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인 시모음]
가구(家具)의 힘
- 1991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 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갈대꽃
겨울 갈대밭에
휘이익 휘이익 벗은 발을 찍는
저 눈부신 비애의 발금
살을 다 씻어낼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공포, 겨울 갈대밭에
바람의 찬손이 허리를 감아쥐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내려온 물방울이
소금불에 휘고 있다
거미
그루터기는 죽은 자가 쉬는 곳,
아침 이슬에 젖은 거미가
숲을 뚫고 오는 늦가을 빛을 본다,
거미는 어둠 속에서 줄에 매달려 사는 삶을 잘도 참아왔다
그래, 처마 끝같이 사위어 가는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
젖은 태양을 바라보며 죽자.
늙은 거미는 추위가 오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줄을 흔든다.
가물거리는 햇빛에 타죽기 위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를 미친 듯이 건너뛰는
수천의 거미떼들이 떨어진다.
늙은 거미는 줄에 걸린 이슬 속에서
황홀을 본다, 숲을 뚫고 새어들어 오는
가느다란 가을빛.
일순 머리를 치켜들고 거미는
설움으로 까맣게 타서 죽는다.
아침에 한줌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죽은 자가 그루터기에서 쉰다.
공간 이동
보도블록을 밀고 나오는 뿌리,
뿌리는 하늘로 솟구친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로 흘러가는 세상은 지치지 않는다.
모래시계의 허리가 가늘어진다
그린 듯이 앉아있는 풍경
비가 오면 민둥산인 마음은 밑뿌리로 하얗게 울었다
비가 오면 새파란 양철지붕의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녹이 한번 더 슬고,
여름 내내 붉은 반점이 집의 살갗을 뒤덮었다
우리 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창에 녹 같은 붉은 꽃들이 섞여 흘러갔고,
밤이 되어 송진이 녹아 흐르는 여름의 가장자리에
쇠파리떼들이 고요히 끓었다
하늘에 붉은 달이
양철지붕 칠이 벗겨진 자리에 돋아난 반점 같은 꽃들을 핥아주었다
달의 긴 혀로 인해 나의 몸은 언제나 신열이 났다
먼지 자욱히 날리며 집을 나간 개는
침을 하얗게 흘리며 돌아오고
가난한 집일수록 커다란 솥 만한
잎을 흔들며 벌레 많은 해당화 그늘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지
언덕 위에 언덕이 생기고 구름을 이루며 산들이 달아나고
피가 도는 발바닥 같은 꽃들이 해당화 위를 지나가자
그 잎 몇 개에는 흔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린 듯이 앉아
흔적을 흔적으로 지우려고 열매를 무수히 매단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병든 어머니의 희게 빛나는 피부 밑에 천길 낭떠러지 검은 물이 흘러간다
기도
상어처럼 이빨을 키우고 배고픈 개처럼 침을 흘리며 서성거리는 오, 무수
한 절망의 세숫대들 아래, 비누여 닳아빠지며 행복해지는 세상은 없느냐.
무허가 판잣집의 대문에 문패를 붙인다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 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 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을 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 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 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 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 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밤에 시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리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용암(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 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나무 줄기속에 아이를 묻기
하늘로 돌아가려면, 극지에서 길 잃은 사람들이 철대못이 라고 부르는 별
을 찾아야 한다. 그 별은 흐릿한 날씨에도 조난자들이 붙들고 있는 희망이
라고 한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는, 새가 잘 찾아오도록 죽은 아이를 마
을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 줄기 속에 묻는다고 한다. 어린 영혼은 혼자 갈 수
없기 때문에 새를 타고 가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어머니들이 딱
따구리처럼 나무에 매달려 줄기를 파고 그 안에 아이를 매장하면 밤에 새가
날아와 아이를 등에 태워 데려간다고 한다. 공기 중에 몸을 비스듬히 숙이
고 떨리는 바람에 짧게 전율하면서 죽은 아이가 철대못에 이르면 밤새 서리
가 내려 황토를 부풀린다고 한다. 그러면 그 나무가 첫새벽의 햇살에 수많
은 물방울을 맺는데 무지개가 가득 돌고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새와 가
장 비슷한 식물이 나무라고 한다. 조난자들이 저마다의 커다란 나무에 도착
해 몸을 줄기 속에 집어 넣는다면, 그것이 어디에선가 길을 잃고 헤매는 그
들의 뒤를 밟아올 또 다른 이들을 위해 빛나는 지상의 철대못이 되어야 하
리.
