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에서 중요한 작가와 작품을 알려주세요
⊙1900∼1910년
▶개화기 시가의 전개
▶전문적인 작가가 없었다. 작가가 시·소설을 같이 쓰는 정도.
▶개화기시가(창가, 가사, 시조)는 조선시대의 지속이라 보아야(목적문학-개화사상, 애국정신 고취, 저항정신, 자주독립등)
▶문예지-독립신문(최초의 신문), 대한매일신보, 경향신문
▶애국가 유형 작품의 주제의식-자주독립과 개화사상
▶대한매일신보의 <詞藻>난에 한시작품이 실리다 뒤에 <사조>난으로 바뀌며 시조형식의 단가와 4.4조 2행련의 시가유형이 실리게 됨(左中단에 위치).<사회등>난도 애국사상과 구국충절 강조→그래서 폐간됨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 전통시가(시조와 가사)의 형식을 빌어 거기에 새로운 내용과 사상을 담아본 것이라 할 수 있다(애국가유형, 개화가사유형, 시조형의 단가). 때로는 전통시가에서 형식적 변모를 시도 했으나, 끝내 그 범주를 못 벗어나고 내용만 담는 데 급급해 있었다.
⊙1910年代 ▶한국 근대시의 前史
▶서구시(자유시)의 경험이 한국 근대시를 형성시킨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외부 적인 자극(영향)일 뿐, 한국시 자체 내의 전통적인 경험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서구시는 자극제였던 것은 사실이나, 모방의 주체는 아니다.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고전시가의 지속이면서 20년대 진정한 문학을 위한 과도기.
▶1920년대 한국적낭만주의의 조짐(꿈,환상,낭만-1920년대 근대시의 자설적구조변화의 과정)
#자설적 형식-남에 의해서(외부에 의해서)주어진 어떤 문학적 특징
타설적 형식-스스로 자체내에서(자생적으로)형성된 어떤 문학적 특징
ex)외부(한시)의 영향→우리 조선사회를 주름잡는 형식. 엇시조,사설시조→자설적
▶문예지- <소년><청춘><태서문예신보><창조>
▶주요작가-육당최남선, 춘원이광수, 소성현상윤, 소월최승구(최소월)
▶일본유학파 신세대들에 의해 겉껍질은 변했지만 내용은 별진전이 없었다.(공부,개화하자...)
▶<태서문예신보>-태서는 구라파,서구 문학을 의미.외국문학을 소개해 주는 신문.김억(김소 월의 국어선생.장관출신.7,80년대까지 가장많은 분량의 전집작가.근대최초 의 시집<오뇌의 무도>20年代)이 번역,편집,사장
▶육당과 춘원의 2人문단시대.
▷육당 최남선-17세때 편집인겸 사장. <소년><청춘>지에 매호 자신의 작품발표.
·「해에게서 소년에게」-제일 못쓴작품(?). 지금은 중요시 않함.
신시의모습이나 내용은조잡. 바이런의 디오우션을 번역하다시피한 작품<소년>창간 호의 권두시. 당시 17살의 작품에 당시인들은 야∼하는 반응 일으킴.
·정형성을 갖춘신시(한계를 느낌)←(혼란)→<태백산시집>에서 자유율 선택 리듬의 무 정부 상태
▷춘원 이광수-초기에 교육자. 1909년1월호<大韓 興學報>에 실린「옥중호걸」에서 시작.
·작품-「우리의 영웅」, 「곰」 「어머니의 무릎」
·춘원시의 주류를 이루는 세부가 육당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구조가 아니라, 관념적이고
-1- 보편적인 공적 감정으로 일관됨→형식면에서 자유로움만 극단적으로 몰고간 자유율의 한계→춘원은 시에 회의를 느끼고 근대소설을 쓰게됨.
⊙1920年代
▶근대시 전개의 세 흐름
▶매일신보 유일(1910년대)→『조선』『동아』의 두일간지(발표지면의 중요한 역할)와 『개벽』(아주오랜동안 발간60호)등의 잡지 20년대 문학의 전개와 발전에 기여.
