운문으로 간다.
등 굽은 늙은 盤松
혼자 세월 먹었는가
그 옛날의 밝은 音色으로
오늘도 산새 지저귀고
비구니
낭랑한 독경이 흘러
댐 하나를 만들었고...
삼국유사의 천년 전 說話
그 이무기 어찌됐나
삶에 찌들은 도시로
나는 다시 가야하나
모든 것
다 벗어버리고
한 조각 구름이고 퍼라.
虎居山 뻐꾸기
虎居山 뻐꾸기는 목궁게 피 내어먹고
그 피 도로 쏟아 철쭉으로 지더니만
오늘은 내 가슴속에 향수 되어 앉았네.
陰四月 고갯길에 怨이 있어 울던 새야
지금쯤 恨을 풀어 산허리를 감았느냐
그렇게 종일을 울어 돌무덤도 젖었겠다.
여기는 아득히 먼 부산의 荒嶺山下
늦은 봄 적막의 늪에 낮달이 잠겼는데
한 옛날 그 뻐꾸기가 따라와서 웁니다.
주:虎居山-경북 청도 운문댐 옆에 있는 산.
일명, 虎山
歸鄕記
살구나무 옛 등걸이 봄을 한껏 덮어쓰고
산자락 적막 아래 꽃잎들이 쏟아지며
回想의 뜨건 눈물 속 부나비로 뛰어든다.
끝없는 자맥질로 세월을 거슬다가
저린 가슴 열어보면 이십 년 그립던 情이
오늘은 옛집 마당에 닻을 내린 나의 歸鄕.
예 놀던 뒷동산엔 쥐불 이미 꺼져있고
봄기운 따슨 정만 물 살져 밀려와서
아련한 幼憶의 늪에 종이배를 띄운다.
歸鄕記(2)
-고개에서-
뙤약볕 성화 속에 보리 대궁 익는 소리
철쭉꽃 처절한 낙화 음사월 그 밑바닥을
꽃 배암 똬리를 풀고 건너가던 적막의 늪.
우거진 日月 끝에 뻐꾸기 울며 날아
잠 못 든 영혼들이 방황하는 백주 대낮
이 슬픈 고갯마루에 낮달 혼자 흘러가.
홑적삼 올올 마다 찌들은 삶을 입고
삭정이 한 짐 진 老翁넘던 마루턱에
하르르 노을 타는데 외로 앉은 돌무덤.
이승저승 분기점에 오늘은 청풍이 분다
막차 타고 떠나려하니 유억이 날 붙잡아
그대로 주저앉으니 날 저문데 우는 넋들.
어둠의 문을 밀면 하늘이 절로 열어
달빛이 골짝마다 울음들을 달래놓고
저만치 날 따라오며 앞길 훤히 밝힌다.
歸鄕記(3)
추억의 뒤 안을 돌아 찾아온 산천인데
그 사람들 다 떠나고 댓잎 끝에 스치는 바람
한 조각 흰 구름만이 흘러가는 파란 하늘.
송화 가루 흩날리면 울어 애는 산새들도
이제는 깃을 접고 어디론가 가버렸나
뻐꾸기 그 먹 뻐꾸기 애달픈 울음소리.
"기집 죽고 자식 죽고 나 혼자 우째 살고'
목궁게 피 올리며 울음 울던 뻐꾸기야
오늘은 新보리고개서 내가 혼자 울고 있다.
옛 보리밭에서
훈풍에 꿈을 뉘면 초록 물이 젖던 언덕
사래 긴 보리밭에 유억은 물살 지고
풀어진 하늘 끝으로 紙鳶처럼 떠는 봄.
자줏빛 옷고름을 휘날리던 새악시야
낮 달이 바람에 실려 嶺을 넘어 흐르는데
봄기운 뿌듯한 情을 나만 혼자 어이해.
수수밭에서
지나간 큰 가뭄에 대파했던 수수들이
뙤약볕 뜨건 하늘 그 갈증을 건너와서
눈 시린 가을 창공에 고개 숙여 섰더라.
