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사의 큰 별 박재삼, 그 푸른 '슬픔의 미학' _ 배한봉
1.
朴在森((1933년~1997년). 나는 선생님의 함자를 한자로 써 놓고는 한참동안 그대로 앉아있다. 선생님(이하 존칭 생략)께서 가신 지 벌써 7년. 나는 자꾸 빗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어제(7월 12일 토)는 사천문화예술회관에서 제6회 박재삼 문학제(박재삼문학기념사업회장 오필근) 가 연인원이 7백여 명 넘게 참가한 가운데 열렸고, 나는 이 문학제에 참가하고는 새벽 일찍 장대비를 뚫고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쓴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던 시/그것이 이제는/먹지 않아도 배부른 황금빛 종소리/또는 바람의 장미꽃이 되어/너의 무덤 위에 찬란하고나/이름 한번 불러보자/아아 박재삼!"(「이름 한번 불러보자 박재삼」일부, 이형기 시집 『절벽』 수록)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중인 노시인의 물기 젖은 목소리가 굵은 빗소리와 뒤섞여 자꾸 내 가슴을 후려친다.
한용운, 김소월, 정지용, 서정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전통서정시의 큰 맥을 계승했던 시인 박재삼. 그의 시에 드러난 음률은 우리민족의 애환과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였다. 핍진한 시대의 질곡을 걸어온 자만이 온몸으로 토해낼 수 있는 깊고도 은은한 울림이었다. 「수정가(水晶歌)」나 「흥부 부부상」에 드러난 바와 같이 그것은, 관념적인 요소가 걸러진, 한(恨)을 서럽도록 아름답게 빚어낸 결정체였다. 이민호는 2003년 『다층』 여름호에 실린 「박재삼론」에서 "미당의 시가 '구부러짐[曲]의 형이상학'이었다면, 박재삼의 시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시의 구경(究竟)을 보여준다. 이것은 '구부러짐과 꺾임[曲折]의 형이상학'"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천년의 바람"을 깨달은 바 있는 그의 장례는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62년 첫 시집 『춘향의 마음』 이후 『천년의 바람』등 시집 열세 권 펴냈다.
2.
미당(未堂)으로부터 "한(恨)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이라 불렸던 그는 1933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으나 만 3세가 되던 때 외가가 있는 삼천포(현재 사천시)로 나와 노산(魯山) 아래 목섬이 보이는 팔포 바닷가 마을에서 성장했다. 자갈채취 인부였던 아버지가 집살 정도의 돈을 모으자 무작정 귀국을 결행했기 때문이다. 출생지는 아니지만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이곳은 그에게 고향인 셈이다.
일자무식으로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었던 부모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아버지는 부두의 지게 짐꾼이었고, 어머니는 광주리에 멍게나 새우젓을 이고 골목골목 팔러 다니는 도붓장사(行商)였다. 또 배에서 갓 잡아온 생선을 받아 이웃도시 진주의 어물장까지 나가 자리를 잡고 팔기도 했다. "진주 남강 맑다 해도/오명 가명/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추억에서」 일부) 성년이 되어 진주를 찾은 그에게 남강은 어머니의 얼굴을 비춰주는 설움이었고 투명한 물살은 겹겹 한의 파랑으로 밀려왔을 것이다.
"밥 먹고살기조차 어려워 수남(洙南)국민학교(현 삼천포초등학교) 졸업 후 삼천포여중에서 사환 노릇을 했지." 그가 내게 들려주었던 청소년기의 서두다. 돈 3천 원이 없어 진학을 못하고 신문배달을 하던 중 삼천포여자중학교의 가사 담당 여선생의 도움으로 그 학교 사환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을 '땡땡땡' 치는 것도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수업 시작종을 치고 난 뒤에는 교실 유리창에 붙어 공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일이 많았다. 하루는 창 밖에서 영어 선생님의 강의를 정신 없이 듣고 있는데, 그걸 발견한 교장 선생이 물었다. "니도 영어 공부하고 싶나?" "예!" "그라모오, 종을 친 뒤 빨리 교실 뒤로 들어가 공부하고, 끝나기 전에 퍼뜩 나와서 종을 치거라."