▶동인지-詩문학, 청록집(박두진,박목월,조지훈)/창조,백조,폐허등은 곧바로 폐간
▶1920년대 초반-詩만 두드러지게 나타남-검열통과 유리
▶한시,가사,시조,국문풍월,창가,신체시등(10년대의 다양성)→자유시 하나로 정리(20년대)
▶1920년대 시의 흐름
·초반-낭만주의 시(박영희「나의 침실로」이상화「빼앗긴들∼」)
→이미지즘,주지주의시(1930年代).퇴폐적,감상적 낭만주의로 봄
→김억:최초의 번역시집「오뇌의 무도」(당시청년시풍영향줌)>창작시집「해파리의 노 래」>김소월을 키움(오산학교.진달래꽃 반은 김억이가 씀?)
→특징: 감정의 과도한 표출과 현실도피적인 경향
·중반-사회시(임화, 김기림, 박팔량-해방공간에 월북함)
→KAPF(1934.프로시).현실중심주의적 경향, 노동자 농민계급이 사회를 이끌어가야함.
·후반-민요시
김소월-한국적 민요조,교과서적 형태/세련된 어조/님이가서 참 슬프다.
한용운-'상징'의 시적인 형상화(최고의 수사를 격상)연가름없고, 산문적
/어눌한 어조(가장 효과적이라 생각)/님은 갔지만∼
*정지용(1930年代)-김소월과 한용운의 절충적 경향/제자-서정주
▶KAFP계열-가난한 농민의 자녀 / 낭만주의-부유층의 자녀들
⊙1930∼45年
▶서정,실험,제 목소리 담기-1930년대 한국시의 전개
▶1930年代 : 시문학파→삼사문학(초현실파)→시인부락
▶시문학파의 시-순수와 기법인식(낯설음, 새로움/박용철,정지용,김영랑,신석정,이하윤)
→반 이데올로기 순수서정의 추구경향
·국민문학파-카프의 이론에 반대를 위한 반대에 그침.조명받지 못함
·시문학파-작품으로 보여주고 실현시켜 나감(문학작품적 성과)
▶실험주의의 시-모더니즘의 갈래(그 당시 世界的 흐름)
·모더니즘운동은 김기림에 의해 주도.「시작에 있어서 主知的태도」라는 시론 발표.
작품에 지성을 도입/처녀시집 기상도는 「모더니즘」을 보여주기위한 작품들.
ex)傲慢한 風景(머리로 의도적으로 짜낸 표현)
·김기림은 '정지용이야 말로 가장 완벽한 모더니즘 시인'이라 平
정지용,김광균, 장만영은 작품으로 활발
▶「삼사문학」동인-발간연대(34년를 따옴)/초현실파를 향한 경사(몰두)다.
·이상「오감도」(조선중앙일보)는 연재되었을 때 항의 전화 빗발.
·종합문예지(시전문지 아님)/이시우「제1인칭시」등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이상의 부록현 상으로 그침.
-2-
▶「詩人部落」동인
·생의 탐구 시도
·서정주-창간호에 「문둥이」「獄野」「대낮」등 /실험적
·오장환- 〃 「城壁」등7작품발표/파상적인 실험작품(내용자체는 20년대로 퇴보)
·유치환- 질박한 목소리로 대상을 다룸.「旗」(조선문단.36년.1월호)/실험에서 물러남.
▶30년대가 저물며 검열이 심해지며, 모든 작품이 친일문학 쪽으로 통제되어 갔다.(문인보국 회-친일강요)
⊙1945∼1950年 ▶민족문학 수립의 모색기
▶해방기문학/해방공간/암흑기(문학작품은 없고 사상논쟁이 주류)
·해방을 맞이하며 가장 가슴조린이들 : 친일 작가
·일제강점기(말살정책의 극한)의 종말>우리 민족문학 찾기 시작
·군정이 시작됨>정치사회분야인력부족>친일파를 심을수 밖에(아이러니컬하게도)
·친일/반일→좌(사회주의.소련)/우(민주주의.미국) 이데올로기의 대립
*좌익계열우의→미국의 사상조사→북으로감
▶해방직후 시단의 두 경향
·민족문학-김기림, 정지용 / 순수문학-조지훈, 서정주
·참여시-경향시(민족작가회의)
→8.15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한 시인들의 작품을 말함.
→조벽암,권환,박세영,임화,이용악,오장환,박아지,여상현,설정식. / 시조-조운
순수시- 민족주의(한국문인협회)
→순수시를 주장하는 시인들은 민족주의계열(우익.미국)시인들이다.정치적 이데올 로기의 배제
→김현승,김광섭,서정주,유치환,김광균,김용호,청록파(박두진,박목월,조지훈),박남수, 정한모,박인환. / 시조-양주동,이호우,김상옥
⊙1950년대의 시적 흐름과 정신사적 의의
▶50년대 전반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 그 자체가 급선무였던 시기이며, 후반은 전 후 복구와 앞으로의 민족적 지향성(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이 과제였던 시기였다.