나비
남묘호랑갱이요 남묘호랑갱이요
일만번을 외우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죽은 나무 위에 새집이 걸려 있는
민둥산, 지난 여름의 끝자락에서
매미는 허물을 벗고 날아갔다
껍데기만 마른 나무 줄기에 달라붙어
빈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얘야, 나는 나비가 되고 싶단다
노망든 할머니가 정신이 돌아와
개다리소반 위에 국어책을 올려놓고
시를 외는 내게 말했다
할머니, 벽에 칠해논 변자국 속에서
어떻게 나비가 태어나요
할머니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려요
남묘호랑갱이요 남묘호랑갱이요
민둥산에 앉아, 아이들과 새집을 털던
죽은 나무 아래 앉아,
나는 잡은 매미 껍질을 헤아려 보았다
일만번을 세면 소원이 이뤄질까,
점점 얇아지는 가을빛 속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채
허물을 벗고 있는 아이
멀리 호곡 속에서
명주실 같은 나비떼가
손짓을 하며
날아온다
노역에 처해진 날개
누구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남몰래 우표를 모으거나
판화를 수집하는 것처럼
내가 갖고 있는 날개는
은밀한 세계에 바쳐졌다,
어느날 스크랩해둔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깨우치고
어른이 된 아이들은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떼어버렸지만,
장님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을
회피하는 것은 아직도 그 뒤에서
벌어지는 날개의 은밀한 축제를
그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검은 도랑물이 흘러가는
공장지대의 아파트에 혼자 산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그들이 나의 날개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금기한 세계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달빛이 채색하는 보름밤이면
나의 날개는 커다란 그림자를
창문에 나타내곤 한다
그런 밤이면 나 역시 떠나고 싶다
이 세상 밖 불꽃을 물고 하늘의 검은
심연 속으로 곧장 날아가는 로켓처럼
나는 창문을 닫고 산다
초인종은 내게 날개를 감추라는 신호이다
공장의 기계 소리가 식은 금속이 번쩍이는
검은 도랑물을 건너, 쇳덩이를 끌 듯
무거운 머리를 침대에 눕힌다
나는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만 잔다
그동안 비가 죽죽 내린다
아스팔트에 짓뭉개진 새 한 마리,
빗물에 둥둥 떠 흘러간다
날개만 남은 납작해진 죽은 새는
지상의 노역으로부터 끝내 자유롭지 못한
내 영혼의 상징이다
달팽이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스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사라져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독신자
입 속에 사는 개구리 한 마리를 알고 있다
그는 내가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있는 밤에만
반쯤 몸체를 입 밖에 내민다
그러고는 앞다리를 턱에 올려놓고 밖을 살핀다
나는 얕은 잠을 잔다
바닥까지 내려간 잠을 자는 동안
벌려진 입 밖으로 개구리가 튀어나와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기에,
그렇지 않은가
방에는 골목으로 나 있는 창이 있고
마구(馬具)를 잃어버린 말이 서성거리다
창문 안으로 불쑥 목을 집어넣고
이쪽을 살피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독신자의 잠은 대개 그렇다
악몽조차도 달콤한 슬픔과 함께 온다
어느 꿈속에 나는
입 밖으로 개구리가 반쯤 튀어나온
한 사내를 내려다본 적 있다
그 사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구리가 밖을 살피다 내 눈과 딱 마주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독신자의 몸 속에 웅크리고
조그맣게 울음 우는 비애의 몸체를 발견한 듯
소스라쳐 깨어났기 때문이다
동면
사슴벌레 한 마리 눈밭을 기어간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멀리서 무지개로 부서져 내린다
햇빛 너무 환해
눈밭을 헤치고 나온
사슴벌레 한 마리
두 뿔로
공중에 뻗은 나뭇가지 끝
무지개 치받는다
허연 하상(河床) 같은
낮달이 흘러가고
까맣게 빛나는 두 뿔에
봄은 오지 않아도
봄은 온다
묘비명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질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무덤은 이 고장의 오래 된 관습이다
얼마나 먹고 싶은 말인가
폐허는,
얼마나 비약하기 쉬운가
흉곽에 몹시 풀과 꽃이 우거진
亡國의 사랑은,
죽음은 이 고장의 오래 된
관습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무덤을 판다
그 고장에서 사는 것은
단순히 묘비를 하나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기 묘비
하나가 나타난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폐허는,
오래 전에 꺼진 등불이다
무덤 파는 남자의 사랑
亡國을 향해 걷는 해와 달이
후광으로 남아 있다.
