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촌 별세
오늘(24.3.4) 오전 아내의 광진문화원 강의를 듣는 중에 문자가 떴다. 나의 오촌 형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노할머니와 유년의 시간을 수년간 보냈다. 당시 조그만 한 마을에 노할머니의 아들들이 살았다. 나의 친할아버지가 장자였고 그 아래로 네 형제가 있었다. 그리고 세 자매가 있었으나 나는 그녀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노할머니와 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그녀들은 한참 전에 출가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친할아버지의 네 형제들도 이미 다 출가하여 가정을 이루고 작은 마을에 서로 모여 살고 있었다. 문밖에 나서게 되면 큰소리를 지르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지근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하면서 우리 큰집의 혜택을 조금씩 받았다. 당시에는 문전옥답이 꽤나 많아서 새로 지을 집터며 생활할 논밭도 일부 떼어 줄 수가 있었기에 모두 한 마을에 살았던 것이다. 거의 매일 저녁이 되면 할아버지 다섯 형제들이 노할머니를 문안와서 좁은 방에 앉았다. 등잔불이 붉게 작은 빛을 발하는 중에 할아버지의 얼굴들도 모두 붉게 보였다. 다들 애연가였는지 주머니에서 담배 쌈지를 꺼내고 긴 담뱃대 끝 작은 종지 모양에 담배 가루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채운 후에 등잔불에 담뱃대를 대고 살짝 빨아당기면 그 작은 종지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러면 연기가 대를 통해 입 속으로 들어가면 그 연기를 서서히 내뱉는 동작을 반복하며 담배가루가 효용을 다할 때까지 반복하고는 재를 재떨이에 떨면 그제야 한 번의 담배 태우기가 끝난다. 다섯 형제가 덩달아 담배를 태우면 겨울인 경우 담배 연기가 방 안 가득했다. 그럴 때면 방문 가까이 있는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곤 하였다. 그들 중 셋째 할아버지는 맏딸이 있었고 그 아래로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바로 오늘 부고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첫째 할아버지의 장남의 아들이었으므로 나와는 오촌이 된다. 같은 유년을 한 마을에서 보냈지만 나는 그와는 별교분이 없었다. 나중에 보니 공부를 꽤나 잘했던 것 같았다. 내 고향은 섬이어서 공부를 잘하게 되면 부모들의 형편이 닿는 대로, 상급학교는 섬을 떠나 진주나 부산으로의 어린 나이 유학을 보내게 되는데 그 오촌은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당시 진고는 명문고였다. 아무나 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더구나 남해 깡촌에서 가기에 쉬운 학교가 아니었음에도 부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혜택을 본 것이다. 그 위의 아들은 겨우 남해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부친의 농사 일을 돕다가 나중 부산으로 직업을 찾아 떠났다.
그 오촌은 나중 부산에 있는 수산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까지 진출하여 강남에서 수협 지점장도 하였다. 깡촌 남해에서 꽤나 성공한 축에 드는 삶을 살았다. 키도 당시 거의 180센티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내가 160센티 대였으니까 상당히 대비되었다. 그가 일취월장하는 과정에 있을 때, 나는 아직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오남매 중의 장남으로서 빈곤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는데 나와 남동생은 노할머니가 사는 큰집에, 누님과 여동생은 외가에 막내 남동생은 부모와 함께 살았다. 나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했던 즐거운 추억이 없다.
오촌은 나중 은행에서 정년을 하고는 아파트 경비원이 되었다. 얼마 전에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전화를 하였다. 서로 대를 달리하지만 나이는 같아서 서로 친밀하게 사귀는 것이 껄꺼러웠던 관계여서 힘들었지만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르다 보니 그래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근황을 물으니 큰 문제는 없으나 겨드랑이에 작은 혹이 생겨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생활에는 큰 무리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에 가 보아도 정확한 진단을 모른다고 했다. 그 통화가 되짚어 보니 벌써 거의 일년이 되었다.
오늘 부고를 받고 그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왜 이렇게 갑작스런 경우를 당했느냐고 했더니 약 2년 전부터 폐암의 징조가 있었고 그간 통원 치료를 하였으나 급격히 폐암 4기로 되었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나와 동갑내기였으나 결코 친밀하게 지낼 수 없었던, 각기 몹시도 상반된 인생을 살아왔던 터라서 약간은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 왔던 오촌을 보내며 만감이 교차하였고 좀처럼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겪었던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서, 그때마다 정말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을까에 대한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 그 어렵고 험난하고 악전고투했던 순간들이, 주어진 환경 중에서 최선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보다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큰 성공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보면 더욱 그들과의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더 강한 결의를 가졌어야 했던 것이다. 더한 어려움도 딛고 일어서
려는 의지를 가졌어야 하는 것이었다. 똑같이 주어지는 삶의 기회를 더 잘 활용하려는 깨우침을 더 일찍 얻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흘렀고 노년이 되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때들은 과거가 되었고 회한이 남아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나의 미래를 배울 수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공동의 필멸의 인간이기에 결국 한 생을 사는 것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서, 조부모에게서, 내가 속한 사회에서 배우며 취사선택을 잘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좋은 스승을 만나는 복을 얻으면 더욱 좋은 것인데 불행히도 나의 성장기에는 특별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좋은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런 면에서 나는 성장기에는 불운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가난과 궁핍은 사회 전반에 널려 있었기에 탓할 것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어둠을 뚫고 나오는 동아줄이 있었다면 복음을 선택한 것이다. 나의 서툰 인생에서 유일한 위안거리가 된 것은 복음이다. 복음을 굳게 붙든 지 벌써 반백년이다. 유일한 영혼의 안식처이며 위로였다. 현명하고 정숙한 아내를 만나 지금은 행복하다.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영원한 시간이 계속 주어진다며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것들을 반추하며 교훈을 얻고 새로운 결심으로 과거와 똑같은 열등의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고 위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