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자 그리고 주님의 위로, 그리고 사명.
1. 요한복음의 부록이라 수 있는 21장은, 주님께서 갈릴리(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또 한 번의 의미 깊은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도마,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다른 두 제자, 도합 7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옛 직업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갈릴리로 가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막 14:28) 그들이 갈릴리로 갔을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은 전과 같이 그들과 늘 함께 계신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주님을 기다려야 했고, 그동안 고기를 잡았던 것 같습니다.
2. 그러나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한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날이 새어갈 무렵 그들에게로 오신 주님은 고기를 잡았냐고 물으시고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걸린 것을 본 순간, 그분이 주님임을 직감한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외치자, 행동이 앞서는 베드로는 얼른 겉옷을 두르고 물로 뛰어내렸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잡은 고기는 153마리였습니다. 이 사건은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15:5). 주님을 떠난 경험과 노력은 쓸모없습니다. 열매를 맺는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뿐입니다.
3. 숯불은 베드로를 다루시는 주님이 준비하신 소품처럼 보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생선과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처음 주님의 신성을 경험했던 바로 그 자리로(눅 5), 배신한 베드로의 낙심한 마음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숯불 앞에서 주님을 배신했던 상황을 재연하십니다. 어쩌면 식사를 할 때 베드로의 마음은 불편했을 것입니다.
4. 식사를 마치고 주님은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15).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를 들어내고 싶어 하는 베드로식의 질문입니다. 이미 뼈아픈 실수를 저지른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되,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방식을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 두 번을 더 물으시자 베드로는 근심하며 주님이 아신다는 대답만 할 뿐입니다. 세 번을 배신한 베드로에게 세 번의 사랑 고백을 요구하신 것은 베드로의 실패를 온전하게 용서하고 치유하시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5.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그의 죄책감과 실패로 인한 패배감을 치유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역자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세우시기 위해 그에게 먼저 처절한 실패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실패는 베드로의 살아있는 자아를 산산조각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자아의 깨짐이 없이 주님을 섬길 자는 없습니다. 실패는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는 전제조건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양을 돌보는 사역자의 조건은 주님의 용서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주님의 양을 돌보고 먹일 수 있습니다. 모든 세대에 주를 섬길 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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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마가복음 16장 7절에 천사가 여인들을 통해 전해준 약속을 듣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과연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1-3절)
(1-3)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 후에’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 나타나신 후를 의미합니다. 도마가 없을 때 나타나셨고, 도마가 의심할 때 두 번째 나타나주신 그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어부였던 베드로가 주님 없는 상황에서 갈릴리에 머물며 떠올린 것은 그동안 주님을 따르느라 잊고 있었던 ‘뱃일’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 ‘우리도 함께 가겠다’ 이야기 하며 그 뒤를 따라갑니다. 아무리 봐도 지금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타이밍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과거의 삶으로의 회귀합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하는 행동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어리석은 ‘회귀’를 통해 그들을 ‘회복’시키시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가 배를 탔으니 한 쪽 마음속에는 ‘풍어’를 꿈꾸며 설레기도 했을 것이고 또한 그동안 자기 실력이 녹슬지 않았을 것이라며 과시하는 마음으로 그물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로 끝맺습니다.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4-8절)
예수님께서 그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4-6)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어둑하여 사물을 분간하기 힘든 이른 새벽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두운 빛의 상태와 어떻게 해서든 오늘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는 제자들의 몰입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여기서 ‘얘들아’라는 단어는 ‘파이디아’라는 단어이며 ‘파이스’라는 ‘아이, 노예, 하인’의 지소사형태인 ‘파이디온’이 그 원형입니다. 이 단어는 보통 7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향해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아무리 젊다고 해도 ‘파이디온’이라 부를 나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셨겠습니까? 그 뒤에 아침 식사를 차려놓으시고 제자들을 회복시킬 마음으로 부르신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조롱하려거나 낮춰 부르실 의도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님들은 자녀를 보며 친근하게 애정을 담아 “얘야”하고 부르십니다. 나이를 40을 먹고 50을 먹어도 부모님 앞에서는 모두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향해 ‘파이디아’라고 부르신 것은 퇴근하는 부모님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얘들아”하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부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부르시고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잡혔습니다. 오늘 이 사건은 예수님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그 날도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잡은 것이 없었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이 순종하였을 때 많은 물고기를 잡았었습니다. 