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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역사방 스크랩 초원의 지배자 [제 5 부]
에셀나무 추천 0 조회 42 14.03.04 10: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뒤집어 보기] □□□□□□□□□□


우리는 [정주농경사회定住農耕社會]와는 생태적生態的으로 다른 [북방초원세계北方草原世界]의 정치적 연결 형태를 약간 다른 안목眼目으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에 관한 사료史料는 거의 없으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흉노匈奴]의 경우를 역사적 발전 형태로서 분석 지표指標로 삼을 까닭은 있다.



모든 장長들은 선우單于의 정庭에 모인다.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오손烏孫의 곤막昆莫은 선우單于의 죽음에 즈음하여 흉노匈奴에 다시 조사朝事하려하지 않았다.   <한서漢書 장건전張?傳>



이 기록은 [용성회의龍城會議]를 말하며 보통 1년에 3번(정월正月*5월*9월 첫 무일戊日) 모이는데 오손烏孫이 이에 따르지 않은 사실을 특별하게 기록한 걸로 보아 휘하麾下 모든 부족 지도자들의 참가가 <의무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제국帝國의 일원一圓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自覺시키고 제국帝國의 규범規範 아래 놓여 있음을 확인시키는 고도高度의 <집단질서체제集團秩序體制>라고 보여 지는바 이러한 회합會合은 한족漢族의 봉건제국封建帝國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왕후王侯나 태수太守들에 대한 궁정회의宮庭會議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다시 말해 오히려 [초원제국草原帝國]에서의 <집단지도자 회의체제集團指導者會議體制>가 제국帝國 경영의 기본적인 유형에 더 근접近接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범적規範的인 정치행위는 일순간에 완성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제국帝國 산하傘下에 있던 모든 정치적 군사적 수장首長들의 관습적慣習的 암묵적暗?的인 합의合意 과정과 역사적으로 일정하게 형성되어 온 상호관계가 정립定立되는 일련一連의 <사회공동체적社會共同體的 규칙規則>들이 장기간에 걸쳐 일반화一般化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초원제국] 운영을 가능케 하는 가장 핵심 축軸으로서 [군사민주주의적軍事民主主義的]인 독특한 체제통합유도방식體制統合誘導方式으로서 오랜 과거로부터 유전遺傳된 <전체회의제도全體會議制度>였음이 기록에서도 여러 번 확인 된다(단군조선의 대가회의大加會議-흉노匈奴의 용성회의龍城會議-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의 제가평의회諸加評議會-신라新羅의 화백회의和白會議-몽골의 쿠릴타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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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목제국遊牧帝國의 완성과 북중국北中國에서의 제후諸侯 세력 운영 - 유물 등의 비교분석으로 찾아본 진실



서방학자西方學者들은 한족漢族의 자의적恣意的 해석解釋에 몰입沒入되어 <상문명商文明>을 한족漢族의 역사로 간주하는 착오錯誤를 일으키는 바람에 발굴할 때마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북방문화적인 요소] [1]를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문화文化의 접촉接觸이나 유입流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일방적이고 전반적全般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방민족東方民族의 문명확산文明擴散]이라고 보면 아주 간단하고 순리적順理的으로 매듭이 풀려진다.


[1] 후가장侯家莊의 자루 끝에 동물 머리양식이 있는 청동도靑銅刀*소둔小屯의 환두도環頭刀*대사공大司空의 세발 토기土器와 옥편玉片 그리고 짧은 투겁곡괭이(이제李濟  기소둔출토지청동기記小屯出土之靑銅器  중국고고학보中國考古學報  1949  1P-70P)와 부호묘婦好墓에서 발견된 야생 염소 머리 장식의 북방형北方形 장도長刀*청동靑銅 거울*신강新疆 연옥채석장軟玉採石場이 원산原産인 수많은 옥玉(왕병화王炳華  사주지로고고연구絲綢之路考古硏究  1993  164p-182p)



주요 야금술冶金術 중심지의 장악과 <거점공동체據點共同體>로의 육성*목축牧畜에 부수적으로 접합接合시킨 농경활동農耕活動이라는 혼합경제체제混合經濟體制로의 발전적인 모색(摸索-카라수크 문화의 성공적인 사례事例)


기마술騎馬術과 궁술弓術을 중심으로 한 완전한 전력화戰力化와 이에 걸 맞는 전쟁 기술의 혁신(革新-원거리遠距離 사격射擊의 핵심인 활의 강도强度와 탄력彈力 증가와 근거리近距離 접전接戰에서의 도刀와 창槍의 위력 배가倍加 등)은 [유목사회구성체遊牧社會構成體]가 국가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해주었다.


사실 광범위한 유목국가체제遊牧國家體制의 내부적인 경제구조나 정치조직을 살펴보면 정주국가定住國家와 그토록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할 역할이나 특별하게 차별差別되는 계층적階層的 특징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비록 핵심을 [군사귀족 엘리트]들이 차지했다는 점만 다를 뿐 통치 이념*정치체政治體의 구조*군사조직*의례儀禮 행위 전반에 걸친 영역에서 유목遊牧과 비유목非遊牧의 전통이 혼합되는 경향 속에서 나름대로 다소 독창적인 <사회-경제 구조>가 추가된 것뿐이다(요종오姚從吾  요금원논문遼金元論文 상上-요종오선생전집姚從吾先生全集  1981) .