바닥에 어머니가 주무신다
침대에 앉아, 아들이 물끄러미
바닥에 누워 자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듬성듬성 머리칼이 빠진 숱 없는 여인의 머리맡.
떨기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하느님이
서툴게 밑줄 그어져 있다. 모나미 볼펜이
펼쳐진 성경책에 놓여 있다.
침대 위엔 화투패가 널려 있고
방금 운을 뗀 아들은 패를 손에 쥔다.
비오는 달밤에 님을 만난다.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을 찾아
아들은 밤마다 눈을 뜨고,
잠결에 앓는 소리를 하며
어머니가 무릎을 만지고,
무더운 한여름밤
반쯤 열어논 창문에 새앙쥐 꼬리만한 초생달
들어온다, 삶이란
조금씩 무릎이 아파지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무릎을
뻑뻑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저 여인은 무릎이 비어 있다.
한달에 한번 시골에서 올라와
밀린 빨래와 밥을 해주고
시골 밭 뒤 공동묘지 앞에 서 있는 아그배나무처럼
울고 있는 여인.
어머니가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가슴을 찢어라 그래야 네 삶이 보인다,고
올라올 때마다 일제시대 언문체로 편지를 써놓고 가는
가난한 여인, 새벽 세시에 아들은
혼자 화투패를 쥐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이미 꺼진 지 오래,
불길에 하나도 상하지 않던
열매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졌지만
일찍 바닥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침대 위의 화투를 치우고
모로 누운 서른셋 아들의 머리를 바로 뉘어주고
한시간 일찍 서울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린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그 시각
밭 갈 줄 모르는 아들의 머리맡에
놓인 언문 편지 한 장.
"어머니가 너잠자는데 깨수업서 그양 간다 밥잘먹어라 건강이 솟애내고 힘
이 잇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어머니는 팔순을 내다보면서부터
손바닥으로 방을 닦는다
책상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둠침침한 침대 밑에 한쪽 손을 쭉 뻗어 넣고
엎드린 채로 머리칼을 쓸어 내오신다.
어머니의 머리칼은 하얗고
내 머리칼은 짧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것도 있다.
빗자루로 아무리 쓸어내도 방바닥에는
어머니와 내 것이 아닌
흔적이 떨어져 있다.
어머니는 먼지가 가득 묻은 머리칼 한웅큼을 뭉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지문이 다 닳아져
우리 둘 외의 다른 머리칼로 변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달에 한번 다녀가실 때마다
못난 자식을 두고 가는 슬픔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보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보게 된다.
방주
그것은 다라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자랄수록 다라는 하늘로 떠올랐다.
인생이란 때로 붉은 다라에서 바라본
물빛 세로줄무늬가 연속된 비닐 천막의
천장인지 모른다, 포장마차 속
아이는 다라에 눕혀져 키워졌다.
흰실로 몸을 친친 감은 누에고치처럼.
뜨내기 손님들이 남긴 생의 얼룩이
카바이트 불빛 아래 고여가는 雨期의 밤, 포장을 때리는 쉼없는 빗소리에
아이는 한 겹씩 고치를 벗고 있다.
나비로 탈바꿈할 때까지, 비가 내린다.
우동을 파는 어미의 고단한 잠에 떠밀려
새벽을 견디는 시장의 포장마차 속
아무도 눈여겨본 적 없는 한 척의 배가, 조심스레 아이를 품고 물거품 이는
해변의 풍요로운 기슭으로 간다.
세로줄무늬의 천장 위로
비가, 그치고 있다.
파리떼가 푸른 등을 반짝이며
점점이 박혀 있다.