동일한 두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또한 예수님께서 주신 힘을 가지고 귀신도 물리치고 병자를 고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세상을 함께 통치하며 좌우편에 앉게 될 것이라 꿈꿔왔습니다. 내가 무엇이 된 것 마냥 서로 높아지려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꿈들이 부셔졌을 뿐 아니라 그 날 예수님 없이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3년 전과 같이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 없는 자신들의 현 주소를 올바르게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던 그 베드로의 모습과 예수님을 3번 부인하며 모른다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여전히 연약함 그대로의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밤새 물고기를 낚으며 실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밤새도록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장 자신 있다고 하는 전문분야에서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얻지 못하며 어깨에 들어간 힘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시간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아무리 그물을 내려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준비하고 몸부림 쳤지만 빈 그물만 거두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지막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리고 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없나이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소망의 말씀이 들려지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물고기를 넘치도록 잡게 된 제자들은 이제야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7-8)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과거에 자신들을 부르셨던 방식과 동일하게 기적과 같이 물고기를 잡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요한은 ‘주님이시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벗었던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려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 갑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마음이 급합니다. 예수님이신 것을 안 이상 물고기를 수습하고 천천히 예수님께 나올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던 모습,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막던 모습, 말고를 향해 칼을 빼어 귀를 자른 모습, 여전히 베드로는 베드로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물고기를 수습하여 작은 배를 타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육지로부터 거리가 ‘오십 칸쯤’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요즘 거리로 환산하여 약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아침식사(9-14절)
(9-14)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하며 허무함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하시며 그 허무함을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 없이 그물질 하는 우리의 인생도 결국 제자들처럼 허무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라곤 결국 사라질 우리의 욕망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투자를 성공해서 몇 배의 수익을 올리고 자녀를 잘 교육해서 남들 부러워하는 대학과 직장에 보내고 노후가 다 보장되어 있는 탄탄대로를 만들어 놓았다 할지라도 결국 영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빈 그물질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인생 헛된 시간들이 다시 의미 있는 153마리의 물고기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제자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아름답게 세워진 것처럼 이제 우리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를 소유한 자들로 의미 있는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밤새 인생의 그물질을 하였지만 허무함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허무한 빈 그물을 의미 있는 153마리의 물고기로 가득 채우시는 분이심을 기억 하십시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 전 제자들은 마음으론 허무함에 시달렸고 육체적으로는 허기짐에 시달렸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내리느라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육지로 올라온 제자들을 위해 준비해놓으신 것은 바로 숯불에 구운 생선과 떡 곧 유대인들의 주식인 빵이었습니다. 허기진 그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식탁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며 예수님께서 작정하고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을 느낍니다. ‘내가 기필코 너희를 다시 얻고야 말겠다, 나는 너희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주님의 사랑과 의지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려 봅니다. 이른 새벽 아직은 조금 어두운 호수 옆 숯불에 구운 물고기와 떡이 놓여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있기에 ‘누구시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다가왔습니다. 배고픈 제자들은 아마 얼른 그 음식을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가와 먼저 음식에 손을 댈만한 용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집나간 아들이 3일 만에 거지꼴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조용히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한 상 차려주시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와서 밥 먹어라’ 잔뜩 혼날 줄 알았던 아들은 밥을 먹는데 밥을 먹는 게 아닙니다. 밥 한 그릇 엄마의 사랑을 먹습니다. 국 한 그릇 엄마의 용서를 마십니다. 반 찬 하나 하나 엄마의 마음을 입으로 목으로 식도로 배로 가득 채웁니다. 어느 새 배고픔은 가시고 집 나가 허기졌던 마음, 두려웠던 마음이 따듯한 위로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이것이 그 날 갈릴리 호수에서 벌어졌던 아침식사의 비밀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빈 그물질하던 제자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결국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이 허무함에 시달리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부와 명예와 권력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결과가 빈 그물질이었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빈 그물만 가득 거두어 올린 채 허무함과 허기만 남은 제자들의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소망이 없다’, ‘이제 망하는 길만 남았다’, ‘코로나 이후 더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물론 부정할 수 없는 여론과 이야기들이 실제로 들려올 때 목회자로서 책임을 느낄 뿐 아니라 정말 한국교회가 이대로 주저앉게 되어 질까 두려움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제 회사에서 학교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기 어려워 베드로처럼 ‘나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자들이 더 늘어날 것만 같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번째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십시다. 