어느 날 날 빛 푸른 조선 낫을 들고 온 농부
묵묵히 떨군 머리 모가지를 잘라 내면
스산한 바람에 묻힌 소리 없는 비명들.
통분의 이 한세월 피 흐르는 刑場에서
모가지를 수습하여 농부가 떠난 다음
초닷새 창백한 달빛 빈 들녘을 적시더라.
晩秋에
내 딸아이 눈동자 같은 하늘 바라 우러르면
맑다 못해 파란빛 깃든 호수 하나 거기 있고
그 영원 끝나는 어디쯤 나는 한 그루 나무여라.
따스한 체온들이 그리워지는 이 계절에
모든 것 벗어버리고 알몸으로서야 하는가
내 여윈 그림자 끌고 가야할 곳 어디던고?
지난 여름의 영광 낙엽으로 날려보내면
수많은 言語들이 질퍽히 쌓이는 공원
손끝에 잡힐 듯 멀어지는 한 자락 푸른 바람.
양동리에서
金海 酒村 외진 마을 한적한 솔밭 아래
쉼 없이 봄빛이 내려 못(池) 안으로 빠져 쌓고
興安寺 추녀 끝에서 풍경 소리 울린다.
뎅그렁 울려놓고 솔가지를 흔드는 바람
그 바람 한 타래를 손끝으로 나비다가
홀연히 고개를 드니 문득 뜨는 옛 幼憶.
오 십년 거슬러가니 강변너머 아지랑이
나 오늘 이 봄을 끌고 고향으로 돌아갈까
동무야! 절앞등으로 봄 맞으려 나와라.
봄, 휴일
얼어붙은 三冬에서 봄의 길목에 들어서면
잿빛의 하늘 너머 희뿌연 그리움하며
내 인생 초라한 모습 꿰맨 자국이 뵈는 아침.
누구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 다 부질없고
부대끼며 살아온 삶 터진 실밥이 드러나는데
빈 花甁 허전한 몸짓이 꽃을 기다리는 저 窓邊.
그러나 이 食前에 누가 꽃 한 송이 갖고 오랴
무한정 자유로워지고 싶은 휴일이 있어 좋고
그 누가 요한 스트라우스의 음악을 듣고있다.
이제 봄이 오고 있다
-졸업하는 딸에게-
雨水 지난 사흘 후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
우산을 받쳐든 손 冷氣 아직 스미는데
메마른 가슴 한켠으로 다시 흐르는 강물 한 자락.
이 강물 한 줄기를 사랑으로 이끌고 가서
딸 아이 어제 졸업에 사랑의 물을 댈걸
언제나 엇갈리기만 하는 아비 사랑 이 마음.
겨울은 지나가고 이제 봄이 오고있다
무한한 가능성이 네 앞에 펼쳐졌다
너의 꿈 곱게 꽃피워 황금 열매 맺거라.
제5장 서면 로터리에서
넥타이를 맬 때
구두를 신으며
바람 앞에서
아침 서면에서
도시의 골목에서
서면 로터리에서
어느 저녁 서면에서
사상공단에서
막 버스에 내려서
가을비에
겨울비에
어느 퇴근길
晩秋의 방
겨울 공원에서
겨울 공원에서(2)
雨期에
퇴근길 回想
퇴근길 有感
백미러를 보며
잃어버린 휴대폰
넥타이를 맬 때
언제나 아침이면 확인되는 삶이지만
넥타이를 맬 때마다 전율에 떠는 나
아득한 원시의 어둠 깨지 못한 나의 아침.
한번 더 졸라매면 살건 가? 죽을 건가?
결단의 어려움에 망설이는 출근 무렵
아들 놈 찬란한 음성 떠밀리듯 나선 현관.
신선한 바람 분다 나는 정녕 살았는가?
내일도 넥타이를 맬 땐 의문에 쌓일 건가?
하구 둑 들머리 즘에 철새 한 마리 날아간다.