봄 밤
달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
누가 사다리 좀 다오
홀로 빈방에 앉아
앞집 지붕을 바라보자니
바다 같기도 하고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결 같기도 하고
달이 내려와
지붕에 어른거리는 목련,
꽃 핀 자국마다 얼룩진다
이마에 아프게 떨어지는 못자국들
누구의 원망일까
조용히
나무에 올라 발자국을 낳고 싶다
봄의 幻
1
이름 떨어진 선술집 유리창에 흐르는 불빛 하나가
반짝거리고 있다, 그 불빛 따라 가면
인적 끊긴 유곽에 측백나무 한 그루가
눅눅한 물관을 통해 다른 불빛을 길어올리고
무우꽃이 허기처럼 흩날리는 바람의 집이
그 끝에 흔들렸고 가난한 뜰에 꽃나무로 서 있는
누이의 오래된 그림자 속으로
무우청 같은 靑年들이 도망가는 첫차가 불을 켜고 지나갔다
서울에는 무슨 꽃이 폈을까 졌을까
채무처럼 경적이 울려나오는 것처럼
그렇구나, 故鄕이 저 유곽의 낡은 측백나무가
길어올리는 불빛들로
유리창에 흐르며 부르는구나
꺼져라 불빛, 삶은 늘 그랬다
나무 한 짐 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
어둠이 고여 있는 생소나무 가지를 꺾으면
뚝뚝 소리내며 저녁이 떼거리로 몰려오고 그래……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져서
구년의 도시 생활은 드문드문 빛났다
2
잠깐 말소리 끊어졌다가
차소리 이어지고
나의 큇바퀴 안으로 물 오르는 만큼
잎 피는 소리가 들어왔다
손님 없는 버스의 환한 내부처럼
취기가 퍼진다
사람들은 이 세상 낮은 곳에서
낮은 만큼 꿈의 水位도 금방 높아진다고 하며
높은 분들을 씹다가, 화장실로 하나 둘 사라지고
유곽의 나무, 쉼없이
유리창에 흐르는 불빛들
창 밖에 봄풀씨 날아가다가
문 열릴 때마다 하나 둘 들어와 앉고
짐짝처럼 풀어진 달이
인적 끊긴 유곽의 나무 꼭대기에 터벅터벅
창유리로 걸어온다
3
비 내린 비포장도로를 대형 트럭이 지나가고
타이어 헛돈 자리마다 기름이 고여 있다
구석으로만 몰리는 덜 치운 낙엽더미로 뒹구는
꿈, 시골 출신의
이십대의 젊음 속으로 느릿느릿
불켠 트럭이 지나가고 불빛이 쏟아지고 아,무지개가 진창
속에 걸려 있고
나는 그 기름 덩어리가
자꾸만, 나더러 내려 오라고 손짓하는지
아니, 내가 내려가고 싶어하는지
그 얕은 물 속에 잎을 피우는
무지개의 다리, 진창 속에 엉킨
기름자국에 걸려 있는 故鄕,어둠 속에 희미해져가는 바퀴
자국처럼
변소에 대한 약사(略史)
옹기는 뒤뜰 장독대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허리가 동그란 옹기를 안고 있으면
어머니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든다.
두툴두툴한 옹기의 촉감이 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지붕이 없는 변소에 앉아
어두컴컴한 땅 밑에 웅크리고 있는
옹기의 구멍을 내려다본다.
옹기는 이 집 내력을 알고 있다.
태어나서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으로 울었던 것도
저 밑을 바라보면서이다.
파묻은 김칫독처럼 발효하는
옹기는, 저 움푹움푹 팬
밑바닥에서 깨어져나가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썩는 것은 따뜻하다.
지붕 없는 설움으로 떠도는 식구들이
들락거리며 별과 새와 구름을 보았던 곳,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빈집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 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 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보고
달빛이 신어보고
소리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칫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 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빛의 소묘
누가
발자국 속에서
울고 있는가
물 위에
가볍게 뜬
소금쟁이가
만드는
파문 같은
누가
하늘과 거의 뒤섞인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가
편안하게 등을 굽힌 채
빛이 거룻배처럼 삭아버린
모습을 보고 있는가,
누가
고통의 미묘한
발자국 속에서
울다 가는가
사랑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 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 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치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 번 힘차게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城에서·1995
죽은 아이들의 얼굴을 매단 작은 무덤처럼, 3층 산부인과 병동의 창에 서
있는 K의 눈 속으로 나무 한 그루가 뻗어 올라온다. 무더운 바람에 잎들이
뱅글뱅글 돌 때마다 막 산모의 배에서 끄집어내진 태아가 울고 있는 환영이
겹쳐진다.“아기가 너무 작아 잡히지가 않아요, 꼬챙이가 들어오면 금세 도
망쳐버립니다. 더 자란 일주일 후에 오세요.”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여의사
가 말한다.
K는 방을 얻었다. 커다란 벌레가 잠자고 있는 듯, 지하방은 털이 많이 날렸
다. K와 여자는 일주일 후 병원에 갔다. 병원은 발은 지상에, 머리는 구름에
반쯤 잠겨 있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잠시 후면 자궁을 채우지 못한, 가엾은
쥐새끼처럼 꼬챙이를 피해 도망다니는 생명체 하나가 도시의 습한 하수구
로 사라질 것이다. 하수구는 버려진 것들이 살기 좋은 곳이다. K는 집에 돌
아왔다.
