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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신드롬(Sofa Syndrome)의 화가, 마티스
-앙리 마티스 탄생 150주년 기념 전시회를 보고
너희들 앞다퉈 달려들다 상처받는 내 가슴은
시인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우주 만물처럼 영원하고 고요한 사랑을.
나는 신비로운 스핑크스처럼 창공에 군림하며
백설의 마음과 백조의 순백을 이어주기에,
나는 선線들을 흩뜨리는 조짐을 지극히 싫어하고
또한 나는 절대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시인들아, 당당한 기념비처럼 나의 자태 자랑스럽지만
경건히 탐구하며 일생을 바치리라.
나는 나의 착한 숭배자들을 매료하기 위해서
만물을 더 아름답게 비추는 거울을 갖고 있도다,
그것은 나의 눈, 영원한 빛을 지닌 커다란 눈!
-<아름다움(La beauté)> 보들레르
봄이 만화방창의 기미를 보이고 있던 3월 끝 무렵.
1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집콕살이로 우울해 있던 차에 걸려온 후배 문인의 전화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던 내 감정선을 팽팽하게 조여주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전시회에 다녀왔노라 했다. ‘마티스’라는 이름을 듣자 기억 속의 그의 그림 몇 점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춤>, <잠>, <붉은 화실>…. 간결한 선, 평면적 구성 그리고 순수한 색감으로 마음을 참 평화롭고 편안하게 해주었던 그림들이었다.
20세기 초는 신인상파, 나비파,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등 여러 화파가 뒤엉켜 있던 시기였다. 마티스는 그중 야수파에 속했다. 야수파는 개론적으로 정의하자면 순수한 색채를 기초로 하고 대상의 색과 형태를 벗어나 자율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스타일이었다. 물론 그런 시도에 다리 역할을 했던 화가들이 있었다. 후기 인상파라 할 수 있는 고흐, 고갱, 세잔 등이다. 하지만 어느 화가를 막론하고 하나의 이론, 화파에 고착되어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글쓰기에 있어 상호 텍스트론이 거론되듯,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화해가기 때문이다.
파(派)를 떠나,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아름다움이다. 밀란 쿤데라는 <잔혹함과 아름다움>이라는 글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머리 없이 허공에 매달린 몸들, 이것이 브를뢰르의 최근 작품들이다. 이러한 시리즈에 관한 작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허공에 버려진 몸의 주체는 애초의 충격성을 점점 상실한다. 훼손되어 허공에 버려진 몸은 점점 덜 고통스럽고, 작품 하나하나를 지나면서 그 몸은 별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천사처럼, 아득한 곳으로부터 온 마법의 초대처럼, 관능적인 유혹처럼, 유희적인 묘기처럼 보이게 된다. 애초의 주제는 무수히 많은 변이형을 거치면서 잔혹함의 영역에서 경이적인 것의 영역으로 이행된다.”
‘회화에서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문제’라 토로한 브를뢰르의 말에 ‘예술은 흥분, 공포, 혐오, 충격 같은, 미학 너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해석을 내리며 덧붙인 말이다.
그는 베이컨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공포’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자신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베이컨의 어떤 그림에서도 아름다움이 결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아름다움이라는 얘기다.