구두를 신으며
매일 아침 현관을 나설 때 구두를 신는 습관
신발을 신어야만 하루가 시작되는
기나긴 인생 旅程의 버릴 수 없는 족쇄인가.
출근길 발걸음은 버릇으로 가벼운데
터벅터벅 힘없이 걷는 귀가 길 서글픔에
모든 것 다 벗어버리고픈 천근 만근 무거움.
사람이 죽을 때는 신발 모두 벗었더라
저승길은 험할 건데 맨발로 가는 건가
십문 칠 조그만 발로 나는 지금 어디 가나.
바람 앞에서
어디서 왔었다가 가는 곳은 어디던가
한 조각 구름도 끌고 산등성에 걸어 놓고
하늘 끝 구천을 돌아 속절없이 가는 바람,
산과 들 강을 건너 울먹이며 달려와서
나의 창을 두들기며 끝내 우는 저 통곡에
불면의 깊은 심연 속 맹목의 내 자맥질.
끝없는 방황 뒤에 후회는 없겠던가
캄캄한 그믐밤도 하얗게 새다보면
愛憎도 절이 삭아서 새벽빛이 되더라.
인생도 한 줄기의 바람처럼 간다던걸
찬이슬 눈물방울 아침볕에 반짝일 즘
승학산 한 기슭에는 들국화가 폈더라.
아침 서면에서
서면 로터리 빌딩들도 지금 막 잠을 깨고
어둠을 털어 내며 가로수도 일어나면
육교 위 층계를 딛고 달아나는 東南風.
바쁘게 질주하는 매연 뿜는 노선 버스
청소부 바쁜 손길이 복개천을 쓸어내면
도시는 身熱에 떨며 모로 누워 뒤척인다.
사이렌 울리면서 엠브런스 지나가면
햇살은 鋪道 위에 빗살로 내려 쌓고
빈 택시 기다리고 서서 외로움에 떠는 나.
도시의 골목에서
바람이 뒤뚱이며 지하도를 빠져나와
웃고 섰는 가로수들 머리채를 움켜잡고
괜스레 소리 지르는 시끄러운 이 都市.
햇살은 허물어져 하늘은 잿빛인데
적막한 골목길을 종종 쳐서 지나다가
세월의 한 모퉁이서 잃어버린 내 그림자.
이제는 갈 수도 없는 이 막다른 길목에서
아득한 구천 끝을 눈물 지며 우러르면
어느새 몰려 온 어둠 날 삼키고 마는가.
서면 로터리에서
어느 날 육교 위를 고개 떨궈 지날 적에
메마른 눈웃음만 흘려놓고 가는 친구
무성한 도시의 숲을 바람처럼 가더라.
뒷모습이 허전하여 나는 그를 부르다가
동전 몇 닢 그 무게로 정의를 가늠하며
피곤한 하루를 끌고 휘청이며 걸었다.
수 없는 群像속에 묻어 버린 우정너머
침침한 눈 비비며 창들이 불을 켜면
저무는 어느 모퉁이에 내 고뇌를 벗어두리.
어느 저녁 서면에서
지하철 공사판은 파헤쳐진 나의 가슴
도시는 시름시름 이 하루를 아파하고
서천에 목을 뽑으며 홰를 치며 우는 落日.
어느새 어둠 내리고 모든 것을 가리워도
끝끝내 감출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여
음침한 뒷골목이다 누구 하나 불을 켜라.
타인만이 지나가는 복개천 路上에서
찌들은 나의 생이 남루처럼 펄럭이면
연산동 일 번 버스가 휘청 이며 오고 있다.
사상공단에서
자욱히 깔려 있는 이 검은 매연 아래
바람이 낮은 자세로 한 나절을 포복하면
우리는 외면을 하고 잔기침을 해야 한다.
기압골이 내려앉은 어느 시간의 골짜기서
눈병이며 가슴앓이며 세월마저 아파하며
죄 없는 하늘을 향해 욕을 하는 저 사람들.
한세상을 이렇게 모르는 척 산다지만
오늘도 두어 번은 구토를 해야 한다
동남풍 바람아 불어라 하늘 활짝 걷혀라.