1947년. 열다섯 살에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중학생이 된다. 분주한 급사생활을 하면서도 여중학생들의 뒷자리에 앉아 영어공부를 하는 그의 열성에 감동한 그 교장의 도움으로 삼천포중학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리고 2학년 때 국어 교사였던 초정 김상옥을 만나게 된다. 김상옥은 가람, 노산, 조운 이후에 이 나라 시조의 새 물결을 일으킨 큰 시인이다. "그분의 학력은 국민학교가 전부야. 그래서 그 때, 학력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글만 잘 쓰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김상옥 선생님의 첫 시조집 『초적(草笛)』을 빌려 공책에 베껴가며 오로지 문학에 열중하게 되었지." 생애의 전환점은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바뀐다며 살풋 미소를 짓던 그의 눈빛이, 생각하면 지금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처음 시조를 쓰게 된 것은 그분이 시조시인이셨기 때문이지." 생전에 그는 힘든 학창시절이었지만 시를 만나게 돼 참 행복했었다고 그 시절을 돌이키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종소리도 영어 단어도 슬프기만 했어요. 넓은 운동장의 저녁 햇볕도 슬펐어요. 그 슬픔 때문에 시를 쓰게 됐던가 봐요." 1957년 시 「춘향이 마음」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사 제정 제2회 신인문학상을 받은 뒤 출연했던 라디오에서 그 시절을 회상하며 했던 말이다.
집을 치면, 정화수(精華水)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신선한 우물 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平床)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때마다 일렁여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山神靈)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수정가(水晶歌)-'춘향이 마음' 抄」전문
그는 '춘향'이라는 원형적 인간상의 '마음'을 빌어 자신의 슬픔과 한, 어머니의 슬픔과 한, 그리고 이 땅 백성들의 슬픔과 한을 온몸으로 토해냈을 것이다. 토속적이고 서민적인 질박한 정서를 이렇게 결 고운 언어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운동장에 줄지어 서 있던 포플라 나무와 나무를 한없이 반짝이게 하던 햇볕 아래 멍게·새우젓 행상을 하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서렸기 때문일 터, 따라서 "우리 마음을 비추는/한낮" "뒷숲에서" 우는 그 "명명(明明)한 명명(明明)한 매미"(「매미 울음에-'춘향이 마음' 抄」일부) 울음은 바로 시인/화자의 서러움이요, 그가 순수하고 투명하게 승화시킨 한국인의 내면에 깔린 한의 정서라 할 것이다.
그는 4년제 중학 졸업 후 삼천포고등학교 2년에 편입학,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역시 수석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생활 근거지를 6.25로 인해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옮겨 중학시절 교장선생이었고 제2대 민의원이었던 정헌주(鄭憲住)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한다. 그의 재능을 가까이서 보고 늘 안타깝게 여기던 정헌주는 가끔씩 방문하는 조연현에게 "우리집 아이가 시를 쓰는 모양인데 한 번 봐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 해 11월 시조 「강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을 받아 『문예』지에 발표된다. 이듬해는 조연현이 주간을 맡아 창간 중이던 『현대문학』사에 입사한다. 그리고 1955년 『현대문학』에 시조 「섭리」(6월호, 유치환), 시 「정적」(11월호, 서정주)으로 추천을 완료, 『현대문학』 제1호 시인으로 등단한다. 이근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시조에서 익힌 운율을 자유시로 철철 넘치게 튕기면서 미당이 해냈던 것, 그 다음의 시의 넝쿨을 치켜들고 있었다."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이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 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것네.
-「울음이 타는 가을江」 전문, 『사상계』(1959, 2)
정과리가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시'라고 말한 「울음이 타는 가을江」과 같은 절창을 뽑아내고 있었다.
