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상 바울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울이라는 이론이 없을 것입니다. 독일 괴팅겐신학교 신약신학 교수였던 거드 루데만 박사는 기독교의 창시자를 바울이라고 주장합니다. 루데만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의 취지에는 공감합니다.
바울의 공로는 왕성한 선교를 통해서 나사렛 변방의 예수운동을 세계적인 종교로 격상시켰고, 그의 서신서들을 통해 탄탄한 기독교 교리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과 사역과 서신에서 가장 잘 담아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체화하고 이론화한 기독교 실천가요 이론가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일생을 살펴보면 이토록 잘 준비된 바울의 삶과 사역은 위로는 하나님의 섭리요, 아래로는 부모들과 바울 자신의 치밀한 준비가 빚어낸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아들을 준비시킨 부모들 노력을 살피며, 아울러 하나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훈련과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바울도 살피려 합니다.
사도바울은 유대교 집안에서 출생했습니다. 클라우스너(J. Klausner) 박사는 외전을 인용하면서 바울의 아버지는 갈릴리의 가버나움 북쪽에 위치한 기샬라(Gishala) 출신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갈릴리를 침략할 때 갈릴리 지역을 떠나 다소로 이민을 갑니다. 그곳에서 길리기아의 특산물인 염소 털(Cilicium)로 만드는 의류, 침구류, 천막들을 만드는 수공업에 성공하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대표적인 도시였습니다. 당시 다소의 인구는 약 50만 정도였고 동방에서 오는 오랜 상업도로가 지중해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 도로는 길리기아 문(Cilicia Gate)을 통과하여 타르우스 산맥 너머 로마로 가는 길과도 통했습니다. 이런 지리적 환경은 다소를 당시에 융성한 무역도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소의 사람들은 길리기아(Cilicia) 평야에서 기른 염소에서 얻은 털과 가죽으로 직물과 텐트를 가공하는 특수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다소의 특산물인 천막은 염소의 가죽과 염소의 털로 만들었는데 염소의 털은 생산지인 길리기아(Cilicia)에서 딴 이름 킬리시움(Cilicium)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다소는 발달된 내륙 도로망과 항구를 통해 물류유통이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이런 다소에서 정착하여 큰돈을 벌었고 자신의 성공을 아들 바울의 교육에 집중했습니다.
스토아학파 거점 교육도시 다소, 바울 부모도 교육열 높아
디아스포라로 선교사 되기 적합한 환경에서 교육받고 성장
한편 성공한 상공인이 많았던 다소는 교육열이 높은 대학 도시였습니다. 고대 지리역사학자였던 스트라보는 당시 3대 교육 도시를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다소로 소개합니다. 스트라보는 이어서 다소가 가장 좋은 교육도시라고 설명합니다. 다소는 좋은 선생이 많았던 아테네나 교육시설로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더 좋은 교육도시였다고 강조합니다.
당시 다소 시민들의 교육열과 다소 시민들의 부유함이 다소를 당대 최고의 교육도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다소 사람들은 교육열이 강해서 자녀들을 다소에서 공부를 시킨 다음에 더 좋은 교육환경으로 이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부모들이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바울을 양육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육 도시 다소는 스토아학파의 거점 도시가 됩니다. 다소는 당시 유명한 스토아학파 학자들을 배출합니다. 예컨대 안티파터(Antipater), 라키데머스(Rachidemus), 네스터(Nester), 아데노도러스(Adenodorus), 그리고 마르쿠스 카토(Marcus Cato) 등이 있습니다. 당시 스토아학파는 로마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다수의 스토아학자들이 로마에서 활동했고, 세네카(네로)와 네스트로(티베리우스)는 각각 황제들의 스승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수준 높은 도시 다소에서 태어나 자라며 헬라의 스토아 철학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사도행전 17장 아테네 설교에서 드러납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히브리파 히브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비록 다소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할 만큼 히브리문화권에서 자랐습니다. 바울 부모는 철저한 유대인으로 바울을 교육시켰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바울 아버지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빗나가서 예수님 시대에 위선적인 사람들을 대표합니다만 본래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사랑하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도모했던 경건한 신앙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철저한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부모들의 가정교육으로 성장합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가문이 자랑하는 사울왕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 부릅니다. 바울은 철저한 바리새인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을 탁월하게 수용합니다. 그가 다소 디아스포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만일 선교사로 운명 지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성장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는 ‘다소’였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1세기 선교사가 되는데 가장 적합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탁월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향 다소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탁월한 대학 도시였습니다. 자녀 양육에 안성맞춤인 교육 도시였지만 바울 부모는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더 좋은 교육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당대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게 합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의 ‘가말리엘’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로 민수기에 등장합니다. 다른 가말리엘은 사도행전 5장(34절)과 22장(3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입니다. 사도행전 22장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성장했다고 자랑합니다.
