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주는 송별사
87년 새해 첫 출근길이었다. 연휴 동안 설악산을 다녀와서인지 발걸음이 가볍고 가슴은 뿌듯했다. 아파트 경비실을 지나 막 계단을 내려서는데 누가 앞을 가로막았다. 가죽점퍼에 검은색 안경의 건장한 사내가 내 신분을 확인했다. 정중한 듯하면서도 사뭇 위압적이었다. 저만큼 앞쪽 검은색 지프차 곁에 역시 가죽점퍼 차림의 두 사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금이 저리다고나 할까, 본능적으로 불안과 공포가 온몸을 조여 왔다.
그들의 요구대로 경비실 인터폰으로 대학원생인 큰아들을 불러 내렸다. 그들은 곧 돌려보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실내복에 슬리퍼 차림인 아들을 차 뒷좌석으로 밀어 넣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어느 기관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그러냐조차 물어보지 못한 소심하고 겁 많은 자신을 질책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며칠 뒤 조간신문 일면에 주먹만 한 활자로 ‘노동운동 배후 세력 일망타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과격한 노동운동 배후에 그것을 기획하고 자금을 제공하는 조직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체포된 열두 명 속에 아들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그 아이가 어떤 아들인가. 빠듯한 살림에 과외공부는커녕 먹는 것조차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이 저 혼자 밤샘 공부로 모두가 선망하는 그 대학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가. 너무 기쁜 나머지 ‘합격’ 전보 여러 통을 고향으로 날리는가 하면 친구들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 그 기쁨이 약이 되었던지 지지부진하던 내 사업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동생 셋도 형처럼 자력으로 자기가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 행운을 불러오는 그 아이, 그는 우리 집 마스코트가 아니던가.
힘이 되어 줄 만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다들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몸을 사렸다. 시국 사건 용의자를 잘못 돕다가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평소에 막역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말을 아끼며 나를 피하는가 하면 자주 울리던 전화벨도 어디 고장이라도 난 듯 잠잠하고…. 우리 집에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발생해 주위로부터 격리당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친구가 깡패로부터 봉변당하고 있는데도 자신이 다칠까봐 못 본 체하는 야박함, 우리 내외는 그때의 섭섭함 때문에 지금껏 외면하고 지내는 사람이 몇 있다.
구속자 대부분이 같은 학교 같은 계열에서 석 ․ 박사 과정을 밟던 학생들이라 그 가족들과 쉽게 연락이 닿았다.
“그럴 리가 없다. 반드시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다.”
“저들이 틀림없이 용공분자 빨갱이로 몰아갈 터이니 우리가 그걸 막아내야 한다.”
가족들마다 분통을 터트렸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학생들끼리 ‘사회과학연구회’라는 공부모임에서 형편이 어려운 어느 회원의 사글세 보증금 일부를 몇몇 회원이 융통해준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그 회원이 ‘노동자 신문’에 관여한 게 바로 ‘노동운동 배후세력’이라는 올가미의 빌미가 되었다고 했다.
마분지로 급히 만든 피켓을 들고 스무 명이 넘는 구속자 가족들이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 분실로 몰려가 시위에 돌입했다.
“고문을 중단하라!”
“용공조작 중지하라!”
선창자를 따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가족들은 모진 고문으로 자식이 빨갱이나 간첩으로 조작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정통성이 없는 군사정권에서는 선거를 앞두거나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적과 내통한 간첩이나 자생적 공산주의 집단이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요란하게 발표해 왔다. 국시(國是)가 반공(反共)인 나라에서 그 방법은 특효약이나 다름없었다. 선량한 국민은 자신의 불만을 접어두고 나라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재미를 본 군사정권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 방법을 사용했다. 마침 87년 그해 12월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다.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직접선거가 아닌 2천 3백여 명만이 참여하는 간접선거의 결과는 현 집권당의 따논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걸 초전박살로 잠재우기 위해 새해 벽두부터 학생들을 잡아들여 용공분자, 빨갱이라는 특효약을 조제하고 있을 것이다.
대공 분실 앞의 시위는 격렬했다. 자식이 용공분자나 그와 비슷한 올가미에 걸리기만 하면 본인뿐만 아니고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판국에 망설일 게 없었다. 분실의 철문을 발로 차고 온몸으로 부딪는가 하면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했다.