밀란 쿤데라의 심오한 미학관에 비하면, 내가 마티스의 작품에서 취하는 아름다움은 일차적인 수준에 머문다. 혹자는 마티스의 그림을 지나치게 조형적이며 장식적이라 폄하하기도 하고, 파토스는 없고 부르주아적 개인주의 표현만이 존재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예술이 삶의 본질 면에서 보자면 부수적이거나 장식적 역할에 머물며, 그것들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쾌락이며 위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성인과 사업가 문학인들에게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편안한 소파처럼 정신적인 평화를 줄 수 있는, 균형적이고 순수하며 불편한 요소 없는 평온한 예술을 꿈꾼다.”는 마티스의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말년의 그가 미술사학자 가스통 딜(Gaston Diehl)에게 자신의 존재적 딜레마를 얘기하며 “세상에 미술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전파하기 위해 고통과 걱정은 오직 나만이 짊어지겠다.”라 한 것도 그의 예술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3월 마지막 날, 마티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강남의 ‘마이아트뮤지엄’을 찾았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예약을 해놓았으나, 먼저 들어간 그룹이 관람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무료함을 달래주려는 듯 주최 측에서 마티스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방을 마련해두어 즐거움을 덤으로 얻었지만, 아쉬운 것은 이번 전시가 그의 장년 이후의 작품들, 즉 컷아웃(Cut-Out)작품들과 시집 삽화로 쓰인 판화들, 무대의상과 스테인드글라스로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삼십여 분의 대기 끝에 전시실에 들어섰다. 먼저 내 눈길을 끈 것은 마티스의 어록이었다.
나는 내 노력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그 전에 그림들이 봄날에 밝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으면 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게 말이다.
미술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전파하기 위해 고통과 걱정은 자신이 짊어지겠다던 앞서 그의 말을 상기하게 하고, 백조의 물밑 발놀림처럼 예술의 창작 과정이 지난한 것임을 각성시키는 문구였다.
앙리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의 북부 소도시 캉브레(Cambrai)에서 출생해 1954년 프랑스 남부 휴양 도시 니스(Nice)에서 운명했다.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로 근무하다 맹장염에 걸려 쉬던 중 수채화 물감을 처음 대한 것이 그의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화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파리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 des Beaux-Arts)’에서 귀스타브 모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4년간 수학하면서 ‘르 살롱(Le Salon)’전에 출품, 국립미술협회 준회원이 되었지만, 인상주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작품은 혹평을 받았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을 만나면서 조각에 관심을 갖게 돼 미술대학 야간부에서 조각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사는 친구 폴 시냑을 방문했다가 남부 특유의 날씨에 영감을 받아 밝은색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신인상파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샤를 보들레르의 시 제목을 딴 작품<사치, 평온, 쾌락>이 호평을 받으면서 그의 기법은 방향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비평가 루이보셀이 강렬한 색채를 쓰는 그와 그의 동료들을 ‘야수들(Les Fauves)’이라 일컬으면서 그는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 조르주 브라크 등과 함께 야수파(Fauvism)로 불리게 된다. 뉴욕에서 첫 전시를 가진 후, 자신의 작품 <삶의 기쁨>에서 춤추는 사람들만을 독립시켜 제작한 <춤>을 ‘살롱 도톤느’에 출품했지만 혹평을 받는다. 스페인, 러시아 모로코 타히티 등을 여행, 이후 니스와 파리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19년에 러시아 발레단의 연출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작품 발레극 <나이팅게일의 노래>의 의상과 무대배경을 맡았고, 그 인연으로 1939년 <적과 흑>의 무대의상, 배경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조각과 판화에 몰두, 말라르메의 《시집(Poésies)》에 삽화를 넣은 것을 계기로 보들레르 등 여러 시인의 시집에 삽화 작업을 했다. 건강이 악화되자 니스에 거주하며 컷-아웃 기법으로 작업 형태를 바꾸었고 회화보다는 장식 작업에 전념했다. 84세에 사망하여 니스의 ‘시미에(Cimiez)’ 묘지에 묻혔다. 니스와 그의 고향에 마티스 미술관(Musée Matisse)이 있으며 이번 전시는 1919년부터 1954년, 죽기 전까지의 작품 120여 점으로 구성되었다.
전시는 주제별 5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구성해놓았다. 제1섹션은 ‘마티스와 오달리스크’, 제2섹션 ‘나이팅게일의 노래’, 제3섹션 ‘적과 흑’, 제4섹션 ‘재즈’, 마지막 제5섹션은 ‘성스러운 무대 로사리오 성당’이었다.