막 버스에 내려서
화명동 오십 구 번 적막한 버스 終點
외등에 그림자 끌고 막차를 내려 설 땐
한 자락 고독한 강물 가슴속에 흐르더라.
아무도 벗지 못한 삶이라는 이 멍에를
죄처럼 짊어지고 어둠 속을 걸어가면
가로등 푸른 불빛이 볼에 닿아 차구나.
창들은 이미 꺼져 정적만이 깊은 밤에
떨어지는 流星처럼 嶺을 넘어 가고픈데
불현듯 부모처자가 눈에 삼삼 어린다.
가을비에
찬란한 영광들을 털어 버린 가을 裸木
나 또한 지은 業을 벗어야 할 이 계절에
찢어진 雨傘가리고 몰래 흘린 뜨건 눈물.
가난이 죄가 되어 숨을 죽인 삶이라서
불혹을 앞에 둬도 가을만은 서럽더라
비 젖은 낙엽 밟으며 혼자 걷는 외진 길이.
지난 길 되 돌아보며 먼 산을 우러르니
홀연히 개인 하늘 가슴속에 스며와서
세상사 다 버려 두고 정처 없이 가고파라.
겨울비에
궂은 비 하염없는 해도 저문 겨울 공단
때아닌 이 삼동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야
그 누가 한 세월을 두고 울음 울고 있는 걸까.
우산도 없는 하루 비는 왜 온 다더냐
더러운 세상 덮을 흰 눈이나 쏟아지지
초라한 내 둥지 속에 새끼들이 떨겠구나.
진종일 쌓인 피로 한쪽으로 접어들고
가로등도 꺼져버린 그 어둠을 헤치면서
빈손에 하늘 가리고 공단 길을 달린다.
어느 퇴근길
연산동 일 번 종점 날 저문 도시의 邊境
살얼음을 저려 밟고 초동의 늪을 건너
고뇌로 몸을 떨면서 돌아보는 이 하루.
캄캄한 칠흑 속에 불현듯 몸을 던져
군밤봉지 하나들고 골목 끝에 들어서니
어린놈 자지러진 웃음 불빛 빤한 내 둥지.
晩秋의 房
진종일 침묵한 방 이름 모를 나비 한 마리
밀폐된 유리창에 퍼덕이는 처절한 몸짓
아, 너는 어디로 들었기에 돌아가지 못 하는가.
날개는 찢어지고 끝내는 곤두박질쳐
적막의 깊은 늪에 물을 먹는 저 몸부림
눈멀어 눈도 멀었는가 허우적이며 가는가.
이것은 절망이다 盲目의 발버둥이다
탈출 못할 만추의 방 육중한 門의 무게
그 누가 문을 열건가 저 빗장을 풀 건가.
겨울 공원에서
천 만근 그 무게로 내려앉는 회색 冬天
긴 의자 모서리서 한 노인 중얼대다가
悔恨은 남겨두고는 그림자만 끌고 간다.
그 노인 떠나가고 내가 다시 채운 空間
헌 신문 읽다 말고 홀연히 고개 들면
아득한 凝視 저 건너 흘러가는 無情歲月.
뒹구는 휴지 한 장 스산한 겨울 音調
한 쌍의 젊은 연인 옆자리에 앉을 즘에
나 또한 苦惱에 떨며 노인 뒤를 따른다.
겨울 공원에서(2)
적막한 겨울 공원은 메마른 강이더라
살얼음을 밟으면서 바람들은 건너와서
빛 바랜 빈 의자 위에 수런대며 앉았더라.
깃털보다 더 가벼운 햇살을 감지하며
지난날을 반추하다 꼬박 잠든 그 한 나절
하오쯤 잠이 깰 때는 나는 한 그루 裸木이여라.
冬天을 받쳐들고 앙상한 알몸으로 서면
살갗에 닿는 냉기 봄은 아직 아득한데
허망한 하늘 끝으로 울며 나는 겨울새.