▶문총구국대-6.25동란이 발발하자 문인들은 이에 격시를 쓰고,피난길에 <문총구국대>를 편 성 활약함
▶ 1930 1951 오늘날
주지주의.이미지즘-김기림,정지용,김광균,장만영 후반기 동인
초현실주의.심리주의-이상 (부산 피난지)
모더니즘 신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後半期> 동인-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조직됨. 1930년대 모더니즘의 감각과 기법을 보 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임.
·작가-박인환.조향.이봉래.김차영.김규동(김기림제자.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
·김규동의 모더니즘 시론은 청록팔류의 보수적이며 정태적인 서정시에 대한 정면 비판 -3-
으로 시사적의의→논리와 자가당착적인 면을 보인 것은 한계였다.
▶박재삼-김소월(누님)과 김영랑(춘향)을 이어주고 자기만의 독특한 시세계(恨의 정서.남평 윤씨). 대표작은 「울음이 타는 가을강」
*韓國文學은 (여인의) 恨의 정서의 문학이다. 패미니즘도 恨의 정서.
▶50년대 중반을 전후한 중요한 정치적 사건-사사오입개헌(54),「대구매일신문」피습사건 (55),장면부통령 저격사건(56),보안법 파동(58),「경향신문」폐간(59)그리고 3.15부정선거(60)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로서 급기야 4.19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1960年代 ▶순수·참여와 다극화시대
▶썩은 정치에의 반발(4.19-60年, 5.16-61年).
▶60년대의 의미-좌·우이데올로기의 격심한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을 빚었던 해방공간과 6.25의 비극적 체험을 겪고난 뒤, 사회역사적 현실을 정신사적으로,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심도있게 극복해가는 자리에 60년대 시가 놓여 있었음을 의미.
①참여냐 순수냐의 갈등
·작가는 영원한 아웃사이더.(관찰자)
②난해시의 등장-소위 모더니즘 계열의 시들(30년대 모더니즘에 비해 매우 난해)
③갖가지 실험을 시도
④시조문학의 전성기
⑤작가의 전성시대(숫적으로)
▶참여시 또는 민중시의 전개
·우리나라는 특성상 참여시가 민중시의 경향
·참여시-어떤 목적을 위해서 쓰여진 시
민중시-노동자,농민(프로레타리아계급들),민중의 생활과 관점으로 쓰여진 시
·문학성은 미흡
·신동문「아 神話같이 다비데群들」-희랍神話中 나오는 무리.십자군 비슷한
·신동엽「껍데기는 가라」-4.19정신
↘60년대 중반 이후-산업사회로 접어들며, 시인들이 소외계층에 눈을 뜸
·김광섭「성북동비둘기」-소외된 소시민의 애환
·이성부「이빨」「벼」-민중의 의지와 자기긍정세계를 노래
「전라도」-피해받고 굶주린 전라도인을 한국 전체의 소외계층으로 확대
-새로운 참여시의 대표작으로 평가
·신경림-「農舞」계열의 농민시를 예고
-「파장」참여시는 참여시인데 시로서도 성공한 작품(대개의 참여시가 시적인 형 상을 이루지 못한데 반하여)
▶언어실험과 순수시
·김구용의 「三曲」(64)-이미지의 자유연상적 결합,서술자의 기이한 체험들,대담한 성적 묘사등으로 장시를 실험.순수시의 지배적 경향인<의식의 내면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줌.
·김춘수「처용단장」(69현대시학창간호) 무의미시의 탐구→이승훈에게<비대상시>로 계 -4-
승된다(관념 무의식)
·현대시 동인-허만하, 주문돈,김규태,마종기,김영태,이승훈,박의상,이수익,오세영등은 수수 께기, 가짜의 모호성,부정직함의 비난과 좌시를 받으며 70년대에 극복의 주된대상이 됨.
·정현종-60년대의 대표적인 언어파 시인(연대 국문과)
⊙1970年代 ▶70년대의 한국시
▶1970年代 詩
·김수영류의 참여시(리얼리즘)-신경림.이성부 →①
·김춘수류의 무의미시, 비대상시(모더니즘)-이승훈. 오규원 →②
①민중적 감수성(참여)②도시적 감수성(순수)③전통적 감수성(서정주,박목월류-전통지속)
·①, ②, ③의 토대(내용,주제)에는 산업사회가 밑바탕에 깔림.