□□□□□□□□□□□ [여기서 잠깐] □□□□□□□□□□□


여기에서 흔히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유라시아 초원]이 유목목축遊牧牧畜으로 진화한 원인을 [건조화乾燥化]라고 단정 짓는 태도를 기반으로 하여 문명의 후진성後進性과 문화의 낙후성落後性으로 연결시키려하는 서방학자西方學者들(한족漢族 사가史家들의 입장도 같다)의 교묘한 <이론전개모델>이다.   하지만 현재 이 이론理論들은 새로운 <분석틀>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으며 많은 근거 자료를 통해 비판을 받는 추세趨勢이다.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하였듯이 문명발달의 초기부터 <초원 벨트>에는 가축화家畜化할 수 있는 동물군動物群의 종류와 숫자가 월등越等했으며 아울러 일부 지역에서는 작물화作物化를 시도할 충분한 야생식물군野生植物群들이 분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여건與件들이 [가축화家畜化]를 위주로 하는 생활을 최선으로 만들어주는 경제적 구조를 만들어내었고 [작물화作物化]는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을 창출創出해내는 효율성 문제로 다만 [가축화家畜化]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부가적附加的인 재료材料로서만 기능하도록 발전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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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벨트] 동방東方의 남쪽 변경邊境에서 최초로 접촉한 정주문명定住文明 세력의 눈에 비친 [유목국가遊牧國家]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헌적文獻的으로는(한족漢族의 기록에 의거한) 5C 중반에야 비로소 북방北方으로 인식認識의 한계를 넓힌 농경민족農耕民族 집단에 의해 출현出現이 확인된다. 


그러나 [유목세력遊牧勢力]의 주도적인 진입進入은 이보다 더욱 일러서 묘지墓地 부장품副葬品의 변화와 특정 발굴품發掘品의 유형학적類型學的인 특징 및 방사성탄소연대放射性炭素年代 측정測定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 등을 고려할 때 대략 [3단계]로 구분되어진다.



가. 진입進入 초기 단계   BC 9C-BC 7C


부장품副葬品에서 마구馬具와 무기武器의 비율이 별안간 증가한다.   특히 동북부 지역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은 [서부와 중부 유라시아 초원을 포용하는 동방제국東方帝國]의 핵심 전위세력前衛勢力들이 중국中國 북부에서 공세적攻勢的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내몽골 적봉赤峰 지역 발굴에서 독자적인 동방문화東方文化를 이룬 뚜렷한 특징들을 가졌음을 증명한(고고考古  1961-2  77p-81p와 고고학보考古學報 1971-4  111p-144p)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上層文化]가 중요한 중심축中心軸으로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늦어도 <BC 11C부터 BC 4C>까지 [유목제국遊牧帝國]의 중추中樞로서 기능하였음은 핵심영역의 범위나 유적분포遺蹟分布의 규모 [1]는 물론 발굴된 유물상遺物相과 유적遺跡의 <방사성동위원소放射性同位元素 년대측정年代測定>을 통해 많은 학자學者들이 동의하고 있다.


[1] 북쪽으로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山脈 동편인 시라무렌Siramuren 강江 분지盆地까지 남부로는 <난하?河-연산산맥燕山山脈-칠노도산맥七老道山脈>에 이르고 동부는 <내몽골-요령성遼寧省-하북성河北省>에 걸치며 서변西邊의 접촉 계선界線은 내몽골의 소오달맹昭烏達盟 지역까지 펼쳐진다.


    이러한 영역추정은 매우 신뢰할만한 고고학적考古學的 분석 결과이다.   남산근南山根같은 연대측정이 가능한 유적遺蹟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출토出土된 서주西周 시대 유물遺物이나 특징적인 문화에 기반 한 양식적樣式的인 진화양상進化樣相을 드러내는 곡선曲線 날을 가진 단검(短劍-곡인청동단검曲刃靑銅短劍) 등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는 결정적인 근거이기 때문이다(근풍의?楓毅  논중국동북지구함곡인청동단검적문화유존論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  고고학보考古學報  1982-4  387p-426p와 1981-3  39p-45p).



[하가점문화夏家店文化]에서 매우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북방이나 서부의 다른 중심지에서 이동한 [동방유목제국東方遊牧帝國]의 흔적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하층문화下層文化가 지난 다음 오래 동안 이 지역은 [농경農耕-유목遊牧]의 혼합경제권역混合經濟圈域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상층문화上層文化 시기에 와서는 돌연히 <말뼈>가 다량多量으로 발견되어 [유목국가遊牧國家]의 전형적인 특색으로 되돌아간 흔적이 역력하다는 시사점示唆點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 갑자기 다양한 매장埋葬 형태의 무덤(움 무덤*돌널무덤 등)들이 등장하는 사실과도 관련성이 많다.   아마도 [단군조선]의 11C 무렵 정세변화와 맞물려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두 번째로] 본격적인 남진南進의 계기를 짐작케 해 줄 유력한 움직임의 흔적들이 갑자기 활발해진다는 점이다.   청동야금술靑銅冶金術이 매우 정교하게 발달된 제국帝國으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구리> 등 광산유적(鑛山遺蹟-내몽골 임서현林西縣 대정大井 등과 옹우특기翁牛特旗 대포자大泡子 분묘墳墓)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는 무기武器를 비롯한 마구馬具 제조와 매우 관련이 깊다(돌 거푸집과 용해로鎔解爐).  


아무튼 <빠르면 12C-늦어도 11C>에 전前 시기 유목문화遊牧文化의 유산遺産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며 등장한 [단군조선 계열系列]이 거의 확실한 [유목遊牧-농경農耕 혼합제국混合帝國]의 존재가 특별하게 두드러졌다는 점이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다.  



1) 흑룡강黑龍江 지역의 울창한 산림山林과 수량水量이 풍부한 강줄기가 많은 이점(利點-고온高溫 처리와 담금질이 필수적인 제철製鐵에는 극히 중요한 조건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발달한 세련된 철야금술鐵冶金術 집단들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2) 본격적인 [제국帝國]의 경영에 필수적인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의 증가를 위하거나 전문기술집단專門技術集團들의 양성(養成-야금冶金과 제철製鍊과 금속기金屬器 제조자製造者 등)에 필요한 물자物資의 축적을 위한 생산수단의 다양화多樣化를 완성하고 있다는 점으로서 동북평원東北平原과 요하遼河 남부 지역의 경작耕作 가능한 토지土地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가축생산家畜生産의 결점缺點을 보완補完시키는 적절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정황이 뚜렷하다.


3) 요령성遼寧省 조양朝陽 지역(십이대영자十二台營子)를 비롯한 여러 지구地區에서 출토出土되는 유물상遺物相의 다양성(비파형동검琵琶型銅劍 등 동방계東方系의 특징적인 유물遺物을 중심으로 한 오르도스Ordos 양식樣式들)은[유라시아 유목사회遊牧社會]를 우세적優勢的으로 선도先導하는 [자율성自律性을 지닌 독자적인 중심문명권]으로서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유추類推하게 해준다.