서울 용두동의 산골짜기 단칸방에서 왜간장 한 가지로 밥을 비벼먹으며『현대문학』사에서 받은 월급을 1년 동안 모아 어렵게 입학금을 마련한 그는 고려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한다. 2학년 때는 E대학 졸업반이던 한 여자를 연모하게 된다. 그녀는 삼천포여중 급사생활을 하며 야간 중학교에 다닐 때 만난 같은 또래의 여학생으로 아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그는 우정을 사랑으로 꽃 피우려 했으나 그녀는 어린 시절 순진한 친구로만 여기고 있었고,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있었던 것. 그는 이때 어쩌면 그의 고향 팔포 바닷가로 흘러드는 한내[川]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비단올 머리칼/하늘 속에 살랑살랑/햇미역 냄새를 흘리고,/그 냄새 어느덧/마음 아파라./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골짜기에서 흘려 보내는/실개천을 보아라./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우는 물살 따라./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첫사랑 그 사람은」 일부) 제삿날 큰집에 간 그는 이 아픈 사랑을 안고 한내를 거닐다 노산공원의 언덕을 올랐는지 모른다.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이 나고나." 그리하여 그때 그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소리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았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로 나는 "울음이 타는" 이 "가을江"의 무대를 당시 삼천포의 동·서금동 사이를 흐르던 '한내'일 것이라 짐작한다. 이렇게 사랑을 앓기도 했던 청년 박재삼은 어렵게 시작한 대학교를 3학년을 끝으로 중퇴한다. 직장을 팽개치면서까지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지훈이 그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학점을 인정해줄 수 있는 데까지 인정해 주며 도와주었으나, 직장일로 종종 수업을 빠지는 그의 모든 학점을 다 채워줄 수 없었기에 결국 학점 부족으로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대문학』은 당시 하나뿐인 문학지였다. 중견문인은 물론 신인들도 수없이 들락거렸을 것은 불문가지. 그중 미당은 원고료를 받을 때마다 눈짓으로 은근히 그를 불러내어 술집으로 향했다. 최하림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어느 날 술자리에서 "시를 뭐라 생각하느냐"는 미당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어마이 말씀이 노래 즉 시는 진실이고, 이야기 즉 소설은 거짓말이라 카대요." "뭐라고? 시가 거짓말이라고? 내 시가 거짓말이란 말이지?" 미당은 대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다음날 미당은 실수를 인정하며 그를 집으로 불러 또 술잔을 주고받았다. 박재삼은 서정주를 존경했고 서정주도 박재삼을 시인다운 시인으로 여기며 좋아했다.
그랬다. 사석에서든 문학강연에서든 그가 늘 강조하는 말은 "시는 노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슬픈 것이다. 역으로 가장 슬픈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말도 자주 했다. 이 진술대로 그의 시는 확실히 아름답고 슬프다. 「봄바다에서」, 「울음이 타는 강」, 「한」, 「추억에서」, 「내 고향 바다 치수」, 「목섬 이야기」같은 시들은 가히 '슬픔의 미학' 그 자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진술이 그의 시의 핵심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이와 같은 시에 대한 그의 지론은 평생을 두고 변함이 없었다. 가난의 고통을 노래로 삭히던 어머니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었다. "선생님. 요즘 시는 가락보다 언어유희, 또는 언어실험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던데요." 1980년대 중후반, 나의 이 우문(愚問)에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노래는 거짓말을 안 한다. 우리 어마이가 노래 잘 하모 극락에 발 디딘다 캤는 기라."
1962년, 서른 살에 그는 김정립(金正立)과 결혼하고, 이듬해 처녀시집 『春香이 마음』(신구문화사)을 출간해 모더니즘 시의 관념적이고 이국적인 정취와 서구문학이론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문단을 깜짝 놀라게 한다. 그러던 중 삼중당으로부터 『문학춘추』 창간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당시 『현대문학』사의 월급이 7,500원이었는데, 삼중당에서 제시한 월급은 15,000원. 그리고 일본어를 번역하는 아르바이트도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전체 월수입으로 따지면 2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조연현 역시 그의 입장을 빤히 아는 지라 흔쾌히 이직을 허락했다. 훗날 그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창간 때부터 9년 7개월 동안 일했던 『현대문학』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직장을 옮긴다는 것이 혀에 소금이 씹힐 정도로 고민되었다. 그러나 워낙 가난한 생활이었기 때문에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64년, 『문학춘추』 창간에 참여하지만, 1년 뒤 『문학춘추』의 판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자 퇴사하고, 경우당(景友堂) 발행의 월간 『바둑』지 편집장을 거쳐 『대한일보』 기자가 된다. 그러나 3년 뒤인 1967년. 남정현의 『분지』 사건 공판을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아 고혈압으로 쓰러져 6개월 가량 입원한다. 겨우 몸을 수습한 그는 마흔 살 때부터 직장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 전업작가가 되었다. 한편 신문에 '바둑 관전평'을 쓰면서 박국수(朴國手)라는 별칭을 얻는다. 이근배는 "박국수라는 호칭만 듣고 모르는 이들은 문단바둑의 최고수인 줄 아나 바둑 서열로는 한참 아래였던 것이고 시의 서열로는 국수"라는 뜻이라 밝힌다.