사도행전에 두 번 언급되는 사도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를 움직일 수 있었던 영향력 있는 지도자입니다. 유대인의 전승과 역사책이 전하는 가말리엘은 대 랍비(Arch-Rabbi) 혹은 최고의 랍비라는 의미의 ‘라반(Rabban)’이라는 칭호를 가진 최초의 랍비가 가말리엘입니다.
가말리엘은 힐렐 학파를 창시한 바리새인 지도자 힐렐의 손자입니다. 힐렐은 탁월한 랍비였습니다. 미쉬나와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힐렐은 바벨론에서 태어나 바벨론 교육을 받고 성장한 후에 40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당시 권위 있는 샴마이 학파의 두 랍비-쉐마이어(Shemaiah)와 아브탈리온(Abtalion)-에게 교육을 받고 힐렐 학파를 창시합니다.
120년을 살았던 힐렐은 모세의 삶과 유비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40년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80세까지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치며 수련을 하고, 힐렐은 랍비학교에서 교육받습니다. 그리고 80세부터 모세는 민족의 출애굽을 인도하고, 힐렐은 민족 교육에 헌신합니다. 힐렐은 당대에 모세가 누리는 영광과 권위를 누린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힐렐은 파격적인 여유와 관용으로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힐렐은 약자들 배려하는데 탁월했었습니다. 예컨대 남편과 사별한 여인의 재혼을 파격적으로 용이하게 했고, 율법적인 안식일 적용과 지나치게 엄격한 십일조를 반대했습니다. 힐렐은 상대인 샴마이 학파에 비해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파였습니다. 요컨대 힐렐은 진보적이고 인권의식이 강한 랍비였습니다. 훗날 가말리엘도 힐렐 학파의 최고 랍비로 활동합니다.
역사자료는 힐렐은 산헤드린 회장인 나시(Nasi)라고 전합니다. 나시는 왕자라는 의미로 주요 기관의 회장을 나시라 칭했습니다. 미쉬나는 ‘힐렐이 죽을 때 율법의 영광도 끝났다’고 전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힐렐의 권위와 영광은 한동안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오직 가말리엘만이 힐렐의 영광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도 ‘나시’였습니다.
바울은 구약을 기독론과 선교론 관점으로 해석
랍비들이 바울의 구약해석 반박 못한 이유는 가말리엘 제자이기 때문
기록에 의하면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가 ‘시몬’입니다. 역사자료는 힐렐의 아들 시몬도 나시(Nasi), 즉 산헤드린 회장을 아주 잠시 맡은 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몇몇 신약주석가(신약신학자)들은 누가복음 2장 25절에 ‘경건한 사람 시므온’이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랄프 하비는 대학자 힐렐의 아들이요, 대 랍비 가말리엘의 아버지인 시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추적합니다. 랄프 하비는 당시 유대 지도층에서 누가복음 2장에서 언급되는 시몬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삭제했다고 주장을 합니다. 랄프 하비 등 몇몇 학자는 누가복음 2장의 시몬이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학자들은 가말리엘은 철저한 바리새인이요 존경받는 랍비였지만 아버지 시몬의 영향을 받아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에게 유리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동방교회 전승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바울, 스데반, 니고데모를 가르쳤고 말년에 자신도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가말리엘은 니고데모와 함께 스데반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스데반의 죽음을 애도하는 니고데모와 가말리엘’이라는 명작을 남겼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가말리엘이 예루살렘 멸망 18년 전에 사망했다고 전합니다.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난파당한 때와 비슷한 시점입니다. 아람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탈굼(Talgum)의 저자였던 온켈로스(Onkelos)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는데, 온켈로스가 왕의 장례식 수준의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했고, 최고의 스승 라반(Rabban) 가말리엘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합니다. 요세푸스는 가말리엘과 가말리엘의 손자 시몬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특히 시몬은 훗날 초대교회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도 전합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로 자란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가말리엘 제자 바울은 유대 사회 영향력과 융통성 있는 해석으로 초대교회 해외선교를 주도합니다. 또 예루살렘회의가 선교적 회의가 되게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과 가말리엘의 영향으로 구약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그의 새로운 구약해석의 결론이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서신서와 설교에서 바울은 구약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바울은 전통적 방식으로 구약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와 다른 구약 해석이 신약과 기독교의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구약을 기독론과 선교론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의 전향적인 구약 해석에 당대의 랍비들이 반박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말리엘 문하생의 권위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이 정통 유대인이라고 주장할 만한 뼈대(?)