4) 이 문화가 완전하게 품격品格을 갖춘 세련되고 전형적인 [유목문화遊牧文化]의 완성형식이라는 점은 기마생활騎馬生活이 절정에 달하였음을 분명하게 확인해주는 그림(기마궁사騎馬弓士 두 사람이 토끼를 쫓는 그림)으로 장식한 등자?子 모양 청동靑銅 고리와 마구馬具들이다. [1] (이일우李逸友  내몽고소오달맹출토적동기조사內蒙固昭烏達盟出土的銅器調査  고고考古  1956-1959  276P-277P와 고고학보 1972-3  3P-27P*영성현남산근적유지발현보고寧城縣南山根的遺址發現報告 고고학보考古學報 1971-5  117P-140P)



이 같은 사실은 수많은 단도短刀*도刀*도끼*창날*화살촉*방패*투구 등 다양한 무기武器와 초식동물草食動物의 유골遺骨이 대량大量으로 발견되는 상황은 이 시기에 완전한 <군사귀족軍事貴族>들이 진정한 [파워엘리트]로서 자리 잡아 이들의 용맹勇猛과 기상氣象에 힘입은 제국帝國의 팽창주의적膨脹主義的 성격과 결코 무관無關하지 않다(Wu En  New Chinese Archaeological Discoveries Regarding the Ancient Northern tribes  1991).


특히 <말>이 끄는 날렵한 마차馬車를 포함한 기마인물騎馬人物들이 일상적인 사냥을 하는 장면이 새겨진 남산근南山根의 각문골판刻紋骨板으로 보아 적어도 BC 8C까지는 기마습속騎馬習俗이 일상화日常化된 [유목제국遊牧帝國]의 중요한 중심지역이 동북지역에 위치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유목문화 중심지]에서 주도적으로 양성養成된 이들 <군사귀족>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영역을 넘어 주변지역의 유목사회遊牧社會를 지배하는 초부족적超部族的*경제적*정치적 공간을 넓혔는데 이런 숙달熟達된 과정은 후일後日 반복되는 [유목제국遊牧帝國의 중심지에서 주변(특히 서부)의 초원사회草原社會로 진입進入]이라는 특유特有의 [유목적遊牧的 정복국가征服國家]의 성격을 규정規定하는 효시曉示가 되었다.


[1] 내몽골 영성현寧城縣 남산근南山根 유적遺蹟의 매우 정교한 두 종류의 재갈*재갈멈치*딸랑이 종鍾과 방울*머리 장식과 마면馬面 등



□□□□□□□□□□ [뒤집어 보기] □□□□□□□□□□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上層文化와 하층문화下層文化의 성격은 전혀 이질적異質的이 아니다.   다만 동일한 [유목문화遊牧文化] 집단의 상층부上層部를 형성하던 주도 세력이 바뀌었을 뿐이다.   또한 [유목문명제국遊牧文明帝國]의 중심지가 이동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즉 [단군조선 제국帝國]이 보다 서西편이거나 북방에 있었을 무렵엔 하층문화下層文化는 제국帝國의 배후지背後地로서 필요한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을 제공하는 중요한 정착지대定着地帶로서 훌륭하게 기능하였음을 유물遺物로서도 잘 알려주고 있다(단순한 식량재배食糧栽培와 가축家畜으로서 주로 돼지 사육飼育 등).  


이 지역이 동북평원東北平原 남부의 산림山林과 비옥한 강江 유역을 배경으로 몽골 동남부의 목초지牧草地를 비롯한 <북방 초원지대>와 넓고 깊숙하게 이어져 공통적인 생활반경生活半徑을 가지고 있었음은 발굴 유적遺蹟에서 사슴 같은 야생동물의 뼈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다.


하층문화下層文化가 이렇게 기능하고 있던 시기에 몽골에서는 [유목사회구성체遊牧社會構成體]의 중심지로서 <오한기敖漢旗 문화>와 <적봉赤峰 문화>가 융성隆盛하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筆者는 바로 이들이 남방南方으로 진입進入하여 얼리터우二里頭 문화(BC 1800-BC 1600)를 또 다른 일파一派는 동부로 이동하여 하가점夏家店에 정착定着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비로소 하층문화下層文化의 요소要素가 자연히 소멸消滅하면서 시간을 두고 후속문화後續文化와 접촉*동화同化하는 가운데 [유목목축遊牧牧畜 중심-농경農耕 보충補充]라는 아주 이상적인 [유목제국]의 전향적轉向的인 변신變身이 상층문화上層文化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냉정한 안목眼目에서 보면 이 두 문화 사이의 기간에 문명사회文明社會가 단절斷絶되었다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가장 안정적인 생활 기반과 문화적인 발전지대를 버려두고 돌연히 사라졌다가 갑자기 다른 집단이 나타났다는 이론理論은 논리論理에 맞지 않는다.  


또 그 지역에서는 그렇게 문화가 단절斷絶될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사회적인 격변激變이 없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곽대순郭大順  시론위영자유형試論魏營子類型  고고학문화론집考古學文化論集  1987  79P-98P).  


이렇듯 하층문화下層文化에서 상층문화上層文化로의 [유목목축적遊牧牧畜的 성격 확산擴散]은 전문적인 목축기술牧畜技術과 기마장비騎馬裝備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현명하게 활용하였으며 가장 뛰어난 야금술冶金術을 지닌 복잡한 사회조직을 가진 집단의 이동과 접촉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단군조선 제국]의 한 두 세기에 걸친 새로운 중심지 이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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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上層文化]의 <지배支配 엘리트>는 견고하고 세련된 금속기金屬器를 사용하던 <유목전사계급遊牧戰士階級>이었음이 오한기敖漢旗 유적遺蹟에서 입증立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유목문명遊牧文明]이 <트란스바이칼Transbaikal-하가점夏家店-동북 만주滿洲>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은 여러 연구 논문論文에서 밝혀내었다(Debaine-Francfort  Du N?olithique ? l'Age 여 Bronze en Chine du Nord-Quest  304p-348p).  