마티스와 오달리스크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는 드로잉 작품으로 대부분이 석판화지만, 간혹 에칭(etching,銅版畵)이나 아쿠아틴트 기법(Aquatint, 판에 송진 같은 수지 분말을 입힌 다음 부식을 거듭하는 기법)을 쓰기도 했다. 석판화는 소묘(素描)와 같은 질감을 주고, 동판화는 섬세한 선, 아쿠아틴트는 동양의 서예 같은, 굵은 선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실제로 마티스는 중국문화에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오달리스크는 터키 궁정의 후궁, 하렘의 여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19세기 초 오리엔탈리즘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모로코에서 만났던 하렘의 여인들을 참고로 하여 동양 의상을 입은 여성 모델을 장식적인 배경 앞에 둠으로써 이국적이면서도 강렬한 색상과 형태를 구현했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릴 만큼 색채로서 명성을 날린 그지만, 그의 예술의 모든 과정이 우아한 선의 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드로잉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 작품들에서도 그런 드로잉의 섬세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선의 표현, 선과 여백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하렘의 특징인 기하학적 문양의 배경과 의상, 장식품 때문일까,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는 흑백임에도 화려함을 느끼게 하고, 간결한 선만으로도 풍성함을 연출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드로잉과 색채의 고유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둘의 대립적 관계를 초월한다’는 평가를 비평가로부터 받았을 만큼 수준 높은 그의 드로잉 솜씨 덕분이 아닌가 싶다. 오달리스크화에서 보이는 고전주의적 전통성 때문에 이 시기를 정체, 퇴보의 시기로 보는 시각에 그는 “나는 반은 낭만주의자, 반은 과학자로서 감성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나이팅게일의 노래
발레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일본왕이 중국 황제에게 선물한 기계식 새, 나이팅게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안데르센의 동화를 원본으로 하고 있다. 러시아 발레단의 연출가 디아길레프가 제작했던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나이팅게일’을 각색한 작품으로 마티스가 무대배경과 의상을 맡았다. 중국 명나라 때의 궁정이 배경이어서, 그는 파리의 기메 동양박물관을 비롯 여러 박물관을 수차례 방문하여 역사 고증에 기반한 전통적 의상에 자신만의 세부적인 디자인을 가미, 이그조티시즘과 오리엔탈리즘이 결합된 무대의상을 탄생시켰다. 의상 작업은 어린 시절, 고향 근처 섬유산업으로 유명했던 보앵(Bohain)시에서 경험했던 직물에 대한 기억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 명나라 때의 궁정 복장을 바탕으로 하여 도자기, 옻칠의 색조에 그가 직접 칠하고 연출한 느슨한 장식을 실크로 정교하게 맞춰 세련된 의상을 창조해냈지만, 공연극 작품 경험이 없었던 만큼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해서 평론가들은 이 무대를 두고 두루마리 그림, 혹은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움직이는 그림)’ 같다는 표현을 했다 한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총체적 예술의 개념을 극장계에 들여놓았고, 향후 그의 작품활동에 미학적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2년 전인 1917년에 피카소가 제작에 참여해 성공을 거둔 <퍼레이드>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라이벌 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적과 흑
<나이팅게일의 노래>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였던 레오니드 마신이 마티스의 모더니즘 예술에 감명을 받아 새로운 작품의 무대의상과 배경을 의뢰한다. <적과 흑>이라는 발레 작품으로, 1939년 몬테카를로에서 초연을 한 후 파리를 거쳐 1940년에는 뉴욕에서 공연되었다. 음악으로는 쇼스타코비치의 1번 교향곡이 채택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1번 교향곡의 네 악장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영과 물리적 힘 사이의 영원한 싸움’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티스는 그 ‘영원한 싸움’을 다섯 가지의 주요색- 흰색, 검은색, 파란색, 노란색 그리고 빨간색-을 사용하여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단일 색상의 의상에 색이 들어간 줄무늬를 넣어 타오르는 불꽃을 표현하고, 무대배경은 되도록 심플하게 함으로써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더욱 리드미컬하게 보이게 했는데, 이는 그가 발레극을 위해 색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심했음을 보여주고 <나이팅게일의 노래>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그 두 개의 발레극 작업을 통해, 공간의 한계성이 있는 회화가 무대, 춤과 어우러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미술에 있어서의 실험이 무대 위로 연장된 셈이며, 이 경험이 훗날 그를 컷아웃 기법으로 이끌게 되지 않았나 싶다.