근대 시인과 그 작품에대한 간단한조사
1.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2. 주요한
3. 홍사용
4.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5. 김동환
6. 이은상
7. 이병기
8. 한용운 - 님의침묵
9. 김소월 - 진달래꽃
10. 박용철
11.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1.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본관 동주(東州:鐵原). 호 육당(六堂). 자 공륙(公六). 아명 창흥(昌興). 세례명 베드로.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일(渡日), 도쿄[東京]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인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여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했으며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 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 ·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 《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 《단군론(檀君論)》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등 다수가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 1908년 《소년》지 창간호 권두에 실린 작품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신체시(新體詩)' 또는 '신시(新詩)'라고 불렀다. 4·4조나 7·5조, 또는 6·5조 등의 창가 형식을 깨뜨리고 완전한 자유시의 형태로 등장했다는 데에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2. 주요한
호 송아(頌兒). 평남 평양(平壤) 출생. 초등학교 졸업 후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와 도쿄[東京] 제1고등학교를 거쳐 3 ·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후장[嫉江]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和信商會) 중역으로 있었다. 8 ·15광복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 ·경제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국회의원을 거쳐 4 ·19혁명 후 장면 내각 때는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5 ·16군사정변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메이지학원 재학중에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하는 한편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문하에서 근대시를 공부하다가 1919년 《창조(創造)》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문단에 진출했다. 1919년 《창조》 1호에 발표한 시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의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된다. 그 후 계속 〈아침처녀〉 〈빗소리〉 등, 낭만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간행했고, 그 밖에 이광수(李光洙) ·김동환(金東煥)과 함께 펴낸 《3인시가집(三人詩歌集)》(1929)이 있다. 한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친일 문필활동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산문시 '불놀이' : 1919년 《창조(創造)》지 창간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1924년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에 수록되어 있으며, 한국 최초의 3연으로 된 자유시이다. 최남선(崔南善)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보다 일반적인 사회성을 띠고 그 표현도 다분히 계몽적이고 설교적인 데 반해 이 《불놀이》에서는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객관적인 사물까지를 변형시키고 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서정시다운 최초의 서정시라고 일컫는다.
3. 홍사용
호 노작(露雀). 수원(水原) 출생.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고 1922년 나도향(羅稻香) ·현진건(玄鎭健) 등과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향토적이며 감상적인 서정시를 발표했다. 신극운동(新劇運動)에도 참여하여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이끌었고 희곡도 썼다. 시 ·수필 ·희곡 등 발표 작품은 많지만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은 없고 《백조》의 간행과 극단운영에 가산을 탕진한 후에는 가난 속에서 살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으로는 그 밖에 《꿈이면은》,《봄은 가더이다》 등의 시작품이 알려져 있다.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 : 1923년 《백조(白潮)》지 3호에 발표. 《백조》의 주류를 이룬 낭만주의의 감상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4.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호 상화(尙火). 본관 경주. 대구(大邱) 출생. 1919년 서울 중앙고보를 3년 수료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1922년 문예지 《백조(白潮)》 동인, 〈말세(末世)의 희탄(阮嘆)〉 〈단조(單調)〉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이중(二重)의 사망〉 등을 발표하고 이듬해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했다. 《개벽》지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하였으며 1935년부터 2년간 중국을 방랑하고 1937년 조선일보사 경북총국을 맡아 경영하기도 했다.
그후 교남학교(嶠南學校)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지도했고 1940년 이후 독서와 연구에 몰두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등의 집필을 기획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작품으로 위에 적은 외에 《비음의 서사》 《마음의 꽃》 《조소(嘲笑)》 등 다수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의 시. 1926년 《개벽(開闢)》지(誌) 6월호에 발표하였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절실하고 소박한 감정으로 노래하고 있는 이 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첫 연 첫 행의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구절이라 하겠다.
일제하의 민족적 울분과 저항을 노래한 몇 안 되는 시 가운데서도 이 시가 특히 잘 알려진 이유는 그 제목과 첫 연 첫 행의 구절이 매우 함축성 있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대의 절약(節約) 속에 최대의 예술이 있다"라는 좋은 표본이 된 대표작이다.