예수님은 허무함과 허기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아 그 사랑과 회복의 양식을 맛보아야 합니다. 부끄럽고 염치없지만 그럼에도 다시금 그 사랑의 식탁에 나아가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그 생선과 떡을 먹으며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사랑을 공급받고 그 식탁에서 영적 교제를 회복하면 열매는 주님께서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회복의 때와 기회입니다. 한국교회는 가롯 유다처럼 주님 없는 번영을 추구하느냐 부끄럽고 연약하지만 그 식탁에 초대받아 먹고 마시며 회복되어 다시금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늦은 때는 없습니다. 다만 주신 때와 기회를 놓치는 우매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주님을 떠난 사람, 코로나 기간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진 채 세상의 성공만을 위해서 밤새 빈 그물질 하고 있는 사람 모두를 위해 주님은 오늘도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오늘 그 귀한 초대에 마음을 열고 나아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금 예수님을 내 인생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 삼는 은혜를 누리십시다. 그때에 우리의 작은 구멍 같은 인생을 통해 거대한 세속주의의 방축이 무너지게 될 것이며 회복된 한국교회를 통해 다시금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신 일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장소는 디베랴 호수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갈릴리 바다 또는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 남서쪽에 위치한 연안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주후 25년,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Tiberius, 14-37년경)의 이름을 따 건설하고 명명한 도시입니다. 디베랴는 문자 그대로 황제의 도시였으며 세속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욕망의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지배계층들은 디베랴에 붙어 있는 호수를 갈릴리 호수라고 부르지 않고 디베랴 호수라고 불렀습니다. 이 호수 역시 황제의 도시처럼 로마와 관계된 사람들에게는 황제의 호수이자 욕망의 호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 호수를 갈릴리 호수라고 기록하지 않고 욕망의 호수를 상징하는 디베랴 호수라고 불렀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를 제자들이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라는 말씀을 제자들이 간접적으로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 천사들로부터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28:7상, 참고 막16:7) 이 전달 사항을 제자들이 명심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깊이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 7명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어버리고 욕망의 호수에서 욕망의 그물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욕망의 그물질 결과는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부 출신이었지만 그들은 빈손으로 배를 몰고 육지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을 때에, 제자들은 평생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제자들이 욕망의 호수에서 욕망을 따라 그물질을 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에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3~4년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너희들의 사명은 욕망의 호수에서 물고기 잡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명자가 되어 욕망의 호수와 같은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져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임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여 허기가 진 제자들을 위해 조반을 준비해 두시고 그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입니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19절)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친히 지어주셨던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옛 이름,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명을 잃고 욕망의 호수에서 그물질하며 옛날로 돌아갔던 베드로에게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서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한 원어의 원형은 지시대명사 ‘후토스’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이 아닌 사물을 가리킬 때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요구하셨다기보다 지시대명사 ‘이것들에’ 해당하는 조반으로 먹었던 빵과 물고기, 그리고 욕망의 호수에서의 그물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황제의 도시와 황제의 호수에서 욕망의 그물질을 하면서 먹을 것, 입을 것, 육체를 위하는 유한한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며 옛사람으로 회귀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옛날 이름, 시몬이라고 부르시듯이 비록 우리가는 개명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옛사람을 의미하는 이름을 부르시며,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멀리서 주님을 보자 타고 있던 배에서 물로 뛰어들어 주님을 만나러 육지로 나갔지만, 얼마 전 예수님을 아느냐고 묻던 자들에게 저주하며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죄책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때 혼자 있지 않았고 다른 제자 한 사람과 같이 있었기에, 주님을 부인했던 일은 이미 제자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다시 사명감을 불어넣어 주시고자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를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답변을 통해 베드로의 트라우마, 심리적 불안감이나 죄책감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세 번의 반복적인 질문에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함으로써, 주님을 부인했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는 성숙한 사도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고난이나 위협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시고 그의 답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듣기만 하지 않으시고 세 번씩이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목자장되신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양을 먹이라는 것인데, 이는 복음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성화를 이루어갈 수 있도록 잘 목양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 말씀하셨던 ‘내 양을 먹이라’에서 ‘양’에 해당하는 원문은 똑같지 않습니다.