재즈(Jazz)
“마티스는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영웅적이고 극적인 관점을 펼쳐 보이는 줄타기꾼이자 곡예사였다.”
독일 ‘피카소 뮤지엄’ 관장인 마커스 뮐러가 한 말이다. 왜 마티스가 서커스를 컷아웃 작품집인 <재즈>의 주제로 삼았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수많은 수련을 거쳐 완벽한 기술을 관객에게 선보이지만, 곡예는 즉흥성을 가지고 있어 매번이 도전이며 실패와 위험을 동반하고 있다. 예술도 그러하고 인생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컷아웃은 종이를 오려 붙이는 기법이다. 대중, 관객과의 즉흥적 상호작용이라는 점에서 서커스와, 재즈, 컷아웃 작품은 일맥상통한다. 재즈가 변주로 즉흥성을 주듯, 색칠한 종이를 오려서 이리저리 옮겨 붙여 변화를 창출해내는 컷아웃 작품 또한 즉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즉흥성 때문에 컷아웃은 고정성과 유동성이 혼합된, 완전히 다른 예술로 발전될 수 있었다. 그는 <재즈>의 주요 주제가 서커스임에도 내용이 가진 다변성 때문에 제목을 ‘재즈’로 결정했다고 한다.
<재즈>는 네 가지 주제로 되어 있다. 서커스의 세계(‘하얀 코끼리의 악몽’ 등), 신화와 전설(‘이카루스’ 등), 제2차 세계대전의 군사적 충돌 상징(‘므슈 루아얄’ 등), 그리고 그의 삶과 여행의 추억(‘석호, Le Lagon’ 등)이다. 컷아웃 기법으로 해서 이 주제들은 '명사가 아닌 동사가 되어 뛰고, 날고, 솟구치고, 떨어진'다. 돌을 깎아 조각을 하듯, 그는 종이를 오려 붙임으로써 '형태와 공간의 갈등'을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윤곽과 색상 사이의 갈등'도 해결했다. 컷아웃 기법에는 한때 공부한 적이 있는 조각 작업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칸딘스키는 마티스의 작품에 대해 “전형적인 프랑스 스타일의 정제되고 매력적이면서도 선율적인 미가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평가했는데, 이와 같은 선율미는 <재즈>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이 선율성 때문에 마티스는 ‘그림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컷아웃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1941년 암으로 두 번의 수술을 받은 후 계속된 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때문이다. 그는 침대 위에서 과슈(Gouache, 아라비아 고무를 매재로 안료와 혼합한 불투명 수채물감)로 색칠한 종이를 오린 다음 그 조각들을 조수의 도움을 받아 벽면에 붙여놓고 퍼즐을 맞추듯 이리저리 옮겨 작품을 완성했다.