그리고 <William watson>은 매우 구체적인 표지지표標識指標로서 [돌널무덤*토기土器 형태*금속기金屬器 양상樣相] 등을 들어 더욱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다(Cultural Frontiers in ancient East-Asia  124P-141P).



여기에서 정말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은 같은 시기(BC 2000년대) 감숙성甘肅省과 청하성淸河省의 [가약?約 문화]가 <동방제국東方帝國> 서부방면을 지탱하는 한 축軸으로서 분명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초기 <상손上孫 유목遊牧-농경農耕 혼합사회混合社會>에서는 돼지 사육飼育이 주主를 이루었지만 <아합특납阿哈特拉 사회구성체社會構成體>는 완전하게 소*말을 중심가축으로 하면서 유목국가체계遊牧國家體系에 편입編入되었다(고동육高東陸  약론가약문화略論?約文化  고고학문화논집 3  153P-165P).  


바로 <이 문화 담당 세력>들이 유목문명遊牧文明의 핵심 동력動力이었던 [기마전사귀족騎馬戰士貴族]으로 발전하는 기술적 진보進步를 통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민근현民勤縣 <사정沙井 문화> [1] 에 영향력을 확산하였다.


그러면서(춘추春秋-전국시대戰國時代까지) 마침내 동호(東胡-혹은 호胡라고 표현되는 동방제국東方帝國)의 영향력 아래에서 서쪽 날개로 성장하고 있더 흉노匈奴에 중요한 밑거름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1] 1923년-1924년 <J. C. Anderson>에 의해 발굴되었다.   범위範圍는 민근현民勤縣*영창현永昌縣*고랑현古浪縣*영등현永登縣에 걸친다.   초기 오르도스Ordos 유형類型인 양羊과 말과 소의 희생물犧牲物*독수리나 사슴과 같은 동물장식 청동장신구靑銅裝身具*창날과 화살촉과 칼 그리고 굴대 투겁(중산국中山國에 영향을 준 남변南邊의 유수구楡樹溝 유적遺蹟) 등이 출토出土되었다.



서부지역 [유목사회구성체遊牧社會構成體]의 영향권에 속한 <사정沙井 문화>의 토성벽土城壁으로 요새화要塞化(삼각성三角城 유구遺構-고고考古 1984-7  598p-601p) 된 거주지居住地는 중국학자中國學者들에 의해 유목세력遊牧勢力을 방어防禦하기 위한 농경정주집단農耕定住集團임을 보여주는 징표徵表라고 일방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이러한 요새화要塞化 된 초기 거주지에서 중점적으로 출토出土되는 <유목적인 문화 요소>가 짙은 유물遺物들의 분석에 의해 유목遊牧에 기반을 둔 [초원 엘리트 계급]들의 거주지로 건설되었을 이라는 견해見解가 더 통찰력通察力 있는 의견意見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Karl Lamberg-Karlovsky  The Bronge Age Khanates of Central Asia  1994  398p-405p).


마지막으로 유의해야할 시사점示唆點이 있다.   초기 철기鐵器가 등장한 시기를 BC 10C 경으로 잡는 게 통설(通說-A. Askarov*V. Volka & N. Ser-Odjav*Michail P. Gryaznov*Roman Kenk)인데 그 지표指標로서


[중앙아시아 지역인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카자흐스탄Kazakhstan-투바Tuba-남 시베리아-몽골-흑룡강黑龍江 지역]에 이르는 <유라시아 초원벨트>에서 광범위하게 유사한 발전양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기를 서슴지 않는다.   바로 [초원유목사회구성체草原遊牧社會構成體]라는 구체적인 실체實體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사례事例이기도 하다.


<투바> 지역은 BC 8C가 정설(定說-아르잔 귀족무덤과 구르칸 무덤 등)로 받아들여지는데 [1] 흑룡강黑龍江 줄기를 따라 철광鐵鑛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BC 20C 말기末期부터 나타나며 몽골의 10C 무렵과 관련하여 BC 9C부터 철제鐵製 부장품(副葬品-도刀*단도短刀*갑옷 등)들이 풍부하게 나타나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 문화를 이끈 주역主役이 누구였는가? 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A. P. Derevianko와 P. M. Dolukhanov).


[1] 미누신스크 지역 Shestakocvo 분묘墳墓에 철제유물鐵製遺物이 존재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으로서 후일 흉노匈奴라 지칭指稱되는 새로운 문화와 매우 관련이 깊다...(철鐵이 독립적인 위치로 올라 선 몽골이나 동북지역보다) 시기적으로도 늦은 투바 지역(BC 5C-BC 3C 후기 우유크Uyuk 문화)에서는 상대적으로 아직 새로운 기술로서 자리 잡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는 Martynova Garina와 Nikolai Bokovenko의 주장은 매우 현명하며 정확한 핵심을 뚫었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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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C까지 이어지는 예니세이Yenisey 강江 상류上流 유역流域 투바Tuba 천川 주변의 미누신스크Minusinsk 분지盆地 일대一帶에서 번영繁榮한 [타가르Tagar 문화-견곤족堅昆族의 유적遺蹟이라 하나 이는 더 연구해야할 과제이다]의 대표적인 유물遺物은 [구르칸Gurkhan 적석묘積石墓]이다.


<그리아즈노프>가 예니세이 강江 오른편인 <사라가쉔 호湖> 주변의 6기基 무덤 가운데 [제2호-제3호]를 발굴하였다.   주목할 점은 제3호 무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상당한 신분적 격차隔差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피장자彼葬者는 구체적으로 그 지역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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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진입進入 완료 및 안정화安定化 단계  BC 6C-BC 4C


이 시기에는 전형적인 유목문화遊牧文化의 <3대 지표指標>로 인정하고 있는 [무기武器*마구馬具*동물 문양文樣 장식품]이 세트로 부장품副葬品에 등장하고 있어 북중국北中國에서의 <유목제국遊牧帝國 확산擴散과 그 문화의 수용收容>이라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입증立證시켜준다.  



