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하다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는 월남사지와 무위사로 들어선다.
바위로 이루어진 월출산 산등성이 병풍처럼 둘러처진 곳에 월남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사각형으로 돌려놓고 중앙에 높직한 하대석을 놓고 있는데, 그 위에 우주석(隅柱石)과 면석(面石)을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역시 우주석과 면석을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탑신부는 1층 탑신이 2, 3층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고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고,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塼塔:벽돌로 쌓은 탑)처럼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으며,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 있다. 탑의 상륜부(相輪部)에는 받침 위에 장식한 석재가
남아 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체감률이 낮다.
이 석탑은 전탑의 외모를 지녔다고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하였으나, 여러 개의 판석형 석재를 끼워넣어 결구(結構)한
수법으로 보아 전탑이라 볼 수 없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특징이다. 석재 결구에서 백제탑 양식을 많이 따른 석탑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월남사지를 지나 무위사를 가는 길은 차밭농장을 가로지르며 가야하는 길인데, 이길은 산책삼아 두어명의 친구와 걸어도
좋을듯하다. 간간이 차잎을 따서 입에물어가며.
<무위사>
무위사는 한창 공사 중으로, 너른 주차장엔 백구 두마리가 간혹 들르는 내방객들의 달콤하고 비린 음식을 구걸하고 있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先覺)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
라 하였다가, 1550년(명종 5) 태감(太甘)이 4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先
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 《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당우(堂宇)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당우는 극락전과 명부전 및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 ·해탈문(解脫門)
·분향각(焚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국보 제13호 극락전
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
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월남사지와 무위사를 둘러보고는 바로 강진군에서 관리하는 주작산자연휴양림으로 발길(차길)을 옮긴다.
<주작산자연휴양림>
휴양림 마당에 잔디가 심어져 있고, 고기도 구워먹을수 있는 준비도 되어있기는 하지만, 기행일이 11월 마지막 주말인 관계로
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곳은 자연휴양림에서 도보로 왕복1시간30여분 걸릴만한 곳으로, 답사때에만 누릴수 있는 특혜로 기행때 아침잠 없는 분들은
운동삼아, 산책삼아 다녀와도 좋을 곳으로, 주작산 전망대에 정자도 있으며, 산 정상에 서면 한쪽면은 바다와 촌락이 어우러진
풍경을, 그리고 또 한쪽면은 산으로 둘러쌓인 촌락의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주작산 휴양림을 나와 영랑생가와 강진의 맛(한정식)이 자리하고 있는 강진군청앞으로 일단 발길을 옮겨, 유홍준의 남도일번지
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치르는 한정식집은 일단 제외하고, 그 다음으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둥지식당'으로 들어섰으나,
점심으로 먹기에는 너무 비싼 1상당 \60,000(4인기준) 가장저렴한 가격으로, 1상당 \80,000 은 먹어야 제대로 먹는다는
소문이 있지만 일단 답사팀은 각자 각출해서 먹기로 하고 들어섰는데, 아주머니의 지청구를 먹으며 다시 나오고야 말았다.
하여 주위의 여러식당들을 둘러보았으나, 같은 가격대라서 눈물을 머금고 강진에서의 점심은 포기하기로 했다.
<영랑 현구 문학관/향토미술관>
영랑생가 입구에는 강진의 시인인 영랑과 김현구의 문학관과 그 지역 미술가들의 미술품들이 전시되어있는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고, 문학관을 지나면 영랑생가까지 담쟁이가 감싸고 있는 돌담이 이어져 있다.
<김영랑 생가>
생가 입구를 지나면 돌담을 모두 감싸고도 남을 만한 은행나무가 있으며, 그 은행나무 아래에는 싸리비가 음전하게
돌담을 기대어 있다.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길우에]
돌담에 소싹이는 햇밮가치
풀아래 우슴깃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오날하고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림가치
시의 가슴을 살프시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매랄드 얕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십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
떠러져누운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니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잇슬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
[마당앞 맑은 새암을]
마당앞
맑은새암을 드려다본다
저 깊은 땅밑에
사로잡힌 넉 잇서
언제나 머 ㄴ 하날만
내아다복 게심 가터
별이 총총한
맑은새암을 드려다본다
저 깁흔 땅속에
편히 누은 넉 잇서
이밤 그눈 반작이고
그의것몸 부르심 가터
마당앞
맑은 새암은 내령혼의 얼굴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들겄네
장광에 골불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리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거졍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보아라
오-매 단풍들것네
[사개 틀닌 고풍(高風)의 퇴마루에]
사개 틀닌 高風의 퇴마루에 업는듯이안져
아즉떠오를긔척도 업는달을 기둘린다
아모런 생각업시
아모런 뜻업시
이제 저 감나무그림자가
삿분 한치식 올마오고
이 마루우에 빛갈의 방석이
보시시 깔니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벗
간열푼 내 그림자와
말업시 몸짓없시 서로 맛대고 잇스려니
이밤 옴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을 지나는 길을 '다산마실돌기' 라는 리본을 따라 가면되는데, 백련사 입구에는 수백년된 동백나무
가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나무길이 끝나는 곳에 백련사가 있고, 백련사 못미쳐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산길이 나있다.
<다산초당>
산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며 20여분 가다보면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때 쯤이면 강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해월루와
백련사 주지와 다산이 만나 담소를 나누었다는 천일각이 있다. 천일각을 지나면 바로 다산초당을 만날수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유물전시관까지는 1시간이 소요되며, 이길은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 유배길'의 한 축으로 '다산 마실 돌기'
길이다.
답사팀은 다음날 장흥의 '천관산'의 억새밭을 가기위해 장흥 안양면 어느 해수욕장 앞에 숙소를 정하고 까만 바닷가에 앉아
정담(?)을 나누며 밤을 보냈다.
천관산의 억새밭은 전날밤의 정담(?)이 너무 진(?)했기에 포기하고 천관산문학공원의 비에 젖은 詩碑들과 돌탑만 둘러보고
다시 점심예약을 위해 강진으로 들어오는 중에 청자전시관을 잠깐 둘러보고는 다시 식당 찾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그만 포기하고, 광주로 오는 길에 만난 나주 어디쯤의 백반집에서의 푸짐한 밥상에 눈이멀어 기행일정에 변경을 예고하며
답사를 마쳤다.
이번 답사에 9인승 차량을 제공하고 이틀내내 운전을 해주신 전서영씨의 부군인 이근수씨의 노고로 인해, 다같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여행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