첫 번째 말씀하셨을 때에는 어린 양(ἀρνία, 유아기의 양들) 을 뜻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말씀하셨을 때에는 성숙한 양 ‘(πρόβατά, 성장한 양들)을 치라(Ποίμαινε, 지배하고 다스리라) 을 뜻합니다. 어떤 사본에는 두 번째 말씀하셨을 때에는 어린 양과 성숙한 양의 중간 단계 크기의 양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세번째때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πρόβατά)’을 먹이라(Βόσκε, 가축을 기르라!)(요 21:17b)”고 말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베드로에게 다시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양, 즉 다양한 양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때론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 대한 우월감을 갖지 말며 주님의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고, 때론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경쟁하지 말며 주님의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고, 때론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 대해 비굴하지 말며 주님의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하여 우월감, 경쟁심, 열등감을 다 버리고 주님의 사람을 사랑해야지만 주님의 사명을 이루며 교회를 교회답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단순히 사명감을 가지고 스스로 주님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베드로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앞으로는 주님께서 강제적으로 베드로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말씀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양팔을 주님을 향해 벌림으로 주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인생의 전부를 주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젊어서 원하는 곳으로 다니며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는 것이 복된 인생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순교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맞는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 길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20-23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베드로는 본인의 성격답게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했던 사도 요한의 미래가 궁금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성경의 여러 가지 근거로 사도 요한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왜 하셨는지 이 대목과 연결이 됩니다. 다른 제자를 경쟁자로 여기지 말고 너는 너에게 맡겨진 주님의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재림 때까지 살아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때까지 사도 요한이 살아있더라도 너와 상관없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 맡은 봉사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봉사에 지나치게 관심을 둘 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를 기억하십시다. 베드로는 베드로의 사명이 있고 요한은 요한의 사명이 있고, 우리 각자는 우리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에게 공통의 사명이지만 그 방법과 역할의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때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사명을 명심하였기에 사명자 행전이라고 불리는 사도행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면 사명자 행전의 한 장을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4-25절)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본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이 사람’, ‘그의 증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요한복음이 철저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객관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많이 있는데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는 표현은 과장법이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행적의 기록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으로 인해,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복음서가 전해짐으로 영원히 죽을 죄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았던 사람들의 증언들이 모두 기록된다면 세상이 수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의 은혜와 열매는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으로 인해 받은 일생의 은혜를 책으로 기록한다면 몇 권의 책이 나오겠습니까? 오늘 하루도 그 은혜를 기대하며 욕망의 도시에서 욕망의 그물질을 던져 버리고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은혜를 기대하며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을 무너뜨리며 주님의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리하여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때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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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실패를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실패하기 마련이고, 실패한 후에야 비로소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에서는 실패한 인생을 찾아오셔서 그 실패를 멋지게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변화산을 오르고, 주님과 함께 물 위도 걷고, 오병이어 기적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는 아무 것도 손에 쥔 것 없이 수도 예루살렘에서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그의 꿈,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 보겠다는 그의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그가 사랑했던 스승을 대제사장의 뜰에서 배신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짐승취급 받으면서 피눈물 흘리며 끌려가신 주님의 눈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겁한 사람, 허풍쟁이, 배신자의 대명사가 된 자신을 용납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긴 했지만,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채, 실패자처럼 과거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더 이상 군중들의 함성도 들리지 않고, 가슴도 뛰지 않는 평범한 자리,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되는 자리로 베드로는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베드로처럼 실패자가 되곤 합니다. 갈망했던 꿈이 처절하게 깨져버리고 자신의 무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해서 절망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주신 기회인데, 주님의 기쁨이 되기는커녕, 하나님나라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늘 무기력하게 패배만 하는 것 같아 수치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쥐구멍 같은 좁은 곳으로 숨어들어가고 싶을 때가 찾아오곤 합니다.