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 바울을 이해하려면 그가 가말리엘 문하생과 바리새인으로 자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 중에 니고데모처럼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방해한 존재로 부각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가 다른 분파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당시 종교권력가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고, 율법 준행에 열심이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고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이유는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중요한 사실들을 놓쳤다고 David Payne은 지적합니다. 페인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아쉬운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데 실패했습니다. 둘째, 바리새인은 인간들이 만든 명령, 인간들이 만든 전통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소위 "구전(Oral law)"에 지나치게 의존했습니다. 셋째, 바리새인은 인간의 칭찬과 박수를 지나치게 의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출발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지배를 당한 후부터 유대인들은 계속 타민족의 지배를 받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에게 정복당합니다. 그 중에 안티오커스 4세가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전에서 제우스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많은 유대인들을 죽입니다. 구약성경의 성전제사와 율법을 모독하는 만행이었습니다. 이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나 독립을 합니다.
이렇게 마카비 혁명으로 세워진 하스몬 왕가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족’이라고 주장하며 무리한 일들을 추진합니다. 왕이 대제사장을 겸합니다. 일반 백성들과 전통을 지키려는 귀족들은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배출했던 사독 계열 사제 가문이 아니었고 왕이 대제사장을 겸임하는 것이 유대의 전통을 파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많은 서기관들과 랍비들을 중심으로 바른 신앙전통을 세우기 위해 바리새파가 형성됩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루쉬(הפרושים)”입니다. 파루쉬는 ‘구분되다’라는 의미로 이방인, 부정, 그리고 타락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방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회개하며 구분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리새 운동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유대사회는 바리새인을 칭송했습니다. 그들의 경건과 열정을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노력과 열정들이 인간적 자랑거리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경건과 신앙적 열심이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은 경건 도모했지만 칭찬에 집착해 예수님께 책망 받아
바리새적인 경건과 열정 가진 바울은 변화된 바리새인으로 사역
바리새인들에 대한 중요한 자료는 요세푸스 자료가 남긴 재료입니다. 바리새인인 요세푸스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남깁니다. 요세푸스는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약3만 명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의 수가 약 6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 영향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을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자(Men-pleasers)들’이라고 혹평합니다. 바리새파는 헬라 스토익학파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모방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 명의 바리새인 앞에서 바리새 회의 규칙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1년간 예비기간을 갖습니다. 이 때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회원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규칙은 이렇습니다. “첫째, 회원이 아닌 사람과는 식사하지 않는다. 둘째, 회원이 아닌 제사장에게는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 셋째,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다” 등등입니다. 그들은 경건을 도모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자료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읽고 유통한 것으로 알려지는 위경(Apocrypha)인 ‘솔로몬의 시편(Psalms of Solomon)’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1세기 말에 기록된 바룩서가 솔로몬의 시편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1세기 말엽 이전에 솔로몬의 시편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솔로몬의 시편이 보여주는 바리새인의 신앙은 경건한 보수주의 신앙입니다. 철저한 율법 중심의 바리새파 신앙을 솔로몬의 시편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철저한 바리새인으로 자랐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보니 사이비 같았습니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안식일 규례와 정결법을 너무 쉽게 어기는 것 같았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성전을 헐라 그러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하며 성전을 모독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합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미숙한 젊은 바리새인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성숙해지니 율법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크리스천 바리새인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바리새적인 경건과 열정을 가진 선교사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만난 바리새인, 변화된 바리새인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열정과 경건으로 교회들을 세웠습니다.