1) 대표적인 케이스가 [평양平陽 문화]와 [한서漢書 2기 문화]이다.   평양平陽 문화는 완전히 실용화된 철기(鐵器-철제鐵製 무기와 도구)에 접어든 목축문명牧畜文明의 전형(典型-한 무덤에서 말과 개의 부장副葬*50자루가 넘는 활과 240개 이상의 화살촉 발굴)을 보여준다.  


   북경北京 주거유지住居遺址와 연경燕慶 유적遺蹟*전국시대戰國時代 삼가자三家子 유적遺蹟의 <개>를 희생물犧牲物로 삼는 장례관습葬禮慣習*시신屍身 얼굴을 청동단추로 덮는 의식儀式 등은 평양平陽 문화의 남부지역 확산을 알려주는 모범이다(고고考古  1912-8  1090p-1098p).


2) 한서漢書 2기 문화는 분명하게도 그리 많지 않았던 기름진 평원平原의 이점利點을 극대화시킨 [단군조선 제국帝國]의 전사戰士 계급과 전문기술집단專門技術集團에 대한 잉여생산물剩餘生産物 공급 배후지背後地로서 선택되었던 동북평원東北平原의 [유목목축遊牧牧畜-농경정착農耕定着]이라는 혼합 형태를 보여준다(동북고고여역사東北考古與歷史  1982-1  136p-140p).


   이 지역에서 발견된 엄청난 진흙과 모래 거푸집으로 추측컨대 제국帝國의 청동靑銅과 철鐵 야금冶金 지역의 하나로 기능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문화 지대에서 북방의 청동단도靑銅短刀와 모양이 거의 같은 철제단도鐵製短刀가 출토되었다는 점과


   이극천二克淺에서 나온 철제鐵製 투겁도끼와 도刀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원中原의 <북부 유형>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문화 확산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심장하다(북방문물北方文物  1986-2  2p-6p*조선동趙善桐  흑룡강관지유지발현적묘장黑龍江官地遺址發現的墓葬  고고考古  1965-1  45p-46p).



진입進入을 위한 [주요 핵심거점지역核心據點地域]은 분명하게 이동 경로를 따라 둘로 나누어지는데 주로 철鐵 야금술冶金術을 밑거름(철제鐵製 도구*자루는 청동靑銅이며 날은 철鐵로 만든 장도長刀 등)으로 위세威勢를 보이면서 유목문명遊牧文明의 군사적인 우월성優越性을 대표하고 있음이 뚜렷하다.


① <동북부 루트>로서 오르도스Ordos-태행산맥太行山脈 동東 편을 지원하는 내몽골-요령성遼寧省 사이의 중간지대


<서부 루트>를 받쳐주는 청해성淸海省 동부-감숙성甘肅省-영하성寧夏省 지역 [1]


[1] 실제로 <Watson>은 [Cultural Frontiers in Ancient East Asia]에서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융戎과 서적西狄이라는 두 줄기의 흐름을 갈라놓았다는 견해見解를 제시提示하였다.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도 본질本質은 같으나 출자出自가 약간 다름을 알려주는데 초원문화草原文化를 상징하는 <몽골과 알타이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동북지역인 <산림山林-초원草原-농경農耕>이 혼합된 유목문화遊牧文化 세력이다.  


    이 같은 사실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분수령分水嶺으로 동부와 서西편에서 진입進入하였음을 더욱 뚜렷이 해준다(필자筆者 보주補注  이는 후일 동호東胡의 서쪽지역을 맡은 흉노匈奴 계열과 이어지는 것으로도 증명이 가능하다).   최근의 유물遺物에 대한 고고학적考古學的*미술사적美術史的인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Bunker  Ancient Bronzes of the Eurasian Steppes  159p).


    하지만 중국中國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은 웬일인지 대부분 중시重視하지 않거나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주요 <패러다임>은 단순한 [북방지역복합체北方地域複合體]라는 관범觀點에서 이를 아예 지역적으로 가르는 학자들의 주관主觀에 의해 다만 <지방문화>로만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중국학계中國學界는 그렇게 단정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Watson>과 같은 학자들의 견해를 간과看過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는 분명히 <Lothar von Falkenhausen>이 적시摘示한 [지역주의 패러다임]이다(필자筆者 보주補注  이런 관점은 그 역사도 꽤 오래되어 질긴 생명력을 가진 망령妄靈처럼 살아남아 오늘날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도 유령幽靈처럼 어슬렁거린다).


    이렇게 한 다음 주周 시대까지도 진晉을 압박한 <Watson>이 적족狄族이라 한 세력을 산서山西 북부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정착하여왔던 초기 [산서山西 문화]와 연결시키지 않고 돌연히 아득히 떨어진 그래서 더욱 모호하기만 한 북방지구와 이어주거나 아니면 지극히 야만적인 지방 세력의 하나로 축소시켜버린다(Lothar von Falkenhausen  The Regionalist Paradigm in Chinese Archeology  1995  208p-210p). 



<말> 장식품들의 발굴이 풍부하다는 점은 이미 <안정적인 정착단계定着段階>에 이른 유목遊牧 군사귀족 전위집단(軍事貴族 前衛集團-한족漢族 기록에서 흔히 별칭別稱되는 이夷*융戎*적狄들이다)이 그 지역의 정주定住 세력과 농경민農耕民들에 대해 정치적*군사적인 국면局面에서 우세優勢한 지위로 부상浮上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 특히 <북중국北中國 진입세력進入勢力>들의 보호막保護幕으로 확실히 작용하고 있던 [단군조선 제국]의 핵심영역인 <하가점문화권夏家店文化圈>에서 부장품副葬品 가운데 군사적 이동의 주역主役으로 짐작되는 <기마전사騎馬戰士>들의 필수품必需品인 다양하고 풍부한 마구馬具와 장신구裝身具들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주목을 요한다(Roal Sterckx  An Ancient Chinese Horse Ritual  1996  47p-79p).


2) 북경北京 근교 연경현延慶縣에서 발견된 특수한 <북방식 기마용騎馬用 재갈>이 이 시기 초엽初葉의 유물遺物인데 한족漢族은 BC 4C 조趙 무령왕武靈王이 기마騎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말>을 탔다는 기록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서양의 학자들도 공감하고 있다(Emma Bunker*Herrlee G. Creel*C. S. Goodrich*Edouard Erkes).   분명한 역사적*고고학적考古學的 입증立證인 셈이다.