“내 새끼 다치면 네놈들도 무사 못 혀!”
“내 손자 빨갱이 만들면 너희 놈들 벼락 맞을 거야!”
“왱~” 하고 사이렌을 울리며 시위 진압차가 들이닥치고 탁! 탁!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최루탄이 연거푸 터졌다. 재채기가 나면서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휘두르는 곤봉에 어깻죽지를 맞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저 안에서 우리 집안의 기둥인 장남이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텐데, 어디를 좀 다친들 대수냐 싶었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철문 안에 갇혀 있는 아들을 구해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과부적, 곤봉에다 방독 마스크로 외계인처럼 무장한 수많은 전경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나둘 사지가 들려 짐짝처럼 ‘닭장차’에 던져졌다. 차 바닥에 널브러져 올려다본 높푸른 겨울 하늘, 나는 설움이 북받쳐 목 놓아 울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목이 멘다.
닭장차에 실려 가 용산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풀려나면 다시 대공 분실 앞으로 모여들고…. 열흘 가까운 시위로 우리는 기진맥진 상태였다. 1월 15일 저녁, 여느 때처럼 종로 5가 기독교 방송국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회의 중간쯤에 우리 일을 도와주던 K 목사가 들어와 긴급 뉴스를 전했다. 대공 분실에서 조사받던 박종철이라는 학생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갇혀 있는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부모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한 사람만 죽은 게 확실하냐?”
“다친 학생도 있을 게 아니냐?”
다들 새파랗게 질려 목사님을 다그쳤다.
이튿날, 가족들은 충혈된 눈으로 새벽같이 대공 분실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날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평화적인 시위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라도 자식의 안위를 확인하겠다는 격렬한 시위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큰 몽둥이를 들고 와 철문의 돌쩌귀를 내리치는가 하면, 한 아름이나 되는 돌덩이를 안고 와 철문을 부수려고도 하고, 몇 사람은 힘을 합쳐 높다란 철문을 기어 올라가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박 군 사망 뉴스 때문인지 지나가던 시민들도 우리를 응원했다. 그동안 모른 척하던 신문, 방송 기자들도 몰려와 번쩍번쩍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데 그중에는 외신 기자들도 여럿 있었다. 힘을 얻은 우리들의 기세는 더욱 맹렬히 솟구치는데, 철문 안쪽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분주하던 차량 출입도 뚝 끊기고,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위 진압 차는 출동하지 않았다.
반응이 없어 가족들의 등등한 기세가 약간 누그러진 정오쯤, 난공불락이던 그 철문이 거짓말처럼 안으로부터 열리는 게 아닌가. 분실의 중간 간부쯤 되는 분이 면회를 허용하겠다며 우리를 안으로 들인 후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자식의 무사함만을 확인하고 싶을뿐이었다.
면회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하나같이 자식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핼쑥해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자기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 내외를 안심시켰다. 부르튼 입술에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문 흔적을 찾느라 아들 옷 여기저기를 들추며 꼼꼼히 살피는 아내, 나도 격정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지만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들은 죽은 박 군의 바로 옆 방에서 조사받았다고 했다. 다행히 몸에 상처도 없고 본인도 고문받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다른 학생들보다 사나흘 일찍 잡혔기에 그 흔적이 사라졌을 뿐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고문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상처가 말끔하게 치료된 후에 면회시키는 게 철칙일 터인데 박 군 사망의 파장이 워낙 컸기에 면회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처를 확인한 부모들이 변호사를 불러오고 피멍 자국을 사진에 담았다.
그 사진들이 내일 조간신문에 실리면 박 군 고문사로 격앙된 민심은 폭발할 것이고, 그리되면 군사정권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고문으로 지탱하던 정권, 결국 고문으로 망하는구나 싶어 나는 오래된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그 사진은 이튿날, 또 그 이튿날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훗날 안 일이지만 그날 밤, 즉시 석방과 고문 사실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서로의 조건에 당국과 가족이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폭력 정권을 고발하고 응징한다는 사회정의의 대의보다, 자신의 아들이 석방되는 길을 선택한 부모들에게는 물론 공안기관의 집요한 회유와 협박이 있었을 것이다.