그후 그는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일대기를 썼던 적이 있다. 목월과 함께 한 작업이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매우 곤혹스런 입장이 되었다. 반 정부적 문인들의 공격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이 일을 이야기할 때는 소설가 이호철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말하곤 했다. 절친한 사이였는데, 이 일로 서로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가 이 일대기 집필을 맡았던 것은 지어미를 잃은 박정희 전대통령을 애틋하게 생각했기 때문. 그는 심성은 여리고 착했으나 결코 권력에 빌붙어 아부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 시절, 조병옥 박사의 서거를 애도하는 시를 써 『현대문학』에 발표했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입 한 번 까딱 잘못 벙긋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서슬 퍼렇던 시절"에 이런 시를 쓴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던 것. 그 시의 제목이 뭐였더라?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봐도 머리 속이 깜깜 암흑이다. 당시에 발간된 『현대문학』을 찾아보면 아직도 그의 그 시가 푸른 힘줄을 팽팽하게 한 채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을 것이다.
그는 시를 쓰려는 지망생이 찾아오면 "머 할라고 시 쓸라하노? 그 어려운 것을!" 이렇게 말리곤 했다. 자신이 겪고있는 생활고를 또 누군가가 업처럼 짊어질까 지레 염려했던 것이다. 어떨 땐 그 지망생들에게 시 쓰지 말고 차라리 소설을 쓰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도 젊은 시절 한 때는 소설을 쓰려했던 적이 있다. 시보다는 아무래도 소설이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고, 또 평소 힘이 되어주었던 서정주, 박경리, 김동리와 같은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편의 소설도 완성하지 못했다. "고치고 또 고치며" 한 줄의 글이라도 완벽을 추구했던 그에게 몇 백 매, 혹은 천 매를 넘어서는 원고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시인으로 남아야 한다는 운명적 하늘의 뜻이 그에게 소설가로서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랬다. 시인 지망생들에겐 그런 염려의 말부터 했지만 그는 늘 시를 부둥켜안고 살았다. "기왕 시인이 되려고 작심했다면 유행시, 인기시에 끌리지 말고 좋은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되라. 인기 시인, 대중 시인은 되기 쉽지만 좋은 시인되기란 기와를 갈아서 거울 만들기보다 어렵다. 시는 자기 마음 속의 보석을 차곡차곡 캐나가는 일인만큼 언어 탁마를 게을리 하지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꾸준히 써 나가라." 20여 년 전, 20대의 애송이 문학도인 내게 당부했던 말이다.
중·고교시절 공부를 잘해 잘 먹고 살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걸을 만도 했지만, 그는 돈 안 되는 가난한 시인의 길을 걸었다. 또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을 "지칠 만큼 오래 깃들이다 보니/어디가 좋아선지 내 정신하고도/담담한 대로 제법 친해져/둘이 짝이"(「고목에 연(鳶) 우는 소리」일부) 된 병마와 싸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와 눈물이 있어야 생활에 물기가 있다"며 슬픔을 감싸안고 살았던 천상 시인이었다. 이것이 그의 평생의 문학적 바탕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전통 서정시의 거장" "토종 시인" "삼베빛 가락의 마지막 시인" "명징한 가락으로 우리의 한을 천년의 시간 너머로 노래한 시인"이라는 찬사가 주어진다. 그에게 가난은 불행이었지만 우리는 그 때문에 정말로 뛰어난 문학적 자산 하나를 갖게 된 것이니 역설이다.
3.