3) 가장 인상적인 요소要素는 매우 우월적優越的이고 세련된 [철鐵 야금술冶金術의 일반적인 이용]이었다.   단련鍛鍊된 철鐵을 통해 무기武器와 도구道具들을 한층 정교한 형태와 강한 재질材質로 개량한 결과 생산력과 전력戰力은 괄목할 만큼 향상되었다. 


  이러한 야금술冶金術을 선진적先進的으로 장악했다는 사실은 [북방 유목제국]이 서북방인 신강新疆을 뛰어넘었으며 동북으로는 <흑룡강黑龍江-트랜스바이칼리아>에 이르는 넓은 문화적*정치적인 지평地平을 열고 있었다는 걸 증명해준다.



동북의 <흑룡강黑龍江 산림지대山林地帶>가 철鐵 야금술冶金術이 발달하기 좋은 최적最適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신강新疆 지역>은 오늘날 중국中國 영토에 편입編入된 모든 지역을 통틀어 최초로 철鐵 야금술冶金術의 흔적이 나타난 곳이다(방사성탄소연대放射性炭素年代 측정법測定法에 의해 BC 10C-BC 7C로 추정 - Mark Hall은 Toward on Absolute Chronology of the Iron Age of Inner Asia(1997)  863P-874P에서 BC 9C-BC 8C로 추정했다).


   <찰오호구察吾乎溝 묘지墓地>는 전형적인 북방식 문화 형식과 유물遺物을 갖추고 있는데(돌무덤 형식*둥글게 둘러싼 돌무지*청동靑銅 말 재갈과 양羊 머리 모양의 재갈멈치 그리고 환두도環頭刀 등) 여기에서 철鐵로 만든 송곳과 고리 같은 북방계 유물遺物이 나왔다(중국사회과학원고고소신강대中國社會科學院考古所新疆隊 신강파음곽릉몽고자치주문관소新疆巴音郭楞蒙古自治州文管所 신강화정현찰오호구구일호묘지新疆和靜縣察吾乎溝口一號墓地  고고학보考古學報  1981-8  75P-99P).


   아울러 기마騎馬의 흔적이 완연하고 대규모 동물 매장 구덩이가 있으며 정주문명定住文明의 유력한 지표指標인 농기구農器具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이 유적遺蹟이 <파미르Pamir 고원高原-우루무치Wulumuchi-윤태현輪台縣 군파극群巴克> 공동체共同體와도 연결되는 [북방 유라시아 유목문화]와 관련이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한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고고학보考古學報  1981-2  199P-216P).



이 시기는 필자筆者가 말했듯이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중심지가 [트랜스바이칼리아-몽골지역 동부]에서 <하가점夏家店 문화지대文化地帶>를 핵심으로 삼아 이동하였을 때였다.   이 지역은 육로陸路나 바다를 통해 중국中國의 동부지방을 한눈에 제어制御할 수 있었고 서쪽으로 마음만 먹으면 몽골과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을 잘 갖추었으며 철광鐵鑛이 풍부한 흑룡강黑龍江 지대와는 동북평원東北平原과 송화강松花江*눈강嫩江*요하遼河의 거대한 수로水路를 통해 <트랜스바이칼리아>까지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 후일 러시아 학자學者들이 흔히 [훈Hunno-사마프티아Sarmatian 기期]라고 표현하는 시대(BC 2C-AD 2C)에도 [흑룡강黑龍江-트랜스 바이칼리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D. I. Brodianskii*P. B. Konovalov).



내몽골 곽현요자?縣窯子 유적(遺蹟-북지北地 유적)과 북경北京 군도산軍都山 유적遺蹟의 유목문화적遊牧文化的 유사성 [1] 은 <북방 세력>의 진입進入 사실과 진출進出 경로를 알려주는 귀중한 표본이다(고고학보考古學報  1989-1  57P-81P*고고考古  1966-5  231P-242P).   바로 이들 [북방초원北方草原 유목제국遊牧帝國]의 전위前衛 세력들이 한족漢族의 사서史書에 [융戎*적狄]으로 산란散亂되어 기록된다.



[1] 말*사슴*양羊 등 동물희생動物犧牲 관습慣習과 기하학적幾何學的 무늬*동물 양식 문양文樣 그리고 오르도스 식式 허리띠 장식 등이다.   북방계 마구馬具는 같은 시기 무덤인 도홍파랍桃紅巴拉과 모경구毛慶溝에서 발굴되어 <북방문화>인 [목축牧畜과 수렵문화狩獵文化]에서 수용受容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내몽골 포두包頭 또한 [제국帝國]의 중심영역으로서 영하성寧夏省의 고원현固原縣 유적遺蹟과 같은 형식(은제銀製와 청동제靑銅製 팬던트)을 공유共有하여 <영하성寧夏省-감숙성甘肅省>으로 이어지는 문화적 연결고리 [1]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더 넓게는 <북방제국>의 전형적인 세 날개촉(삼익족三翼鏃)의 분포 [1]를 통해 [내몽골-요령성遼寧省-하북성河北省]에 이르는 절대적인 영향권역을 추정해 낼 수 있는 지울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


[1] 모경구毛慶溝의 특이한 동물 문양文樣 장식을 갖춘 청동靑銅 조임 쇠 등等에 대한 상호공유양태相互共有樣態를 잘 보여준다.


[2] 하북성河北省 회래현懷來縣 북신보北辛堡와 요령성遼寧省 심양瀋陽 정가와자鄭家窪子 유적遺蹟(고고考古 1966-5  231p-242p*고고학보考古學報  1975-1  141p-1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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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漢人들의 고고학考古學 연구 태도에서 이처럼 [북방세력]의 문화적 진출을 주周의 제후국들과 인접한 주민住民들의 보다 선진적先進的 문명으로의 동화同化나 변방邊方 집단들의 야만상태에서 세련된 문화지대에로의 편입編入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꽤 일반적이다(허성許成*이진증李進增  동주시기적융적청동문화東周時期的戎狄靑銅文化  고고학보考古學報  1993-1  1P-11P).    