K가 집을 얻은 건, 포도나무 때문이었다. 이담 생에 외동딸이 사는 집 뜰
포도나무로 태어나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그가 내 열매에 손 대준다면. 포도나무는 대문을 들어서면, 비
좁은 마당에서 2층으로 잎을 뻗고 있다.
그것은 프라스틱에 나무색깔을 입힌 지주대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푸른
열매를 맺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 가득 떨어져 세입자들의 발에 밟혔
다. 포도나무는 포도나무를 그리워한다. 포도나무로 태어났으나, 포도나무
가 아닌, 아무도 손대지 않는 저것은. 파도가 품고 오는 물새알들의 속삭임
도, 외동딸도 없이, 집이 열 채나 되는 주인이 세를 내주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의 자궁에 머물다 간 한 알의 작은 포도알이여. K는 불
을 끄고 웅크린 채 지하방에 날리는 털에 덮혀 잠들었다.
여자는 의사의 어깨에 기댄 채 질질 끌리듯 K의 가슴에 들어왔다. 병실 안
은 링거병이 매달린 지주대, 철제 침대,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창 밖 너머
로 커다란 미루나무가 보인다. 아련하게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져 여자의
몸 속으로 사라진다.“날 좀 바라보세요, 날 좀 지켜봐 주세요.” 잎새들은 금
방 꼼지락거리는 아기의 작은 손이 되어 K의 목을 조른다. 여자는 몸을 조
그맣게 웅크리고 끊임없이 울었다. 여자의 눈물이 침대 시트를 적실 때 K
는 피폐한 성욕의 쾌감으로 몸을 떨었다.
城은 언제나, K의 내부에 있었다. 성의 흙을 밟으면, 허물어지는 성의 벽에
기대면 K는 한 그루 포도나무였다. K는 파도의 끝자락에서 솟구치는 물고
기들이 가득 잎새에서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K는 더 이상 城을 알지 못했
다. 물소리를 잊어버린 나무는 염분의 찌꺼기처럼 뿌리부터 썩어갔다. 커다
란 벌레가 지하방 밑에서 꿈틀거리며 K를 낳기 시작했다.
여우볕
햇빛이 비 오는
속으로 들이쳤다
죄수들이 빛을 쬐려고
감옥의 창살에 매달린다
얼굴에 달라붙는 것은
빗줄기만은 아니었으리
창살을 타고
작은 원숭이들이 내려온다
눈에서 두 줄기 흘러내리는 빛
역전 뒤 식당에서 만난 여인
밥 한 그릇을 머리에 쓴 수건에다 싸고 있는
젊은 아낙,
그리고 등에 업혀 꼬무락대는 아기.
미친 여자면 어떤가.
주인을 향해 천진한 독처럼
웃고 있는 여인 뒤,
재를 씹는 것같이 멀리서
기차가 레일을 밟고 오네.
음식 연기로 그을린 벽은
오래 전부터 천천히.
깊게 갈라져왔네.
벽 틈에 달라붙어 있는
나방 한 마리가 눈에 띄네.
버려진 음식물이 가득한 쓰레기통에서 태어나
온종일 파닥거렸을 작은 날개에게
벽 틈은 최상의 안식처라네.
아낙의 등에 업힌 아기는 울다 지쳐.
애벌레처럼 졸음에 빠지네.
고개가 천천히 뒤로 들려
머리를 까닥까닥하다가
그것에 놀라 울다, 또 잠에 빠지네.
흑암 속에서 나비가 되고 있을 것이네.
유성들
―진만에게
사내는 후덥지근한 상가 귀퉁이에
음반 가게를 냈다.
그리고 오늘 맹인 하나가 그에게 왔다.
사내는 유심히 맹인을 바라보고 있다.
맹인은 오래오래 음반을 음미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지듯이.
사내는 생각한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 맹인 하나가 여기로 왔다.
단 한순간을 위해 황홀한 급사를 하는 者, 파멸의 웅덩이에 몸을 던지려고
天體 사이를 날아왔다.
열대야의 밤이 오고 있다.
유성이 얼마나 아름다우나를
사내는 맹인에게 만지게 하고 싶다.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어깨의 상처
그 오래 아물지 못하는 흉터가, 맹인이 만지는 세계 어딘가로 떨어진다.