5. 김동환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인 《국경의 밤》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
본관 : 강릉
호 : 파인(巴人)
별칭 : 창씨명(創氏名)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함북 경성(鏡城)
주요저서 : 《국경의 밤》 《승천하는 청춘》 《해당화》
국경의 밤 : 김동환의 첫 서사시집.
1925년 3월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 간행. 반국판 124면. 김억(金億)의 서(序)와 서시(序詩)가 있고 근대문학사상 최초의 서사시 《국경의 밤》, 그리고 《북청(北靑) 물장수》 등 14편의 단시가 실려 있다. 두만강(豆滿江)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밀수(密輸)를 떠난 남편을 근심하는 아내의 애타는 심정을 빌려 일제하의 민족적인 비운을 노래한 《국경의 밤》은 전 3부 73장으로 된 서사시로서 거칠고 생경한 흠은 있으나 시사적(詩史的)인 의의는 크다.
6. 이은상
호 노산(鷺山). 경남 마산(馬山) 출생. 1923년 연희전문 중퇴, 1926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를 청강하였다. 1970년 경희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4년에는 연세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1945년 호남신문사의 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이후 청구대학(靑丘大學)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남대학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4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9년 충무공 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65년 민족문화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맡아 다년간 민족적 위인에 대한 현창사업을 전개하였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고 1966년 문화재 위원에 추대되었다. 1969년 한국산악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하고 1972년에는 숙명여자대학 재단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74년 노산시조문학상을 제정하고, 그 해 한국 ·네팔 협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역시 그 해 총력안보국민협의회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이 되고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예술원 공로상, 5 ·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 등을 수상하였다.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많은 시조가 있다. 저서로는 《노산사화집》 《노산시조집》 《노산시문집》 《이충무공 일대기》 《난중일기해의(亂中日記解義)》 《나의 인생관》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 일생을 통하여 시조(時調)와 민족의식 앙양이라는 두 길을 위해 진력하였다.
노산시조집 : 노산 이은상의 제1시조집.
1932년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 1924~1932년의 작품으로 모두 112편 282수의 시조가 실렸다. 8부로 나뉘었으며, 첫머리에 작자의 자서(自序)가 있다. 제1부 《가는 곳마다》, 제2부 《흐르는 봄빛》, 제3부 《달아래 서서》, 제4부 《쓸쓸한 그날》, 제5부 《꿈은 지나가고》, 제6부 《송도노래》, 제7부 《금강행》, 제8부 《양장시조 시작편》이 수록되어 있다.
전체 시조의 반수 이상이 국내의 명승고적지를 찾은 회고적 감회를 적었는데, 조국애와 국토애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이 밖의 작품은 인생과 자연과 생활에 대한 감회를 노래하였고, 이 중에 유명한 《성불사의 밤》 《가고파》 《봄처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양장시조(兩章時調) 시작(試作)은 시조 형식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7. 이병기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益山) 출생. 한성사범(漢城師範)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古文獻)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한강(漢江)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시인으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고전(韓國古典)에 대한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자리도 굳혔다. 1926년 최초로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律格)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등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고 1939년에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을 발간, 《문장(文章)》지 창간호부터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를 발표하는 등 고전연구에 정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 함흥(咸興) 형무소에 수감되어 l년 가까이 복역하다 1943년 가을에 기소유예로 출감한 후 귀향하여 농사와 고문헌연구에 몰두했다. 광복 후 상경,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각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1948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등을 역주(譯註) 간행했고, 1954년 학술원회원이 되었으며, 이 해 백철(白鐵)과 공저로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인 시풍을 확립하였고, 국문학자로서는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국문학전사 : 이병기, 백철 공저의 한국문학사. 1965년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 발행. 국판 557면.
1957년에 나온 초판을 증보한 것이다. 제1부 고전문학사, 제2부 신문학사, 부록 국한문학사(國漢文學史)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책머리에 이병도(李丙燾) ·이희승(李熙昇)의 서문과 이병기의 자서(自序)가 있고, 책 끝에 백철의 후기 및 색인을 달았다.