열 명의 학생들은 곧바로 석방되고 고문 자국이 없는 두 사람, 우리 아들과 또 한 명의 학생만 기소되었다. 처음 구속할 때의 ‘노동자 배후세력’은 온데간데없고 ‘이적 발언’과 ‘불온서적 소지죄’라는 엉뚱한 죄명이었다. 친구끼리 군사정권을 비판한 것도 죄가 되고 소설가 조정래 씨의《태백산맥》을 갖는 것 또한 죄가 된다고 했다.
교도소로 달려가 면회 차례를 기다리고, 선처를 부탁하는 주임교수의 탄원서를 검찰과 법원에 제출하고, 변호사를 만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 어느새 계절은 바뀌어 거리마다 화창한 봄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 거리에 분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독재 타도!”
“직선제로 개헌하라!”
박종철 군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당국의 발표가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오래 참았던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이제는 총칼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날마다 시위 참가자들이 늘어나더니 ‘6.10 대회’ 날에는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인파의 도도함은 지난날 4.19 학생혁명’ 때의 그것에 못지않은 것 같았다. 지금 처음으로 고백하지만 나는 그때 그 도도한 인파가, 성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듯 아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 철문을 깨뜨려 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직선제 개헌과 사면 복권, 정당 활동의 자유를 약속하는 ‘6.29선언’이 나왔다. 그 선언은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정된 당 대표가 대통령에게 항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많은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뒷날 그것이 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치밀한 연출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것으로 군사정권은 커다란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선언 후에 내 아들도 곧장 석방되었다. 그러나 교도소 앞에서 두부를 입에 물고 학우들의 헹가래를 받던 아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모교에서 학위를 받고 유학까지 다녀와 촉망받는 교수가 되었던 아들은, 뇌종양으로 마흔 살 한창나이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주위에서는 발병의 원인을 두고 지난날 대공 분실에서 받았던 물고문의 후유증일 수도 있다는 말들을 했지만, 나는 그런 사실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머지않아 그의 5주기가 돌아온다. 그날을 기해 아직도 내 가슴속에 있는 아들을 자유롭게 놓아줄 생각이다. 지난 5년 동안 아들과 나는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꽁꽁 언 빙산 같던 한(恨)의 덩어리를 대부분 녹여냈다. 이제는 웃으면서 아들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기일(忌日) 새벽, 작별 인사를 위해 우리는 마당 가 바윗돌에 나란히 걸터앉을 것이다.
“추우냐?”
“아니 괜찮아요.”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리며 미소 짓는 아들.
“혼자 갈 수 있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아들의 목을 끌어당겨 볼을 비빌 것이다.
“그럼 열까지 세는 동안에….”
“그럴게요.”
맑고 윤기 흐르는 아들의 목소리.
“하나, 둘….”
채 열도 세기 전에 아들은 멀리, 아주 멀리, 동이 트는 새벽하늘로 날아갈 것이다.
자식을 위해 감옥을 부수고 싶어 했던 아비의 마음이 담긴 이 한 편의 글은, 그날 새벽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주는 나의 송별사가 될 것이다.
닭장차⁑ 시위자들을 태우기 위해 철망을 둘러친 트럭.
첫댓글 자수성가에 세 아드님을 든든하게 키워낸 철인같은 분이라고만 여겼는데 이런 아픔도 있으셨군요.
젊은 날, 삶의 역경 쯤이야 그 아까운 아드님이 말도 안 되는 시대의 고난을 겪은 것도 모자라
그 후유증으로 보내야 하는 아버님의 마음에 비견할 수 없지요. 제가 다 마음이 아픕니다.
회장님의 글들은 파란만장한 한국사의 한 줄기로 자리매김되어 귀중한 사료적 서책으로 남을 듯합니다.
책 준비하시는 과정이지요?
복희샘,
고맙습니다.
역사의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대학 보내면 대모에 가담할까봐
대학을 못 보내주는 부모도 있었지요. 강철수 선생님 가정에도 이런 아픔이 있었는지
짐작도 못 했습니다.
제 속이 마구 상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도 험난 했을지 짐작만 할 뿐이지요.
아드님과 제대로 이별을 하신듯 합니다.
강철수 선생님, 힘내세요. ^^
윤승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힘 내겠습니다.
강선생님의 그 글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 선생님댁에도 그런 참혹한 일이...
가슴에서 떠나 보낸다고 지워지겠습니까? 아름답게 살다간 꽃 한송이로 간직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