전형적이라고 할 <춘추필법적春秋筆法的인 기록>에 의존하는 고고학考古學 연구자세는 중국학계中國學界의 일관적一貫的인 입장이며 특징임을 기술한 서양 학자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Lothar von Falkenhausen  On the Historiographical Orientation of Chinese Archeology  1993  839p-849p).


그동안에 발굴된 고고학적考古學的 증거들은 모두 북중국北中國의 생활양식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반정주半定住 농업-목축牧畜과 농경農耕 혼합-유목목축사회遊牧牧畜社會]로 전환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북중국北中國으로의 [북방제국北方帝國] 세력의 유입流入을 전제前提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아마도 한족漢族의 능동적能動的인 진출進出이 있었다면 농경문화農耕文化로 정착定着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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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비로소 [진정한 유목제국遊牧帝國의 북중국지역 거점據點]들이 완성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가장 모범적인 지역이 <춘추春秋 말末-전국戰國 초기 즉 BC 7C 경>으로 추정되는 바로 북경北京 부근 연경현延慶縣의 [군도산軍都山] 유적遺蹟이다.   중국中國 고고학계考古學界에서 구태여 <유목세력>이 아님을 애써 강조하면서 산융山戎으로 규정하고 있는 곳이다(문물자료총간文物資料總刊  1983-7  67p-74p*문물文物  1989-8  17p-35p와 43p).



1) 하지만 출토出土 유물遺物이 뚜렷한 [기마유목사회騎馬遊牧社會 3 요소要素]를 갖추고 있으며(마구馬具*다량多量의 무기武器*동물양식 문양文樣) 풍부하게 발굴되는 곧은 날 단도短刀*꺾창*도끼 등은 이 지역을 극히 호전적好戰的인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지배하였음을 분명히 해준다.


2) 또한 함께 발굴된 금속판*띠고리*죔쇠*종鍾 들은 내몽골 곽현요자?縣窯子 유적遺蹟과 동일하여 앞서 말한 대로 [내몽골 ? 북경北京 부근]이라는 정기적인 진입進入 루트를 명확히 해주고 있다.


3) 마지막으로 청동단추로 장식된 복면覆面을 죽은 사람 얼굴에 씌우는 관습慣習은 전형적인 <북방계의 풍속>으로서 이 지역의 다른 유적遺蹟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이러한 분석에 의거하여 내려지는 결론은 단 하나이다.   즉 북방에서 기원한 [유목군사귀족계급遊牧軍事貴族階級]이 진출進出하여 이 지역의 정주사회定住社會를 지배하면서 이윽고 [유목목축遊牧牧畜 중심의 농경정주農耕定住]라는 <혼합사회구성체混合社會構成體>가 형성된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대목이 있다.   <BC 6C-BC 5C>에 등장하여 속칭俗稱 [흉노문화匈奴文化]의 원조元祖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도홍파랍桃紅巴拉 청동기靑銅器 및 철기鐵器 유적遺蹟 [1] 에서 나온 유물遺物들의 양식樣式이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上層文化]와 매우 친밀성親密性을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시사점示唆點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족漢族 기록에서 조차 왜곡歪曲되어 나오는 흉노匈奴가 처음 복속服屬하고 있던 동호東胡라는 존재야말로 역시 [단군조선 제국帝國]의 또 다른 이름이었음을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입증해준다는 확실한 웅변雄辯이다.


도홍파랍桃紅巴拉 유적遺蹟에서 <귀가 하나 달린 갈색 항아리>가 전국시대戰國時代 흉노匈奴 유적遺蹟인 서구반西溝畔과 아로시등阿魯柴登의 더 정교한 회색 토기土器의 선구先驅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전광금田廣金  근년래내몽고지구적흉노고고近年來內蒙古地區的匈奴考古  고고학보考古學報  1983-1  7P-24P).


[1] 이 <무덤 군群>에서 1973년 7기基가 발굴되어 1976년 보고서報告書에 내몽골 범가요자范家窯子 유적遺蹟과 동일한 흉노匈奴 유적遺蹟과의 유형적類型的 유사성類似性이나 철제鐵製 유물遺物이 출토出土되었다는 사실에 입각立脚하여 [흉노匈奴 유적遺蹟]으로 단언斷言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이 유적遺蹟과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上層文化 유물遺物]과의 동일성同一性이 전반적으로 부각浮刻되자 1986년의 재판再版에서는 갑자기 북중국北中國의 지방 세력인 백적白狄의 유적遺蹟으로 은근슬쩍 다시 분류分類하는 태도를 보인다(전광금田廣金  도홍파랍적흉노묘桃紅巴拉的匈奴墓  고고학보考古學報  1976-1  131P-142P).



그러나 도홍파랍桃紅巴拉 발굴 청동판靑銅板과 금金 귀걸이는 남산근南山根과*이른바 안테나식(촉각식觸角式) 청동단검靑銅短劍은 범가요자范家窯子 등 하가점夏家店 영역에서 널리 분포하고 동일 문화권인 하북성河北省 북신보北辛堡에서도 출토出土된다.   또한 고리 모양 장신구裝身具도 범가요자范家窯子와 같다.  모두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권上層文化圈]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뚜렷하다.


또 다른 중요한 [유목문명遊牧文明 유적지遺蹟址]로서 한족漢族 사가史家들이 [흉노匈奴의 요람]이라 인정하였으며 사실상 제국帝國의 중앙부 쪽 변경邊境을 떠맡아 북중국 진입進入의 배후지背後地로 작용한 <모경구毛慶溝 유적遺蹟>은 매우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양상樣相을 보여준다.  

춘추春秋 말기末期의 문화적 양태樣態는 엄격하게 기마문명騎馬文明의 요소要素를 갖추었으며 분명하게 내몽골 곽현요자?縣窯子 유적遺蹟과 일치한다(전광금田廣金*郭素新 編著  악이다사청동기鄂爾多斯靑銅器  227P-315P).   그러나 한인漢人 사가史家들은 이들을 다시금 [적狄]으로 새롭게 규정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면 철鐵의 사용이 두드러지는데 어느 모로 보나 같은 기마집단騎馬集團인 이들을 이번에는 아예 이전以前과는 전혀 다르게 <누번樓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이 [기마전사騎馬戰士 엘리트 계층階層]은 주변의 소규모 농경정주세력農耕定住勢力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음이 주거유적住居遺蹟들의 형태로서 충분히 짐작해낼 수 있다(Claudia Chang & Perry Tourtellotte*Nicola Di Cosmo). 