8. 한용운 - 님의침묵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 ·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충남 홍성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님의 침묵 :
1926년 회동서관 간행. 4 ·6판 양장, 168면. 표제시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알 수 없어요》 《비밀》 《첫 키스》 《님의 얼굴》 등 초기 시작품이 모두 수록되었다. 그의 시는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인데,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의 높이로 그는 한국 현대시 사상 가장 빛나는 시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 ·15광복 후 동명의 시집이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로 시작되는 표제시 《님의 침묵》은 ‘님’이 누구냐로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독립정신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에 비추어 그것은 잃어버린 ‘조국’이라고 보아야 적합할 것이다. 그러한 추측의 타당성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즉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님은 갔다’고 객관적인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여 주관적인 의지로서 ‘님은 자기와 함께 있음’을 강조하고 그 ‘님’을 붙들고 사랑의 노래를 읊는 시인의 애국심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9. 김소월 - 진달래꽃
본명 정식(廷湜). 평북 구성(龜城) 출생.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등을 《학생계(學生界)》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영대(靈臺)》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그후 구성군(郡)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7 ·5조의 정형률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진달래꽃 :
1925년 매문사(賣文社) 간행. 반국판. 234면. 1부 《님에게》에 〈먼 후일(後日)〉 등 10편, 2부 《봄밤》에 〈꿈꾼 그 옛날〉 등 4편, 3부 《두 사람》에 〈못 잊어〉 등 8편, 4부 《무주공산(無主公山)》에 〈부엉새〉 등 8편, 5부 《한때 한때》에 〈잊었던 맘〉 등 16편, 6부 《반달》에 〈가을 아침에〉 등 3편, 7부 《귀뚜라미》에 〈옛날〉 등 19편, 8부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 된다고》에 〈불운(不運)에 우는 그대여〉 등 9편, 9부 《여름의 달밤》에 〈오는 봄〉 등 3편, 10부 《버리운 몸》에 〈우리 집〉 등 9편, 11부 《고독(孤獨)》에 〈초혼(招魂)〉 등 5편, 12부 《여수(旅愁)》에 〈여수 1〉 등 2편, 13부 《진달래꽃》에 〈개여울〉 〈산유화(山有花)〉 〈진달래꽃〉 등 15편, 14부 《꽃 촉(燭)불 켜는 밤》에 〈꿈길〉 등 10편, 15부 《금잔디》에 〈엄마야 누나야〉 등 5편, 16부 《닭은 꼬꾸요》에 1편 등 모두 127편이 수록되어 있다.
김소월 생존시에 간행된 유일한 시집으로 가장 널리 읽힌 시집이다. 김소월 사후 많은 출판사에서 《소월시집(素月詩集)》 또는 《진달래꽃》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유사본이 나왔다.
10. 박용철
호 용아(龍兒). 광주 광산(光山) 출생.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도일,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거쳐서 도쿄 외국어학교 독문과에 입학했으나,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연희전문(延禧專門)에 입학, 수개월 후에 자퇴하고 문학에 전념했다. 1930년에 김영랑(金永郞)과 함께 《시문학(詩文學)》을 창간, 이 잡지 1호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했다.
《시문학》에 이어 《문예월간(文藝月刊)》 《문학》 등을 계속해서 발간하고 시와 함께 많은 번역시, 그리고 《인형의 집》을 비롯하여 《빈의 비극》 《베니스의 상인》 등의 희곡을 번역했다. 1931년 이후로는 비평가로서도 크게 활약하여 《효과주의 비평논강(效果主義批評論綱)》 《조선문학의 과소평가》 《시적 변용(詩的變容)에 대하여》 등을 발표,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배격하여 임화(林和)와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 사후 1년 만에 《박용철 전집》(전2권)이 간행되었다.
떠나가는 배 :
1930년 《시문학(詩文學)》지(誌)에 발표. 《박용철전집》에 수록되었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가련다//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나 두 야 가련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간다.”
울적한 현실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몸부림을 담은 시이다. 아무리 탈출을 시도해도 “앞대일 언덕”조차 없는, 암담한 현실의 벽을 느껴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나두야 가련다”를 굳이 “나 두 야 가련다”로 쓴 것은 리듬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절박감을 강조한 것이다.
11.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본명 윤식(允植). 전남 강진(康津) 출생.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 ·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제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 ·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 ·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1934년 《문학(文學)》지에 발표하였고, 1935년 간행된 《영랑시집(永郞詩集)》에 수록되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김소월(金素月)이 진달래꽃을 이별의 징표로 형상화한 것과는 달리 영랑은 모란을 봄의 절정, 즉 봄의 모든 것으로 상징화하면서 삶의 보람, 삶의 목적을 거기에 귀일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