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거짓말쟁이와 파파야, 그리고 카멜레온.
어제 밤에는 세상 다 무너뜨릴 듯 비를 쏟아 붓더니, 날 밝고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고 당당하고 말짱합니다.
탁발 나가며 본,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새빨간 태국 법당은 지나치게 산뜻해 보였어요. 꼭 시치미 뚝 떼고, 모른 채로 일관하는 말괄량이 십대 소녀같았죠. 새들도 말짱하고, 개구리도 우렁찼고, 자랑스레 불알을 흔들고 다니는 동네 숫컷 개들도 힘이 넘치는 아침이었죠. 뭐 이상한 건 없는데, 이런저런 모습을 보며 뭔가에 나만 혼자 속은 기분이 들었어요.
'어제 밤 그 소나기는 벌써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빨리 지워져도 좋은 건가?'
그래도 평소처럼 앉아 눈 감았습니다. 지난 밤 그토록 거세게 내렸던 소나기는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머리속에서는 여전히 남아 내리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한참 소나기를 맞으며 앉아있었죠. 아, 황순원의 소나기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그 소나기라해도 나쁘지는 않겟네요. 저는 그 소나기를 무척 좋아하니까요.
이런 탓에 바보라는 딱지 이마에 한 장 턱 하니 붙이고 앉아 있는 것 같았어요. 명상할 때 가끔 이럴 때도 있죠. 맞아요. 오늘이 그런 날이었어요.
그러다 도저히 그런 기분으로는 눈 감고 있을 수 없어 눈 뜨고 빨간 태국 법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분이 울컥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붓다는 새빨간 거짓말쟁이!'
(여기부터는 반말입니다.^^)
이제 겨우 20일을 지냈을 뿐인데, 몇 일전부터 이곳이 태국이란 사실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오직 니까야의 이해와 명상에만 집중해서 지내온 탓에 현실감이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정신차려보니 이곳 태국사람들과의 의사 소통도 참 웃기게 되어 버렸다.
서로 영어를 못하니, 뭔가 할 말이 있으면 저쪽은 태국어로 말하고 나는 한국어로 말하는 웃지못할 상황도 어느 새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냥 그게 당연하지 않느냐 는 분위기가 만들어 졌다. 뭔가 필요에 의해서 서로의 언어로 말하다, 알아 들으면 웃으며 좋은거고, 안통하면 뭐 어쩔 수 없지 또 웃으며 관찮다는 뭐가뭔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자리잡혀 버렸다. 물론 이런 관계는 오래 갈 수 없다.
그래서 이번 인도 여행을 갖다오면 한태 사전을 구입해서 차근차근 이 곳에서 태국어를 배울 생각이다.
그런데 오늘 '아 참, 여기는 태국이지!' 하는 사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파파야.
점심 때, 두피떰 이라는 젊은 스님이 파파야를 내밀며 먹으라 했다. 그리고 대충 몸짓을 보니 공양간 바로 옆 나무에서 따 온 거라 한다. 물론 나는 그 나무에 대해 알 고 있었지만, 정말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한국에서처럼 집에서는 어설프게 영글어 먹기 힘들고, 꼭 재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태국이었다. 정말 사방이 열매나무 심어져 있고, 추위가 없는 탓에 열매들은 매일매일 무럭무럭 자라난다. 특별히 재배따위는 필요 없다. 그냥 놔두면 열매는 각자 알아서 제 몫을 확실히 책임진다. 사랑스럽지 않은가? 사방에서 그런 과일들이 꽁짜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얼마나 좋아지는지.
또 하나는 카멜레온.
아침 공양을 하고 방 안에서만 책 읽는 게 답답해 밖으로 나와 읽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눈에 걸려 보니, 카멜레온이었다.
흑! 뭐 냐 넌.... 어째서 카멜레온이 동물원에 있지 않고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거냐.
나는 신기하게 녀석을 보고, 녀석도 나를 신기하게 째려 보는 듯 보였다.
녀석은 잠시 멈짓하더니 잽싸게 나무위로 올라갔다.
도대체 어디 있다 온 건지, 머리는 파란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그어져 있고 몸부터 꼬리까지는 회색 바탕에 커다란 동그라미들로 얼룩져 있다.
한 참 녀석을 보며 도대체 어디있다 온건지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다 머리가 파란색이 된건지.....흰색 줄무늬는 뭘까? 왜 몸과 꼬리는 회색에 검은 반점일까? 어디에 멈춰 있었기에 저렇게 변하는 거지? 힌트, 힌트,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도대체 넌 어디있다 온거니?'
물론 나무에서 내려올 때엔 또 다른 색깔을 하고 있겠지. 녀석은 카멜레온이니까. 그게 녀석의 특징이니까.
(여기까지 반말 입니다.)
이것이 오늘 '맞다, 여기는 태국이지' 라고 느꼈던 두 가지이네요. 하하.
첫댓글 태국 우리신랑이 미치도록 좋아라하는
더운 그리고 더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