열대야의 끝에서 끝으로 가늘게 타고 있다.
무덤은 이 고장의 오래 된 관습이다
얼마나 먹고 싶은 말인가
폐허는, 얼마나 비약하기 쉬운가
흉곽에 몹시 풀과 꽃이 우거진
亡國의 사랑은, 죽음은 이 고장의 오래 된
관습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무덤을 판다
그 고장에서 사는 것은
단순히 묘비를 하나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기 묘비
하나가 나타난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폐허는, 오래 전에 꺼진 등불이다
무덤 파는 남자의 사랑
亡國을 향해 걷는 해와 달이
후광으로 남아 있다.
저 곳
空中이라는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 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空中이라는
말.
지붕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 한 채를 보았습니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흰 비닐을 움켜쥔 채
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우는 발로 견디는
둥근 지붕.
지붕의 눈
옛날의 눈이 별의 눈꺼풀인 눈이
집 지붕에서 깜박거리는 것을 느낀다
낮잠을 자면서도 간혹 나는 저녁을 말하려 애쓰는
꿈에 시달렸지 않은가, 그럴 때 낮잠은
서늘한 구멍이었고 우물이었고 지붕의 눈이었다
눈 오는 날 주름을 겹겹이 껴입고 타는 황홀함을
나 이외에는 보지 못한다, 새금새금한 아지랑이
혹은 먼 그대, 불꽃을 물고
창문에 죽음을 즐기며 오후가 지나간다
천식
거품들이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 숨죽인 해변에 새들이 죽어 있다. 저것들
은, 오래 전의 헛것들이다. 날개를 벗어버린 꿈들이 부서져버린다.
어느 해안을 떠돌다 왔을까. 나를 차지했으나, 끝내 모습을 감추고 헛되어
끼루룩거리는 바다에서, 죽은 새들이 해변을 점령한 오후에, 거품들이 급격
히 불어난다. 멀리, 섬들이 솟아 있다.
초생달
자기야 저건 상처다 반쯤 뜬 자기의 눈이다
자기 눈꼬리에 매달린 사닥다리를 타고
이 세상을 벗어나간 그림자와 빛
밤바다를 가로질러가는
치욕의 지느러미,
인광이다
하현(下弦)
창문에 뭉툭한 손이 내려오네
시골에서 보내온 감자를 삶아먹는 밤, 어머니 한숨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
네
새벽을 기다리네
거미가 가등에 달라붙어 새벽이 터지는 빛살들로 날개 한 벌 짜려고 하네
꼼짝도 않고 기다리네
먼 훗날, 감자 껍질을 벗겨 희디흰 속살 먹는 소녀의 창가를 엿보리
무서리 저리 내리는 날
날개를 반쯤 펴고
젖어서, 가만히 딸의 창문에 비치리
해당화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나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 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밥그릇은 내 발이 자라나는 만큼
아랫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발이 아랫목까지 닿자
나는 밥그릇이 내 차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쫓길 데가 없어진 밥그릇은
그런데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자 나는 밥그릇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습니다
설령 밥그릇이 있다 해도
발이 닿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밥그릇의 따뜻한 온기보다 더한
여름이 내 앞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나운 잠에 떠밀리다
문지방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어
방문을 여니,
해당화꽃 그늘이었습니다
뿌리에서부터 막 밀고 나온 듯,
묵은 만큼 화사해진다는
처음 꽃 핀,
삼년생 해당화 붉은 꽃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느새 늙은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저녁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밥그릇처럼
해당화꽃 그늘 속에 서 계신
어머니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꼭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내느라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묻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어머니의 손에서 떠난 그 작은 무덤들이
붉디붉은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형준
196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인천에서 성장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구의 힘」이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
첫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하여 이야기하련다」에서 시인은 존재의 쓸쓸함과 비애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가볍지 않은 실존적 물음들은 화려한 이미지와 금언적 구절들에 의해 근본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형상화된다. 특히 그의 시에는 시각적 이미지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낯설은 언어들의 혼합으로 선명하고 강하며 신선한 색깔을 띤다. 그러나 ,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들이 의상만 화려하게 걸친 것은 분명 아니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과 사유가 도처에서 번쩍거리며 빛을 발한다.
시 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지사, 1994)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창비사, 1997)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사, 2002)
산 문 집 『저녁의 무늬』 (현대문학, 2003)
1996년 제1회 꿈과시문학상을 수상
2002년 제15회 동서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