雨期에
鋪道를 두들기는 하염없는 장대비에
끝없는 심연으로 침몰하는 잿빛 도시
어둠의 먼 끝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들.
우산 하나 받쳐들고 나는 어느 孤島에 서면
누가 버린 휴지 한 장 부표처럼 흘러가고
빗줄기 내 가슴을 쳐서 匕首날을 꽂고 있다.
왼 종일 자맥질하며 허우적 허우적이다
폐선처럼 와서 멈춘 빛 바랜 버스를 타고
캄캄한 칠흑 속으로 投身하는 나의 肉身.
퇴근 길 回想
나의 하루 커튼을 내리고 돌아오는 퇴근 길
말 없이 걷다가는 서천을 우러르니
유년의 회상 그 위로 붉은 노을 피었네.
한 웅큼 따먹던 찔레 밥 그리고 푸른 바람
발을 벗고 건너던 내(川) 붉은 해 물 속에 잠겨
그 여울 짙은 피 머금고 지금껏 뇌리에 흘러.
풀잎 뜯어 물살에 띄우며 고개 떨궈 건넌 저녁
그때도 바라봤던 저물 녘의 서쪽 하늘
오늘도 허기진 세월 발 적시고 건넌다.
퇴근길 有感
하루의 피곤함이 강물로 밀려 올 때
화명동 한 언저리 어두운 終點에 서면
섣달 밤 모진 바람이 회오리쳐 지나간다.
오늘도 날이 저문 긴 旅程의 한 가운데
밤하늘 캄캄한 곳 별들의 安息너머
그 옛날 어린 추억이 샛별처럼 돋나니.
세월도 시린 삭풍도 生의 둘레 할퀴어가고
강 건너 김해 벌에 먼 불빛이 아련하다
나 이제 어서 돌아 가 찬 肉身을 뉘여야지.
백미러를 보며
아직은 봄이 이른 二월 어느 휴일 날에
회색의 이 도심을 빠져나고 싶었는데
신호등 붉은 불빛에 나는 문득 멈춰 섰다.
무심코 들여다본 백미러에 비친 풍경
도시는 한적하게 정적으로 앉아있고
운전석 後視鏡 속에 거꾸로 가는 자동차.
視點 너머 사라지는 반대차선 차량들은
아련한 꿈길 따라 추억처럼 달리는가
아, 나도 세월 거슬러 돌아갈 순 없는 건가.
잃어버린 휴대폰
언제나 초라한 식탁
두어 술 아침을 뜨고
현관을 나설 때만은
하루가 새로워도
生存의 넓은 戰場은 바다보다 막막하다.
어딘가 전하고 싶은 말
문득 떠오른 휴대폰
정신을 어디다 뒀는지
두고 온 곳 모르겠다
十字路 어디쯤에서 차를 돌려 가야하나.
이제 돌아가긴
늦어 버린 시간이어라
공중전화 부스 속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누군가 맡아있길 바라며 전화 버튼을 눌러본다.
잃은 건 전화기 아닌
내 자신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電子音에 느껴지는 戰慄
먼 허공 세월 건너로 울려 가는 信號音.
제6장 빈방에서
癸酉年 身數를 보고
빈방에서
토요일 하오쯤에
함박눈은 쏟아지고
부천에서
송내동에서
잿빛 하늘 아래
동백으로 필란다
春信
鋪道에서
어느 봄에
어떤 背叛
2001년 3월 30일
사월
수도권에 온 폭우
벌판에서
歸家
癸酉年 身數를 보고
해는 다시 바뀌어도 하늘 아직 먹빛이고
섣달 느즈막에 쏟아졌던 그 눈밭에서
이따금 부는 바람 앞에 나는 한 그루 裸木이다.
유난히 추운 듯한 요 몇 년의 이번 겨울
낯선 공단 한 모서리 유배 온 듯 앉았으면
산 너머 부모처자가 눈에 아련 떠오르고.
丁亥年 庚戌月生 내 身數를 뽑아보니
利는 없고 괴로운 괘 이 한해도 어이할꼬
고목이 再逢春하는 괘, 陰九月을 기다린다.