이 기법을 응용하여 탄생시킨 것이 유명한 <블루 누드> 시리즈와 <수영장>이다. 이 작품들은 푸른색 과슈를 사용한 석판화지만, 마치 종이를 오려 붙인 듯 인체 형상을 지극히 단순화시켜 간결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아프리카 조각과 타히티 방문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다는 이 누드 연작은 형체를 재현하는 기존의 방식을 버림으로써 평면적이면서도 형체는 존재하는, 이중성을 연출하게 된다. “드로잉과 색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했던 그는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대신 나는 색으로 바로 선을 그린다.”라며 컷아웃 기법이 이룬 두 요소의 합일에 만족해한다. 이 <재즈> 시리즈는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수많은 디자인 용품에 인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인스타그램에서 그의 각종 포스터 이미지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나는 <푸른 누드>와 긴 가로 그림 <수영장> 앞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원근법도 무시하고, 세밀한 묘사도 없는, 평면적이고 조각 난 이 단조로운 인체가 어떻게 이토록 풍성한 볼륨감을 연출하고 생동감을 주는 것일까? 피카소의 조각 난 인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었다. ‘묘사’의 방법과 여백의 효용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고령과 병으로 점점 더 움직임이 불편해진 그는 삽화에 열중하여 말라르메(Mallarmé)를 비롯낭만주의, 초현실주의 시인들뿐만 아니라 중세 시인 샤를 도를레앙(Charles d’Orleans)의 시집에 판화 삽화 작업을 한다. 시를 읽는 것이 “침대에서 일어난 뒤 신선한 공기로 폐를 채우는 것과 같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예술에 있어 시는 산소와도 같은 존재였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은 베르나르, 조르주 루오 등 몇몇 화가들이 이미 삽화 작업을 했던 작품집이다. 하지만 그는 시의 내용에 충실한 해석을 내놓은 그들과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자신이 선택한 시를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33개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중 하나는 자화상, 하나는 보들레르의 초상, 3개는 젊은 남성의 초상, 나머지 28개는 여성의 초상이었다. 초상화는 잘 알려진 보들레르의 여자들을 참고하지 않고 자신의 회화나 판화 작품에 등장시켰던 모델들을 그렸는데, 카르멘이라는 모델의 비중이 컸다. 보들레르는 그의 혼혈 정부 잔느 듀발을 위해 《악의 꽃》을 썼고, 마티스는 혼혈여성인 카르멘을 모델로 삽화를 그린 것이다. 카르멘은 다중적 캐릭터를 가진 여인으로, 보들레르의 시에서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그의 삽화들은 시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예술을 형성하고 있는데, 독특한 점은 매 시의 말미 여백에 각기 다른 율동적 느낌이 나는 간결한 선 그림을 넣었다는 것이다. 각각의 시가 지니고 있는 운율을 자기만의 느낌으로 표현한 것일까?
삽화 작업에는 에칭, 리놀륨판화, 석판화 등 여러 판화 방식이 적용되었지만, 그가 애용한 것은 석판화였다. 삽화는 주로 인물 초상이었는데,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함축적인 선묘법을 구사함으로써 문학의 순수성과 조화를 이룬 한편, 관람자나 독자의 상상력과 다양한 해석을 유도해내는 여백의 효과도 낳았다. 마티스의 컷아웃 작품들을 스텐실(Stencil, 공판화의 일종)로 재작업하여 일러스트와 본문을 곁들여 출간한 것이 작품집 《재즈(Jazz)》이다.
성스러운 무대 로사리오 성당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져 시미에 지역이 공습당하자 마티스는 니스에서 20여km 떨어진 방스(Vence)시로 이주해 1948년까지 거주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47년 방스의 도미니크 수도회로부터 로사리오 성당(Chapelle du Rosaire)건립 프로젝트에 참여해줄 것을 제안받는다. 이것은 한때 그의 야간간호사였고 모델이기도 했던 모니크 부르주와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그녀는 자크 마리라는 수도명의 수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와 함께 성당 작업에 참여하여 벽화, 실내장식, 스테인드글라스 및 사제복 등을 도안하였고,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컷아웃 기법을 이용한 장식 작업을 했다. 이 성당은 4년 뒤인 1951년에 완공되어 축복식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마티스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로사리오 성당을 통해 그만의 예술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이 작업은 내 작품 인생의 정점이자 방대하고 복합적이며 진솔한 노력의 성과물이다. 이 성당은 모든 요소를 한곳으로 모아 내가 추구한 것을 실현할 기회를 주었다.”라 표현했을 정도로 로사리오 성당은 마티스 작업의 완전체라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한 조형적 실험의 결집이며 ‘형태와 색의 균형을 통한 무한한 차원의 공간’이 실현된 건축물인 것이다.
로사리오 성당 작품 방에 들어서자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온화한 빛이 온몸을 감싸 안으며 성스럽고 평온한 분위기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성화(聖畫)재현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유리 그림은 부드럽고 율동적이다. 마치 산호초가 살랑거리는 깊고 투명한 물속을 유영하는 느낌이랄까.