세 번째로 주목되는 유적遺蹟은 제국帝國의 서남변西南邊을 맡아 북중국北中國으로 진입進入하는 세력의 버팀목으로 기능하였던 <BC 5C-BC 4C 경>의 흔히 [흉노匈奴 전기문화前期文化]로 분류되기도 하는 [호로사태呼魯斯太 오르도스Ordos 문화]이다(탑랍塔拉*양점명梁点明  호로사태흉노묘呼魯斯太匈奴墓  문물文物  1980-7  11p-12p).


이 문화가 [하가점夏家店 문명영역文明領域]인 범가요자范家窯子나 수윤구문水潤溝門의 영향을 짙게 품고 있으며(전광금田廣金*郭素新 編著  악이다사청동기鄂爾多斯靑銅器  220P-221P) 발굴된 마구馬具나 다른 고풍古風스러운 유물상遺物相도 도홍파랍桃紅巴拉와 모경구毛慶溝의 유형類型과 거의 같다는 사실이 위 단락段落의 추정을 재확인해준다.   아울러 <오르도스 지역>의 옥륭태玉隆太와 속기구速機溝 등 지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 유물遺物까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이 문화의 분포는 <영하성寧夏省 고원현固原縣 지역-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주변>을 배후背後 중심지로 삼아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남변南邊은 위수渭水에 이른다(종간鍾侃  영하성고안현출토문물寧夏省固原縣出土文物  문물文物  1978-12  86P-90P*종간鍾侃 등  영하남부춘추전국시기적청동문화寧夏南部春秋戰國時期的靑銅文化  중국고고학회제4차연회논문집中國考古學會第4次年會論文集  문물文物  1985  203P-213P*유덕정劉德楨 & 許俊臣  甘肅慶陽春秋戰國墓葬的淸理  고고考古 1988-5  413P-424P)



1) 이 지역 분묘墳墓에서 나온 부장품副葬品이 하북河北이나 오르도스Ordos의 것과 친밀親密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외면外面할 수 없다.   북중국北中國 진입進入의 주요 거점據點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무기武器와 마구馬具가 다량多量으로 발견되고 [단군조선 제국]의 표지지표標識指標라고 할 수 있는 <돌방무덤>이 주류主流를 이룬다는 점도 마찬가지이다(고원固原 지역 발굴 분묘墳墓 가운데 하나만 움 무덤이고 나머지 27개는 모두 돌방무덤이다.  고고학보考古學報  1993-1  13P-56P).  


2) 이런 [무덤 형식]은 강력하고 팽창적인 [북방유목제국北方遊牧帝國]의 군사적인 확장 움직임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널리 확산되었는데 그 사례事例로서 영하성寧夏省  도돈자倒墩子와 북중국北中國 합마돈蛤?墩 유적遺蹟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인류학적人類學的인 증거로도 입증되는데 이 무렵(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末期)을 전후前後해서 전형적인 동북아시아 기마전사騎馬戰士 집단의 북중국北中國 출현(팽보촌彭堡村 근처의 우가장于家莊 유적遺蹟)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한강신韓康信  영하팽보우가장묘지인골종계특점지연구寧夏彭堡于家莊墓地人骨種季特點之硏究  고고학보考古學報  1995-1  107p-125p).  


   이는 다른 여러 세력집단들을 더 큰 정치적 결합체(結合體-제국帝國이라고 보아도 좋다)로 통합시키는 정치적*군사적인 변화과정을 보여줌에 다름이 아니다.



※ 이 같은 엄연한 사실은 [만주滿洲와 요령성遼寧省과 몽골]을 핵심지역으로 삼은 [단군조선 제국]이 몽골에서 영하성寧夏省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 점이 그 시기에도 [오르도스Ordos-동북지역-극동極東 지방]을 관통貫通하는 <금속문화>의 연결고리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외면할 수 없는 증거이다.



3) 서주西周 초기인 양랑楊郞의 묘지墓地에서 고전적古典的인 안테나식 청동단검靑銅短劍이 발굴된다거나(동銅 생산의 중심지였다) 고원현固原縣 팽보촌彭堡村과 석라촌石喇村 유적遺蹟에서 <말>을 널리 활용했던 보다 선진적先進的이고 기술적인 진보進步가 뚜렷한 사회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장례葬禮 부장품(副葬品-재갈*마면馬面*말 가슴걸이*동물 양식樣式 장신구裝身具)이 발견된다는 점 [1]은 위와 같은 추정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해준다.


[1] 중국고고학연감中國考古學年監  1988(1989)  255P-256P*나풍羅豊  영하고원팽보춘추전국묘장寧夏固原彭堡春秋戰國墓葬  고고학집간考古學集刊  1983-3  130P-131P와 142P*나풍羅豊 & 한공락韓孔樂  영하고원근년발현적북방계청동기寧夏固原近年發現的北方系靑銅器  고고考古 1990-5  403P-418P



4) <중령현中寧縣 유적遺蹟>의 경우에도 [무덤의 형식]이 군도산軍都山과 모경구毛慶溝 유적遺蹟과 정확히 일치한다(고고考古 1987-9  773P-777P).   또한 매우 분명하게도 [유목국가遊牧國家 3 요소要素]를 갖춘 부장품副葬品의 모범을 보여준다(청동무기靑銅武器*동물 양식 장신구裝身具*마구馬具와 말의 매장埋葬).


5) 특히 이 당시 보다 선진적先進的인 <돌방무덤>과 고전적古典的인 <움 무덤>이 매우 가까운 곳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대한 정치적*사회적 통합체統合體인 [단군조선 제국]이 이미 스키타이Scytai 양식樣式을 보존한 [유목사회공동체遊牧社會共同體]를 융합融合시켰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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