빈방에서
살갗을 도려내며 폐부를 찔러오던
내 생애 가장 길던 계유년 겨울은 가도
타향 땅 낯선 도시의 우수 비는 차갑더라.
한 줄금 봄비 맞아도 가슴속은 메마르고
온몸에 스민 냉기 오한으로 떨던 밤에
낙동강 수많은 철새 떼 꿈속 가득 날고 있다.
홀연히 눈을 뜨면 외로운 나의 거처
캄캄한 빈방에서 허공을 우러르면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 홀로 있는 나는 孤島.
토요일 하오쯤에
토요일 하오쯤엔 나는 왠지 외롭더라
모두들 돌아가고 혼자 남은 사무실에
공허한 정적을 깨고 이따금씩 울던 창문.
임자 없는 전화들도 거의 다 끊어지고
적막만 못(池)이 되어 가슴팍에 차 오르면
심연에 자맥질하며 건져보는 옛 추억.
그 목소리 기다려도 끝내는 소식 없어
아련한 회한들을 葉信으로 접어들면
창 밖의 어둠은 깊고 가얄 길은 멀더라.
함박눈은 쏟아지고
-1992년 겨울-
무너져 내릴 것은 모두 다 허물어져
폐허로 남은 내 가슴에 함박눈은 쏟아지고
전신주 외로운 위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어디로 날아가는가 몸 숨길 덤불은 있는지
철강공단 한켠으로 삭풍은 몰아치는데
갈곳도 머물 곳도 없는 이 한 몸을 어이할꼬.
이 삼동 신열에 떨던 내 육신을 일으켜서
하이얀 눈밭 위로 낯선 발자국 따라
산 너머 아련한 南村 어디론가 가볼까.
- 포항에서-
부천에서
겨울이 서둘러서 그림자를 거둘 즘에
나 또한 시리던 삼동 훌훌히 털고 오니
먼 남녘 봄 오는 소리에 두 귀 열고 앉은 도시.
메마른 서울의 변방 봄은 아직 이르구나
낙동강 물 한 줄기 데 불고 올걸 그랬던가
아직은 무건 잿빛하늘 눌러쓰고 있는 부천.
계절에는 무딘 群像 뭇 사람들 지나칠 때
문득 뇌리에 흘러 출렁이는 푸른 강물
아내여 다음 주말에는 그 강 한 자락 끌고 오소.
-1994년 3월-
송내동에서
-1995년 3월-
겨울이 중얼대며 그림자를 거둬 접고
송내동 십자로에 신호등을 기다리면
春信은 경적을 울리며 북녘으로 달린다.
건널목에 우두커니 먼 하늘을 바라보니
내 사는 거처 근처 서성이는 낯선 손님
가족도 식탁도 없이 저 봄 어찌 맞을꼬.
아직 못 벗은 외투 어깨는 무거운데
소매 끝에 찌들은 때 내 삶의 고뇌 같은 것
철없는 내 새끼들아 그 곳은 봄이던가.
잿빛 하늘 아래
-1995년 12월-
모든 것 다 무너져버린 폐허의 한 끄트머리
찢어진 깃발 하나 바람에 펄럭이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알 수 없는 絶叫던가.
모두 다 어디 갔나 적막만 남겨놓고
녹슬은 기중기 위에 까마귀는 왜 우는가
그 모진 삭풍은 불어 휴지 한 장 날고있다.
누런 개 한 마리가 지나는 殘骸더미
하늘은 잿빛으로 자꾸만 내려앉아
나 끝내 통곡을 하면 눈보라가 쏟아진다.
동백으로 필란다
-1997년 2월-
하이얀 눈밭 위에
쉼 없이 내리는 햇살
이따금 부는 바람에
하늘 나라 말씀 들리고
지난 밤
꿨던 꿈 물고
날아가는 까치 한 마리.
어릴 적 추억 같은 것
먼 나라 전설 같은 것이
들렸다가 멀어지다가
음악으로 울려와서
휴일 날
적막한 가슴에
붉은 꽃망울로 맺히던가.