마티스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나뭇잎을 모티프로 삼아 짙은 파랑색과 암녹색, 밝은 노란색을 사용해 빛의 교향곡을 만들어냈다. 생명의 나무(arbor vitae)를 연상시키는 창 그림은 푸른 예루살렘과 낙원을 표현한 것이라 하는데, 이 나무의 이미지는 그가 선호했던 산호초나 무화과나무, 미모사 같은 나뭇잎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나뭇잎 이미지는 <재즈>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제외하고는 성당 내부며 외관, 사제복 등을 사진으로 대치한 점이 아쉬웠으나, 성당을 떠메다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니 만족할밖에.
이 로사리오 성당 작업을 두고 마티스와 피카소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듯하다. 종교적 신앙을 갖지 않은 예술가가 성당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일이 가당치 않다며 니스의 꽃시장이나 꾸미라는 피카소의 조소 섞인 말에, 마티스는 무신론자 예술가의 작품도 종교적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대답으로 맞선다. 그의 첫 수필 <화가의 노트>를 빌어서는 “진정한 예술 작품은 모두 종교적”이라 했고, “나는 신을 믿는가? 작업을 할 때는 그러하다. 예술적 창작은 미를 찬양하기 위한 속세의 의식”이라고도 했다. ‘예술적 창작은 미를 찬양하기 위한 의식’이라는 그의 말에 필자가 서두에 인용한 보들레르의 시 <아름다움>의 마지막 구절이 상기되었다.
나는 나의 착한 숭배자들을 매료하기 위해서/ 만물을 더 아름답게 비추는 거울을
갖고 있도다,/ 그것은 나의 눈, 영원한 빛을 지닌 커다란 눈!
어쩌면, 장르 불문 모든 예술 창작은 아름다움이라는 종교를 숭배하는 의식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예술에서 진실성이 시작되는 시점은 더 이상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할 수 없을 때이며, 이때 나오는 힘은 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억제되고 응축된 보다 강력한 무언가일 것이다. 예술가는 겸허하고도 순수하며, 맑고 솔직해야 하고, 성체성사를 받는 이가 성탁으로 향할 때
처럼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제까지 적지 않은 글을 써오면서 그나마 스스로 흡족했던 글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내 안에 응축되어 있던 것들이 누에고치에서 실 풀려나오듯 술술 흘러나온 글들이었던 것 같다. 진실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마티스의 말처럼 성체성사를 받기 위해 성탁으로 향하듯 순수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말년으로 갈수록 단순해지고 색감도 순수해진다. 인생을 오래 살다 보면 예술이란 피카소의 말대로 투쟁하고 대항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표현 도구가 아니라, 마티스의 예술론처럼 ‘내적인 갈등과 번뇌를 조화롭게 해소하고 순수와 평온, 균형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예술이, 예술가가 그런 것은 아니며,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예술의 목적도 미에 대한 기준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도착점은 결국 하나가 아닐까.
들꽃 하나만 있어도 예술을 한다던 마티스. “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는 어디를 보아도 꽃이다.”라는 그의 말을 가슴에 담고 전시장을 나선다.
*참고 서적: <<앙리 마티스: 재즈와 연극>> 마이아트뮤지엄 발행
<<앙리 마티스>> 캐럴라인 랜츠너 지음 -모마 아티스트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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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미술평론가가 쓴 수필인가 싶다가도 수필가가 쓴 미술평론인가 싶기도 하고
수준 높은 글을 읽고 나서
"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편안한 소파처럼 정신적인 평화를 줄 수 있는, 균형적이고 순수하며 불편한 요소 없는 평온한 예술을 꿈꾼다.”
는 마티스의 말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전시회를 다녀온 지 일 년이 다 되었어요
문화탐방 글을 부탁받고 그 전시회가 생각이 나 쓰기로 했는데 기억이 희미했어요
그때 사왔던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워낙에 좋아하던 화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