그러나 무력함과 무능함, 아무 대책 없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때가 우리의 관점에서는 끝이고 막다른 골목이요, 가장 낮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작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실패감이 온 영혼을 짓누르는 바로 그 때에 일하시곤 합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실패는 결코 실패 그 자체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낙향하여 물고기 잡으러 디베랴 호수에 배를 띄웠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처절하게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그 시간 그 장소, 그러나 그 주위에서는 여전히 그를 눈여겨보는 분이 계셨습니다. 4절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님은 낙심하여 낙향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왜 좀 더 일찍 찾아오시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일보 직전에 그 때 용기와 힘을 주시면 안됐을까요? 왜 하필 가장 낮은 자가 되었을 때 찾아오신 것일까요? 실은 오늘 21장은 매우 치밀하게 세팅된 예수님의 회복 프로그램입니다. 디베랴 호숫가는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간 베드로를 곧 시작될 성령과 교회의 시대에 큰 일꾼으로 사용하시기 위한 주님의 완벽한 상담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팅해 놓으신 이 호숫가는 베드로가 실패를 극복할 중요한 두 가지 과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21장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만난 첫사랑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다 허탕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처음 부르심을 받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전능의 하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기로 다짐했던 사건과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물고기 잡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21장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한 사건, 즉 첫사랑을 잃어버린 쓰라린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베드로가 바닷가에서 명하신 분이 주님인 줄 알고 배에서 뛰어 내려가 보니,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곳이 바로 숯불 앞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숯불은 일종의 트라우마인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의 가장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끌고 가셔서 그 수치를 직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거기서 치유와 회복을 일으켜 그에게 더 큰 사명을 맡겨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숯불 앞에서 배신자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시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고, 사명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배신자라는 낙인 때문에 평생 실패자로 살았을 수도 있는 베드로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첫 사랑을 다시 되찾고, 잊고 싶었던 그의 실패도 직면하여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은 역전의 명감독이기 때문입니다. 역전의 명수이신 주님은 오합지졸 같은 실패자들을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 만드시는 데 명장이십니다. 고물상에 쌓여 있는 폐품같은 인생들을 고쳐서 사람들을 낚는 어부로 삼으시는 걸 즐거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베드로를 변화시켰던 주님께서 오늘도 외눈박이 인생 같은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다시 첫사랑의 열정을 일으켜 실패를 역전시키실 것이고, 암울한 우리의 현실을 새로운 미래로 엮어가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베랴 호숫가에서 주님은 자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을 위해 조반을 준비해 놓고 그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함께 아침식사를 드시고 난 후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세 차례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6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절)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절)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6절)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절)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주님을 배반했던 실패한 경험이 있기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인 사랑을 물으시는 주님께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지라도 베드로의 마음은 여전히 주님을 향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7절 말씀이 증거합니다.
베드로의 답변을 들으신 주님께서 바로 바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
15절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서 어리다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되고 있는 소명이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은 양떼를 목초지로 인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고 양들의 모든 활동을 돌보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든 성장한 양이든 주님께서는 양떼를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낙망하고 절망한 경험이 있는 베드로에게 세 차례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에게 주님의 양 떼를 맡기셨습니다. 주님의 질문을 들으며, 또한 주님께 답변을 드리며 베드로는 점점 더 깊게 주님을 알아갔고, 더 친밀하게 주님을 경험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선명하고 또렷하게 알아차렸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기 문헌에는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양떼를 돌보는 목회적 직무를 수행하다 순교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길에서 주님을 만났는데 베드로는 주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 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고 물었고, 주님께서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을 듣고 다시 로마로 돌아가 사역을 지속하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 자신의 사명을 확인한 베드로는 곁에 있던 다른 제자를 보고 그가 어찌될지를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시며,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22절). 때로 우리는 자신보다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보기보다 타인의 삶을 더 주의깊게 들여다보다가 시간을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는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한 눈으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정시하면서, 또 한 눈으로는 이 세상을 작별하고 떠날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야하듯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바르게 인지하고 에스더처럼 교만하지 않고, 룻처럼 자탄하지 않고, 바울처럼 모함 받아도 가야할 길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라고 오늘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탁에 어떤 응답을 드리게 될지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