아산 땅 어느 변두리
裸木처럼 서 있으니
아직은 머나먼 봄
손발 끝이 시린데
나 오늘
저 양달 볕에서
동백으로나 필란다.
春信
-1997년 봄-
제주도 서귀포의
유채 꽃 개화 소식
무거운 내 일상을
외투처럼 벗고픈 데
아직은 내려앉은 하늘
손 끝 시린 한 나절.
매일 거르는 아침
친숙해진 공복감도
어떤 날은 웬일인지
서러움 같은 것이
이따금 귓전을 울리는
耳鳴으로 들린다.
鋪道에서
-1998년 여름-
햇볕이 灼熱하며 송곳으로 꽂히는 鋪道
정오의 짧은 投影 내 육신을 끌고 가면
가로수 회색 이파리 숨을 죽인 이 靜寂.
뙤약볕에 漂白되는 화려한 지난 映像
갑자기 엄습하는 시장 끼를 가눠보면
사나이 落淚 한 방울에 하루해도 떨어진다.
진종일 걸어봐도 내 갈곳은 없는 건가
돌연히 주저앉고픈 오늘의 이 絶望感
기우는 해거름 속에 비둘기 떼 날고 있다.
어느 봄에
전쟁이 아니어도 모든 것 다 무너져버려
폐허를 헤치고 나와 양지쪽에 앉아본다
망가진 내 가슴 한쪽 아직 아린 이 상처.
차라리 난리였다면 피난이라도 했겠지만
제자리 앉은 채로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석 三冬 웅크린 채로 헛소리를 해댔었다.
하려면 開闢을 하지 아이엠에프 크나 큰 고통
잔해를 뒤적이며 먼 하늘 우러르면
아직은 이대로 라고 외치는 놈 소리 들린다.
-2000년 3월-
어떤 背叛
스치는 바람 한 입 물고 하늘을 우러르며
반만년 그 허기에 허리띠를 졸라매면
눈부신 청천 하늘에도 별이 돋던 한 시절.
수 천년 못 넘었던 보릿고개 넘어 봐도
격려도 박수도 없는 허망한 잔치의 끝
비 맞은 토종개 한 마리 마당 끝에 서성인다.
영광의 살찐 열매 그 누가 따먹었나
知命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어가면
왼 종일 울리는 耳鳴 느껴지는 空腹感.
이 것은 배반이다 세월의 반역이다
목젖이 아파 와서 분노를 삼키다가
孤寂이 가득한 날에 혼자 웃는 헛웃음.
2001년 3월 30일
희뿌연 남녘 하늘 잿빛으로 무너지고
때아닌 진눈개비 목련꽃은 만발했다.
계절이 거꾸로 가면 이 세상은 어찌될꼬
나 또한 유년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걸까
한 가닥 이상기후 내 마음이 설레는데
거슬러 살 수 없는 삶 깜박 잊은 生의 理致.
모든 것이 전도되니 나 그만 착각했다
한 길에 나가 서서 물구 한 번 서 볼 가
하늘은 문득 벗겨지고 불어오는 봄바람.
사월
잔인한 달이라고 엘리엇이 일렀던가
보릿고개 산모롱이 울음 울던 먹 뻐꾸기
그 환한 백주 대낮에도 별이 뵈던 고갯마루.
라일락 향기 고와도 슬프기는 매한가지
눈물 방울 찔끔거리며 鋪道를 질주하며
괜스레 빈주먹으로 하늘 향한 손 삿대질.
그런 세월 다 보내도 아직도 슬픈 사월
버릴 것 다 버리고 빈손으로 앉았으면
눈앞엔 아무 것도 없고 펼쳐 졌는 荒蕪地.
-2000년-
수도권에 온 暴雨
백주에 하늘 뒤덮은 칠흑 같은 먹구름이
뇌성벽력 성난 소리 최후의 심판인가
며칠째 수도권 일원 초토화가 되었단다.