나는 어제 오전 박재삼 문학제가 열리는 사천문화예술회관에 가면서 먼저 그가 성장했던 서금동의 팔포바닷가와 노산공원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는 이 마을에서 3살 때부터 20살이 넘도록까지 살았다. 여관 종업원으로 취직한 형이 가져다주는, 손님이 먹다 남긴 김밥을 바닷가에서 씹어먹기도 했고, 기부금이 없어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던 날도 그는 물결높은 바다와 거기에 떠가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花月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그 충층대 밑에/옹송거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손님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싸서/나를 향해 남 몰래 던져 주었다./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그리고 두 누이동생이/부황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반가이 맞이했다./나는 맛있는 것을/많이 많이 먹었다며/빤한 거짓말을 꾸미고/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뜰에 나서면/바다 위에 달이 떴는데/내 눈물과 함께/안개가 어려 있었다."(「추억에서 30」전문) 그는 멍게장수였던 어머니를 도와 멍게를 까며 밤을 새우던 유년시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난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시 생각키 어려운 지독한 가정환경을 김훈은 이렇게 정리한다. 그의 가난은 빈곤이 아니라 '서정'이라고.
그가 성장했던 집은 현재 궁전 보리밥집이라는 식당이 들어서 있고, 대지는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가 뚫리면서 59평중 15평만 남아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박재삼 시인의 시가 실려 있었다 아임미꺼" 식당 안주인은 이 집이 그 '유명한 박재삼 시인'의 집이었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식당 바로 앞 시퍼런 파도가 덮쳐오던 팔포바닷가는 매립돼 횟집과 모텔 등의 상가가 빼곡이 들어차 있다.
노산공원은 그가 어릴 때 자주 올라와 명상을 했던 곳.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이 굽어보이는 이곳에 그의 시 「천년의 바람」을 새긴 시비가 서 있다. 시비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솔숲 사이로 목섬이 보인다. 어린 시절 그는 이곳에서 망연히 앉아 푸른 바다와 목섬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바닷마을에 옛날엔 바람난 가시내가 있었다 한다. 바닷바람이 무서웠더란다. …중략… //그런 세월과, 그런 갈증과, 그런 마을에, 바람 기운이 없는 어느날 앞바다를 섬 하나이 흘러오고 있었더란다./마침, 불 때다 볼 붉은 그 가시내가 부지깽이를 든 채 나와선, 가슴 차도록 섬이라도 안으면 살 길이나 열리리라 믿었던가 한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더란다."(「목섬 이야기」 일부)고 노래했던 목섬!
공원을 내려가니, 해안에는 햇빛이 '쟁쟁쟁' 내리쬐는 푸른 바다가 하염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 빛나는 철썩임 속에서 불운한 그의 집안 내력을 실은 듯 파도만 힘껏 바위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의 집안의 남자 어른들은 고무신짝 같은 작은 배를 타고 이 바다로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고, 소박을 맞은 이모는 모래밭에 고무신을 곱게 벗어놓고 그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는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나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편들은 한려수도 청정한 바다를 달려온 "천년 전"의 전설 같은 바람을 타고 노산의 솔숲에서, 우리의 가슴에서 한없이 출렁이며 새로이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시와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 한시도 시의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새벽이면 책상에 원고지를 펼치고 앉아 무엇이든 쓰고 또 쓴다고 했다. 제자들에겐, 시인으로서의 바른 자세와 정신을 가르쳐주던 큰 스승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주 몇 잔에 기분이 흥쾌해지면 '홍도야 우지마라'를 흥얼거리며 '장미'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 물었다. "술 담배 좀 줄이셔야지요." 그렇게 말씀이라도 올리면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다 그러기에 미안 미안해"라는 윤항기의 노랫말로 받아넘기곤 했다. 그가 발굴한 시인으로는 얼마전 작고한 김강태 시인을 비롯해 정일근, 박주택 등이 있다. 고향에는 현재 그와 호형호제하던 최송량과 지난해 『문학과 경계 문학상』을 받은 젊은 시인 김경 등이 그가 떠난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천포 바다와 같은 맑고 푸른 영혼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우리시사의 큰 별 박재삼! 그는 가난 때문에 구차하지 않았으며,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또 스승으로서 누구보다 '속 깊은 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 위 글은 '시로 여는 세상'(2003년 가을호) 박재삼 특집에 수록된 배한봉 시인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