인구의 사 분의 일, 國富의 七割을 가진 서울
그것은 죄악이다. 이 사회의 모순이다.
오늘도 천평 저울에 올려보는 不平等.
대륙의 찬 기운과 태평양의 뜨거운 공기
기압이 불안정하여 豪雨警報가 내려졌다
언제쯤 날이 개려나 허리 아직 쑤신다.
벌판에서
지난 여름의 영광
모든 걸 걷어 가 버린
산란한 울음 울며
갈가마귀 떼 나는 曠野
찢겨진 노을 한 자락이 펄럭이고 있는 西天.
점차 사나워지는 바람
그것은 하나의 아우성
이마에 손을 얹고
누군가하고 바라보니
허재비 襤褸 걸치고 목을 뽑는 어떤 打令.
나 또한 실성한양
헛웃음 허허 웃으면
발가벗은 미루나무 사이
회오리치는 모래먼지
온몸을 엄습해오는 어둠 이 한밤을 우얄꼬.
歸家
피곤한 日常의 한 자락을
접어들고 돌아오면
언제나 밀쳐내며
나를 거부하는 門이 있고
오늘도 가슴 속 빗장 굳게 잠근 방 하나.
헛기침 두어 번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비어있는 빈방에는
어둠만이 滿場한데
冷氣는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이 初冬.
한 점의 온기도 없는
도회의 냉랭한 삶
창밖에 비치고 있는
푸른빛이 도는 외등
식구들 다 어디 갔나 自鳴鐘만 울린다.
지은이 약력
*1947년 11월 3일 경북 청도 금천에서 출생, 대구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계속 부산에서 생활함.
*제1회 국방부 군가가사 현상공모 "명랑오락회" 당선
*1978년 1월 시문학에 '봄'으로 초천(初薦), 1979년 10월 "아침'으로 천료(薦了) 문단 등단.
*1979년부터 부산시조문학회(볍씨) 회원으로 현재도 활동 중임.
*1980년부터 3년 간 크낙새 시조동인으로 지냄.
*한국손해보험협회 시나리오 공모 "약속된 행복"으로 당선작 없는 가작
*2003년 시집 '이 찬란한 아침에' 펴냄.
*성파시조문학상수상
*한국문인협회, 부산문인협회 이사, 부산시조시인협회 회원.
*우성식품(코카콜라)주식회사에서 기획관리실 주임으로 근무.
*동부제강주식회사 부장으로 근무.
*광명산업주식회사 이사 역임.
*현재 주식회사 한국창호공사 경영
연락처
전화 011-852-0356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 937-125
직 장 경남 김해시 주촌면 내삼리 907번지
전화(055)337-3760, FAX(055)337-7556
E-mail: poemjung@hanmir.com
첫댓글 시조 700년, 겨레시 700년 대장정 다녀 오시느라고 피곤하실텐데 아침 일찍 시조사랑 회원들을 위해 귀한 작품을 손수 올려주셨군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무리한 행사 일정으로 피곤하실텐데도 끝까지 잘 협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으로 후배들을 이끌어주셨으면 합니다. 손증호 드림
정해원선생님!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이렇게 왕림해 주셔서 귀한 글 남겨 주시니 넘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겠나이다. 선생님의 그 해맑으신 얼굴과 생각보다 큰 음성이 한동안 생각날 듯 합니다. 자주 오셔서 어린 저희들 깨우쳐 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려주신 시 자주 열어 읽어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늘 건강 하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잘 소개드린 것이 틀림 없군요. 많은 회원들에게 좋은 <보기글>이 될 것입니다. 어설픈 시인, 어설픈 간부 그 누구도 부럽잖은 선배님의 시와 무관의 참여가 시조를 살리고, 후배들을 이끄는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의 소신일 뿐만 아니라, 후배들의 바람이고, 문인으로서의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봄비처럼 젖어드는 시인의 향취에 젖고 싶은 후배들과 애독자들을 위하여 건필하소서!
가슴으로 읽고 또 읽어 말라가는 제 시심에 감로수로 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